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그웨나엘 오브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 관념운동(觀念運動)처럼 써버리고야 마는 엇비낀 페르소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갖가지 목소리들에 의해 굳건해진 세계, '소설로 쓸 것'이란 아버지의 메시지.

㉡ 낡은 종이가 발산하는 광채는 한순간에 재탄생이란 영원성으로 변모하지만 아버지의 딸이 느끼는 내부에서의 되살아남은 과연 무엇일까.

㉢ '더 이상은' 그 누군가가 되지 않을 권리, 위험천만한 자갈투성이의 상념들, 그리고 아버지의 자식이 여기, 이렇게 남아있다.

㉣ 루 ㅡ 이름,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 앞에 붙는 이름, 더 정확히 말해 아버지의 딸이 아기였을 때 그가 딸을 부르던 이름 ㅡ 의 의식을 파편으로 만들어버리는(재구성하는) 과거와 현재.

㉤ 메모 덩어리는 그렇게 역사를 쌓고, 시간을 분절하고, 영혼의 문장이 되고, 산맥을 형상한다.

㉥ 분노를 용서받기 위해 죽음의 미사로 '디에스 이레'를 선택하는 아버지.

㉥-① 디에스 이레는 '분노의 날'이란 뜻으로 레퀴엠(장례 미사)의 부속곡이다.

㉦ 쇄빙선 뒤쪽에 선 흰 염소들은 검은 양을 추방하려 하지만 오히려 검은 양은 그것을 자신으로 만든다. 아니, 또 하나의 페르소나로 만들었던 것일까.

㉧ 아버지. 그렇게 검은 양은 아버지가 된다.

㉨ 좀먹고 벌거벗어 발효된 정신세계가 진짜인지, 자유에 도취되면서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세찬 물줄기와 같은 사유가 진짜인지?

㉩ 치킨게임처럼 달려드는 두 개의 텍스트는 별의 인도를 받아 여기까지 온 세 동방 박사의 예물 ㅡ 그 경건함을 빚어낸다.

㉪ 칸트적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아버지. 그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연극은 약간의 두려움을 숨긴 채 대단원을 맞으려 하고 있다.

㉫ 투실투실한 논리 ㅡ 다수는 백이고 소수는 흑 ㅡ 는, 비약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숨 막히는 사유의 흐름에 부딪고는 금세 나동그라진다.

㉬ 피안(彼岸)이 있다면 아마도 카빌리아(kabyle)일까. 그리고 바람의 노래에 실려 마침내 그 땅에 도달할 수 있을까.

㉭ 홀 한가운데 서있는 것은 아버지의 페르소나가 아니다. 그자비에이자 프랑수아이며 공허함을 적절하게 손볼 수 있는, 재주 많은 열쇠공 같은 인간 하나다.

㉭-① 이것은 딸이 아닌, '아버지'의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데비 존스의 강제된 심장처럼 궁녀들은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자신의 감정은 태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가 보는 궁녀는 흔히 후궁이 되기 위해 왕을 유혹하는 형태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흥미 위주에 불과하다. 실제로 왕은 자신의 관할을 벗어나는 궁녀에 대해서는 그녀들의 선발권조차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대비나 세자궁의 궁녀 등 자신의 관할이 아닌 궁녀는 왕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어쨌든 궁녀라는 이름으로 살아간 사람들에 대해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겼던 것은, 대체 궁녀는 어떤 일을 하는가, 였다. 우선 조선 시대 중앙 정부의 문반과 무반을 합한 전체 정원은 5,000명이 안 되었던 것에 비해 조선 후기 궁녀의 수는 500-6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즉, 중앙 정부 공무원의 1할 이상을 차지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아침저녁 문안 인사, 자수, 바느질, 서적 관장, 글 낭독, 필사, 왕 수행, 수라 및 음식물 거행, 세탁, 등촉 담당, 청소……. 그야말로 궁녀라 함은 가사 노동을 위한 존재가 아닌가. 이래서는 왕의 잠자리 상대를 하기는커녕 평생 자기 업무에 종사하는 전문가로서의 면모가 보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자연스레 의문이 이어진다. 그녀들의 보수에 관해서다. 이 의문은 바로 해결되었는데, 조선 시대 궁녀들은 월급을 받았단다. 궁녀들이 받는 보수에는 의전, 선반, 삭료 3가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의전은 1년에 두 차례 지급하는 옷값이고 선반은 식사 제공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의전과 선반은 옷값과 밥값이므로 지금의 복리후생비 정도가 될까. 그리고 삭료라는 것이 바로 봉급 ㅡ 월급이다. 다시 말해 궁녀들은 월급 외에 옷값과 식사를 제공받았던 것이다. 그럼 월급은? 월급은 금전이 아닌 현물로 제공되었는데 쌀, 콩, 북어, 이렇게 3가지였다고 한다. 또한 직급과 근무 연수에 따라 차등 지급이란 개념이 있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참 고단한 일을 하면서도 그녀들은 ㅡ 특히 아주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궁녀로 선발된 경우 ㅡ 성(性)이 금지된 생활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잠시 동안이 아니라 평생 말이다. 『속대전』에 나온 다음의 법조문을 보면 그것이 강제적으로 금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궁녀가 밖의 사람과 간통하면 남자와 여자는 모두 즉시 참수한다. 임신한 자는 출산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한다. 출산 이후 100일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하는 예를 따르지 않고 즉시 집행한다.


 

물론 현직 궁녀의 경우에 비해 출궁한 궁녀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했다고는 하나, 이것은 사랑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되니 살벌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간통'이란 단어는 배우자가 있는 경우에 쓰는 말이 아닌가? 책을 더 읽어보니, 상궁과 나인 등 정식 궁녀는 기본적으로 왕이나 세자 등 '주인의 여자'로 간주되었단다. 참으로 인간적인 성욕을 초월해서, 한편으로는 그런 욕망을 삭이면서 처절하게 살아갔다고도 볼 수 있겠다……. '궁녀'란 사람들에 대해 많은 궁금한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그녀들이 하는 일과 보수에 관해서였다. 또 실제로 나는 거의 그러한 점에 대해서만 썼다. 『궁녀』에는 궁녀의 자격, 궁녀의 선발 과정과 조직구조, 그네들의 수절(성과 동성애도 포함된다)을 비롯해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으니 영화 한 편을 보는 기분으로 이 책을 집어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야들야들하다고 말하겠다(설명할 길은 없고, 그저 '야들야들해 보이는' 첩어가 생각났는데 그게 '야들야들'이다) ㅡ 책을 덮은 후의 내 사고가 월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청교도적 환상이었구나, 하는 결론으로 흘렀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가브리엘의 오랜 사랑인 빨간 후드 여인을 놓고 격투를 벌일 때 그의 주먹이 왜 상대의 눈과 코만을 향했는지 생각해보라. 아마도 소설의 어느 사건을 둘러봐도 이만큼 격정적인 장면은 없겠지만(섹스할 때? 흠, 그렇다면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이다) 거웃의 덤불숲 앞에서 후퇴하고 공격하고 논쟁하고 휴전하는 상설시장 같은 리듬이 어디에 또 있을지를. 원래부터가 나는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오래전 결혼한 사이인 게 분명한, 소싯적 부부란 공동명의를 사용한 사람들의 정신구조를 볼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탄할 때가 있다. 『오래오래』와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적어도 나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진 않다. 아내를 배신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파트너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게 복잡하고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ㅡ 「두 집 살림하는 것도 머리가 좋아야 해!」 뭐, 어쨌든 우리의 가브리엘은 전설의 아이를 만들기 위해 전설적인 정원에서 전설적으로 행해진 한편으론 어처구니없이 추락하는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처럼 사랑의 방향을 바꾸었다. 부빙(浮氷)마냥 영원히 한곳에 서있을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것도 정신없이 널브러지거나 웅크린 채 어깻죽지를 비벼대면서. 이 유쾌하고 불쾌한 사랑은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썩고 문드러지고 끔찍한 쇠약을 맞이해도 그칠 줄을 모르는데, 어느 누가 비열한 본능이라고 분노하며 손가락질하겠는가? 「낮에 감히 소동을 벌이지 못하는 사람은 밤거리를 걸어야 한다」고, 셰익스피어가 괜히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왕」) ㅡ 여기서는 다른 맥락이려나? 그럼 어쩔 수 없고……. 차가운 두뇌에서 증기가 응결되어 감각의 통로가 차단되는 것처럼, 그들도 좀 여유를 가졌으면 했다. 이건 특히 가브리엘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여간 자발스러운 게 아니니까. 작가가 <차를 마시며 배우다>란 장(章)을 중심으로 거푼거푼 산책을 했듯 그도 그래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파리 식물원에서 그녀의 손에 손가락을 갖다 댄 그 '움찔'이란 반응 이후 그가 보여준 행로는, 그나마 클라라와 앤이라는 소담스럽고 안정된 산맥으로 인해 조절되었으니까 말이다(그래서 난 사실 엘리자베트보다 두 할마시들이 더 좋다니까). 켜켜이 쌓인 사랑의 일기를 넘겨보려면 때로는 가만히 앉아 침전하는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누구도 이 소설 같은 사랑을 당해낼 재간은 없을 테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서할 수 없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 30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제기랄. 코벤 씨(머리털 없는 사진을 보니 왠지 '씨'라는 의존명사를 안 붙이기가 뭐하더군) 때문에 담배 피우는 걸 깜박했다. 어쩐지 2분의 1을 읽고 잠시 시계를 봤을 때 몸에 기운이 없더라니.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게 코벤을 읽어보라고 권했지만 오히려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전한다 ㅡ 오, 그들에게 평화와 사랑을! 어쨌든 코벤 씨, 책 참 잘 썼어. 그전에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을 좀 짚어보겠다. 정신병자가 된 프린스턴 졸업생 켈빈 틸퍼의 입에서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키치적 문장, 초반에는 확신하다가 나중에는 의혹으로 전환되어 이야기를 끌어가는 웬디 타인스식 캐릭터의 메커니즘, 굳이 등장시킨 스타벅스의 그 이름도 우스꽝스러운 얼간이 래퍼 텐 어 플라이(ten-a-fly), 웬디가 듣는 음악의 제목들 ㅡ 이를테면 스라이빙 아이보리 밴드의 「Angels on the Moon」, 윌리엄 피츠시먼즈의 「Please Forgive Me」 하는 식으로 소설 속 인물이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 독자에게 알리려는 문장 말이다.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에 슬립낫이 나오는 것처럼. 나는 이런 패턴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ㅡ 기타 등등.



이제 앞서 언급했다시피 내게서 담배를 빼앗을 정도로 마음에 든 점을 적어야겠다. 이런 스릴러물이 자랑하듯 무절제한 속도감은 마약을 향해 달려가는 경찰견의 뒷다리에 모터를 달아준 것처럼 느껴진다. '재미있는 책'의 정의는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는』은 읽어나갈 페이지가 적어지는 게 아쉽다기보다 어떻게든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끝장을 보고 싶게 만드는 쪽이다. 굳이 OMR 판독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 학생의 답안지가 어떨지 상상이 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풍경 묘사로 종이를 허비하는 쪽이 아닌, 알 수 없는 결말과 파워풀한 장르적 특성이 버무려낸 가독성이라 생각한다(이런 말은 너무 상투적인가? 어쨌든!). 또 하나 소설은 익명성과 파괴성에 대한 초상화를 제공한다 ㅡ 인터넷의 위험성과 낙인효과. 『변신』· 『파리 대왕』 그리고 『투명 인간』 · 《반칙왕》에서의 외모 변화가 가져오는 인간심리와 가면 뒤에 숨은 익명성의 폭력, 자유스러움. 영화 《반칙왕》을 조금 꼬아서 보자. 주인공 대호가 반칙왕이 될 수 있는 건 익명성 때문이다. 같은 구조로써 인터넷은 욕망의 바다로 변모한다. 대호에게 가면은 목숨만큼이나 중요한데, 오직 그 속에서만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이다. 반대로 보면? 가면을 뒤집어쓰면 저게 내 아버지인지 어제 내 성적표에 F를 뿌려댔던 안경잡이 교수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면의 주인공은 자유와 해방을 맛보지만(물론 진심을 말할 수 없는 단점도 있다) 상대방은 그 탈개인화로 인해 자신의 현실성이 무너질 따름이다. 스스로의 악의적 행동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책임을 익명성이라는 원웨이 미러(one-way mirror) 뒤쪽에 던진다 ㅡ 사실 웬디 역시 자신에게 보이는 앞면만을 이용해 덫을 치지만 오히려 자신이 그 덫에 빠지기도 한다…….



코벤(씨)의 『용서할 수 없는』과 영화 《밀양》에는 '용서'라는 모호한 이름이 공통분모로서 버티고 있다. 물론 서로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인간이 하는 용서와 신이 하는 용서라는 점에서 그런 것인데, 둘 다 원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복수를 하거나 용서를 하는 것뿐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걸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 용서는 인간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한다(그럴 수밖에 없다). 바로 나를 위해서다.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데, 영상이나 텍스트를 빠져나와 현실세계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용서라는 귀결이 쉬 가능하겠냐는 거다. 공포영화나 범죄영화를 보고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건 현실에서는 나에게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는 걸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 그레이슨은 웬디에게 말한다. 내 자식이 전사자 명단에 오를 확률이 적을 거라 여기기 때문에 전쟁터로 내보내는 주사위를 던질 수 있는 거라고. 코벤의 소설은 현실에서의 가능성이 적은(을) 확률, ㅡ 「설마 나는 아니겠지!」 ㅡ 이런 스릴러의 특질과 용서라는 잘 연결되지 않음직한 명제를 골랐다. 뜨악하게도 소설에서 '사냥의 희생양이 된 스카페이스'는 너무나 선선하게 보일 정도로 '용서할 수 없는'을 '용서할 수 있는'으로 바꿔놓았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 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책의 카피 문구처럼 「용서할 것인가? 단죄할 것인가?」 그리고 과연 뭘 믿을 것인가?



덧) 써놓고 보니 두서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의 열쇠 홍신 세계문학 8
A. J. 크로닌 지음, 김성운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은 오직 정신 하나만으로도 신앙 한가운데에 계속 머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정신은 항시 깨어있어야 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어떤 자명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리하여 신앙 자체보다 지속적으로 신앙 속에 있으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막스 피카르트가 그의 책 『침묵의 세계』에 쓴 말이다. 나는 이 문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서 나타나듯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성채’ ㅡ 그의 다른 작품 『성채』의 주인공처럼 ㅡ 를 좇는 인간의 세계관과 어렴풋이 닿는 것 같기도 하다……. ‘이성이 먼저인가, 아니면 신앙이 먼저인가?’ 이 물음은 ‘인간이 먼저인가, 아니면 신이 먼저인가?’ 라는 의문과 궤를 같이 한다. 소설 속에서 어린 시절 종파가 다른 부모님을 보며 「왜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놔두지 않는 것일까?」 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프랜시스의 독백은 종교와 믿음이라는 화두의 속병에 접근하고 있다. 나는 오컴의 ‘하나님이 가진 전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보편자는 오직 정신 속에서 사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에는 찬성한다. 그런데 소설에는 개개인의 사유를 한 가지 형태로 끄집어내고 집합시켜 사람들을 오도하려는(이를테면 ‘마리아의 샘’)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불[火]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은 오히려 어두컴컴할 때가 아닌가? 수천 개의 말이 뒤섞여 마치 신비의 경이로움처럼, 혹은 수천 개의 번잡함으로 인해 침묵하지 못하고서 뭔가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혼탁한 한숨처럼, 크로닌은 프랜시스라는 인물을 내세워 과연 자기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명제를 그리려고 했던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