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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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ㅡ 무라카미 라디오 2 ㅡ 가 나오기 십 년쯤 전에 『무라카미 라디오』(까치, 2001)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잡지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하시 아유미(大橋步)가 삽화를 그렸는데, 어찌된 일인지 예전 것에는 '사정상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오하시 씨의 그림은 빠지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란 편집부의 코멘트 하나로 마무리되어 있다. 그 사정이라는 게 뭔지 그다지 관심은 없었지만 귀찮아서는 아니겠지(설마). 이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옛날 글들을 다시 한번 죽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는 참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도 쓸 수 있고 때에 따라선 시도 쓸 수 있다. 뭣하면 이렇게 에세이를 쓰기도 하고. 『어둠의 저편』이었나 『해변의 카프카』였나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그즈음부터 하루키의 소설이 좀 부담스러워졌었던 것 같다. 왜냐고 물어도 뭐라 꼬집어서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그의 에세이는 좋다.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다. 작년 말에 나온 『잡문집』(비채, 2011)도 순식간에 읽어버렸으니까. 이 사람은 소설을 쓸 게 아니라 에세이스트였어야 했어,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2001년에 나왔던 책은 고속버스 안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는 29년간 I시(市)를 벗어난 적이 없으므로 추측컨대 서울에 사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나로서는 고속버스를 탈 일이 좀처럼 없으니 당연히 범위가 한정된다). 올라가면서 한 번, 내려오면서 두 번째 읽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도 지금 두 번째 보고 있는데 절반가량 읽었을 때, 지금쯤 감상이라도 좀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과 달리 에세이집은 딱히 감상을 쓸 만한 얘깃거리도 생기지 않아서 불안한 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썩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예컨대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걸 읽고서 2,000자 가까운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ㅡ 하루키의 에세이는 그보다는 다종다양. 그래서 도저히 잊히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은 아니지만 은근슬쩍 어디에선가 불쑥 생각나는 쪽이다. '아, 어떤 글에서 이런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하고 말이다. 특유의 '몽글몽글함'이 공백을 채우고 있는 듯한 기분, 정체 모를 메뉴가 적혀 있는데도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뭐 그런 것. 그럴 땐 어쩐지 독자보다는 하루키에게 이익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쓰면서 책을 계속 읽고 있었는데 「슈트를 입어야지」 꼭지까지 와버렸다. 이건 전작의 「양복 이야기」와 비슷한 글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양복'과 '슈트' 정도일까. 그런데 이 양반은 이걸 또 글로 써버렸다. 「이 얘기도 한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 어디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으므로 일단 처음이라 생각하고 쓴다.」 뭐야 이거, 자기 좋을 대로잖아. 근데, 이상한 게, 이런 점이 좋다니깐, 하루키 에세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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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7-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맞아요. 이상해서 좋아요. ^^
하루키는 정말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은 아무런 금기도 없이 쓰는 거 같애요. 그런 자유스러움, 그런 이상함이 하루키의 매력 같애요. 저는 무라카미라디오는 아직 안 읽었는데요. 이제 읽어보려구요.

ㅋㅋ <율리시스> 읽고 2000자나! 하하. 정말 대단한 일이겠어요. 공감공감.

그레코로만 2012-07-14 11:32   좋아요 0 | URL
그쵸. 뭘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데 그런 점이 또 이상하게 보이고...ㅋㅋ
 
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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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쿠이 도쿠로는 야마모토 슈고로(山本周五郞) ㅡ 과거 나오키 상을 거절한 유일한 작가 ㅡ 상을 수상한 것을 '운'이라고 했는데 어찌됐든 그건 겸손의 (빈)말이고, 내 관심사는 작가의 『통곡』을 뛰어넘는 작품이 과연 언제 나올까 하는 것이었으므로 온 신경의 초점이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통곡』 다시 쓰기'가 가능할 것인지 어떤지가 가장 궁금했으나, 일단은 거기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일단 소설 속에서 드러난 '손가락 수집가'가 피해자의 집게손가락을 취하는 이유나 그 이전에 살인을 하는 이유 자체의 연결고리는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연쇄 살인마, 정보 유출, 수직적 경찰 조직이라는 케이스가 이미 소설 속에서의 '낡은 것'이라면, 여기에 인터넷이라는 '현대의 것'을 적절히 조합한 발상이 이 작품의 묘미라 하겠다. 인터넷과 휴대 전화를 통한 살인 현장 중계는 꽤나 당혹스럽다. 이것이 자기현시욕에서 기인한 것인지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는지는 넘어가고, 역시 서술상의 흥미로운 점이라면 빠른 시점의 변화다. 하나의 군상극을 연상케 하는 이 기술은 단지 재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낡은 것'을 통해 '현대의 것'으로의 연착륙을 부각시키고 있다. '현대의 것'이라면 단연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통신망일 텐데, 콘센트에 꽂힌 지저분한 선들처럼 이야기가 진행됨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익명의 세계라는 화두를 현실로 끌어들여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하나의 접점에 무섭고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피력한다. 또 희한하게도 소설 속 인물(형사)들은 하나같이 중대한 문제를 떠안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가족'이다. 1차적 집단으로서의 전인적 상호관계가 결여된 가족, 밀착성과 연대성이 없고 역할수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족 간의 긴장과 의사소통의 부재. 이 문제점은 소설 속 범인인 '손가락 수집가'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이들이 고민하는 것은 모두 가족과 가정이며, 그것보다 도드라져 보이는 인터넷이나 휴대 전화 쪽이 외려 전자를 뒷받침하고 끌어주는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다. 『후회와 진실의 빛』은 외관상 '경찰 소설'이다. 수사관들의 반목과 조직 내부의 움직임에 따라 소설의 발단과 결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설정된 것임에 불과하며 ㅡ 이미 시작부터 추측을 엇나가게 하는 기교일 뿐이다 ㅡ 그 뒤에는 엄연히 불안정한 사회적 배경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제로섬으로 보이는 어떤 뺄셈의 가치가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군상의 문드러진 폐부를 물밑에 감추어 놓음으로써 '후회와 진실'의 빛깔, 과연 그것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거다.



덧) 형사 하나를 이렇게까지 몰락시킬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나마 끝까지 수사에 관여한다는 점(링컨 라임처럼?)과 왠지 '손가락 수집가'의 마음이 투영된 것 같아 조금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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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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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ㅡ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민주화 추세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 확산이 중단되었다.


2010년
ㅡ 2008년 이래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위축되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 Economist Intelligence Unit)이 발표한 '민주화 지수'의 내용이다. EIU는 5대 평가 부문으로 민주화 성과를 분석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선거 과정의 투명성과 다원주의의 존중, ②시민의 자유, ③정부의 기능성, ④정치 참여, ⑤정치 문화.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발명품은 이렇게 다각화되었고 현재인 오늘을 변화시켰음에도 때로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을 서술하고 있지만 어쩐지 이것이 민주주의의 '역사'라고 보기엔 조금 애매모호하다. 그것은 분명 과거부터 있어왔지만 뭔가 변화의 양상, 다시 말해 과거보다 발전되고 과거보다 뛰어난 점을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아테네의 민주주의 국가로의 변모는 쿠데타의 위험을 자각한 지배계층이 법안을 마련한 것을 그 태동으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이것을 뒷받침할 서술 사료라 할 만한 것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미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관료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선거 문화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역시 제한된 유권자에 의한 투표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로는 민주주의라고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부족했던 것들이 현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으로 이어졌을까? 물론 근대 유럽에서는 중앙집권화를 띠는 정부와 국가라는 개념이 강조되기는 했다. 게다가 런던의 '퍼트니 논쟁'으로 인해 대의정부 또한 주장되기에 이르렀고 사후 '수평파'라는 것을 발견해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소위 '선거 관습'이라는 것, 정치란 화두가 대중적 담론으로 떠오른 상태에서도 계속된 이러한 악습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을 잘 안다. 19세기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또한 알고 있다. 그런데 보자. 오늘날 민주주의 수립 환경을 만들겠다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대량 살상 무기 운운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수출하겠다며 이라크의 정권 교체를 시도한 그들을(이건 1차 비유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비전인가? ㅡ 더구나 이라크의 민주주의는 결과물로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구상의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를 목표한다. 내가 보기엔 그것이 한계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라 해도 보이지 않는 '우선권'을 가진 자들은 존재한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묵살당하고, 무시당하고, 유아 취급을 받고, 권리를 박탈당한다. 로저 오스본은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이 말은 이렇게 보면 맞고 저렇게 보면 틀리다. 공동선을 향하는 과정에서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질 못하는데 어떻게 그 민주주의 자체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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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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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에는 '뉴타입(new type)'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으로부터 새롭게 발현된 정신능력, 제6감, 초능력, 텔레파시, 천리안 등의 공감각(共感覺) 능력에 대한 것이다. 아니면 《인랑》 ㅡ 이것을 예로 드는 것은 좀 꺼려지지만 ㅡ 은 또 어떨는지. 이른바 '평행세계(parallel world)'를 도입했으니까. 이것도 아닌가? 그럼 브라이언 레반트의 《베토벤》은? 그야말로 '슈퍼 개'가 주인공으로 나와 불법 동물실험을 하려는 작자에게 한방을 날리는 영화 말이다. '인류보완계획'을 내세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또 어떻고……. 『제노사이드』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집착하던 신기루 같은 이야기들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도 비슷하게. 인간 탐구의 방법론과 접근법은 몇 가지가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의 방식은 진부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길이다. 겉표지에 적힌 문구처럼.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모럴 해저드인가? 모럴 해저드 위의 단계를 차지하는 인간의 해이인가? 어설픈 앙팡 테리블 취급을 하는 조야한 인간의 불가해성인가? 『제노사이드』는 걸작이건 졸작이건 둘 중의 하나라고 본다. 어중간하지는 않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러저러한 단점도 눈에 띄지만. 일단 통신이나 위성, 해킹에 손을 대는 '아키리'가 과도하게 전지전능한 모습을 지녔다는 것. 이것은 신인류의 능력, 위에서 말한 뉴타입이란 걸로 해결이 된다고 여겨야 할까. 이래서야 속 편한 결론이지만. 다음은 결말인데, '기프트'란 제약 프로그램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ㅡ 기프트(gift, 천부적인 재능)를 다 하고 ㅡ 되어있다는 설정이다. 이런 식이라면 애초에 이 이야기 자체가 발생하기 힘들다고도 보이지만 당최 일관성은 없어 보인다 ㅡ 일본의 독자들이 반응하는 단순한 전쟁관이나 편향된 역사관(이건 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한국인이라서일까?)은 다소 쓸데없는 논란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으니 차치하고 넘어가자. 처음부터 영화화를 목적으로 했는지 어땠는지 소설은 할리우드식 SF의 면모도 있고 또 등장인물 고가 겐토가 과거 냉전 시대의 이야기를 듣고는 '마치 SF 같았다' 라고 느끼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오히려 현실이 SF다!). 그러나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어느 인터뷰에선가 말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면 허술한 액션영화밖에는 안 된다.」 이 작품은 절대 영화화할 수 없다는 단언(혹은 자만)일 수 있겠지만 인터뷰의 전반적인 내용을 훑어보면 텍스트를 손에 쥔 자의 자신감과 약간의 겸손이 들어가 있다. 「전투 장면은 소규모적인 것이 두 군데밖에 없다 (...) 그것을 언어의 힘을 빌려 긴박감을 더해 인물의 감정과 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류사를 담아 (...) 인간의 잔학 행위를 영상으로는 만들기 어렵다…….」 자, ①아키리의 설정이 너무 초인적이라든가, ②스케일이 '너무 커서' 지친다든가, ③용병으로 등장하는 예거의 돈을 필요로 하는 동기가 진부하다든가(파편적으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생각나서), ④뜬금없이 한국의 '정(情)'이 나온다든가 ㅡ 하는 것은 집어치우겠다. 이런 면면은 기술적인 곁다리로 보고 좀 크게 가자.



인간에게 선한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네. 하지만 선행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미덕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행동이라면 칭찬받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ㅡ 본문 p.475



왜 '신약 개발'인가. 10만 명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소설 전반부에 나오는 '피그미족 캉가 밴드 40명의 격리 또는 사냥' 혹은 '신인류의 탄생'과 외려 대치되기도 하고 병립되기도 한다. 여기서 이런 알고리즘이 발생한다. 하이즈먼 리포트 #5 '인류의 진화' ▶신인류 '누스(아키리)' 탄생 ▶신약의 필요, 누스의 신약 개발 돌입(현인류의 능력 밖이므로) ▶위험하다고 판단한 현인류의 누스 말살 정책 ▶누스의 반격 ▶신약 개발 완료 ▶누스 말살 정책 폐기(누스의 지력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그가 사라졌다고 판단) ▶현인류의 불치병 치료 ▶평화(▶다시 처음으로?). 신인류가 현인류를 구한 셈이다. 훗날 현인류를 '갈아엎고' 신인류가 현인류로 대체되고 다시 또 언젠가는 새로운 인류가 나타난다든가 하는 결말까지는 가지 않는다(당연하다). 그러니까 단지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아니라 맨 밑에서부터 위 끝까지 아우르는 의미에서 ㅡ 「너 = 나 = 우리 = 인간 = 너 = 나 = 우리……」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웅대한 철학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인간 개체는 다분히 허영에 사로잡혀있고 자기중심적이다.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기보다 탐욕, 잔혹, 자만으로 가득 차있는 존재다. 인간은 결코 지적이지 않다. 인간의 윤리적 기초에 동정심이 존재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전자라면, 그것은 학습된 사회적 반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이런 사유 속에 『제노사이드』는 생명의 논리를 들이민다. (포괄적으로 말한다면)단순히 인간을 후손을 낳는 생존 기계로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그런 끊임없는 생산과 생존만이 진화하는 것이라고 여겨야 하는가의 문제를. 하지만 어떤 경우든 미지의 외부 존재와 마주쳤을 때 쾌감 혹은 불쾌를 겪는 문제가 간섭한다. 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금방 죽을 수밖에 없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 고바야시 마이카, 그리고 처음부터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난 아키리와 에마(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도, 그것을 다수와 소수로 나누는 것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저 옛날 스토아학파의 한 철학자의 중얼거림을 들어보자. 「신이 지금 질병을 나에게 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질병을 추구했을 것이다.」 말인즉슨 삶에 초연하고, 불리한 입장에서 분노하지 않고, 행운을 맞이해도 쾌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인간(우리)은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왜? 인간은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착하고 고통 받는다. 첫 번째 논의 ㅡ 소설 초반부의 캉가 밴드를 놓고 하는 입씨름은 그래서 괴로운 물음이다. 나을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로 왜곡되어있다)을 죽일 것인가 격리시킬 것인가. 아니, 애초에 어떤 물음을 던져야 하는가. 두 번째 논의 ㅡ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못하고 개인의 이성만을 신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질문. 과거의 홀로코스트나 현재의 다발적 전쟁은 같은 이름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간다.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지금쯤 세계 종말 시계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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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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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본질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누락되는 삶 역시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수녀의 일기처럼 순수했던 사람 하나가 웬일인지 범죄자가 된다. 가업을 이으려 착실히 반죽을 개던 선량하기만 한 메밀국수집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를 해한다는 식의(이유야 어쨌든 그런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는) 범죄. 동기는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거기서부터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경위가 애달프다. 고도의 경제 성장, 샐러리맨의 급증, 그에 따라 반듯하게 재단된 사회로부터의 사회적 배경과 인간의 정념이, 얼굴 뒤쪽 보이지 않는 손짓의 '거절하지 못할 제안'과 반응해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증명 시리즈'로 악명 높은(!)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는 이런 말을 했다. 「'세이초 이전'은 일반 독자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주로 고답한 문학이자, 문단의 칭찬 일색으로 독자의 선택을 강요하는 문단주도형 문학이었다. 하지만 세이초 작품은 독자가 주도했다.」 그런가하면, 세이초와 친했던 한 고서점 지배인이 언젠가 세이초의 입원 소식을 듣고 얼른 가보았더니 「병원은 심심해서 싫구만, 뭔가 재밌는 것 없을까」 하는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는 적도 있다고 한다.

 

 

어떤 작품이야 안 그러겠냐마는, 단편집 『잠복』은 모리무라 세이치의 말대로 독자가 주도하는, 한 사람이 파멸할 때까지 끝까지 가보는, 단편이라는 적은 용량임에도 최대의 중량감에 육박하는 초여름 백화만발(百花滿發)의 성과물이다 ㅡ 병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금쯤 냉동인간으로 있다가 어느 병원에서라도 불쑥 나와 주면 어떨까. '재밌는 걸 좀 찾으러 왔다'고 하면서……. 『세이초와 그 시대(淸張とその時代)』, 『마쓰모토 세이초 사전(松本淸張事典)』 ㅡ 이런 책도 있군 ㅡ 등의 저자이면서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고하라 히로시(鄕原宏)는 세이초 연구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다. 어떤 작가가 어지간히 유명해지면 그 사람에 대한 책이 종종 출간되기도 하는데, 고하라 히로시가 쓴 책은 '사전'이다(앞의 책). 세이초의 작품,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등을 총망라한 책이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 사전』이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였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다음은 고하라 히로시와, 전 아사히신문사 사장 나카에 도시타다(中江利忠)의 세이초에 대한 코멘트이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빼고는 일본 미스터리를 말할 수 없다.

ㅡ 고하라 히로시


이 대선배의 오랜 꿈은 자신의 작품의 무대가 된 곳곳을

아사히신문사 전용기를 타고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ㅡ 나카에 도시타다

 

 

나카에 도시타다의 말은 실현되었는데, 언젠가 제트기를 타고 운젠후겐산(雲仙普賢岳)의 화산 가스와 재가 날리는 분화구 근처에서 세이초가 흥분한 나머지 필름이 없는 것도 모른 채 셔터를 눌러대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어.」라며 '소년처럼' 분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각설하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ㅡ 이 단편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의 작품은 대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혹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을까?」 보다 「아아, 제길, 그럼 주인공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만은 제발!」 하는 기대와 불안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텍스트와 투쟁하거나 그것에 동화되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원망(願望)'하게 된다. 이를테면 「목소리」의 전화 교환원(다카하시 도모코)이나 「귀축」의 인쇄업자(다케나카 소키치)를 들 수 있겠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평안은 경사진 툰드라 평원의 짧은 여름보다도 더없이 적게 느껴진다. 한창 맛있게 피우고 있는 담배가 그대로 파국의 향(香)을 사르게 되는 꼴이다(도코모 씨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귀축」은 벅수 같은 ㅡ 창자를 찾아내기 힘든 게처럼 ㅡ 인물의 마음속에 똬리를 튼 무사안일로 인해 괴물로 변하는 모습을 그린다. 「목소리」의 경우는 갑작스레 장(章)이 바뀔 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시점의 변화 ㅡ 꼭 추리편과 해답편처럼, 혹은 밸린저(Bill S. Ballinger)식 컷백처럼 ㅡ 는 왕왕 독자로 하여금 괴로움에 가까운 불안한 추측에 더쳐 정신의 뒤집힌 앙양(昻揚)을 낳게 한다.

 

 

줄거리의 조밀함이란 측면에서는 「일 년 반만 기다려」와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를 꼽을 수 있겠다. 전자는 그야말로 카타스트로프의 정점을 찍는데, 여기서는 형사 소송법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와 함께 맞물린 유연한 '이야기의 그럴듯함'의 경첩이 주인공의 '계산 착오'를 씁쓸하게 만들고 있다.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는 한 지방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가 형사 내지는 탐정의 역할로 분(扮)해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이야기다.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가 편집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북스피어, 2009)에 달린 그녀의 해제는 이 작품을 두고 '끝까지 다 읽은 뒤 다시 한번 앞머리로 돌아와 읽어보라'고 조언한다(나도 그녀의 말에 따라 그렇게 해보았다). 그저 어둡고 무서울 뿐이었던 결말이 새삼 애달프게 변하리라 ㅡ 이 단편은 「얼굴」과도 비교해볼 수 있는데 주인공들이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전전긍긍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 역시 묘한 조바심을 내게 된다. 「얼굴」에 대해 좀 키치적인 비유를 하자면, 통으로 된 아이스크림의 얄팍한 테두리처럼 긁어내면 긁어낼수록 자꾸만 녹아내려 종국에는 다 먹어치워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 무참한 행보랄까……(허허).

 

 

표제작 「잠복」은 내게는 최고의 단편이며 동시에 가장 뒷맛이 좋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화자의 입장이 되는 유키 형사는 세이초의 『짐승의 길』(북스피어, 2012)에서의 히사쓰네 형사처럼 자신이 쫓는 여자에게 동화되고 어느 정도의 감정선을 따라간다는 점에서는 일견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히사쓰네에게는 그 여자를 품으려는 일념이 있었고 또 그 과정에서 죽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유키 형사가 보여준 감정에는 이해와 연민이라는 명제가 끼어든다. 처음부터 그가 작심한 듯 쫓는 여자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이 여자, 수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유키 형사는 어찌된 일인지 '아갈묵념(!)'하고 만다. 그런가하면 「카르네아데스의 널」은 「일 년 반만 기다려」와 같은 맥락으로 형법의 '긴급 피난'이란 조건을 내세운다. 물론 앞의 단편처럼 안쓰러운 결말에서는 매한가지……라는 것은 찰나이며, 이미 등 뒤에서 시작된 오케스트라의 비극적인 연주에 맞춰, 이성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인간이 순간의 감정에 휘말리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18세가 되던 해 고쿠라의 작은 지방 신문사인 진서보(鎭西報)의 문을 두드렸다가 학력의 벽에 부닥치고 마는데 ㅡ 그러다 훗날 아사히신문사 규슈 지사가 사옥 신축을 계기로 고쿠라로 이전한 후 그곳에 취직한다. 그렇다면 왠지 수록작 「투영」은 그런 일면을 얼마간 반영한('투영'한)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이초 자신은 신문사의 꽃인 기자가 아니었기에 소설 속에서나마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게 아닐는지. 게다가 이 단편은 인간관계의 정(情)과 '정의는 승리한다'는 쾌감 또한 느낄 수 있어 다른 수록작에 비해 그나마 밝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다만 사건 발생 장치에 좀 무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대단한 작가라고 해서 어떤 장애나 의무감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그의 작품에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지 않아도 읽을 사람은 반드시 읽을 거라는 확신도 있고, 외려 칭찬 일색의 감상은 진정한 가치를 오도할 수도 있다는 추측뿐이다(그렇게 생각하는 주제에 잘도 이런 글을 쓰고 있군……). 단편집 『잠복』에서 우리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고 싶었던 배우, 티 없이 순수했지만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여인, 짐승처럼 제 자식을 버리는 인쇄업자, 충동의 와류에서 허우적대는 지식인과 마주친다. 동시에 악의 감정은 더치고 더쳐 텍스트는 ㅡ 총을 든 겁쟁이, 깨어있는 소시민 등을 양산해내고 있는 거다. 『잠복』이란 단편집…… 주인공의 시선이라는 다소 텁텁한(그럴 수밖에!) 필터를 통해 만들어지는 맥놀이가 얄궂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덧) 아래 사진은 '영구 보존판'이란 딱지가 붙은 「잠복」의 DVD와 해설서인데 ㅡ 30쪽 미만의 단편을 무려 116분의 영상으로 만들었단다. 당연히 보고 싶다……!

 

 

사족) 곰곰 머리를 굴려보니 일본의 2인조 록밴드 B'z(비즈)에 기타와 작곡을 하는 마쓰모토 다카히로(松本孝弘)라는 사람이 있는데, 마쓰모토란 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제목 짓기' 센스가 발군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그가 제목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노래 제목 몇 개만 써보자면 다음과 같다. 「안녕 상처투성이 날들이여(さよなら傷だらけの日々よ)」, 「충동(衝動)」, 「맨발의 여신(裸足の女神)」 ㅡ 사실은 좀 억지로 갖다 붙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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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리 2012-06-2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리뷰가 대단하다!

그레코로만 2012-06-24 14: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뽀리 님의 과감한 댓들이 더 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