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홀로틀 로드킬
헬레네 헤게만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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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서평처럼 <확실히 완전히 개운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Ctrl +C>와 <Ctrl +V> 만으로는 세상만사가 탈 없이 흘러가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이기주의적이고 무신경한> 열일곱의 작가는 본문에서 이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혹은 그렇지만, 이 문제는 여기서 가차없이 빼겠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줄거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왜 이다지도 극찬을 받고, 미프티는 (맙소사!) 세상의 모든 원죄를 혼자서 짊어진 얼간이가 되었는가에 대한 감흥은, 책 겉표지의 새빨간(혹은 핏빛의) ㅡ <핑크색>이나 <분홍색>으로 묘사하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이다 ㅡ 아홀로틀로 대신하자.

나는 죽었다 깨도 미프티처럼은 될 수 없다. 심하게 탈골된 언어를 구사하며 마치 카타콤catacomb에 갇힌 로마 병사처럼 기는 그녀의 삶은, 당최 이해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프티는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限りなく透明に近いブルㅡ』의 미군기지 근처에 사는 소녀로 대체되어도 무방하다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처럼 읽었다면 과장일까?(그렇다, 고 나는 생각한다) 미프티의 트라우마가 진짜이든 그렇지 않든 그녀를 설명하는 모든 단어 앞에는 수식어로서 <탈脫>이나 <반反>을 붙이는 것도 좋겠다. 『아홀로틀 로드킬』은 성장 소설보다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불온서적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이렇게 일관되게 악마적일 수는 없다!) ㅡ 이것은 다양한 의미로 그렇다는 얘기다.


 

왜 다른 사람들은 너의 염병할 시야에
단 한 발짝도 들어설 수가 없는 건데?
ㅡ 본문 p.43


그래. 우리(나)는 <너(미프티 혹은 헤게만)의 염병할> 시야에 단 한 발짝도 들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이야기는 좀처럼 진행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는 인간은 자신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조르주 바타이유의 『문학과 악』)는 말처럼. 알 수 없는 어긋남, 통찰력을 잃고 더쳐가는 상처들. 이것들은 작위성이나 상투성, 비개연성이란 말로는 쉬이 해결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봉합>이 안 된다는 거다. 헤게만의 연출력은 평면적이지만, 붕괴, 그 직전이다. 그래서 미프티에게 유토피아란 없다. 오로지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우주적으로 변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보편의 문턱을 넘어 버린, 착한 어린이는 될 수 없는, 반추상의 구어체로 이야기하는 미프티만 남는다 ㅡ 나는 분명 『아홀로틀 로드킬』이란 <책>을 읽었음에도, 에로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게다가 미프티는 좀먹은 행려병자 꼴을 하고 <자동 응답기의 부재중 전화 표시를 보고서, 언젠가 죽으면 자신의 일부도 이렇게 남아 있게 되리라(p.300)>는 것을 알고 있다(물론 우리도 안다). 상당히 불쾌하고 조금은 위악적이며, 동시에 순수하고 쉽사리 로드킬 같은 건 당하지 않을 미프티 ㅡ 시속 120km로 달리는 차에 스스로 뛰어들었으면 뛰어들었지. 헤게만의 실험은 텍스트를 그러모으는 것에 더해 그녀 자신을 해부하는 실험을 한 것이다.

그런데 책을 덮는 순간 내 귀에 이명이 일며 어디선가 블러드하운드 갱bloodhound gang의 Foxtrot Uniform Charlie Kilo」가 들려오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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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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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최초 완역본>, 태생은 그 해 <가장 아름다운 체코슬로바키아 책>이 된 1965년판.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간기면에는 <초판 1쇄>라고 적혀 있다. 여기 『도롱뇽과의 전쟁』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는 누구냐는 질문에 키플링 ㅡ 아마도 『정글북the jungle book』을 쓴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ㅡ 을 꼽는 도롱뇽(놈들은 언어구사가 가능하다), 그리고 동물원에서 방문객으로부터 초콜릿과 단 것을 너무 많이 얻어먹어 위장염에 걸리는 도롱뇽(들)이 등장한다. 게슈타포가 공공의 적 no.3로 지목할 정도로 악명높은(?)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 우리는 곧잘 체코the czech republic, 또는 프라하prague라는 단어 자체에 매료되곤 한다 ㅡ 파리paris나 도쿄tokyo의 다리 위 야경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그리고는 약간의 안개와 어쿠스틱 기타를 상상하기도 한다(적어도 나는 이런 몽상을 즐긴다). 하지만 무대가 된 체코는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의 주인공) 포본드라의 <내가 전 세계를 망쳐 버린 거야……>란 말을 끝으로 도롱뇽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도롱뇽들은 도롱뇽들이니까」
그는 목소리를 깔며 얼버무렸다.
「2백 년 전에는 깜둥이들은 다 깜둥이들이라고 했죠」
「결국 그 말이 다 맞잖소. 체크!」

나는 결국 그 게임에서 졌다.
갑자기 체스 판 위의 수들이 하나같이 케케묵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로 벌써 결판이 나 있고,
우리는 그저 우리 말들을 똑같은 네모 칸으로 옮기면서
과거와 똑같은 패배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까만 말이 졌구먼」

ㅡ 본문 p.215


파시즘의 풍자와 즉각적인 현실의 반영은 차치하고라도(그럴 수 없겠지만 미루자) 『도롱뇽과의 전쟁』은 환상문학이며 거기에 고급 저널리즘을 융화시켰다. 그리고 작가는 시종일관 영민한 위트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그는 수도원 꼭대기 탑루에서, 히죽거리며 금서를 읽는 노망난 수도승을 어떻게 골려줄까 하고 고심한 끝에 소설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의 호르헤를 흉내내 <이 책에는 독이 발라져 있다>라는 쪽지를 몰래 책 속에 넣어 수도승을 놀래킨다(물론, 당연하지만, 비약을 인정하며, 에코의 작품이 훨씬 나중에 태어났다). 그러나 적어도 작가(탑루 위의 수도자)는 사람들(수도승들)을 (아직은)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한다. 『도롱뇽과의 전쟁』은 어두운 결말로 맺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의사소통과 직립보행이 가능한 도롱뇽들에게, 인간은 각종 노동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ㅡ <우리는 진주의 모험 소설 대신 환희에 찬 노동의 찬가를 부를 겁니다. 우리는 구멍가게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창조자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p.169).> 그리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도롱뇽들이, 그들의 거주지(!) 확보를 위해 인간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싸우는 걸 더 잘했던 것 같구나」(...)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어 놓으면,
너무 잘해서 네 녀석도 깜짝 놀랄걸?」

ㅡ 본문 p.361


하! <우두머리 도롱뇽은 이 순간, 아직은 세계를 무력으로 접수하기보다는 인류로부터 구매할 의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p.352).>라니. 게다가 <아직은>이라니 ㅡ 우두머리 도롱뇽의 진짜 정체를 밝히지는 않겠다. 책의 마지막 <작가, 혼잣말을 하다>를 읽어보시라. 작품에선 도롱뇽이 인간을 상대로 거래를 하는 세상이 온다. 물론 사람들은 이전에 수많은 도롱뇽들을 죽이거나 못살게 굴었다. 그런데 이 <마카로니(작가는 특별히 억센 놈들이라 표현한다) 같은 도롱뇽들만> 살아남아 계속 번식을 유지했나? 운명이 질긴 놈들이다(물론 작가의 저항의 몸짓이겠지). 말을 할 줄 알고 지식을 쌓아 교수가 된 도롱뇽(!)의 논문을 인용해 파문당한 과학자의 (이유 있는) 할복이나, 도롱뇽들이 사는 강에 독극물을 부어 그들을 독살하는 영국 사령부에 관한 에피소드는, 독자(혹은...)에게 전하는 놀라운 위트로 무장한 잘 다듬어진 촌철이다.

명랑 개그 만화처럼 ㅡ 단발적인 개그가 아니라 촘촘히 짜여진 코미디에 가깝지만 ㅡ 내내 히죽거리게 만드는 『도롱뇽과의 전쟁』은 칼레이도치클루스를 떠오르게도 하는데, (물론 모두 작가가 의도해 적었고 동시에 허구인) <도롱뇽들의 성생활>을 고찰한 부록, 도롱뇽들에 관한 각종 신문 기사들, 과학 총회를 목격하고 쓴 기록들, 저명한 명사들의 소견들, 학교 교육을 받은 도롱뇽의 회상, 국제 공산당 선언문, 전시에 보내진 전보들...이 색색의 면지로 구성되어 있다(일본어로 된 부분도 있는데 일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부끄럽게도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엉터리 일본어가 아닐까 한다) ㅡ (세심한 옮긴이주와 별도의 색인으로 엮어진 지명 색인,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편집) 출판사에 감사와 영광을! 정말 아름다운 책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동물에게 주는 메시지건, 그가 풍자하려는 파시즘이건, 뭐가 어쨌건 아쉽다. 그래서 나는 작가 내면의 목소리를 빌린다. 「이렇게 끝낼 거야?(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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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질문 - 의문문으로 읽는 서양 철학사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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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질문』을 펴낸 열린책들의 편집자 노트(웹 카페를 통해 확인)를 보면 이 책 자체를 놓고 <위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이 책에 악행을 저지르는가?>, <이 책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를 만들려 하는가?>, <최선의 편집 형태는 무엇인가?>가 그것들이다. 그럼 나도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을 읽는 나는 지금 여기에 실재하는가?>, <나는 이 책을 읽는 행위로써 행복한 것인가?>, <나는 이 책의 텍스트를 믿어야만 하는가?>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닮아있다. <하늘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라>, 또는 <운명의 긍정>이란 하나의 구절로서 표현되는 그것이다. 그래, 이건 쉬이 생각할 수 있는 명제다. 그럼 고르기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고 헤라클레이토스(그는 코스모스cosmos를 말한다)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어쨌든 많다. 저자는 『위대한 질문』에서 30가지의 질문을 한다. 아니 30명의 철학자들이 (초빙돼) 질문한다. 하지만 나는 단 하나의 질문에도 답할 수 없다. 아예 답이란 건 집어치우고, 내가 보기에 나는 답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아니면 내가 그 흔해빠진,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수식[~(~a)=a]에서 허우적대는 걸까? 사실 이게 기막힌 논리일지도. 이를테면 <허구의 허구를 통해 실재에>, <없음의 없음을 통해 있음에 도달한다>거나 말이다 ㅡ 그나마 최근 사람인 사르트르의 눈으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겠지만(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욕을 해도 대꾸할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위대한 질문』에 대해서, 그리고 위에 나열한 철학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오랫동안 설명할 수 없고 그럴 자신도 없다. 내가 왜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하는가(이것도 멋진 <위대한 질문>이다)? 『위대한 질문』은 총 30명의 철학자들의 입을 빌려 하나씩 질문을 해댄다. 그런데 등장인물(이라 표현하자)의 연대 순으로 19세기, 20세기까지 오다가 갑자기 마지막엔 플로티노스(204~269 혹은 205~270)가 나타난다. 대체 왜? 사실 이 양반도 일자一者를 이야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학파, 고대 그리스철학과 총체적 체계로서 엮여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갑작스럽다. 사실 이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이것은 <허섭스레기 질문>이란 걸 깨달았다.
 

▼ 『위대한 질문』의 저자인 폴란드의 소크라테스,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그는 작년 유有에서 무無로 되었다.
아니 원래의 무에서 변하지 않고 무 자체로 남아 있는 건가,
아니면 이제야 진정한 유가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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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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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등장하는 현재시제의 문체는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며,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불안한 영혼들의 불완전한 이야기. 옆구리를 툭 치면 활자화된 단어들이 눈에 보이게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은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집 『전화』. 그런데 아뿔싸, 나는 절대 함정에 걸려들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에게 빈틈을 보이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그의 언어는 포물선을 그리며 도망갈 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머리 위를 향해 내리꽂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글에서 영화감독 김기덕이 <나 역시 누구나 쾌락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 쾌락의 진원지가 상대방의 고통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라고 쓴 부분을 기억해내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전화』에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듯 자기만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거나, 정말 바닷물에 심하게 절어 손쓸 방법이 없는 양말 한 짝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들, 아니면 내가 보기엔 분명 고통스러운 순간임에도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는 의식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순간 이 책을 찢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누군가의 지시에 사로잡히고 만다. 차라리 그들이, 영화 《섬》에서 전기로 물고기를 지지듯 ㅡ 자신의 입이나 성기가 아닌 물고기라는 타자他者 ㅡ 스스로가 아닌 타인이나 다른 어떤 것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근원적인 고통을 피했으면 하고 바랐다(물론 『전화』와 《섬》을 같은 선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악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씨발>이든 <씨팔>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예술kunst>이란 단어 하나로 맺어졌으니까(「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자동 응답기의 안내 멘트를 듣고 <왜 연극하는 것처럼 말할까?>하고 느끼는 B(「문학적 모험」), <이제는 전화가 지긋지긋해. 네 얼굴을 직접 보며 말하고 싶어>라는 말에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라고 응대하는 X(「전화」), <내가 거울을 볼 테니까 너도 거울 속의 나를 봐. 그러면 거울 속의 내가 같은 사람임을 확인할 거야. 아무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거야>란 묘안을 내는 형사(「형사들」), <당신의 얼굴이며 말하는 방식과 눈길에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자아내는 무언가가 있어요>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는 여성 작가(「앙리 시몽 르프랭스」)의 경우도 그렇다. 그들은 전화를 이용하거나(때로는 편지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아니면 직접) 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모두 타인과의 맺음에 있어 실패하고 고통 받는다는 거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전화』라는 타이틀로 묶어지며, 수록된 대부분의(거의 다) 단편들은 어, 하다가 끝나고 만다. 왜일까.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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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67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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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의 배경이 된 세계대전이나, 세상의 모든 전쟁, 총싸움, 전쟁을 그린 영화나 책, 정치적 입장 등은 뒤로 놓고, 오직, 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만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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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 같은 청춘. 청춘이라! 우리는 모두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다고? 청춘이라고? 그건 다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 본문

정말 그들은 노인이 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더 살고 싶다. 그들은 참호 안에서 느낀다. 시체의 영혼을 빨아들인 밤안개가 내일은 적의 포탄을 몰고 올거라는 것을. 그리고 바람을 타고 오는,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아군 병사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왜 전쟁이 일어난 거지? 어째서 내가 여기서 총을 들고 있어야 하지? 대체 왜 땀으로 가득찬 군화를 벗지 못한 채 꼼짝않고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쥐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기 전에 그들은 악마가 된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되고 피상적으로 변한다. 알싸한 연기를 맡으며 그들은 웅크린 맹수가 되고 교착 상태에 빠진 인형이 된다. 그들은 사자死者가 되어서 움씰움씰 춤을 추는 기관총이 되고 또 수류탄이 된다. 부상병의 신음 소리를 싣고 오던 바람은 이제 피냄새를 데리고 오며 천진난만한(했던) 소년들에게 메스꺼움을 준다.

그들은 때로는,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히멜슈토스 하사에게 침대 시트를 뒤집어씌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패기도 하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사나운 개와 상대하면서도 거위 한 마리와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시간이란 이미 사라졌다. 두개골이 없어도 살아 있는 사람과, 두 다리를 잃은 채 달리는 병사와, 흘러내리는 창자를 움켜잡은 채 치료소까지 오는 병사를 본다. 그들은 <숟가락으로 먹을 것을 입 안에 떠 넣고는, 달리고, 던지고, 쏘고, 죽이고, 널브러져 누워 있다>(p.110). 그리고 그들은 어느 판자벽 광고물에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있는 한 소녀를 보고, 평화를 본다. 그리고는 곧 눈을 내려 자신들의 더럽고 꿰맨 자국이 있는 군복을 본다. 그리고 다시금 가슴에 총알 하나가 알을 슨다.

-- 그냥 엎드리고 있으면 공포는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곰곰 생각하다가는 공포에 질려 죽고 만다 -- 본문

파울 보이머는 휴가를 나와서야 비로소 전쟁이란 것을 안다. 그가 전선에 있을 때는 활기를 띠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했다. 그가 휴가를 나와 어색해하고 혼자 있고 싶어할 때는 나 또한 그러했다. 병영에 있는 미텔슈테트가, 그에게 낙제를 줬던 칸토레크 선생에게 ㅡ 그는 이제 향토 방위대에 편입되어 미텔슈테트의 아래에 있다 ㅡ 잔소리를 해대는 것을 보고 히죽히죽 웃을 때는 나도 따라 히죽거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의 전쟁이란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논쟁거리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가십거리일 뿐이란 거다. 우리의 파울 보이머(를 비롯한 모든 군인)는 참호 속에서 죽어가는 프랑스 병사로 인해 얼마나 고뇌했으며, 그의 지갑에서 발견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사진으로 얼마나 맹목적이게 되었는가. 결국 전우애는 허망함 그 자체로 돌변하고 그 속의 수많은 사연들은 총탄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날아간 것은 전쟁의 허망함과 어린 소년의 낡은 단추만이 아니다. 고약한 히멜슈토스 하사에게 대들던 차덴을, 몰래 잡은 거위를 요리하던 카친스키를, 포화 속에서 교과서를 끼고 다니던 뮐러를, 머리가 비상해 가장 먼저 일등병이 된 크로프를, 막상 전방에서는 겁에 질린 원숭이가 되어버린 히멜슈토스 하사를, 약혼자에게 보내겠다며 구리로 된 포탄 띠와 프랑스제 조명탄의 비단 낙하산 천을 줍던 하이에를, 휴가를 얻어 만난 부모님과 누나를, 그리고 참호 속에서 죽어간 제라드 뒤발이란 이름을 가진 프랑스 군인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에, 작가의, 파울 보이머의, 그의 전우들의, 누군가의 나지막하고 담담한 외침을 듣는다.

--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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