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치카 -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걸작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최종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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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영화에서 들었던 '러시아인들은 죄다 우울하다'는 말을 기억한다. 나는 여기에 찬성할 이유는 없지만 그다지 반대할 만한 이유도 찾질 못하겠다. 러시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스토옙스키를 보자면 흔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세 아들 모두에게 매료되듯이 울리츠카야의 인물들 역시 모두 매력적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우울하게. 단 독창성은 그다지 보이지 않지만 보편성과 시대성이란 측면은 나름대로 인상적이다. 재기발랄한 라이프니츠의 '창(없는 모나드)'도 은근히 엿볼 수 있다. 왜 '은근히'란 표현을 썼느냐하면 인물간의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담대함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엮여나가는 인물들의 소통은 라이프니츠의 창에 난 틈을 통해 슬며시 들락날락한다 ㅡ 관계의 내재성(internality)과 함께. 어떻게 하면 사람과 사람이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을 이해하고 삶을 이해하는 입장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지는데 여기서도 라이프니츠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도 그럴 것이 『소네치카』의 여러 인물을 보면, 타자와의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행복과 불행은 새롭게 혹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가 탄생할 때부터 모두 신이 예정해 놓은 것이 질서에 의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수록된 단편 「스페이드의 여왕」에서의 무르의 패악, ㅡ '이 XX같은 닭은 어디 있는 거야? 누구를 속이려는 거야?' ㅡ 그것이야말로 그녀는 처음부터 속아 넘어갈 운명이었고 타자들은 그녀를 속일 운명이었다(그런데 정말 결말은 그렇게 되었을지 어떨지 묘한 기분이다). 내가 표제작인 「소네치카」보다 「스페이드의 여왕」을 더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구태(舊態)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통쾌하게, 거스를 수 없는 숙명처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들은 모두 인간관계 속에서도 특히 '가족'을 파고드는데(그것도 가족만을) 피가 섞인 진짜 가족이라기보다 어쩐지 겉도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상당히 위험천만한 알고리즘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페미니즘과 친숙한 사람에겐 이 작품들이 더욱더 흥미롭게 읽힐 거라는 점을 일러두고 싶다.



사족) 러시아 문학에서, 음, 그러니까, 그 '이름'에 대한 강박관념은 언제쯤 깡그리 없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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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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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드식 사르카즘이야 그렇다 치고, 스티븐 킹만의 악랄하고 무자비하게 긴 괄호 세례(공공연하게 '부연의 king'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내 말 믿으시라, 내 글에서의 괄호 중 쓸데없는 것은 수천 개 중에서 한두 개밖에 없으니까, 라고 속삭이는 일종의 서브텍스트처럼)에 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가 10살로 접어들던 해의 극장에서 늙고 탐욕스러운 비행접시인이 등장하는 《지구 대 비행접시》에서 공포의 씨를 보지 못했다면 지금의 작가 스티븐 킹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만약 그가 어릴 적부터 공포 영화를 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공포 문학, 호러 문학의 방향 제시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했을지도 모른다(킹 이전의 위대한 작가들도 있었지만). 『11/22/63』도(작가가 소설 속에서 비유한 '제목에 항상 숫자가 달리고 살인마가 거리를 활보하는 영화'의 느낌과 아주 살짝 비슷하달까) 이 '만약'이라는 하나의 명사에서 출발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과거 여행이다('즐거운 여행'은 아니고). 제목의 숫자는 미국의 35대 대통령 케네디가 사망한 날이다. 1963년 11월 22일. 그러니까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케네디의 암살을 막는다면, 하는 게 골자가 되겠다. 소설에서, 식당 창고의 '토끼 굴'을 통하면 1958년 9월 9일 11시 58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여기서 시간을 가지고 장난친 수많은 영화를 떠올려볼 수 있을 텐데 이 소설은 약간은 다른 설정을 취한다.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오게 되면 지금의 상황은 변했을지 몰라도, 다시 한 번 과거로 가게 되면 항상 1958년 9월 9일 11시 58분부터 시작한다는 거다. 그때부터 리셋이 된다. 토끼 굴을 통과해 과거로 가는 순간 현재의 상황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다. 하나 더. 『드래곤볼』의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과거에서 얼마를 머물러도 현재에서의 시간은 고작 2분밖에 지나질 않는다. 오늘 아침 6시 정각에 토끼 굴을 통해 1958년으로 돌아가 10년을 지내다 와도 현재는 아침 6시에서 2분이 지나간 6시 2분이다(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기는 신체의 변화는 현재로 돌아와도 이어진다). 그럼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1958년일 텐데, 케네디가 죽은 1963년까지 가려면 5년씩, 즉 한 번 실패해서 두 번째로 갔다 오면 나이가 10살은 먹어서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현재 시점)에선 2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결말은 조 힐(킹의 아들이며 그 역시 작가다)의 의견이 반영되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그 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국내 출간이 이루어지기 전에 출판사의 배려로 가제본을, 그것도 1권만 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도 동시 출간이 아니라 일정에 맞추어 따로따로 나온다고 하니, 1권의 끝에서 어쩔 줄 몰라 어렵사리 미소를 쥐어짰던 주인공이 된 심정이다. 말인즉슨, 우리의 주인공이 케네디의 죽음을 막을 것인지 어떤지는 이 소설의 끝장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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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상 지도 - 마르크스에서 지제크까지, 눈으로 그려 보는 현대 철학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 부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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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힘이 역사를 만든다며 계급투쟁을 부르짖었던 맑스는 그것 때문에 보드리야르로부터 비판당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철학책을 (두서없이) 읽다보면 '지금의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의 내가 아닌'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가 분명히 있다. 불한당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유유히 사라지는 히어로를 만끽한 다음 영화관에서 나올 때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철학은 수많은 은유로 점철된 소설이나 시에 비해 더 어렵게 느껴질 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을 접하려면 끈기가 필요하다. 아주 약간의 끈기가. 『20세기 사상 지도』는 연대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묶였다. 그래서 뜬금없이 벤야민까지 등장한다. 이로써 어떤 문제를 보는가, 에 대한 추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 더 괜찮다고 생각한 점은 이 양반들의 국내 번역본에 대한 코멘트가 붙어있다는 것. 다정도 병인 양, 친절함이 독이 되지 않도록 읽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 책을 포함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에 대하여 그것을 읽을 자유와 읽지 않을 자유가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이다. 그에게 인간은 본질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 수 있고 도 만들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내가 있어야 할 것으로 있는 이 미래가 단순히 존재를 넘어서 존재에 대해 현전할 수 있는 나의 가능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는 엄밀하게 과거에 대립한다. 확실히 과거는 내가 나의 바깥에서 있게 되는 존재다. 그러나 과거는 내가 그것으로 있지 않을 가능성이 없는 존재다.」 그의 저작 『존재와 무』에 나오는 말이다. 정말이지 난해하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드는 존재라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알튀세르 역시 사르트르와 함께 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옹호했다. 여기에 반감을 드러냈던 자가 바로 알튀세르다. 그가 인간이란 주체는 사회적 구조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까닭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는 것 말이다. 희한한 것은 알튀세르에게 있어 주체라는 범주는 이데올로기와 분리할 수 없게 되는 것인데, 더 뜨악한(!) 것은 그가 인간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고도 보았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코나투스(conatus)를 타고난 사회적 원자들인 인간을 꿈꾸는 것, 사르트르와 알튀세르는 대척점에 서있으면서도 그 두 개의 점을 죽 이어 만든 선 위에 함께 존재한다. 사실 사르트르건 알튀세르건 뭐가 중요하겠는가. 앞서 언급했다시피 우리는 『20세기 사상 지도』를 읽을 수도 있고 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ㅡ 이 세계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낄 수 없도록 재단한 것이다 ㅡ 20세기 역시 인간의 시대였다고 본다면,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 우리가 과거에도 인간이었고 앞으로도 인간으로 살아갈 것임을 확실히 해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보르헤스의 에세이 ㅡ 정확하지 않은 기억력에 의하면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ㅡ 에 나오는 동물 분류법처럼 언어(인식과 관념), 도구(아트 혁명, 노동과 여가), 정치(자아, 주체, 사회), 윤리(욕망의 꽃, 윤리)라는 네 가지 틀로 엮인 흥미로운 사상들을(직경 2 또는 3센티미터에 달하는 '알렙'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주의 공간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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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파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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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y, Coben.」 할런 코벤의 소설을 읽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한 번 요 네스뵈로 갈아탄 모자란 인간이여.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다. 당연히, 재미있는 것은 그만큼의 매력이 있으므로 『레오파드』는 그 최소한의 필요충분조건은 갖췄다고 볼 수 있겠다. 소설은 전작 『스노우맨』과 동일선상에 있으면서도 '논스톱 액션'은 스케일과 과감성이 증대되었다. 『스노우맨』을 읽어봤다면, 이 시리즈의 주인공 해리 홀레가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거나' 아니면 염상섭처럼 '양옥집도 생겼고 기왓장도 늘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레오파드』의 상황을 볼작시면 해리는 적어도 '손가락도 잃었고 연인도 떠났다네' 정도가 되겠다 ㅡ 더군다나 불행히도 가운뎃손가락이 잘려 욕설 한번 시원하게 날릴 수도 없고. 이야기는 강력반에 사표를 던지고 홍콩으로 도망가 마약과 술과 벗하며 '젖병'을 빨던 해리가 다시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복귀하면서 시작된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참으로 익숙한 패턴이 아닌가. ①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에 히어로는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고독을 잘근잘근 씹는다. ②다시금 세상을 들썩이게 하는 (살인)사건이 터진다. ③그것은 과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사이코패스 같은 범인과 흡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④조연들은 히어로의 조언이나 복귀를 원하고 사방팔방 뒤진 끝에 다시 세상에 그를 불러낸다. ⑤히어로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사건을 해결한다 ㅡ 패턴이 진부하다면 내용으로 승부를 하자.



▶ 「Benzin」 / Rammstein


전작이 슬립낫(Slipknot)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레오파드』는 어쩐지 람슈타인(Rammstein)의 냄새가 난다. 더 묵직하고 더 탁하고 더 암울하고 더 정체를 알기가 어려운 개미지옥처럼 말이다. '스노우맨 = 눈사람'에서 '레오파드 = (레오폴드의) 사과'라는 조금 복잡해진 매개체도 등장하는데, 레오폴드의 사과는 당구공만 한 크기에 여러 개의 구멍이 뚫린 공이다. 그 중 한 구멍에서 뻗은 고리 모양의 철사를 잡아당기면 스물네 개의 바늘이 튀어나와……. 이 정신 나간 고문도구가 미니어처로도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것으로 주인공 해리가 멜 깁슨 흉내를 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로 명성이 자자했던 《리쎌 웨폰(Lethal Weapon)》에서 그가 보여준 '궁극의 어깨탈골 원상복구 필살기'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슬프게도, 나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한 건가? 『스노우맨』이 끝나도 계속 궁금하기만 했던 '곰팡이 제거반'(그의 이름은 스토르만이다)이 재등장하지 않은 게 아쉬운 사람도 나 혼자뿐인 거고? 크리포스의 위치를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고 벨만 경정을 미워만은 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든 것도 훗날 해리와의 서스펜디드 게임을 펼쳐 보이려는 작가의 의도였다고 생각하는 것도? ……『레오파드』는 전작에 비해 조금 더 뜨겁게 달아오른다(눈[雪]이 아니니까 그래도 된다). 토니 라이케를 사랑했던 레네처럼 감정에 맹목적인 여형사 카야, 오직 한 장면만을 위해 설정된 카야의 억지스럽지만 꽤 유용한 트라우마, 아버지에게 못 다한 것을 스노우맨에게 베푸는 해리. 거의 모든 것들이 ㅡ 조사(照射)각도는 라이트에 비해 넓지만 노출이 부족한지 과다한지는 찍어봐야 알 수 있는 스트로브처럼, 고리를 당겨봐야 알 수 있는 레오폴드의 사과처럼, 사방으로 복잡하게 날뛴다. Can the leopard change his spots?(예레미야서)





자꾸 『스노우맨』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작품에는 스노우맨을 모방한 연쇄살인은 물론이거니와 난항에 빠진 해리가 스스로 잡은 스노우맨(마티아스)에게 조언을 구하려 만나는 장면(스노우맨의 재등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ㅡ 조언이라고는 했지만 그저 해리 스스로 어슴푸레했던 부분을 재확인하는 취지에서 그를 만나길 원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과 ㅡ 당장은 보이진 않지만 껍질을 벗겨 조각내면 씨 바로 옆을 기어가고 있는 벌레가 튀어나온달까. 『스노우맨』의 군살 없고 섹시한 서늘함은 『레오파드』에 와서는, 여드름도 조금 나있고 광대에 주근깨도 약간 있는 예쁘장한 이국소녀로 변한다. 질소 섞인 다이아몬드가 노란색으로 탈바꿈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울하고 끈덕진 싸움 끝에 스노우맨에게 작별을 고하는 해리의 뒷모습에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The Great Gig in the Sky」를 선사하고 싶다. 죽음, 절규, 영속(永續)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기분이 드는 까닭이다(오래 전부터 내 휴대전화 벨소리였는데 아직도 전화가 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그러므로 『스노우맨』은 『레오파드』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ㅡ 눈사람과 돼지 가면이 표범과 사과로! 다만 으레 등장하는 연애전선만은 예외. 전작의 마지막에서 해리는 연인 라켈에게 말했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야.」 봐라, 어떻게 됐나? 초반에 해리가 노르웨이로 돌아오기 전 홍콩에서 썩고 있을 때, 그를 데려가려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기에 나는 다른 설득력 있는 주장이 나올 줄 알았고 해리 역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돌아가면 거짓말인 걸 알게 될 거라고 해리에게 외쳤다. 그러나 해리는 결국 노르웨이행 비행기를 탔고 그의 아버지는 정말로 오늘내일하고 있었다. 이 빤한 구성, 그리고 앞서 언급한 일련의 패턴에도 불구하고 『레오파드』가 무지막지하게 흥미롭게 읽히는 이유는 뭘까…… 그건 책을 읽으면서 찾아보라…… 자, 이제 마지막으로 『스노우맨』에 특별출연했던 스토르만의 대사를 써먹을 때가 되었다. 「그게 바로 곰팡이의 특징입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그 스스로가 해리의 집을 깨끗하게 해주고 나서 '앞으로는 자신을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쪽지를 남겼듯, 자신도 조용히 사라지겠다는 건가. 「하지만 있다는 거죠.」 ……Å faen.



▶ 「The Great Gig in the Sky」 / Pink Floy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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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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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를 소득수준으로 나눠보면 절대 빈곤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거의 모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발견된다. 지리적 위치 때문일까? 문화적 요인 때문일까? 아니면 빈곤한 나라의 국민이나 통치자가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이렇게 일차원적인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이 실수와 무지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어떨까. 대낮같이 밝은 남한의 밤과 칠흑 같은 북한의 밤을 보라. 북한의 평균 생활수준은 남한의 10분의 1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들의 수명까지 이쪽보다 10년가량 짧다는 점이다. 이러한 극명한 격차는 20세기 중엽의 경제 운용 방식 차이에서 벌어졌다. 북한 주민의 사유재산은 불법화되었고 시장 역시 금지됐다. 그들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자유를 제한받은 것이다. 사유재산이 없다는 것은 투자하거나 생산성을 높이기는커녕 현상 유지를 해야 할 인센티브를 느끼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다.(p.116) 남북한이 왜 이토록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는지를 문화적 요인, 지리적 요인, 혹은 무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있다. 1980년부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짐바브웨를 철권으로 다스려왔으며 자신과 장관의 월급을 200퍼센트로 인상한 바 있는 무가베 대통령이, 정부가 일부 지분을 보유한 짐바브웨 뱅킹 코퍼레이션(짐뱅크, Zimbank)이 과거 한 달 동안 5,000짐바브웨달러 이상의 잔고를 유지한 고객을 대상으로 연 복권 추첨 행사에서 10만 짐바브웨달러에 당첨된 일화는 그가 마음대로 복권까지 당첨될 수 있다는 것과 짐바브웨를 함부로 좌지우지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의 착취적 제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세계 불평등을 이해하려면 일부 사회가 왜 그토록 비효율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짜여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나라는 무지나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 때문에 잘못된다.

ㅡ 본문



덩샤오핑의 흑묘백묘(黑猫白猫)를 볼까.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주장 말이다. 그는 좌파를 축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좌파의 손에 축출되기도 했었지만 훗날 농업에 손을 대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물론 정치제도를 비롯한 사회전반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이 기존의 틀을 깬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그 분기점은 바로 마오쩌둥의 사망이라 할 수 있겠다). 세계를 둘러보면 생활수준의 엄청난 격차를 목격할 수 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착취적 정치 · 경제 제도와 포용적 제도의 차이, 그런 차이가 왜 일부 지역에서만 태동하는가에 대해 다각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착취적 정치 · 경제 제도가 경제성장과 늘 어긋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제도하의 성장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지속되지 못한다. ①지속적 성장은 혁신이 있어야 하는데 혁신은 반드시 창조적 파괴를 수반한다.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엘리트층은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어쩔 수 없이 단기에 그치고 만다. ②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이들이 사회 전체를 희생시켜가며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으므로 착취적 제도하의 정치권력을 탐내는 이들이 많아져 수많은 집단과 개인이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착취적 제도하의 사회에는 정치 불안을 초래할 만한 강력한 요인이 많아진다.(p.608) 한편 민주주의가 다원주의의 태동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베네수엘라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우고 차베스와 같은 독재 성향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도 그런 지도자만이 기성 엘리트층에 맞설 수 있다고 믿는 탓은 아닐까. 어쨌거나 가난한 사회가 부유해지려면 뭔가 근본적인 정치적 환골탈태가 필요한 법이다. 텍스트는 성공적인 정치 변혁을 향한 이양 과정이 전개되는 바로 그 시기와 이유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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