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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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에 분쇄되고, 프리스비처럼 동어반복만을 하다보면 과연 어떤 인간이 미치지 않을 수 있겠나. 『세월』이, 『댈러웨이 부인』의 답습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버지니아, 로라, 클래리사 ㅡ 이 셋의 기묘한 합체의식(合體意識)이 조이스의 '길고도 긴 하루'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이건 농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은 처음부터 「제발 이 삶(들)을 봐 달라」는 간곡한 권고로 시작한다. 게다가 화자들은 몹시 지쳐있다. 때로는 명랑함도 의미를 잃은 것처럼 꾸며져 '허무주의 vs. 인간의 임무'라는 다소 피상적 논리도 엿보인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논리와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모순에서 이 작품은 후자의 발언권을 얻어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당연히 페미니즘(만)을 다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건 하나의 수단이니까. 내가 왼쪽을 볼 때 당신은 오른쪽을 보고, 내가 오른쪽을 볼 때 당신은 왼쪽을 본다. 타협점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분명 이런 상태가 지속될 필요는 없는데도 인물들은 꾸역꾸역 침체된 일분일초를 걷는다. 이따금 빅벤이 울려도 그건 그저 지옥으로 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켜줄 뿐이다. 사실, 애초 『댈러웨이 부인』을 읽지 않고 이 책을 들었다면 엄청난 중력의 참을 수 없는 부조화를 느꼈으리라(내겐 울프의 작품을 읽다가 내동댕이쳐버린 전적이 있다, 정말이다!) ㅡ 낡아빠진 램프를 주워 그들을 대신해 소원이라도 빌어주고 싶을 만큼. 예컨대 '시작한 곳에서 끝나버리는' 기이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세 여자는 저항할 힘조차 없고 그러려는 노력 또한 단속적이어서 속내를 들어주는 친절한 안내자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충실한 조력이 있다한들 그녀들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ㅡ 그럴 수 없다, 『댈러웨이 부인』만 하더라도 거기서 셉티머스만 죽어나갔듯 여기서도…… ㅡ 그녀들의 세월이 욕망(죽음)한대로 결핍이라는 표지판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을까. 이들에게는 약간의 '시끄러움'만 있으면 되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왜? 끝의 위치가 시작으로 돌아가 버티고 때문이다. 하다못해 그녀들에게는 시뮬라르크 따위도 없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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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가 불야성 시리즈 2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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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크 하나가 있다 치자고. 내 생일인데도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 뭐, 깜짝 놀래 주려고 연극을 한 거야. 난 그런 낌새는커녕 하루 종일 뭐 빠지게 일만 죽어라 하다 집에 들어왔어. 불빛은 하나도 없고 숨이 막혀서 가슴이 졸아들지. 뭐야 이거, 지금까지 돈 벌어오는 기계로 살아왔는데 이젠 내 인생도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눈앞에 들이밀고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거야. 나는 놀라서 말도 못해. 너무 기뻐서. 담배 냄새가 찐득거리는 입으로 촛불을 끄고 소원을 빌지. 이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게 해주소서. 모두들 케이크를 한 조각씩 먹으며 웃음을 나눠. 이제 내 몫으로 돌아온 마지막 조각. 거기엔 반쪽으로 잘라진 딸기도 얹혀있어. 그런데 말이야, 웃긴 게 뭔지 알아? 그 마지막 케이크를 먹으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쑥 나와서 달큼한 딸기만 채 가는 거야. 그리곤 남은 케이크 조각에 얼굴이 박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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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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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패닉의 「뿔」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가 간지러워서 뒤통수 근처를 만져보니 뿔이 하나 돋아났네, 이쯤은 뭐 어때 모자를 쓰면 되지 뭐, 직장의 동료들 한마디씩, 거 모자 한번 어울리네, 어쩐지 요즘엔 사는 게 짜릿짜릿해,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란 이렇게나 즐거워……. 이에 반해 조 힐에게 돋아난 뿔은 위치도 다르거니와 게다가 패닉의 경우처럼 낭만적이지도 않다. 어쩐지, 빌어먹을 『말벌 공장』 같은 책이다. 아, 뭐 그렇다고 정말 '빌어먹을 뭣 같은 책'이란 건 아니고. 그럼 뭐가 문제냐. 종교적 해석? 프로이트 대입? 상징에 또 상징? 맙소사. 이 소설을 읽으려면 정신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다. 주인공 이그가 태생적으로 트럼펫을 불 수 없게끔 설정된 상황부터 왜 하필이면 뱀이 등장하는가 하는 것까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까. 자, 시작은 패닉의 노래와 같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뿔이 돋아나 있다. 양쪽 관자놀이에. 환상도 아니고 당최 사라질 기미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성당엘 갈까? 아니면 병원? 여기에서 작가가 구성해놓은 것 중 하나가 드러난다. '뿔의 힘'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품었던 추악한 생각들을 고해성사하게 하는 것. 그리고 하나 더. 이그는 뿔이 돋은 시점부터 그의 애인 메린이 살해당한 범인을 찾아나서게 된다. 역자가 '옮긴이의 말'에 간략하고도 섬세하게 써놓았지만, 이그는 물에서 한 번, 불에서 한 번 태어나고 죽는다. 어릴 적 쇼핑카트를 타고 내려오다가 강에 빠지고 훗날 불타는 차 안에서 다시 한번 그 강에 빠져서 말이다 ㅡ 붉게 달아오른 피부로 숨을 들이쉬며 물속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은 마치 영화 《크랭크》의 영원한 불의 화신, 체브 fu**in' 첼리오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소 신파극으로 흐를 우려가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거기서 갑자기 확 꺾여버린다. 모든 사건에는 여자가 얽혀있다고 하듯, 『뿔』에서의 여자들 ㅡ 메린과 글레나 ㅡ 은 이그를 유혹에 빠뜨렸지만 사랑 또한 보여주었으므로(종교적 의미부여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어쨌든 외모가 변했다고 해서 카프카를 끌어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럴 요량이었다면 이 소설 자체를 쓸 필요가 없었을 테니. 대체 어디서부터 글러먹은 건지는 차치하고라도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이그가 악마가 돼버렸다는 사실 자체다. 여기서 또 하나의 포인트. 그가 악마로 변하기 전 이미 그는 악마란 이름으로 불리고 만다는 것. 악마로 변하자 사람들이 그를 악마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먼저 악마라는 부름이 있은 후에 변하는 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악마가 되었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 되기 전부터 이미 위험한 짐승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에서 이 작품을 두고 '하이테크 롤러코스터'라고 한 것처럼 이그라는 위험한 짐승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그야말로 불[火]과 함께하는 황홀경을 맛볼 수 있는데, 그가 맞는 두 번(혹은 세 번)의 죽음에 이르면 불은 이상하리만치 신성하게까지 보인다. 『뿔』에서 사람들의 죄는 처음에는 자신의 것이었다가 나중엔 다른 사람의 죄로 변한다. 우리 마음이 지향하는 작용은 순수하지 않으니까, 이건 너무나도 당연한 메커니즘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구멍'이 더 이상 인간의 순수한 자유로 정의되지 못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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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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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자 후기에도 '진화'에 대해 적혀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은 분명 『흑백』에서 변했다 ㅡ 그래서 '변조 괴담'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를 더 생각한다. 『흑백』에 이은 이 『안주(暗獸)』에 이르러서 한 번 더 진화(란 표현이 과연 적절할는지는 모르겠다)했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인 주인공 오치카를 보면 확연히 알게 된다. 전작이 어딘지 모르게 꿈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인상이었다면 이번에는 무대가 되는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더 한 발짝 내딛는다. 바깥이란 현실로. 그러니까 어떤 보이지 않는 필터를 통해 이야기되었던 것이 지금은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언제라도 그것을 열고서 목전에 할 수 있다는 느낌이랄까(꼭 메세나의 성공사례 같다). 다만 작가의 말대로 '괴기소설이면서 이렇게 귀여운 이야기뿐인 거야?' 하는 기분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표제작 「안주」를 치워놓으면 외려 전작만큼 혹은 전작보다 더 사람들의 '다른 마음'이 흉물스레 전해져오니까. 그런고로 흑백의 방의 이야기는, 듣고 버리고, 이야기하고 버리고 ㅡ 이긴 하지만 인간의 마음만은 남게 된다. 조금씩 변하면서, 이따금 똘똘 뭉친 정념이 되기도 하면서. 사람을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있어 사람은 그것을 없애는 존재이긴 하지만, 사람 자체가 먼저 나서서 그리움과 미움이란 마음을 없앨 수 있을까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으니까 말이지 ㅡ 자꾸만 흘레붙는 게 또 사람의 마음이니까. 얄궂다면 얄궂은 얘기다.


읽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록작 「달아나는 물」과 「안주」에서 그런 애틋한 뭔가를 접할 수 있다. 두 작품에서만큼은 악과 미움에서 선 혹은 사랑으로 그 테마의 이동이 이루어진 듯하다. 물론 여기에도 유령이나 귀신으로 여겨질 만한 것이 나오기는 하지만 어쩐지 산뜻함이 느껴진다(심지어 나는 이야기가 '맛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본 기분이기도 하고. 「신이든 인간이든 대개 마음이 있는 존재라면 언제가 가장 쓸쓸할까 ㅡ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란다.」(「달아나는 물」) 그런가하면 「안주」에는 구로스케라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사람 옆에서는 살 수 없는 기교한 생명'이 등장해 신자에몬 할아버지를 울리기도 한다(여기서는 냉혈한인 나도 좀 울컥했다). 중요한 건 '생물'이라는 점이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유령이 아니다. 게다가 귀엽다. 그러나 가까이하면 인간의 독한 기운에 쐬어 위태롭게 된다. 내 추측이고 또 책을 읽어야 알 테지만, 좋아하면서도 다가갈 수 없는 그 마음의 정체는 수국 저택에서 도망하지 못하고 죽고 만 하녀의 아이가 아닐는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어두운 곳에 외톨이로 살고 있는 생물이라는 의미로 어둡다는 뜻의 '암(暗)'에 짐승을 뜻하는 '수(獸)'를 더해 직접 만든 단어라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고 만다.


이쯤 되면 말할 것도 없이(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덤불 속에서 바늘 천 개」와 「으르렁거리는 부처」는 앞의 두 이야기에 비해 '무서운' 쪽에 속하게 되는데 나는 「덤불...」 쪽이 조금 더 그렇다고 느낀다. 바늘 가게의 장남이 쌍둥이(이름은 오하나와 오우메라고 한다)를 낳는다. 그런데 상인들은 쌍둥이는 집안을 나눈다, 재산을 나눈다고 하여 꺼린다. 결국 대장 노릇을 하는 어머니의 노기에 밀려 쌍둥이 중 하나를 차남의 양녀로 보내 분가하게 하고 분가한 아이는 절대 본가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된다. 문제는 본가의 아이(오하나)가 죽은 후다. 장남과 차남이 본가와 분가를 합치려는 계획을 세우자 죽은 아이의 귀신이 나타난다. 그 계획을 포기하자 이번엔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오우메를 지키기 위해 인형사를 고용해서(여기서부터 섬뜩해진다) 본가에 두기로 하고 오우메가 하는 것은 밥 먹는 것부터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인형에게도 똑같이 해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둘의 처우가 다르면 인형의 얼굴과 몸뚱이에 바늘이 꽂힌다. 그에 따라 오우메의 몸에도 새빨간 습진이 생긴다. 인형에 꽂힌 바늘이 있던 부분에 똑같이……. 미야베 미유키는 일체의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오우메의 습진이 생긴 자리에 희미하게 들었던 멍을 통해 인간이란 생물이 좇는 '다른 목적'과 '다른 마음'을 오롯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오우메 본인의 마음까지도(처음 들었을 때의 멍은 습진에서 나타나는 증상과 비슷하다, 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ㅡ 뭐, 읽어보는 게 가장 정확하겠다만. 비교적 짧게 쓰는 것이 왠지 미안해지지만 「으르렁거리는 부처」는 마을의 관습이란 것을 차용한 거라고 본다. 고립된 산간 마을의 무시무시한 관습 ㅡ 같은 거라면 다른 곳에서도 접한 적이 있는 이야기지만(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에서였던가) 이 소설에서는 다르다. 관습이란 형태를 빌려 몰래 일을 꾸미는 인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습 자체보다 더 무섭다…….


각설하고, 맨 처음 이 『안주』가 진화하고(며) 변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미시마야의 수수께끼 간판 아가씨' 오치카의 모습에서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인간관계의 발전에서도 그렇다. 새롭게 나타난 오카쓰란 여인과 덜 익은 호리병박 아오노 선생의 등장으로 왠지 모르게 미시마야 변조 괴담이 한층 더 와글와글해질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가 습자소 선생(아오노)이 지금부터 오치카와 어떤 관계가 될지는 비밀이라고 한데다가 ㅡ 그럼 『흑백』의 나막신 가게 아들은 팽(烹) 당하는 건가 ㅡ 흑백의 방을 만든 미시마야의 주인 이헤에는 이것이 '백 가지 괴담 대회'라며 앞으로의 이야기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흑백의 방을 향한 ㅡ 흑백의 방에서 출발한 여정에 텐징 노르가이처럼 굳건한 조력자가 될지 그저 그런 빠꼼이가 될지는 제쳐두고라도(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옛날이야기' 속에서의 사람과 사람이 공유하는 마음과 연대감이 지금의 소위 사회파 추리소설에서 보이는 양상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 '미야베 월드 제2막'이라는 이 에도 시대물을 읽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계속하자 ㅡ 더 듣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여기여기여기를 보자.


덧) 『안주』는 독자 펀드로 탄생한 소중한 책이다. 독자들에 의해 십시일반으로 모인 5천만 원(열흘 만에!)이란 마케팅 비용은 일대 사건이었고, 이것은 출판사에서 만든 같은 금액의 것과는 의미도 다르고 차원도 다르다. 그야말로 '원기옥'이다.


덧) 원기옥 : 만화 『드래곤볼』의 주인공 손오공이 사용하는 것으로 손을 들고 생물체들의 기를 모아서 쏘는 기술. 그만큼 협력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이 되겠다. 이에 따른 신조어로는 '베기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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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 1
구사카베 요 지음, 박상곤 옮김 / 학고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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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를 시행하는 의사에게는 '까다로운 치료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잠재의식이 있다.」 「환자의 고통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이기심이다. '죽지 마'라는 말이 때로는 '죽어'라는 말보다 더 가혹할 수도 있다.」 존엄사보다 안락사라는 말은 어쩐지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손』은 문체와 단어구사는 평이한 편이고 때로는 진부한 표현도 눈에 띈다. 또 극 흐름이 원활치 않은 부분도 있으며 참으로 조악한 설정이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죽음이라는 화두와 왜 안락사인가 하는 물음에 접근하는 스릴러 요소가 더해져 근사한 의학 미스터리가 되었다(어쩌면 '의학'보다 더 큰 범주에 해당될지도). 이야기는 스물한 살의 청년이 안락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육체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젊고 강한 심장은 좀처럼 지치지 않았다. 덕분에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계속되었다.(p.14) 안락사는 고령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편엔 생명력이 왕성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을 수 없는 젊은 환자들이 있다. 인공호흡기를 달면 돈이 들므로 죽는다, 가족 안에서 천덕꾸러기가 될 바에는 죽고 싶다, 차라리 나는 깨끗이 죽겠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으나 과거 군인이 되기 위해 자원입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면에 경제적 요인이 작용한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게 과연 '자원'이라 불릴 수 있을까. 마찬가지, 이제 그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락사를 선택하겠다는 사람의 속내를 보자면 온전히 환자 본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결정했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차라리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참을 수 없는 고통'이란 대체 뭘까. 결국 거기에는 의사의 판단이 더해진다. 환자는 끝내고 싶다고 하고, 의사는 좀 더 버티라고 한다. 의사가 보기엔 아직 더 참을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반대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보며 이제는 가망이 없으니 환자 본인에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려는 의사도 있을 거고…….



안락사는 고통 받는 환자를 위한 복음인가, 아니면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선별인가. 모든 생명은 존엄하므로 그 생명만 구하면 된다는 건 의사의 오만이고 무신경한 태도인가, 아니면 더 이상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환자의 고통을 보고도 그것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의사의 이기심인가. 그것이 신의 손일지 사신의 손일지를 구분하는 것은 무척이나 곤란하고 어렵다. 결국 늘 같은 딜레마에 빠져 출구가 없는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다. 작가는 전일본의사회와 새롭게 발족한 JAMA(일본전의료협회, Japan All Medical Association)라는 단체를 등장시켜 그들 간의 알력을 보여주고(JAMA라는 이름을 가진 전혀 다른 단체가 일본에 존재하긴 하지만, 내 짧은 지식으로는 이것 ㅡ 의학 관련 ㅡ 은 실재하지 않는 단체이다) 후반부에 가서 두 단체 모두 붕괴시킨다. 소설을 보면 장진의 영화가 생각날 때도 있고, 거짓 죽음을 가장한 과격한 실험, 사이비 종교 같은 우스꽝스러움, 의료계와 정치를 흔드는 요소도 찾을 수 있지만(끝에는 허망하면서 놀라운 반전도 있다) ㅡ 의료 신질서, 의사의 노블레스화, 의료 정화와 같은 부수적 재료는 그럴싸하게 들린다 ㅡ 일단은 안락사를 다룬 이야기다보니 독자로서 그리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괴롭고 복잡한 감정이 앞서게 된다. 아래(▼)는 소설에 등장하는 안락사법 제정을 위한 각 안의 골자인데 그 엄격함만 다를 뿐 우리가 쉬 판단할 수 없는 문맥이 상당하다. 편안한 죽음을 맞겠다는 바람의 정당성, 내 생명을 방치하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논리. 내 삶과 죽음의 선택의 자유일까, 아니면 방법만 다른 살인일까.



본인의 의사 확인
A안 : 구두를 포함한 모든 방법이 가능하다. 각서, 컴퓨터나 메일 등도 가능.
B안 : 본인 또는 대리인을 통한 서면 필요. 단, 서식은 상관없다.
C안 : 소정의 서식에 따라 본인이 자필로 기재. 변호사 또는 공증인의 승인이 필요하다.

의사 표명 뒤의 확인 기간
A안 : 1주일.
B안 : 2주일.
C안 : 1개월.

연령 제한
A안 : 20세 이상.
B안 : 40세 이상.
C안 : 75세 이상.

안락사 요건
A안 : 도카이 대학 안락사 사건에서 1999년 요코하마 지방법원이 내린 네 가지 요건.
B안 : A안과 동일.
C안 : A, B안의 네 가지 요건에 더하여 가족의 동의 필요. 주위의 정신적 압력이 없다는 증명, 사회적 · 정신적 빈곤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대상 환자
A안 : 참을 수 없는 고통(육체적 · 정신적인 것 불문)이 있는 경우.
B안 : 참을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이 있는 경우.
C안 :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는 말기 암에 한정.

의사의 동의
A안 : 의사 두 명의 동의 필요.
B안 : 의사 세 명의 동의 필요.
C안 : 전문의 네 명 및 근무처가 다른 의사의 동의 필요.

보고 의무
A안 : 24시간 이내에 의무적으로 경찰에 신고.
B안 : A안과 동일.
C안 : 6시간 이내게 의무적으로 검찰에 신고. 아울러 의사는 검찰관의 질문에 답하는 형태로 70개 항목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 제출.




과연 구두로 의사를 표명하는 것을 사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안락사가 필요한 긴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본인이 서면을 작성할 것인가. 환자가 의사를 표명하고 곧바로 안락사를 실행하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겠지만 환자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을 때의 환자의 고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연령 제한에 있어 C안의 경우는 젊은 사람은 더 살아야 하고 노인들은 죽어도 좋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은가. 환자에게 있어 주위의 정신적 압력이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란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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