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 : 전진하는 진실 위대한 생각 시리즈 2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02년 10월 5일, 에밀 졸라가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히기 직전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아직 뚜껑을 닫지 않은 묘혈 앞에서 그를 떠나보내며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는 어리석음과 무지와 사악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모욕의 더미 위에 모두가 우러러볼 높다란 영광의 탑을 우뚝 쌓아 올렸습니다 (...)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의 운명과 그의 용기는 그를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적 양심의 위대한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졸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가해진 크고 작은 테러와 살해 위협으로 미루어보건대ㅡ 졸라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이라는 물증 없는 확신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또 드레퓌스 사건이 완결된 마무리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에밀 졸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일단 <나는 고발한다...!>라는 처절한 격문인데(그 외에 『목로주점』 정도가 있을까) 진실의 최종 관문을 보지 못한 채 수상쩍은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 자신과 드레퓌스, 그를 지지했던 시민들 그리고 진실을 원했던 이들에게 내려진 불행임에 틀림없다. 『전진하는 진실』은 드레퓌스 사건의 내막,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비롯한 일련의 글들, 그의 생전 인터뷰와 사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으레 [졸라 = 드레퓌스 사건]이란 그림이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만큼 언제나 세간에서는 드레퓌스는 단지 희생자일 뿐이며 진정한 주인공은 졸라 자신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명을 쓴 드레퓌스 대위가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면 졸라마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한 프랑스 장교가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는 무관 앞으로 보낸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포병대 대위는 필체가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그리고 독일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것 때문에) 참모본부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게 된다. 공공연하게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시절 언론마저도 이를 묵인하는가하면 한편으로는 반유대주의와 드레퓌스의 혐의에 대한 논란을 부추겼다. 졸라는 1897년 <르 피가로(Le Figaro)> 지에서 일부 언론을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저열하다'며 그들이 추잡스런 신문을 팔기 위해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들의 신문에는 독물이 섞인 강물이 넘쳐흘렀다. 어쩌면 그런 게 공정성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여기저기에 찔끔찔끔 소심한 평을 하는 것으로 그치면서, 고귀한 가치를 소리 높여 외치는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다니, 단 한마디도!」ㅡ <르 피가로>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일간지로 중도우파 성향의 보수 색채를 띤 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이며, 당시 드레퓌스의 편에 섰지만 보수 독자들의 항의와 구독 철회로 인해 판매 부수가 2만부까지 급감했다(그러나 반드레퓌스파로 돌아서지는 않았다). 졸라의 이 기고문이 실리기 하루 전, 당시 내각의 수장인 쥘 멜린(Jules Méline)은 의회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 중에 「드레퓌스 사건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라고 발언한 터였다. 하지만 지난한 세월이 흐른 뒤 진실은 어렵게 밝혀지고 만다. 졸라 역시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든 시작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 1898년 1월 13일자 <로로르> 지 1면에 실린 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당시 졸라가 팸플릿으로 제작한 기고문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국의 2013년이 끝나갈 때쯤부터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릴레이를 떠올리게 한다. 한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된 이 대자보는 철도 민영화, 불법 대선 개입, 밀양 송전탑 사태 등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청년들을 향한 외침이었다ㅡ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졸라가 꾸짖은) 언론과 같이 당시에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찢는 자들과 함께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졸라는 글에서, 학생들을 들고일어나게 했던 고귀한 열정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청년들은 언제나 불의에 분노하며 흉포하고 강한 자들과 맞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박해받은 이들을 위해 싸웠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행복한 사람과 불우한 사람의 운명의 무게를 그릇되게 재는 세상의 불공평한 저울 위에 그대들의 뜨거운 젊음에서 우러나오는 항의를 올려놓기 위해서인가? (...) 아,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그대들의 앞에 놓인 고귀하고 원대한 일들을 잊지 말기를!」 그리고 뒤이어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프랑스가 쓰레기 같은 언론이 발표하는 거짓 정보들로 넘쳐나고 있다고 꼬집었다ㅡ 「프랑스여, 그대의 여론은 (...) 권력의 테이블을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의 탐욕스런 야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 (1897. 12. 14)


접힌 부분 펼치기 ▼

 

청년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학생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분노한 양심의 소리를 만천하에 외치고자 하는 갈망에 휩싸인 채, 분노와 열정의 이름으로 시위를 하는 그대들은 무리를 지어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인가?

누군가가 권력을 남용한 데 대한 항의를 하러 가는 것인가? 삶의 일상적인 비겁함과 정치적 타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순수하기만 한 그대들의 마음속에서 아직 불타오르는 진실과 공정성에의 갈망을 그네들이 모욕했기 때문인가?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행복한 사람과 불우한 사람의 운명의 무게를 그릇되게 재는 세상의 불공평한 저울 위에 그대들의 뜨거운 젊음에서 우러나오는 항의를 올려놓기 위해서인가?

혹은, 과학의 붕괴를 선언하면서 그대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오류투성이의 과거로 되돌리려고 하는 편협한 광신자들에게 야유를 보내고, 인류의 관대함과 자주성을 소리 높여 외치려 달려가는 것인가? 아니면 비겁하고 위선적인 인물의 창문 아래에서, 다음 세기의 미래에 대한 불굴의 믿음을, 정의와 사랑의 이름으로 세상의 평화를 실현하게 될 그대들의 믿음을 큰 소리로 외치기 위해서 달려가는 것인가?
   ㅡ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야유를 퍼부으러 몰려가는 것이오. 평생 동안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몸 바쳐 일해 온 끝에 고귀한 대의를 당당하게 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조국 프랑스의 영예를 위해 진실이 밝혀져 과오가 바로잡히기를 바라는 어떤 노인에게 항의하러 가는 것이오!1

아! 나도 젊었을 때 그대들의 카르티에라탱2을 본 적이 있다. 젊음의 자랑스러운 열정과 자유에 대한 열망, 이성을 짓누르고 영혼을 억압하는 무지한 폭력에 대한 증오로 요동치던 그곳! 제정 하에서는 권력에 맞서며 ― 때로는 부당하게 행동할 때도 있었지만 ㅡ 언제나 자유로운 해방 정신에의 추구로 넘쳐나던 그곳! 그곳의 젊은이들은 튈르리 궁3에 아부하던 작가들에게 야유를 보냈고, 수상쩍은 교육을 하던 교수들에게는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암흑과 독재의 편에 서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분연히 일어서 맞서 싸울 줄 알았다. 모든 희망이 현실이 되고, 내일은 반드시 이상적인 국가의 승리가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던 스무 살, 그 시절이 지녔던 아름다운 열정의 신성한 불길이 타오르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학생들을 들고일어나게 했던 고귀한 열정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청년들은 언제나 불의에 분노하며, 흉포하고 강한 자들과 맞서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박해받은 이들을 위해 싸웠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압제에 시달리는 민족을 위해 다 함께 거리로 나섰다. 폴란드를 위해 그렇게 했고, 그리스를 위해 그렇게 했다. 청년들은 무지한 군중이나 무자비한 독재자의 폭력 아래 고통 받고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들고일어났다. 카르티에라탱이 불타오른다고 할 때면, 언제나 그 뒤에는 오직 패기와 열정만으로 젊은 정의의 횃불을 피워 올리는 청년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라도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마치 강물이 흘러넘치듯 너도나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오늘날 청년들이 들고일어나는 이유가, 반역자 무리에 의해 위협받는 조국, 그 조국이 승전국인 적국에 까발려졌다는 위기감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묻고 싶다. 사물에 대한 예리한 직관, 진실한 것과 정의로운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아는 감각과 순수한 영혼을 지닌 그대 청년들에게서 찾지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정치적 삶에 처음 눈뜨기 시작했으며, 아직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은 올곧고 선한 이성을 지닌 젊은이들이 아닌가. 오랜 음모와 술책으로 타락한 정치인들, 직업을 핑계로 온갖 타협에 익숙해져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 기자들, 그런 사람들이 지극히 뻔뻔한 거짓말에 눈감고, 명백한 진실을 모른 척 외면하는 것은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순수하고 순박한 심성을 지닌 청년들이 터무니없는 과오들 속에서 환한 태양처럼 빛나는 투명하고도 명백한 진실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다니, 젊은이들이 벌써 그렇게 타락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알고 보면 이보다 간단한 이야기도 없다. 한 장교가 유죄판결을 받았고, 아무도 재판부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확실하다고 믿었던 증거 위에서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사람과 또 다른 몇몇 사람이 그 판결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마침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재판부는 공개적으로 밝혀진 유일한 증거인 예의 그 증거에 의거해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앞서 말한 몇몇 사람들은 죄수의 형4이 그 증거를 조작한 사람을 고발했다고 밝혔다. 그 형은 가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첫 번째 소송의 재심을 이끌어 낼 새로운 소송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완벽히 명백하며 정당하고 합리적이지 않은가? 여기 어디에 반역자를 구하기 위한 술책과 음흉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건가? 우리는 반역자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이 아닌, 죄를 지은 자가 그 죄의 대가를 정당하게 치르기를 바랄 뿐이다. 그대들은 반역자를 반드시 처벌하게 될 것이다. 이제 진범을 잡아 그대들 앞에 무릎 꿇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

약간의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대체 무슨 다른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은 반유대주의 같은 생각일랑 부디 떨쳐 버리기를. 광포한 편집광처럼 유대인의 음흉한 음모론을 운운하며, 유대인들이 돈으로 매수한 기독교인을 유대인 대신 악명 높은 감옥에 집어넣으려 한다고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주장들인가 말이다. 터무니없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들은 하나둘씩 모두가 거짓임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모든 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양심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문제는 모든 사법적 오판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서서히 위압적으로 그 세를 더해 간다는 데 있다. 모든 문제가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법적 오판은 살아 움직이는 힘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심적인 이들은 진실에 매료되고 사로잡혀 점점 더 진실을 찾는 일에 자신을 내던지게 된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신들의 재물과 목숨까지 걸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있을 수 없다. 나머지는 비열한 정치적 음모와 종교적 책동이며, 중상과 욕설이 넘치는 진흙탕일 뿐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마음속에서 인류애와 정의에 대한 생각이 한순간이라도 더럽혀진다면 그대들은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12월 4일에 열린 프랑스 의회는 '가증스러운 캠페인을 주도함으로써 공공의 양심에 혼란을 조장하는 선동가들을 규탄하기 위한' 의사일정을 확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나는 내 글을 읽게 될 다음 세대의 사람들을 위해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러한 표결은 관대함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수치이며,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저들이 '선동가들'이라고 규정한 이들은 양심과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이 고문 속에서 죽어 가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는 애국적인 신념으로 사법적 오판이 저질러졌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세상에 폭로하여 바로잡고자 했다. 저들이 '가증스러운 캠페인'이라고 지칭한 것은, 양심적인 이들이 외치는 진실과 정의의 소리이자,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프랑스를 인류애와 자유와 정의를 구현했던 나라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 의회는 분명 범죄를 저질렀다. 학교의 젊은이들까지 타락하게 만들어, 저들에게 속아 판단력을 상실한 채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청년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용감하며 가장 고귀한 것들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니, 이게 어디 있을 법이나 한 일인가!

12월 7일, 상원에서 열린 회의 후에 언론은 무슈 쉐레르-케스트네르가 무너져 내렸다며 떠들어댔다.5 그렇다, 그가 무너져 내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마음과 영혼 모두가! 우리의 소중한 공화국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가 느꼈을 두려움과 고뇌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가 평생 선의의 투쟁을 해 오면서 공화국을 위해 쟁취하고자 했던 모든 것들, 무엇보다 자유가 그 첫 번째였고, 충성심과 정직성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용기 같은 남성적인 덕목들.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인물들 중 하나이다. 제2제정 시대를 거치는 동안 그는 독재 권력 하에서 살아가는 민중이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불의와 부당함 앞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열기를 억누르며 지내는 것을 똑똑히 보아 왔다. 그는 또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패배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패배의 원인이 전적으로 전제적인 어리석음과 망동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후, 그는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열렬하게 패망의 잔해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프랑스로 하여금 유럽에서의 과거의 지위를 다시 차지하게 하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그는 우리 공화주의 프랑스의 영웅적인 시대를 치열하게 겪어 낸 사람으로서, 전제 군주제를 영원히 몰아내고 다시 자유를 되찾은 데 대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확고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굳게 믿고 있을 터였다. 여기서 자유란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각자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인간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되찾을 수도 있고, 또다시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오늘날 그의 주위의 그의 내면에는 폐허가 된 진실과 정의의 잔해만이 존재하고 있다. 진실을 갈망하는 것은 죄악으로 치부되었다. 정의를 원하는 것도 죄악이었다. 무시무시한 독재정치의 망령이 다시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입에는 또다시 엄청나게 단단한 재갈이 채워졌다. 오늘날 공공의 양심을 짓밟는 것은 시저의 군화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이들을 규탄하는 의회의 의원들 모두인 것이다. 입을 다물라니! 저들은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입을 강압적으로 다물게 하면서, 군중을 선동해 그들로 하여금 소수의 정의로운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자유로운 논쟁에 대해 이토록 끔찍한 억압이 조직적으로 행해진 적은 없었다. 또한 수치스러운 공포심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면서 용감하기 이를 데 없던 사람들도 점차 비겁자가 되어 갔고, 사람들은 매국노나 반역자로 낙인찍힐 것이 두려워 더 이상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소리 내어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신을 지키던 몇몇 신문들마저 황당한 소문들로 인해 흥분한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앞에서 바짝 엎드린 채 몸을 사렸다. 지금까지 그 어떤 민족도 그들의 이성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이처럼 혼란스럽고 혼탁하며 불안한 날들을 지냈던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무슈 쉐레르-케스트네르로서는 오랫동안 그가 보여 주었던 충직함과 위대한 과거가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가 아직 인간의 선함과 공정성을 믿고 있다면, 그건 그가 확고한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영예와 노년의 안락한 삶을 위태롭게 한 대가로 3주 전부터 매일같이 진흙탕 속에 내동댕이쳐졌다.6 그처럼 올곧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정직성이 박해를 당하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절망은 없을 것이다. 저들은 그의 마음속에 있던 내일에 대한 믿음을 살해했으며, 그의 희망을 독살시켰다. 그 때문에 죽게 된다면 그는 이렇게 탄식할 게 분명했다. 「이젠 정말 끝이야. 이젠 아무런 희망도 없어. 그동안 내가 이루었던 선행들은 나와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리는 거야. 이렇게 캄캄하고 텅 빈 세상에서는 도덕은 한낱 말장난에 불과한 거야!」

저들은 애국심을 모욕하기 위해 프랑스 의회의 마지막 알자스로렌 출신 상원의원인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가장 의심 많은 사람들의 불안마저 잠재울 수 있는 인물을 매국노, 반역자, 군부를 모욕한 파렴치한으로 취급하다니! 어쩌면 그는 자신이 알자스 출신이라는 사실과 열렬한 애국자로서의 명성이 정의의 수호자라는 까다로운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선의를 보장해 줄 수 있으리라고 과신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이 일에 발 벗고 나선 것은, 군부와 조국의 명예를 위해 신속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일을 앞으로 몇 주간 더 질질 끌면서, 진실을 은폐하고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애써 보라. 그러면 그사이 그대들은 온 유럽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을 것이며,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최하위 국가가 되어 있을 것이니!

아니,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정치인들과 종교계 인사들은 그와 같은 경고를 조금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학생들은 무슈 쉐레르-케스트네르에게 군부를 모욕하고 조국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죄목을 씌워 반역자와 매국노라는 오명과 함께 거친 야유를 퍼붓는 광경을 전 세계에 보여 주고 있다.

물론 나는 길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일부 청년들이 우리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거리를 소란스럽게 하는 백여 명의 과격파 젊은이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는 만여 명의 성실한 학생들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음도 알고 있다. 하지만 백 명의 과격파만으로도 이미 너무 많은 게 아닐까? 아무리 소수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이 시각에 카르티에라탱에서 그런 소요가 일고 있다니 이 얼마나 섬뜩한 징조인가!

그러니까 반유대주의자 청년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유대주의라는 독이 이미 젊은 두뇌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청년들의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가 그들의 판단력마저 흐려 놓은 것인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머지않아 열리게 될 20세기를 위해 지극히 안타깝고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권선언문이 발표된 지 백 년이 넘은 지금, 관용과 해방의 지고한 행위가 있은 지 백 년이 넘은 지금, 더없이 가증스럽고 어리석은 광신자들처럼 다시 종교전쟁의 시대로 역행하다니! 그것도 어떤 무리들이 그들의 정치적 입장과 탐욕스런 야심을 지키기 위해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 세기에는 더욱더 찬란하게 피어나기를 꿈꾸는 인권과 자유의 구현을 위해 태어나고 자라나야 할 청년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모두가 기다려 온 다음 세대를 위한 일꾼들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반유대주의자라고 칭하면서 모든 유대인들을 말살하는 것으로 새로운 세기를 열려 하다니! 그것도 우리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종교를 가진 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 평등과 형제애가 넘치는 나라에 그런 식으로 첫걸음을 내디딜 수는 없지 않은가! 진정 젊은이들이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면 우리 모두는 비통한 심정으로 흐느껴 울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적인 행복에의 기대와 모든 희망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아,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그대들의 앞에 놓인 고귀하고 원대한 일들을 잊지 말기를! 우리는 그대들이 미래의 일꾼으로서, 저물어 가는 세기가 던져 놓은 진실과 공정성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다음 세기의 초석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그대들보다 앞서 살아온 우리 기성세대들은 그대들에게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의문과 모순과 의혹 들을 남겨 놓고 떠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그 어느 세기보다도 열정적으로 진실을 향한 노력과 정직하고 견고하게 수집한 수많은 역사의 기록들 그리고 그대들이 자신들의 영예와 행복을 위해 계속 쌓아 올려야 할 거대한 과학의 탑의 기반 또한 함께 남겨 놓았음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대들이 더욱더 너그럽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는 젊은 세대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일에 온전히 쏟아붓는 노력으로 우리를 한층 더 넘어설 수 있기를. 마침내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아래 넘치는 삶의 기쁨을 솟아나게 할, 인간과 대지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위해. 그리하면 우리는 그대들에게 이 자리를 기꺼이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우리를 계승하여 우리가 꿈꾸었던 것들을 실현해 주리라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들에 만족하면서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나 죽음의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그대들의 아버지들이 겪었던 고통과, 지금 그대들이 누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던 끔찍한 전투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를! 지금 그대들이 자유롭다고 느끼며 마음대로 오갈 수 있고, 거리낌 없이 언론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어떤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들의 아버지들이 그 모든 것을 위해 자신들의 지혜와 피를 바친 덕분인 것이다. 독재 정권하에서 태어나지 않은 그대들은 매일 아침 주인의 군홧발에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독재자의 칼날과 사악한 심판자가 내리치는 무시무시한 철퇴를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의 아버지들에게 감사하며, 거짓에 환호하거나 무지한 폭력과 광신자들의 불관용과 출세주의자들의 탐욕에 장단을 맞추며 그들과 함께 춤추는 죄악을 저지르지 말길 바란다. 이제 독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언제나 정의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살아가는 동안 그대들의 마음속에서 정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한순간이라도 흐려진다면, 그대들은 온갖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의 우리의 '민전법'7에 나오는 정의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법전에서 말하는 정의는 사회적 관계만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 정의가 존중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정의'가 있다. 즉,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음(재판부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을 전제하는 것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도 결백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권리를 추구하는 그대들의 뜨거운 열정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근사한 기회가 아닌가? 삭막한 이해관계와 인간관계로 뒤얽힌 추잡한 싸움판에 아직 뛰어들지 않은 그대들이 아니라면 누가 분연히 일어나 정의를 행할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아직 수상쩍은 어떤 일에도 끼어들거나 연루되지 않은 채 오직 순수한 선의로써 소리 높여 말할 수 있는 그대들, 청년들이 아니라면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인간성과 관대함을 겸비한 젊은이들이 되기를! 설사 우리 생각이 틀리더라도 부디 그대들이 우리와 함께해 주기를! 우리가 그대들을 향해, 아무 죄 없는 한 사람이 끔찍한 형벌을 받고 있으며, 분노에 찬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가혹한 형벌 앞에서 단 한순간만이라도 오판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가슴이 미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릴 수 있기를. 물론, 도형장의 간수라면 냉담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대 청년들이여, 아직 눈물 흘릴 줄 알고, 불행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세상사에 민감한 그대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어리석은 증오심의 희생양이 된 한 무고한 시민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알면서, 어찌하여 그를 구해 내어 그의 결백을 밝히고자 하는 기사도적인 꿈을 꾸지 않는 것인가? 그대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 숭고한 모험에 뛰어들 것이며, 그대들이 아니라면 그 누가 위험하고도 당당한 대의를 위해 이상적인 정의의 이름으로 무지한 민중과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그대 젊은이들이 나서서 해야 할 관대하고도 열정적인 일들을 나이 든 우리들이 대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디로 가는가, 청년들이여! 거리를 휘젓고 다니면서, 그대들의 찬란한 스무 살의 용맹함과 희망을 어리석은 분쟁으로 얼룩진 진흙탕 속에 내팽개치려 하는 학생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ㅡ 우리는 인류애와 진실과 정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1 알자스 출신 상원의원 쉐레르-케스트네르(Auguste Scheurer-Kestner)에게 야유를 보내는 민족주의자 학생들의 시위와 그를 향한 욕설과 위협을 말한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확신하고 그의 재심을 위해 노력한 결과 이 '노인'은 온갖 비난과 모진 모욕을 감수해야 했고 상원 부의장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2 Quartier Latin, 파리 5구와 6구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대학가. 1968년 학생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3 Palais des Tuileries, 파리 루브르궁 서편, 루브르궁의 남북 갤러리 사이에 있었던 궁전.

4 마티외 드레퓌스(Mathieu Dreyfus),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형으로, 공장을 운영하던 실업가였던 그는 동생에게 저질러진 '사법적 오판'을 확신하고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동분서주한다.

5 쉐레르-케스트네르가 상원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라는 사실과 그 사실을 확신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거센 비난과 무관심뿐이었다.

6 그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상원 부의장직의 재임 요청을 거부당했다.

7 나폴레옹 1세 때 제정, 공포된 프랑스 민전법('나폴레옹 법전'이라 불린다). 법 앞에서의 평등, 취업의 자유, 신앙의 자유, 사유재산의 존중, 계약의 자유 등 프랑스혁명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근대 법전의 기초가 되었다.

 

펼친 부분 접기 ▲






졸라는 1898년 <로로르(L'Aurore)> 지에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를 기고한다(30만 부 판매)ㅡ 원래는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이지만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획기적인 타이틀을 붙였다. 그러고는 군사법원과 판사들의 선입견 그리고 불공정한 판결에 대해 토로하며 다음과 같은 기판력(旣判力)의 모순을 추궁했다ㅡ 기판력은, 확정판결을 받은 사항에 대해서는 후에 다른 법원에 다시 제소되더라도 이전 재판 내용과 모순되는 판단을 할 수 없도록 구속하는 소송법적 효력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다. [①드레퓌스는 군사법원에 의해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 ②따라서 그는 유죄이다. → ③그러므로 군사법원은 그가 무죄임을 선언할 수 없다. → ④그런데 에스테라지(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은 곧 드레퓌스의 결백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였으니 드레퓌스 대위의 복권은커녕 재심조차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또한 당시 국방부장관 등부터도 졸라에게까지 명예훼손의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등 정의가 난도질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대위 하나가 순식간에 군사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군적 박탈을 당하고, 또 멀리 유배에 보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재판의 파기가 선언되자 드레퓌스 대위는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같은 해 재차 유죄를 선고받고(유죄 판결을 두 번씩이나 말이다) 정상참작과 함께 10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또다시 1년 뒤, 당시 법무부장관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반역죄를 제외한 모든 범죄 사실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는 사면법에 관한 법안을 상원에 제출한다. 그러나 이것은 드레퓌스 대위의 완전한 복권이 아니지 않은가. 진실과 정의는 무척이나 더디게 찾아왔다. 6년이 지난 1906년, 드디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이미 졸라가 죽은 뒤였다). 아나톨 프랑스가 졸라의 장례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저들이 저지른 사악한 행위들을 알게 되었고 기어이 진실은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ㅡ 그러나 보라, 적대적 시위가 벌어질 것을 염려해 졸라의 장례식장에조차 참석하지 못할 뻔했던 드레퓌스는 1908년 졸라의 유해를 국립묘지 팡테옹(Panthéon)으로 이장하던 때 보수 일간지 <르 골루아(Le Gaulois)> 지의 편집인이 쏜 총에 맞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실천적 지식인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에밀 졸라는 1900년 드레퓌스의 사면법이 가결되기 직전 그와 처음 만났을 정도로 둘은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일에 침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첫걸음을 떼었으니 또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며, 언젠가는 결정적인 마지막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사실이다.」





▼ 1898년 3월, 졸라의 지지자들은 <나는 고발한다...!>의 발표를 기념하여 메달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모두 1만 683프랑이 모금되어 제작된 순금으로 만들어진 이 메달은 2천여 명의 기부자 명단이 적힌 붉은색 가죽 장정의 노트와 함께 졸라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는 아직 승리자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이르다는 소감을 밝혔다(훗날 졸라의 부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 앞면에는 졸라의 초상과 함께 <에밀 졸라에게 바치는 경의>라는 문구가, 뒷면에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에밀 졸라. 1898년 1월 13일>이 새겨져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뭐, 좀 키치할 수도 있고 동어반복일 수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숨겨진) 아주 작은 코드를 언급하지 않은 것에서(놓친 것일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우리를 미치도록 궁금하게 만드는 것들을 설명해보려는 시도는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물론 우리 역시 매트릭스에 갇혀있다면 아무리 이런 논의를 해도 그 기계들은 코웃음을 흘리고 있을 테지만)ㅡ 토머스 앤더슨/네오와 사이퍼(배신자)가 공존하는 이 미망(迷妄)의 현실세계에서 말이다. 이를테면 네오의 매트릭스 안에서의 이름 토머스/예수의 부활에 의구심을 갖는 제자 '의심하는 토머스', 탯줄 같은 케이블을 뽑아내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네오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육된다'는 점에서의 처녀 잉태, 죽은 네오를 부활시키는 트리니티/trinity(삼위일체), 그들이 타고 다니는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호에서부터 매트릭스 안에서 고치처럼 웅크린 자들의 '인간 발전소'와 같은 모습, 이러한 기독교적 명제와 더불어 불교적 교리까지(휘어지는 숟가락 등). 물론 이것은 영화에 집어넣은 주제들 중의 일부에 그친다. 「나는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내가 이걸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나의 뇌에다 이게 아주 부드럽고 맛있다고 말해 준다는 걸 알고 있다고. 9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에 내가 깨달은 게 뭔지 알아? 무지가 바로 행복이라는 거야.」 스미스와 교섭하는 사이퍼의 대사다. 만약 우리의 뇌가 나머지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커다란 통에 담겨있고 컴퓨터가 전자 충격을 뇌에 보내 이런저런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실제 경험을 한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고, 또 사이퍼의 배신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자유를 갖고 있으려면, 우리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자유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면(만약 당신에게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할 자유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지, 자유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227) 이 말은 맑스가, 노동과 그들이 생산하는 자본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자들은 작업 시간과 작업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용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하는데도 그들 자신은 강제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유 시장'에서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팔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오/사이퍼의 선택을 두고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네오마저도 자발적으로 빨간 약을 골랐다고는 자부할 수 없다. 만약 예언자(오러클)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면 그 미래 역시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나.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본다는 것은, 그것이 발생한 동시에(이미 미래를 알고 있으므로) 발생하지 않았다(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ㅡ 게다가 미래가 이미 정해져있다면 모피어스를 배신한 사이퍼의 결심 또한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이 세계가 변화할 뿐이지 그것이 진화나 진보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변화’라는 범주 안에 진화와 진보가 속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수상쩍게 생각한다……. 지젝에 의하면 엘리베이터에 있는 닫힘 버튼은 실제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고물이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에게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높이는 데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기여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곳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결국 문은 닫힐 것이므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빨리 움직이도록 어떠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 참여'에 빠져있다.(p.315)




덧) 영화는 1999년에 만들어진 단 한 편으로 끝났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네오의 단 한 마디로 요약된다. 「Wow……!」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골적으로 '우연'에 집착한 「우연 여행자」를 시작으로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노골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개인적으로 내 취향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인데, 그에 반해 「하나레이 해변」이나 「시나가와 원숭이」는 꽤 괜찮았다. 하나레이 해변에서 상어에게 오른쪽 다리를 물어뜯겨 죽은 아들의 어머니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하나레이 해변」은 유독 그 색감 때문인지 시종일관 우울한 기운이 틈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ㅡ 막바지에 다다라 '외다리 서퍼'의 목격담이 등장해도. 주인공 사치(어머니)는 하나레이에 집착하고, 서핑을 하려는 젊은이 두 명과 조우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지만 외려 어드바이스를 받아야 할 것은 그녀 자신이며, 아무것도 결말지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이 나고 만다. 「시나가와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여자가 있다. 우여곡절 끝에 드러난 진실은 원숭이가 그녀의 집에서 이름표를 훔쳐갔기 때문이라는 것. 「하나레이 해변」과는 달리 일정 부분 매듭이 해소된 감은 있지만 이쪽 역시 다른 단편들과 같이 기이하게만 보인다. 하루키의 소설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식이다. 불가해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벌어져도 당하는 쪽은 여간해서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에 천착해 제 삶을 팽개치기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어떻게 해서든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겪어 온 삶에 있어 방관자인 동시에,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서도 (무지막지할 정도로) 철저하게 일상의 공기에 그 흐름을 맡긴다. 소위 하루키 문학(이라고까지 부를 건 없지만)은 메타포를 숨겨 놓든 그렇지 않든 겉으로는 무미건조한 것이며 그 속에는 심리적 결핍, 무심함(과 책무) 그리고 서브컬처에서 오는(혹은 그쪽을 향하는) 특질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극한 상황에 도달하면 다시 돌아온다는(혹은 이 세계의 메커니즘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극즉반(極則反)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지 오웰 : 영국식 살인의 쇠퇴 위대한 생각 시리즈 6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폴레옹(『동물 농장』)과 빅 브라더(『1984』)에만 급급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오웰이 썼던 소설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글들도 속속 번역되어 왔다. 이 『영국식 살인의 쇠퇴』도 그런 맥락 위에 서 있는데 과거 이런저런 에세이를 묶은 책에 포함되었던 글이 중복되기도 한다(어쩔 수 없는 일일까)ㅡ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글을 이미 여러 번 읽은 셈이며, 심지어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글들은 그 성격이 일관성 있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켜 중구난방의 편집을 자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살인의 쇠퇴』를 읽는 자들의 공통된 이유는 (장담하건대) 저자가 오웰이라는 점일 터다. 그렇다면 왜 오웰인가? 그 연유는 특히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의 영향이 지배적임에 틀림없다. 오웰은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인간들을 그림으로써 독자들에게 투쟁의 대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이 세계를 둘러싼 현상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짚어내는 것에 자질이 있었으며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까지 터득했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세상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누가' 알려줄 수 있는지를, 소위 문학성이 담보된 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환멸에의 각성을 꾀하도록 도왔다(그중에서도 《트리뷴》지에 썼던 고정 칼럼 <As I Please(나 좋을 대로)>는 ㅡ 말 그대로 '오웰 마음대로' ㅡ 짧은 호흡으로 보다 큰 울림을 선사한다). 또한 식민지 경찰과 부랑자, 접시닦이 등을 거친 그의 손은 '예술이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나는 이 책에 대해서(적어도 오웰의 글 자체에 관해서만큼은) 이러쿵저러쿵하며 평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오웰'이라는 단어 자체를 읽어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치킨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흘리개 적 '통닭'이었던 것이 '치킨'으로 불리고 기름기 좔좔 흐르던 포장지는 피자 박스처럼 변했지만(물론 어디선가는 '옛날 통닭'이런 것을 지금도 튀겨주기는 한다), 닭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1인 1닭'을 외치는 이들도 있는 만큼 조류 독감과 같은 재앙이 닥쳐올지언정 이런 닭에 관한 탐구 역시 존재하질 않나ㅡ 실제로 나는 군 시절 조류 독감이 한국을 휩쓸었을 때 점심 식단으로 '1인 1닭'을 몸소 실천한 바 있다(광우병 파동 때도 마찬가지). 담배 한 개비 피우고자 아파트 동(棟) 밖으로 나와 치킨 배달 오토바이와 마주쳤을 때의 부러움과 돌아나오는 그의 등짝 뒤로 엘리베이터에 그득한 기름 냄새의 황망함. 나도 치킨 한 마리 시켜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 찰나, 집에 모셔둔 쿠폰이 몇 장 남았는지를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헤아리고 있는 쓸쓸함(치킨게임 ㅡ chicken에는 '겁쟁이'란 뜻이 있다 ㅡ 으로 닭을 모독하는 자, 그대에게 화 있을진저!). 책은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고 치킨의 역사와 종류, 현주소를 탐방하기도 하며 치킨 산업의 뒤통수를 보여주기도 한다ㅡ '아버지가 월급날 사오셨던 통닭'이란 개념이 환상일지도 모른다면서(그러나 그것은 소위 '양념통닭'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양념통닭이란 것을 먹으면서 이런 소스는 대체 누가 만들어낸 걸까, 하며 발을 동동 굴렀던 적이 있다. 위에는 땅콩 가루도 담뿍 흩뿌려진 따끈따끈한 악마의 메뉴 말이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나 역시도 양념을 손에 묻히기가 싫어져 후라이드치킨(언제고 '프라이드'라 부르는 우를 범할 수는 없겠다)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제는 양념소스를 따로 갖춘 메뉴들이 자리를 잡았다. 파를 올리는가하면 기존의 달착지근한 양념이 아니라 새로 개발된 요상한 소스도 있고, '강정'이나 '순살'로 변신하기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요즘 후라이드라 부르는 어지간한 치킨은 '크리스피 치킨'이란다ㅡ 바삭함을 뜻한다고. 그러면서 90년대 초반 KFC에서 출시한 것을 시작으로 BBQ, BHC, 치킨시장의 새로운 강자 네네치킨(튀김옷이 과하지 않은 것이 포인트)으로 이어지는 애통의 역사 ㅡ '치맥' 개념의 등장까지 ㅡ 를 설파한다. 이른바 '통큰치킨'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나는 거기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물론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기다란 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뻣뻣하게 기다려 손에 넣었을 때 이것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며 자위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값싼 것이라도 우리가 거실의 다 헤진 가죽 소파에 앉아 전화번호 두드려가며 시켜 먹던 그 맛도 아닌데다가 ㅡ 통큰치킨은 그 자체가 일종의 '보급형'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ㅡ 그간 익숙해져 있던 '배달 치킨'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소상공인과 소비자, 소위 상도덕, 극에 달한 치킨업계의 경쟁에 있어 이례적인 대동단결의 결과 통큰치킨은 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당시 인터넷상에서는 '통큰치킨 장례식'이라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인 김수영의 양계(養鷄) 경험까지 들쑤신 이 책은 어쨌거나 치킨의 역사를ㅡ 양계농민, 프랜차이즈 치킨점, 예비 창업자에 이르기까지를, 현재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벌어질 애환을 섞어 다채롭고도 씁쓸하게 다룬다. 치킨은 지금, 야구장에서 맥주 캔으로 탑을 쌓아가며 소비된다. 혹은 각 가정에서ㅡ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기분이 나쁘니까 전화통을 붙들고 치킨을 주문한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치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치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치킨을 먹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누가 만들고 누가 키우는가 하는 문제, 우리가 야식이라는 이름 아래 곧잘 접하게 되는 치킨이 누군가에게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바로 그 문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