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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감정에 분쇄되고, 프리스비처럼 동어반복만을 하다보면 과연 어떤 인간이 미치지 않을 수 있겠나. 『세월』이, 『댈러웨이 부인』의 답습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버지니아, 로라, 클래리사 ㅡ 이 셋의 기묘한 합체의식(合體意識)이 조이스의 '길고도 긴 하루'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이건 농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은 처음부터 「제발 이 삶(들)을 봐 달라」는 간곡한 권고로 시작한다. 게다가 화자들은 몹시 지쳐있다. 때로는 명랑함도 의미를 잃은 것처럼 꾸며져 '허무주의 vs. 인간의 임무'라는 다소 피상적 논리도 엿보인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논리와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모순에서 이 작품은 후자의 발언권을 얻어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당연히 페미니즘(만)을 다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건 하나의 수단이니까. 내가 왼쪽을 볼 때 당신은 오른쪽을 보고, 내가 오른쪽을 볼 때 당신은 왼쪽을 본다. 타협점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분명 이런 상태가 지속될 필요는 없는데도 인물들은 꾸역꾸역 침체된 일분일초를 걷는다. 이따금 빅벤이 울려도 그건 그저 지옥으로 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켜줄 뿐이다. 사실, 애초 『댈러웨이 부인』을 읽지 않고 이 책을 들었다면 엄청난 중력의 참을 수 없는 부조화를 느꼈으리라(내겐 울프의 작품을 읽다가 내동댕이쳐버린 전적이 있다, 정말이다!) ㅡ 낡아빠진 램프를 주워 그들을 대신해 소원이라도 빌어주고 싶을 만큼. 예컨대 '시작한 곳에서 끝나버리는' 기이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세 여자는 저항할 힘조차 없고 그러려는 노력 또한 단속적이어서 속내를 들어주는 친절한 안내자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충실한 조력이 있다한들 그녀들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ㅡ 그럴 수 없다, 『댈러웨이 부인』만 하더라도 거기서 셉티머스만 죽어나갔듯 여기서도…… ㅡ 그녀들의 세월이 욕망(죽음)한대로 결핍이라는 표지판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을까. 이들에게는 약간의 '시끄러움'만 있으면 되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왜? 끝의 위치가 시작으로 돌아가 버티고 때문이다. 하다못해 그녀들에게는 시뮬라르크 따위도 없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