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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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8년
ㅡ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민주화 추세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 확산이 중단되었다.


2010년
ㅡ 2008년 이래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위축되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 Economist Intelligence Unit)이 발표한 '민주화 지수'의 내용이다. EIU는 5대 평가 부문으로 민주화 성과를 분석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선거 과정의 투명성과 다원주의의 존중, ②시민의 자유, ③정부의 기능성, ④정치 참여, ⑤정치 문화.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발명품은 이렇게 다각화되었고 현재인 오늘을 변화시켰음에도 때로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을 서술하고 있지만 어쩐지 이것이 민주주의의 '역사'라고 보기엔 조금 애매모호하다. 그것은 분명 과거부터 있어왔지만 뭔가 변화의 양상, 다시 말해 과거보다 발전되고 과거보다 뛰어난 점을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아테네의 민주주의 국가로의 변모는 쿠데타의 위험을 자각한 지배계층이 법안을 마련한 것을 그 태동으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이것을 뒷받침할 서술 사료라 할 만한 것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미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관료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선거 문화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역시 제한된 유권자에 의한 투표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로는 민주주의라고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부족했던 것들이 현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으로 이어졌을까? 물론 근대 유럽에서는 중앙집권화를 띠는 정부와 국가라는 개념이 강조되기는 했다. 게다가 런던의 '퍼트니 논쟁'으로 인해 대의정부 또한 주장되기에 이르렀고 사후 '수평파'라는 것을 발견해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소위 '선거 관습'이라는 것, 정치란 화두가 대중적 담론으로 떠오른 상태에서도 계속된 이러한 악습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을 잘 안다. 19세기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또한 알고 있다. 그런데 보자. 오늘날 민주주의 수립 환경을 만들겠다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대량 살상 무기 운운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수출하겠다며 이라크의 정권 교체를 시도한 그들을(이건 1차 비유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비전인가? ㅡ 더구나 이라크의 민주주의는 결과물로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구상의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를 목표한다. 내가 보기엔 그것이 한계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라 해도 보이지 않는 '우선권'을 가진 자들은 존재한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묵살당하고, 무시당하고, 유아 취급을 받고, 권리를 박탈당한다. 로저 오스본은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이 말은 이렇게 보면 맞고 저렇게 보면 틀리다. 공동선을 향하는 과정에서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질 못하는데 어떻게 그 민주주의 자체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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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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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에는 '뉴타입(new type)'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으로부터 새롭게 발현된 정신능력, 제6감, 초능력, 텔레파시, 천리안 등의 공감각(共感覺) 능력에 대한 것이다. 아니면 《인랑》 ㅡ 이것을 예로 드는 것은 좀 꺼려지지만 ㅡ 은 또 어떨는지. 이른바 '평행세계(parallel world)'를 도입했으니까. 이것도 아닌가? 그럼 브라이언 레반트의 《베토벤》은? 그야말로 '슈퍼 개'가 주인공으로 나와 불법 동물실험을 하려는 작자에게 한방을 날리는 영화 말이다. '인류보완계획'을 내세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또 어떻고……. 『제노사이드』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집착하던 신기루 같은 이야기들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도 비슷하게. 인간 탐구의 방법론과 접근법은 몇 가지가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의 방식은 진부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길이다. 겉표지에 적힌 문구처럼.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모럴 해저드인가? 모럴 해저드 위의 단계를 차지하는 인간의 해이인가? 어설픈 앙팡 테리블 취급을 하는 조야한 인간의 불가해성인가? 『제노사이드』는 걸작이건 졸작이건 둘 중의 하나라고 본다. 어중간하지는 않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러저러한 단점도 눈에 띄지만. 일단 통신이나 위성, 해킹에 손을 대는 '아키리'가 과도하게 전지전능한 모습을 지녔다는 것. 이것은 신인류의 능력, 위에서 말한 뉴타입이란 걸로 해결이 된다고 여겨야 할까. 이래서야 속 편한 결론이지만. 다음은 결말인데, '기프트'란 제약 프로그램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ㅡ 기프트(gift, 천부적인 재능)를 다 하고 ㅡ 되어있다는 설정이다. 이런 식이라면 애초에 이 이야기 자체가 발생하기 힘들다고도 보이지만 당최 일관성은 없어 보인다 ㅡ 일본의 독자들이 반응하는 단순한 전쟁관이나 편향된 역사관(이건 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한국인이라서일까?)은 다소 쓸데없는 논란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으니 차치하고 넘어가자. 처음부터 영화화를 목적으로 했는지 어땠는지 소설은 할리우드식 SF의 면모도 있고 또 등장인물 고가 겐토가 과거 냉전 시대의 이야기를 듣고는 '마치 SF 같았다' 라고 느끼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오히려 현실이 SF다!). 그러나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어느 인터뷰에선가 말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면 허술한 액션영화밖에는 안 된다.」 이 작품은 절대 영화화할 수 없다는 단언(혹은 자만)일 수 있겠지만 인터뷰의 전반적인 내용을 훑어보면 텍스트를 손에 쥔 자의 자신감과 약간의 겸손이 들어가 있다. 「전투 장면은 소규모적인 것이 두 군데밖에 없다 (...) 그것을 언어의 힘을 빌려 긴박감을 더해 인물의 감정과 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류사를 담아 (...) 인간의 잔학 행위를 영상으로는 만들기 어렵다…….」 자, ①아키리의 설정이 너무 초인적이라든가, ②스케일이 '너무 커서' 지친다든가, ③용병으로 등장하는 예거의 돈을 필요로 하는 동기가 진부하다든가(파편적으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생각나서), ④뜬금없이 한국의 '정(情)'이 나온다든가 ㅡ 하는 것은 집어치우겠다. 이런 면면은 기술적인 곁다리로 보고 좀 크게 가자.



인간에게 선한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네. 하지만 선행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미덕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행동이라면 칭찬받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ㅡ 본문 p.475



왜 '신약 개발'인가. 10만 명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소설 전반부에 나오는 '피그미족 캉가 밴드 40명의 격리 또는 사냥' 혹은 '신인류의 탄생'과 외려 대치되기도 하고 병립되기도 한다. 여기서 이런 알고리즘이 발생한다. 하이즈먼 리포트 #5 '인류의 진화' ▶신인류 '누스(아키리)' 탄생 ▶신약의 필요, 누스의 신약 개발 돌입(현인류의 능력 밖이므로) ▶위험하다고 판단한 현인류의 누스 말살 정책 ▶누스의 반격 ▶신약 개발 완료 ▶누스 말살 정책 폐기(누스의 지력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그가 사라졌다고 판단) ▶현인류의 불치병 치료 ▶평화(▶다시 처음으로?). 신인류가 현인류를 구한 셈이다. 훗날 현인류를 '갈아엎고' 신인류가 현인류로 대체되고 다시 또 언젠가는 새로운 인류가 나타난다든가 하는 결말까지는 가지 않는다(당연하다). 그러니까 단지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아니라 맨 밑에서부터 위 끝까지 아우르는 의미에서 ㅡ 「너 = 나 = 우리 = 인간 = 너 = 나 = 우리……」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웅대한 철학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인간 개체는 다분히 허영에 사로잡혀있고 자기중심적이다.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기보다 탐욕, 잔혹, 자만으로 가득 차있는 존재다. 인간은 결코 지적이지 않다. 인간의 윤리적 기초에 동정심이 존재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전자라면, 그것은 학습된 사회적 반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이런 사유 속에 『제노사이드』는 생명의 논리를 들이민다. (포괄적으로 말한다면)단순히 인간을 후손을 낳는 생존 기계로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그런 끊임없는 생산과 생존만이 진화하는 것이라고 여겨야 하는가의 문제를. 하지만 어떤 경우든 미지의 외부 존재와 마주쳤을 때 쾌감 혹은 불쾌를 겪는 문제가 간섭한다. 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금방 죽을 수밖에 없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 고바야시 마이카, 그리고 처음부터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난 아키리와 에마(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도, 그것을 다수와 소수로 나누는 것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저 옛날 스토아학파의 한 철학자의 중얼거림을 들어보자. 「신이 지금 질병을 나에게 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질병을 추구했을 것이다.」 말인즉슨 삶에 초연하고, 불리한 입장에서 분노하지 않고, 행운을 맞이해도 쾌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인간(우리)은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왜? 인간은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착하고 고통 받는다. 첫 번째 논의 ㅡ 소설 초반부의 캉가 밴드를 놓고 하는 입씨름은 그래서 괴로운 물음이다. 나을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로 왜곡되어있다)을 죽일 것인가 격리시킬 것인가. 아니, 애초에 어떤 물음을 던져야 하는가. 두 번째 논의 ㅡ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못하고 개인의 이성만을 신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질문. 과거의 홀로코스트나 현재의 다발적 전쟁은 같은 이름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간다.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지금쯤 세계 종말 시계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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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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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본질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누락되는 삶 역시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수녀의 일기처럼 순수했던 사람 하나가 웬일인지 범죄자가 된다. 가업을 이으려 착실히 반죽을 개던 선량하기만 한 메밀국수집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를 해한다는 식의(이유야 어쨌든 그런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는) 범죄. 동기는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거기서부터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경위가 애달프다. 고도의 경제 성장, 샐러리맨의 급증, 그에 따라 반듯하게 재단된 사회로부터의 사회적 배경과 인간의 정념이, 얼굴 뒤쪽 보이지 않는 손짓의 '거절하지 못할 제안'과 반응해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증명 시리즈'로 악명 높은(!)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는 이런 말을 했다. 「'세이초 이전'은 일반 독자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주로 고답한 문학이자, 문단의 칭찬 일색으로 독자의 선택을 강요하는 문단주도형 문학이었다. 하지만 세이초 작품은 독자가 주도했다.」 그런가하면, 세이초와 친했던 한 고서점 지배인이 언젠가 세이초의 입원 소식을 듣고 얼른 가보았더니 「병원은 심심해서 싫구만, 뭔가 재밌는 것 없을까」 하는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는 적도 있다고 한다.

 

 

어떤 작품이야 안 그러겠냐마는, 단편집 『잠복』은 모리무라 세이치의 말대로 독자가 주도하는, 한 사람이 파멸할 때까지 끝까지 가보는, 단편이라는 적은 용량임에도 최대의 중량감에 육박하는 초여름 백화만발(百花滿發)의 성과물이다 ㅡ 병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금쯤 냉동인간으로 있다가 어느 병원에서라도 불쑥 나와 주면 어떨까. '재밌는 걸 좀 찾으러 왔다'고 하면서……. 『세이초와 그 시대(淸張とその時代)』, 『마쓰모토 세이초 사전(松本淸張事典)』 ㅡ 이런 책도 있군 ㅡ 등의 저자이면서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고하라 히로시(鄕原宏)는 세이초 연구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다. 어떤 작가가 어지간히 유명해지면 그 사람에 대한 책이 종종 출간되기도 하는데, 고하라 히로시가 쓴 책은 '사전'이다(앞의 책). 세이초의 작품,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등을 총망라한 책이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 사전』이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였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다음은 고하라 히로시와, 전 아사히신문사 사장 나카에 도시타다(中江利忠)의 세이초에 대한 코멘트이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빼고는 일본 미스터리를 말할 수 없다.

ㅡ 고하라 히로시


이 대선배의 오랜 꿈은 자신의 작품의 무대가 된 곳곳을

아사히신문사 전용기를 타고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ㅡ 나카에 도시타다

 

 

나카에 도시타다의 말은 실현되었는데, 언젠가 제트기를 타고 운젠후겐산(雲仙普賢岳)의 화산 가스와 재가 날리는 분화구 근처에서 세이초가 흥분한 나머지 필름이 없는 것도 모른 채 셔터를 눌러대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어.」라며 '소년처럼' 분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각설하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ㅡ 이 단편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의 작품은 대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혹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을까?」 보다 「아아, 제길, 그럼 주인공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만은 제발!」 하는 기대와 불안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텍스트와 투쟁하거나 그것에 동화되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원망(願望)'하게 된다. 이를테면 「목소리」의 전화 교환원(다카하시 도모코)이나 「귀축」의 인쇄업자(다케나카 소키치)를 들 수 있겠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평안은 경사진 툰드라 평원의 짧은 여름보다도 더없이 적게 느껴진다. 한창 맛있게 피우고 있는 담배가 그대로 파국의 향(香)을 사르게 되는 꼴이다(도코모 씨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귀축」은 벅수 같은 ㅡ 창자를 찾아내기 힘든 게처럼 ㅡ 인물의 마음속에 똬리를 튼 무사안일로 인해 괴물로 변하는 모습을 그린다. 「목소리」의 경우는 갑작스레 장(章)이 바뀔 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시점의 변화 ㅡ 꼭 추리편과 해답편처럼, 혹은 밸린저(Bill S. Ballinger)식 컷백처럼 ㅡ 는 왕왕 독자로 하여금 괴로움에 가까운 불안한 추측에 더쳐 정신의 뒤집힌 앙양(昻揚)을 낳게 한다.

 

 

줄거리의 조밀함이란 측면에서는 「일 년 반만 기다려」와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를 꼽을 수 있겠다. 전자는 그야말로 카타스트로프의 정점을 찍는데, 여기서는 형사 소송법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와 함께 맞물린 유연한 '이야기의 그럴듯함'의 경첩이 주인공의 '계산 착오'를 씁쓸하게 만들고 있다.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는 한 지방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가 형사 내지는 탐정의 역할로 분(扮)해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이야기다.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가 편집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북스피어, 2009)에 달린 그녀의 해제는 이 작품을 두고 '끝까지 다 읽은 뒤 다시 한번 앞머리로 돌아와 읽어보라'고 조언한다(나도 그녀의 말에 따라 그렇게 해보았다). 그저 어둡고 무서울 뿐이었던 결말이 새삼 애달프게 변하리라 ㅡ 이 단편은 「얼굴」과도 비교해볼 수 있는데 주인공들이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전전긍긍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 역시 묘한 조바심을 내게 된다. 「얼굴」에 대해 좀 키치적인 비유를 하자면, 통으로 된 아이스크림의 얄팍한 테두리처럼 긁어내면 긁어낼수록 자꾸만 녹아내려 종국에는 다 먹어치워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 무참한 행보랄까……(허허).

 

 

표제작 「잠복」은 내게는 최고의 단편이며 동시에 가장 뒷맛이 좋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화자의 입장이 되는 유키 형사는 세이초의 『짐승의 길』(북스피어, 2012)에서의 히사쓰네 형사처럼 자신이 쫓는 여자에게 동화되고 어느 정도의 감정선을 따라간다는 점에서는 일견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히사쓰네에게는 그 여자를 품으려는 일념이 있었고 또 그 과정에서 죽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유키 형사가 보여준 감정에는 이해와 연민이라는 명제가 끼어든다. 처음부터 그가 작심한 듯 쫓는 여자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이 여자, 수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유키 형사는 어찌된 일인지 '아갈묵념(!)'하고 만다. 그런가하면 「카르네아데스의 널」은 「일 년 반만 기다려」와 같은 맥락으로 형법의 '긴급 피난'이란 조건을 내세운다. 물론 앞의 단편처럼 안쓰러운 결말에서는 매한가지……라는 것은 찰나이며, 이미 등 뒤에서 시작된 오케스트라의 비극적인 연주에 맞춰, 이성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인간이 순간의 감정에 휘말리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18세가 되던 해 고쿠라의 작은 지방 신문사인 진서보(鎭西報)의 문을 두드렸다가 학력의 벽에 부닥치고 마는데 ㅡ 그러다 훗날 아사히신문사 규슈 지사가 사옥 신축을 계기로 고쿠라로 이전한 후 그곳에 취직한다. 그렇다면 왠지 수록작 「투영」은 그런 일면을 얼마간 반영한('투영'한)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이초 자신은 신문사의 꽃인 기자가 아니었기에 소설 속에서나마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게 아닐는지. 게다가 이 단편은 인간관계의 정(情)과 '정의는 승리한다'는 쾌감 또한 느낄 수 있어 다른 수록작에 비해 그나마 밝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다만 사건 발생 장치에 좀 무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대단한 작가라고 해서 어떤 장애나 의무감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그의 작품에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지 않아도 읽을 사람은 반드시 읽을 거라는 확신도 있고, 외려 칭찬 일색의 감상은 진정한 가치를 오도할 수도 있다는 추측뿐이다(그렇게 생각하는 주제에 잘도 이런 글을 쓰고 있군……). 단편집 『잠복』에서 우리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고 싶었던 배우, 티 없이 순수했지만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여인, 짐승처럼 제 자식을 버리는 인쇄업자, 충동의 와류에서 허우적대는 지식인과 마주친다. 동시에 악의 감정은 더치고 더쳐 텍스트는 ㅡ 총을 든 겁쟁이, 깨어있는 소시민 등을 양산해내고 있는 거다. 『잠복』이란 단편집…… 주인공의 시선이라는 다소 텁텁한(그럴 수밖에!) 필터를 통해 만들어지는 맥놀이가 얄궂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덧) 아래 사진은 '영구 보존판'이란 딱지가 붙은 「잠복」의 DVD와 해설서인데 ㅡ 30쪽 미만의 단편을 무려 116분의 영상으로 만들었단다. 당연히 보고 싶다……!

 

 

사족) 곰곰 머리를 굴려보니 일본의 2인조 록밴드 B'z(비즈)에 기타와 작곡을 하는 마쓰모토 다카히로(松本孝弘)라는 사람이 있는데, 마쓰모토란 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제목 짓기' 센스가 발군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그가 제목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노래 제목 몇 개만 써보자면 다음과 같다. 「안녕 상처투성이 날들이여(さよなら傷だらけの日々よ)」, 「충동(衝動)」, 「맨발의 여신(裸足の女神)」 ㅡ 사실은 좀 억지로 갖다 붙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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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리 2012-06-2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리뷰가 대단하다!

그레코로만 2012-06-24 14: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뽀리 님의 과감한 댓들이 더 대단!
 
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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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가이드 투어이자, 지배적 정신과 함께 사람들 자체를 변화시킨 예루살렘의 소유와 파괴라는 세계를 기술한 역사서다. 나는 『예루살렘 전기』가 일종의 어떤 해독제 역할을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이름, 주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땅, 거룩함과 탐욕이 공존하는 불구덩이와 같은 그곳에 메스를 들이댄들 무슨 결론이 나겠는가 ㅡ 괴롭게도 예루살렘이란 단어로 웹 검색을 하면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와 '팔레스타인의 중심적 도시'란 두 가지 해석이 도출된다(!). 유대인 순례자들에게 열려 있던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고립된 마을에 불과했다. 이제, 이스라엘인들이 예루살렘에 오게 되고 또 궤멸된다. 이 작은 전투로부터의 나비효과가 길고도 긴 예루살렘의 피와 눈물을 불러오는 건가? 기원전 1000년경 다윗왕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시'로 불렸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이스라엘 전역에서의 순례자를 받아들이지만 훗날 이스라엘이 분열되자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의 존재는 세계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했었나. 세계 어디든 예루살렘을 소유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비단 정복자뿐만이 아니라 수도자들까지도 ㅡ 19세기 중엽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수도사들 사이의 '총칼 대립'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몬티피오리는 책의 시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그곳은 무척이나 우아해서 유대인의 종교문학에서는 언제나 관능적이고 활기 넘치는 여성이자 미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추잡한 매춘부로, 또 한편으로는 연인에게 버림받아 상처 입은 공주로 그려지기도 한다. 예루살렘은 하나의 신이 사는 집이자 두 민족의 수도이며 세 종교의 사원이고, 하늘과 땅에서 두 번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다.」 또 3차 십자군을 이끈 사자왕 리처드가 이슬람 세계의 구원자로 부각된 살라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예루살렘은 우리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남는 한이 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경배의 대상이다.」 책의 내용을 다 옮기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각 장의 소제목을 간단히 나열해본다. ①1부 유대교: 다윗의 세계, 왕국과 성전, 바빌론의 창녀, 로마의 등장, 예수 그리스도, 예루살렘의 죽음 ②2부 이교: 계속되는 유대전쟁 ③3부 그리스도교: 비잔티움의 쇠퇴 ④4부 이슬람: 아랍의 정복이 시작되다 ⑤5부 십자군: 우트르메르의 황금시대, 살라딘 왕조 ⑥6부 맘쿠르조: 술탄의 노예 ⑦7부 오토만제국: 신화와 메시아 ⑧8부 제국: 예루살렘의 나폴레옹, 복음주의자들 ⑨9부 시온주의: 세계전쟁, 아랍의 반란 등등 ㅡ 끝에는 100여 쪽에 달하는 가계도와 지도를 포함한 부록까지(책은 총 961쪽).


예루살렘은 예수가 부활한 곳이라는 측면에서만 신성시되는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모두 예루살렘의 '주인'이 된 역사가 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부정적으로 본다면, 예루살렘을 둘러싼 공방전은 너무나도 종교적이라는 것이다(그 뒤에는 정치적 필요성이라는 불손한 자극도 있었다). 예루살렘은 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지 못한 채 그저 '선택될 뿐'이었다. 『예루살렘 전기』는 연대기적 서술을 시도하고 있지만, 경찰 조서처럼 무미건조한 나열에 그치지는 않는다. 게다가 저자의 말대로 '예루살렘의 모든 면을 다루는 백과사전식 역사책도 아니며 모든 건물의 벽감과 기둥머리와 아치 길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안내책자도 아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은 중동 분쟁이나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의 갈등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책의 마무리는 1967년 이스라엘이 요르단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6일 전쟁'으로 끝난다 ㅡ 저자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오늘날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기술한다. 자, 그러면 다시 출발점이다. 책 자체가 예루살렘이며 성스러움과 침략, 학살, 반란, 세계의 역사인 예루살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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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그림자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시릴 페드로사 지음, 배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트레이드오프(trade-off)라고 하면 맞아죽을지도 모른다. 『세 개의 그림자』는 무척이나 거대한 담론이기에, 기괴하고 슬픈 생명과 사랑의 오마주니까, 한갓 얄팍한 용어 따위로, 게다가 주제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말 꾸밈새로 오독하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하잘것없는 나무도 아니고 그저 지나가는 여행객도 아닌 세 개의 그림자 ㅡ 로댕의 '세 그림자' 혹은 '세 악령'과 과연 연관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ㅡ 는 결국 사랑스런 아이를 데려가고, 리즈는 루이에게 「두려움과 분노만으론 우리 아이를 지킬 수 없다 (...) 아이는 곧 우리 곁을 떠날 거고, 난 준비가 됐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세 개의 그림자』는 부모의 사랑에서도 특히 부정(父情)을 하나의 줄기로 삼아 여행하고 있다. 멀리 떠나기 위해 오른 배에서 루이(아버지)는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대비되는 한 노예의 애절한 눈빛을 모른 체했다가 나중에 끕끕수를 당하고 ㅡ 아들 조아킴만 지켜낸다면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아버지의 맹목적이고 쌉싸래한 눈물(누가 멋진 재킷을 입었는지도 그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ㅡ 머지않아 배는 침몰하게 되는데, 살기 위해서는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여기에 어마어마한 메타포가 있다고 여겨진다)는 어느 노인의 말에 그는 조아킴을 안고 거센 바다로 뛰어들고 만다. 그리고 훗날 악마와의 거래로 자신의 심장을 내어준다. 오로지 조아킴을 위해서……. 그런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심장을 잃고 괴수가 되어버린 아버지로부터, 아들은 더 이상 그림자들이 무섭지 않다며 그의 단단한 주먹 속에서 빠져나온다. 친구의 아들의 죽음에서 이 작품의 주제를 구상했다는 작가의 말로 보건대, 이것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나 성장통이 아닌 사랑의 소멸로 보인다. 그리고 훗날 '세 그림자'는 아들 조아킴에게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아버지 루이의 심장을 돌려주게 한다. 「조아킴… 이제 가야 한다.」 「네. 아빠, 안녕히 계세요.」 죽은 아이는 스스로 제 아비를 살리고 떠난다. 그런데 조아킴은 정말로 아버지에게서 사라지는가? 아니면 되살아난 루이의 심장에, 다시 뛰게 된 아버지의 가슴속에 숨어있다고 해야 할까?



덧) 그들이 배를 타기 전의 에피소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며 배표를 쉽게 내어주지 않으려 했던 장사치에게 조아킴은 「그 아저씨 '죽이고' 싶었어요!」라고 중얼거리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두 번째 읽는 순간 이건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외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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