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페우스의 영역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수현 옮김 / 펄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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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페우스의 영역』의 출발점은 조금 특이하다. 여기에는 사사키 아쓰시란 소년이 등장하는데(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할 만큼 이 양반의 인물설정은 어쩐지 유기적이다 못해 '치열'하다. 게다가 이 소년뿐만이 아니라 일련의 작품에는 반복되는 인물들이 자주 나온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DVD와 함께 만들어진 소책자에서 과거의 작품연표를 작성했는데 아마도 『나이팅게일의 침묵』이란 작품에 등장했던 사사키 아쓰시의 나이가 틀어져버린 듯하다. 그럼 그를 5년 동안 잠들게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쓴 것이 이 『모르페우스의 영역』 제1장이라고 알고 있다. 응? 이런 이유로 소설이 탄생한다는 건 좀 억지스럽잖아 라고 하기엔, 뒤에 가서 기가 막히게 터뜨려주고 있다(소년의 각성 과정과 부모의 이혼은 부자연스럽게 생각되지만). 어쨌든 이건 메디컬도 뭣도 아닌 (메디컬의 탈을 쓴)드라마라고 결론내리고 싶다. 자, 불치병을 앓는 소년 하나가 있다. 미래의 기술이 개발되기까지 5년간의 콜드 슬립(인공 동면)이 결정되고 그는 수조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5년 뒤 눈을 뜨게 되고, 거기서부터 비로소 이야기가 풀어진다. 여기에 나오는 <동면 8원칙>에는 이런 항목들이 있다. 4항, 동면 선택자는 각성 뒤 1개월의 유예 기간을 거쳐 이전의 자신과 연속한 생활 또는 타인으로서의 새로운 생활, 이 양자 중에서 선택한다. 5항, 동면 선택자가 과거와 별개의 속성을 택한 경우, 이전 속성은 동면 개시 당시로 소급해 사망 선고된다. 6항, 이전과 연속성을 가진 속성으로 복귀했을 경우, 사회에 동면 사실 공개를 요한다……. 실은 이 내용이 시발점이자 도화선으로 작용하고, 동면에 빠진 소년을 관리하던 센터 직원 히비노 료코가 충격적인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이야기는 급격히 바빠진다 ㅡ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르페우스의 영역』은 후속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딱히 할 얘기는 없다. 5년간 잠들어있던 소년이 깨어난 후의 이야기는 헤살이 되므로. 의료 시스템을 따라가지 못하는 의료 정신의 부실한 상태? 그런 걸 굳이 얘기해서 뭐하나. 읽어보면 알 것을. 하나만 언급하자면 이런 식으로 (말이 안 나올 만큼)뒤통수를 꽝, 하고 맞은 적은 최근 몇 년 들어 처음이다. 그런즉슨, 이건 다음 이야기가 꼭 나와 줘야 한다니까.

덧) 그나저나 료코가 아프리카 노르가 공화국에서 만난 영사관 의무관은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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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부식 열도 1 금융 부식 열도 시리즈 1
다카스기 료 지음, 이윤정 옮김 / 펄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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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토모 야스유키의 『돈이 울고 있다』란 만화를 아는지. 엘리트 은행원이 대부업체 지점장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만화인데 이 『금융 부식 열도』와 궤를 같이 하는 접점은 '돈'이 되겠다. 자본주의의 오래된 테마는 역시 돈과 금융이니까, 당연히 돈의 움직임과 그것이 어디서 머물고 어디가 종착역인지를 따라가는 그림은 언제나 흥미롭다. 가장 접근성이 좋은 주제는 부정한 돈의 흐름과 변제에 관한 것이겠고.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잃어버린 10년'이건 '잃어버린 20년'이건 간에 거품경제로 인한 자산가격의 빠른 성장 속도는 원칙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거품이 끼고 말았다. 언뜻 보면 그야말로 '진흙 속에서 핀 연꽃'인데 돋보기를 들고 자세히 관찰해보니 결국 '시체꽃'이었다는 뭐 그런 얘기가 되려나……. 『금융 부식 열도』는 딱딱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부식'을 타이틀에 넣음으로써 거품도 거품이지만 거기서 파급되는 '돈의 맛'을 보여주고 있고 ㅡ 배금주의, 더티 머니, 유불리를 따지는 괴수들이 한데 모여 총체적 난국이란 퍼즐의 조각으로 분(扮)한다. 일단은 다케나카라는 주인공이 있다. 이 평범한 은행원의 시선을 빌려 일본의 거품 끼고 부식된 경제를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절대 권력에 가까운 파워를 지닌 사토라는 교리쓰 은행 비서역(도쿄대 출신으로 설정)과 출신대가 달라 어디든 갖다 쓰고 버릴 수 있는 부하직원의 인상도 묻어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은행장의 딸 스캔들로 시작되는데, 후자의 이유가 없다면 굳이 교리쓰 은행 도라노몬 지점 부지점장인 다케나카란 인물을 사토가 캐스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스기모토가 사토의 심복인 스기모토가 다케나카의 입행 동기라는 점도 한몫했겠지만). 어쨌든 소설은 다케나카가 본점 총무부 주임 조사역으로 발령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다케나카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100명 가까이 되려나) 소설 속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다섯 명 안팎이다. 이들을 줄기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다케나카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발령에 그는 은행 주주총회에서 여론을 장악하는 총회꾼 ㅡ 주주총회에 참석해 금품을 목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거나 돕는 소액주주 ㅡ 들을 전담하는 '섭외반' 근무를 하게 된다. 총회꾼들 중에는 조직 폭력단과 우익 단체도 있는데 다케나카에게 내려진 임무는 주주총회를 대비한 스캔들을 막으라는 것. 은행 회장과 그에 줄을 대는 비서역의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고민하는 다케나카의 첫 번째 사건은 불법 융자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앞서 말한 일본 경제의 총체적인 문제, 거품 경제를 들쑤셔대야 한다. 돈은 회사에의 투자 등 유익한 곳에 쓰이지 않은 채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로 이어진다. 실제로 80년대 말 도쿄의 땅값이 미국 전 국토의 땅값과 맞먹는다는 수치가 나오지 않았던가. 이것이 거품이다. 사람들은 일본의 경제가 성장과 발전의 일로를 걷는 것으로 착각했다. 힘 있는 원맨에 의한 실력행사는 물론이거니와 금융계, 주택 문제, 그와 얽히고설킨 정치적 알력까지. 이 버블이 쉬이 사라질까? 붕괴는 되었지만 잔재물이 남았다. 페이퍼컴퍼니를 만들고, 거기에 자금을 대주고(부정 융자), 리베이트를 챙기고, 부실 채권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지옥문으로 들어간다(실은 복마전일지도). 작가는 다케나카로 하여금 거물 해결사 고다마와 만나게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ㅡ 고다마는 주인공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 때문에 그저 박력 있는 인물로 생각될 수 있지만 그 역시 깨끗하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거품이 만들어낸 인물이다. 『금융 부식 열도』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태생이 거품이라고 해도 좋다.

기업은 은행주를 매각하고 은행은 기업주를 매각해 주식 시세가 떨어진다. 은행은 실질 이익의 감소로 인한 경영 부진에 빠지고 은행의 신뢰도 저하는 또다시 은행주의 매각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금융채 구제에 혈세를 사용할까? 대형 은행을 구하기 위해 공적 자금을 투입할까? 아니면 돈 자체를 거세해야 이 세계가 편해질까? 썩어빠진 관료주의와 맞물린 부식된 경제 블랙홀이 『금융 부식 열도』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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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셀러 -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의 반짝이는 사랑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3
아리카와 히로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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렬했다, 소설을 쓰는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내주어야 하는 여자란. ……치사성뇌열화증후군. 사고(思考)하는 대신 수명을 잃게 되는 병이란다. 작가인 '그녀'의 머릿속에서 어느 날 퓽, 하고 나사가 날아가 버린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없이는 그녀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글을 쓴다. 훗날 그녀가 죽는다면 아마도 그 병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그런 병과 드잡이하면서. 간단한 스토리다. 하지만 이 Side A에 이어지는 Side B가 있기에 비로소 이 소설은 완전한 동체가 된다. 하나의 단편과 그 연작이 독자를 지켜낸다. 그런데 이야기(story)를 파는(seller) 것이 과연 생명과 맞바꾸는 대가로서 정당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앞에서의 우울했던 감정이 이제는 좀 달라지겠지, 했는데 Side A가 끝나고 Side B로 넘어가는 그 시점부터 다시금 불안해진다. 시작부터 불길하다 ㅡ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화자는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렵고 슬픈 이유를 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다시 한번, 불행하게도 그녀의 머리에 망치질이 가해진다. 꼭 신이 팔짱을 낀 채 비웃으며 욕지거리를 하는 것만 같다. 가운데 손가락을 비죽 내밀고, 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까딱…….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반드시 거기서 사랑의 승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팔아서 역몽(逆夢)을 일으켜야 하니까.」 불행에 맞서 역몽을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이 자체가 '역몽 소설'인 걸까. 『스토리셀러』가 슬픈 이유는 자신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이야기를 잃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역몽이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외려 역몽이 아니어서 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엄청난 추진력은 없지만 '재생해가는' 이야기 자체의 아우성이 담긴 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집단 트라우마에 따른 해석으로 무조건적인 수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역몽일지 아닐지는 ㅡ 이야기를 팔 것인지 아닌지, 이야기를 읽을 것인지 아닌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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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냥 - 상 - 개정판
텐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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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냥'에서 '가족'은 주어일까 목적어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어떤 공동체가 피로 얽혀있다는 건 무척 기기묘묘한 일이므로…….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나 반대로 무책임한 태도 역시 가족의 일면이다. 새로운 가족 문제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2010년 『범죄 백서』를 보면 살인 사건의 50% 정도가 친족 살인이며 상해 치사 역시 친족이 관련된 경우가 50% 정도를 차지한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최근 이삼일가량 아침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아동학대는 물론이거니와 내 아들이 번 돈이니 며느리는 상관 말라며 마구 써버리는 시어머니, 밖에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폭군으로 변하는 남편 등 이상하리만치 일그러진 가족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면 일종의 행복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도 마찬가지다. 마치 공포 영화를 보고 나와 '재미있었다'고 느끼는 것처럼, 『가족 사냥』을 덮고 나서 안도하는 것처럼. 「이건 소설(영화)일 뿐이잖아. 우리 가족만큼은…….」 하고. 중요한 건 이 소설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용히 손을 들고 발언을 하고 있는 거다. 자신의 이상을 좇기 위해 자녀를 희생시키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혹여 자식에게 거추장스러울까 부모가 가족 안에서의 은거를 취하는 게 옳은 일인가? 여기에 스도 슌스케가 다니는 학교의 관리인 ㅡ 그녀의 아버지는 과거 한국에서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어 왔다 ㅡ 의 얘기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그녀는 학교를 떠나기 전 학생들 앞에서 말한다. 「여러분이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악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지도자가 고향에서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의미도 사실은 이해할 수 이해할 수 없을…….」 마지막 말은 교감에게 제지당한다.





그림은 파울라 레고의 「가족」(1988)이다. 부인과 두 아이는 아버지의 옷을 '벗기고' 있다. 성적인 뉘앙스가 아니다. 이 그림에서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쥐어 짜이는' 인물로 전락해버렸다. 정말 가족이란 공동체는 신성함 그 자체일까? 나에게는 오른쪽 창가에 있는 아이의 표정이 가장 두려워 보인다……. 가족이란 공동체는 외부와 맞서 대립하는 가족 이기주의와 집단 무의식의 모습을 취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가족 내에서의 투쟁이라는 측면도 알게 해준다. 왜 내가 가족와의 알력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소설에서 해충 구제를 하는 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가족은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용감하게 공유해 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떤 건물을 짓든 우선 토양부터 소독해야 하듯이 이 이야기의 가족 문제를 들여다보려면 근저에 깔린 가족의 썩은 지탱점을 보수해야 한다. 내 짧은 생각에, 타인에 대한 사랑은 가족으로부터 생겨난다.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욕구 ㅡ 물론 모든 가족은, 모든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ㅡ 가 강한 구성원이 있다면 사랑의 단계는 현저히 낮아지고 말 것이다. '가족'이라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자면,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이런 문제는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릇된 행복감을 얻고서 자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90년대부터 써보고 싶은 게 있었지만 그즈음에는 아직 유아학대나 아동학대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 것은 이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 표현력도 부족했고 (...) 그런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았겠지만 소설에 대한 사회적 요청이란 측면에서는, 당시에는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 사회가 그런 소설을 수용할 수 있는 밑바탕이 마련되지 않았다고나 할까.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와의 대담집 『소년과 아프리카』에서 덴도 아라타가 한 말이다. 그럼 지금은 사회가 변했을까. 그때는 이런 문제를 드러내놓고 얘기할 만큼 황폐해지지 않았다는 뜻일까. 『가족 사냥』에서 하나의 은유로 투영되는 흰개미의 여왕개미는 한 번의 교미로 정액을 축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수컷(남편)과 함께 지낸다. 말하자면 가족생활이다. 사랑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인간으로 이루어진 가족도 언제나 사랑으로 유지되고 있을까? 내가 타인을 사랑하는 순간 나는 상대방으로부터의 사랑 또한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를 버리고 떠날 수도 있다. 문제는 과연 가족 관계에서도 이 동어반복이 가능하겠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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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아멘 아멘 -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
애비 셰어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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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는 물음인데도 다른 답을 취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외려 정답을 맞히는 것이 부적절해 보이는 건 왜일까. 심장은 깨져있고, 펼쳐진 침대 시트는 눅눅하고, 폐활량이 77퍼센트로 늘어나고, 684번 고속도로가 일어나지도 않을 두려움을 보여주더라도 ㅡ 끊임없이 날카로운 것들을 모으고 하루에 몇십 분씩 기도를 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월터 핫도그 가게가 무사하건 말건 ㅡ 흑마술 같은 급류를 피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애비가 일종의 자해라고 생각하는 살을 꼬집거나 머리를 때리는 행위는 나 역시 겪어서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행동들을 본 적이 있다. 대학 시절 만나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야기 속 애비와 비슷한 상황이 오면(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엄지손톱으로 집게손가락 언저리를 마구 찔러대곤 했다. 내가 그것을 하지 못하게 잡으면 그녀는 내 손을 으스러지도록 세게 쥐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제이가 되지 못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극지에 서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진실은 결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므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본질의 문제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도 그녀와 애비가 '인간의 망실(亡失)'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님(원서 쪽을 검색해보니 거기에선 'G-d'로 표현한 것 같다)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삶과 죽음이라면, 우리는 애비처럼 지고의 진리인 인간을 통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활세계(lebenswelt, lifeworld)에서 뻗어간 메를로-퐁티의 아카이브가 그러하다. 「지각된 광경은 순수 존재를 갖지 않는다.」 그가 인간 개체를 '함몰'과 '주름'이라 비유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이야기로 보인다. 결국 궁극적으로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여지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애비의 강박증을 보면 심지어 읽는 사람까지도 거기에 시달릴만한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나는 정말이지 너무도 지긋지긋했다!). 삶의 무수한 문제들 중 내가 가장 큰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오늘은 또 누가 내 손에 죽어나갈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네, 아니오'라는 양자택일을 들먹이는 우스꽝스러운 일련의 사유가 하-님의 이름에 입맞춤할 수밖에 없는 귀결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애비와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으로 남기거나 아니면 지구 밑에 가라앉아서 축을 따라 함께 순회하며 연극을 벌이는 또 하나의 양자택일과 투쟁해야 한다. 그러니 ㅡ 엄마의 말대로, 쉬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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