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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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가이드 투어이자, 지배적 정신과 함께 사람들 자체를 변화시킨 예루살렘의 소유와 파괴라는 세계를 기술한 역사서다. 나는 『예루살렘 전기』가 일종의 어떤 해독제 역할을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이름, 주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땅, 거룩함과 탐욕이 공존하는 불구덩이와 같은 그곳에 메스를 들이댄들 무슨 결론이 나겠는가 ㅡ 괴롭게도 예루살렘이란 단어로 웹 검색을 하면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와 '팔레스타인의 중심적 도시'란 두 가지 해석이 도출된다(!). 유대인 순례자들에게 열려 있던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고립된 마을에 불과했다. 이제, 이스라엘인들이 예루살렘에 오게 되고 또 궤멸된다. 이 작은 전투로부터의 나비효과가 길고도 긴 예루살렘의 피와 눈물을 불러오는 건가? 기원전 1000년경 다윗왕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시'로 불렸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이스라엘 전역에서의 순례자를 받아들이지만 훗날 이스라엘이 분열되자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의 존재는 세계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했었나. 세계 어디든 예루살렘을 소유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비단 정복자뿐만이 아니라 수도자들까지도 ㅡ 19세기 중엽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수도사들 사이의 '총칼 대립'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몬티피오리는 책의 시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그곳은 무척이나 우아해서 유대인의 종교문학에서는 언제나 관능적이고 활기 넘치는 여성이자 미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추잡한 매춘부로, 또 한편으로는 연인에게 버림받아 상처 입은 공주로 그려지기도 한다. 예루살렘은 하나의 신이 사는 집이자 두 민족의 수도이며 세 종교의 사원이고, 하늘과 땅에서 두 번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다.」 또 3차 십자군을 이끈 사자왕 리처드가 이슬람 세계의 구원자로 부각된 살라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예루살렘은 우리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남는 한이 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경배의 대상이다.」 책의 내용을 다 옮기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각 장의 소제목을 간단히 나열해본다. ①1부 유대교: 다윗의 세계, 왕국과 성전, 바빌론의 창녀, 로마의 등장, 예수 그리스도, 예루살렘의 죽음 ②2부 이교: 계속되는 유대전쟁 ③3부 그리스도교: 비잔티움의 쇠퇴 ④4부 이슬람: 아랍의 정복이 시작되다 ⑤5부 십자군: 우트르메르의 황금시대, 살라딘 왕조 ⑥6부 맘쿠르조: 술탄의 노예 ⑦7부 오토만제국: 신화와 메시아 ⑧8부 제국: 예루살렘의 나폴레옹, 복음주의자들 ⑨9부 시온주의: 세계전쟁, 아랍의 반란 등등 ㅡ 끝에는 100여 쪽에 달하는 가계도와 지도를 포함한 부록까지(책은 총 961쪽).


예루살렘은 예수가 부활한 곳이라는 측면에서만 신성시되는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모두 예루살렘의 '주인'이 된 역사가 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부정적으로 본다면, 예루살렘을 둘러싼 공방전은 너무나도 종교적이라는 것이다(그 뒤에는 정치적 필요성이라는 불손한 자극도 있었다). 예루살렘은 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지 못한 채 그저 '선택될 뿐'이었다. 『예루살렘 전기』는 연대기적 서술을 시도하고 있지만, 경찰 조서처럼 무미건조한 나열에 그치지는 않는다. 게다가 저자의 말대로 '예루살렘의 모든 면을 다루는 백과사전식 역사책도 아니며 모든 건물의 벽감과 기둥머리와 아치 길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안내책자도 아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은 중동 분쟁이나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의 갈등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책의 마무리는 1967년 이스라엘이 요르단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6일 전쟁'으로 끝난다 ㅡ 저자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오늘날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기술한다. 자, 그러면 다시 출발점이다. 책 자체가 예루살렘이며 성스러움과 침략, 학살, 반란, 세계의 역사인 예루살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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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그림자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시릴 페드로사 지음, 배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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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오프(trade-off)라고 하면 맞아죽을지도 모른다. 『세 개의 그림자』는 무척이나 거대한 담론이기에, 기괴하고 슬픈 생명과 사랑의 오마주니까, 한갓 얄팍한 용어 따위로, 게다가 주제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말 꾸밈새로 오독하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하잘것없는 나무도 아니고 그저 지나가는 여행객도 아닌 세 개의 그림자 ㅡ 로댕의 '세 그림자' 혹은 '세 악령'과 과연 연관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ㅡ 는 결국 사랑스런 아이를 데려가고, 리즈는 루이에게 「두려움과 분노만으론 우리 아이를 지킬 수 없다 (...) 아이는 곧 우리 곁을 떠날 거고, 난 준비가 됐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세 개의 그림자』는 부모의 사랑에서도 특히 부정(父情)을 하나의 줄기로 삼아 여행하고 있다. 멀리 떠나기 위해 오른 배에서 루이(아버지)는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대비되는 한 노예의 애절한 눈빛을 모른 체했다가 나중에 끕끕수를 당하고 ㅡ 아들 조아킴만 지켜낸다면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아버지의 맹목적이고 쌉싸래한 눈물(누가 멋진 재킷을 입었는지도 그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ㅡ 머지않아 배는 침몰하게 되는데, 살기 위해서는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여기에 어마어마한 메타포가 있다고 여겨진다)는 어느 노인의 말에 그는 조아킴을 안고 거센 바다로 뛰어들고 만다. 그리고 훗날 악마와의 거래로 자신의 심장을 내어준다. 오로지 조아킴을 위해서……. 그런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심장을 잃고 괴수가 되어버린 아버지로부터, 아들은 더 이상 그림자들이 무섭지 않다며 그의 단단한 주먹 속에서 빠져나온다. 친구의 아들의 죽음에서 이 작품의 주제를 구상했다는 작가의 말로 보건대, 이것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나 성장통이 아닌 사랑의 소멸로 보인다. 그리고 훗날 '세 그림자'는 아들 조아킴에게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아버지 루이의 심장을 돌려주게 한다. 「조아킴… 이제 가야 한다.」 「네. 아빠, 안녕히 계세요.」 죽은 아이는 스스로 제 아비를 살리고 떠난다. 그런데 조아킴은 정말로 아버지에게서 사라지는가? 아니면 되살아난 루이의 심장에, 다시 뛰게 된 아버지의 가슴속에 숨어있다고 해야 할까?



덧) 그들이 배를 타기 전의 에피소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며 배표를 쉽게 내어주지 않으려 했던 장사치에게 조아킴은 「그 아저씨 '죽이고' 싶었어요!」라고 중얼거리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두 번째 읽는 순간 이건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외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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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그웨나엘 오브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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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념운동(觀念運動)처럼 써버리고야 마는 엇비낀 페르소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갖가지 목소리들에 의해 굳건해진 세계, '소설로 쓸 것'이란 아버지의 메시지.

㉡ 낡은 종이가 발산하는 광채는 한순간에 재탄생이란 영원성으로 변모하지만 아버지의 딸이 느끼는 내부에서의 되살아남은 과연 무엇일까.

㉢ '더 이상은' 그 누군가가 되지 않을 권리, 위험천만한 자갈투성이의 상념들, 그리고 아버지의 자식이 여기, 이렇게 남아있다.

㉣ 루 ㅡ 이름,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 앞에 붙는 이름, 더 정확히 말해 아버지의 딸이 아기였을 때 그가 딸을 부르던 이름 ㅡ 의 의식을 파편으로 만들어버리는(재구성하는) 과거와 현재.

㉤ 메모 덩어리는 그렇게 역사를 쌓고, 시간을 분절하고, 영혼의 문장이 되고, 산맥을 형상한다.

㉥ 분노를 용서받기 위해 죽음의 미사로 '디에스 이레'를 선택하는 아버지.

㉥-① 디에스 이레는 '분노의 날'이란 뜻으로 레퀴엠(장례 미사)의 부속곡이다.

㉦ 쇄빙선 뒤쪽에 선 흰 염소들은 검은 양을 추방하려 하지만 오히려 검은 양은 그것을 자신으로 만든다. 아니, 또 하나의 페르소나로 만들었던 것일까.

㉧ 아버지. 그렇게 검은 양은 아버지가 된다.

㉨ 좀먹고 벌거벗어 발효된 정신세계가 진짜인지, 자유에 도취되면서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세찬 물줄기와 같은 사유가 진짜인지?

㉩ 치킨게임처럼 달려드는 두 개의 텍스트는 별의 인도를 받아 여기까지 온 세 동방 박사의 예물 ㅡ 그 경건함을 빚어낸다.

㉪ 칸트적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아버지. 그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연극은 약간의 두려움을 숨긴 채 대단원을 맞으려 하고 있다.

㉫ 투실투실한 논리 ㅡ 다수는 백이고 소수는 흑 ㅡ 는, 비약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숨 막히는 사유의 흐름에 부딪고는 금세 나동그라진다.

㉬ 피안(彼岸)이 있다면 아마도 카빌리아(kabyle)일까. 그리고 바람의 노래에 실려 마침내 그 땅에 도달할 수 있을까.

㉭ 홀 한가운데 서있는 것은 아버지의 페르소나가 아니다. 그자비에이자 프랑수아이며 공허함을 적절하게 손볼 수 있는, 재주 많은 열쇠공 같은 인간 하나다.

㉭-① 이것은 딸이 아닌, '아버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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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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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존스의 강제된 심장처럼 궁녀들은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자신의 감정은 태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가 보는 궁녀는 흔히 후궁이 되기 위해 왕을 유혹하는 형태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흥미 위주에 불과하다. 실제로 왕은 자신의 관할을 벗어나는 궁녀에 대해서는 그녀들의 선발권조차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대비나 세자궁의 궁녀 등 자신의 관할이 아닌 궁녀는 왕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어쨌든 궁녀라는 이름으로 살아간 사람들에 대해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겼던 것은, 대체 궁녀는 어떤 일을 하는가, 였다. 우선 조선 시대 중앙 정부의 문반과 무반을 합한 전체 정원은 5,000명이 안 되었던 것에 비해 조선 후기 궁녀의 수는 500-6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즉, 중앙 정부 공무원의 1할 이상을 차지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아침저녁 문안 인사, 자수, 바느질, 서적 관장, 글 낭독, 필사, 왕 수행, 수라 및 음식물 거행, 세탁, 등촉 담당, 청소……. 그야말로 궁녀라 함은 가사 노동을 위한 존재가 아닌가. 이래서는 왕의 잠자리 상대를 하기는커녕 평생 자기 업무에 종사하는 전문가로서의 면모가 보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자연스레 의문이 이어진다. 그녀들의 보수에 관해서다. 이 의문은 바로 해결되었는데, 조선 시대 궁녀들은 월급을 받았단다. 궁녀들이 받는 보수에는 의전, 선반, 삭료 3가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의전은 1년에 두 차례 지급하는 옷값이고 선반은 식사 제공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의전과 선반은 옷값과 밥값이므로 지금의 복리후생비 정도가 될까. 그리고 삭료라는 것이 바로 봉급 ㅡ 월급이다. 다시 말해 궁녀들은 월급 외에 옷값과 식사를 제공받았던 것이다. 그럼 월급은? 월급은 금전이 아닌 현물로 제공되었는데 쌀, 콩, 북어, 이렇게 3가지였다고 한다. 또한 직급과 근무 연수에 따라 차등 지급이란 개념이 있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참 고단한 일을 하면서도 그녀들은 ㅡ 특히 아주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궁녀로 선발된 경우 ㅡ 성(性)이 금지된 생활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잠시 동안이 아니라 평생 말이다. 『속대전』에 나온 다음의 법조문을 보면 그것이 강제적으로 금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궁녀가 밖의 사람과 간통하면 남자와 여자는 모두 즉시 참수한다. 임신한 자는 출산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한다. 출산 이후 100일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하는 예를 따르지 않고 즉시 집행한다.


 

물론 현직 궁녀의 경우에 비해 출궁한 궁녀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했다고는 하나, 이것은 사랑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되니 살벌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간통'이란 단어는 배우자가 있는 경우에 쓰는 말이 아닌가? 책을 더 읽어보니, 상궁과 나인 등 정식 궁녀는 기본적으로 왕이나 세자 등 '주인의 여자'로 간주되었단다. 참으로 인간적인 성욕을 초월해서, 한편으로는 그런 욕망을 삭이면서 처절하게 살아갔다고도 볼 수 있겠다……. '궁녀'란 사람들에 대해 많은 궁금한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그녀들이 하는 일과 보수에 관해서였다. 또 실제로 나는 거의 그러한 점에 대해서만 썼다. 『궁녀』에는 궁녀의 자격, 궁녀의 선발 과정과 조직구조, 그네들의 수절(성과 동성애도 포함된다)을 비롯해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으니 영화 한 편을 보는 기분으로 이 책을 집어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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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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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들야들하다고 말하겠다(설명할 길은 없고, 그저 '야들야들해 보이는' 첩어가 생각났는데 그게 '야들야들'이다) ㅡ 책을 덮은 후의 내 사고가 월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청교도적 환상이었구나, 하는 결론으로 흘렀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가브리엘의 오랜 사랑인 빨간 후드 여인을 놓고 격투를 벌일 때 그의 주먹이 왜 상대의 눈과 코만을 향했는지 생각해보라. 아마도 소설의 어느 사건을 둘러봐도 이만큼 격정적인 장면은 없겠지만(섹스할 때? 흠, 그렇다면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이다) 거웃의 덤불숲 앞에서 후퇴하고 공격하고 논쟁하고 휴전하는 상설시장 같은 리듬이 어디에 또 있을지를. 원래부터가 나는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오래전 결혼한 사이인 게 분명한, 소싯적 부부란 공동명의를 사용한 사람들의 정신구조를 볼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탄할 때가 있다. 『오래오래』와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적어도 나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진 않다. 아내를 배신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파트너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게 복잡하고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ㅡ 「두 집 살림하는 것도 머리가 좋아야 해!」 뭐, 어쨌든 우리의 가브리엘은 전설의 아이를 만들기 위해 전설적인 정원에서 전설적으로 행해진 한편으론 어처구니없이 추락하는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처럼 사랑의 방향을 바꾸었다. 부빙(浮氷)마냥 영원히 한곳에 서있을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것도 정신없이 널브러지거나 웅크린 채 어깻죽지를 비벼대면서. 이 유쾌하고 불쾌한 사랑은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썩고 문드러지고 끔찍한 쇠약을 맞이해도 그칠 줄을 모르는데, 어느 누가 비열한 본능이라고 분노하며 손가락질하겠는가? 「낮에 감히 소동을 벌이지 못하는 사람은 밤거리를 걸어야 한다」고, 셰익스피어가 괜히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왕」) ㅡ 여기서는 다른 맥락이려나? 그럼 어쩔 수 없고……. 차가운 두뇌에서 증기가 응결되어 감각의 통로가 차단되는 것처럼, 그들도 좀 여유를 가졌으면 했다. 이건 특히 가브리엘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여간 자발스러운 게 아니니까. 작가가 <차를 마시며 배우다>란 장(章)을 중심으로 거푼거푼 산책을 했듯 그도 그래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파리 식물원에서 그녀의 손에 손가락을 갖다 댄 그 '움찔'이란 반응 이후 그가 보여준 행로는, 그나마 클라라와 앤이라는 소담스럽고 안정된 산맥으로 인해 조절되었으니까 말이다(그래서 난 사실 엘리자베트보다 두 할마시들이 더 좋다니까). 켜켜이 쌓인 사랑의 일기를 넘겨보려면 때로는 가만히 앉아 침전하는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누구도 이 소설 같은 사랑을 당해낼 재간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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