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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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1

 

 

할리우드식 사르카즘이야 그렇다 치고, 스티븐 킹만의 악랄하고 무자비하게 긴 괄호 세례(공공연하게 '부연의 king'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내 말 믿으시라, 내 글에서의 괄호 중 쓸데없는 것은 수천 개 중에서 한두 개밖에 없으니까, 라고 속삭이는 일종의 서브텍스트처럼)에 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가 10살로 접어들던 해의 극장에서 늙고 탐욕스러운 비행접시인이 등장하는 《지구 대 비행접시》에서 공포의 씨를 보지 못했다면 지금의 작가 스티븐 킹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만약 그가 어릴 적부터 공포 영화를 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공포 문학, 호러 문학의 방향 제시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했을지도 모른다(킹 이전의 위대한 작가들도 있었지만). 『11/22/63』도(작가가 소설 속에서 비유한 '제목에 항상 숫자가 달리고 살인마가 거리를 활보하는 영화'의 느낌과 아주 살짝 비슷하달까) 이 '만약'이라는 하나의 명사에서 출발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과거 여행이다('즐거운 여행'은 아니고). 제목의 숫자는 미국의 35대 대통령 케네디가 사망한 날이다. 1963년 11월 22일. 그러니까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케네디의 암살을 막는다면, 하는 게 골자가 되겠다. 소설에서, 식당 창고의 '토끼 굴'을 통하면 1958년 9월 9일 11시 58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여기서 시간을 가지고 장난친 수많은 영화를 떠올려볼 수 있을 텐데 이 소설은 약간은 다른 설정을 취한다.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오게 되면 지금의 상황은 변했을지 몰라도, 다시 한 번 과거로 가게 되면 항상 1958년 9월 9일 11시 58분부터 시작한다는 거다. 그때부터 리셋이 된다. 토끼 굴을 통과해 과거로 가는 순간 현재의 상황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다. 하나 더. 『드래곤볼』의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과거에서 얼마를 머물러도 현재에서의 시간은 고작 2분밖에 지나질 않는다. 오늘 아침 6시 정각에 토끼 굴을 통해 1958년으로 돌아가 10년을 지내다 와도 현재는 아침 6시에서 2분이 지나간 6시 2분이다(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기는 신체의 변화는 현재로 돌아와도 이어진다). 그럼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1958년일 텐데, 케네디가 죽은 1963년까지 가려면 5년씩, 즉 한 번 실패해서 두 번째로 갔다 오면 나이가 10살은 먹어서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현재 시점)에선 2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결말은 조 힐(킹의 아들이며 그 역시 작가다)의 의견이 반영되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그 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국내 출간이 이루어지기 전에 출판사의 배려로 가제본을, 그것도 1권만 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도 동시 출간이 아니라 일정에 맞추어 따로따로 나온다고 하니, 1권의 끝에서 어쩔 줄 몰라 어렵사리 미소를 쥐어짰던 주인공이 된 심정이다. 말인즉슨, 우리의 주인공이 케네디의 죽음을 막을 것인지 어떤지는 이 소설의 끝장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Pt.2


보안등급이나 위기경보를 보면 주의(yellow), 경계(orange) 순으로 위험도의 색깔이 변화한다. 또 노란색은 유다의 옷 색깔이라든지, 까만색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어 검은 고양이를 마녀의 종이라고 여겼다든지(그런가하면 초록색은 행운의 색인 동시에 불행의 색으로 취급된다) 등등. 그러나 나로서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소 컬러풀한(?) 카드맨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그저 제이크의 세계가 바뀐 정도에 따라 카드맨도 옷을 갈아입는 게 아닐는지. 종국에 일이 틀어지자, JFK는 제이크로부터 팽(烹) 당하긴 했지만 ㅡ 어떤 의미에서는 말이다 ㅡ 딱 이 정도가 나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의 발단에는 여자가 있으니까. 새디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숙녀니까. 단 고민되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을 저장할지 다음번에 새로 시작할 마음으로 과감히 꺼버릴지 하는 건데…… 나도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게임을 하다 보면 이런 기로에서 고민하곤 하니까 말이다. 'resume'을 누를지 아니면 'abandon'을 누를지. 전자는 계속 이어서 할 수 있지만 이미 지나온 것을 바꿀 수는 없고, 후자는 누적된 것을 다 잃어버리지만 처음의 시점부터 아예 다른 방향으로 시작할 수 있다(그럼에도 애쉬튼 커처는 아예 스스로를 죽여 버리기도 하지). 물론 어느 쪽이든 간에 5, 60년대의 것들을 엿볼 수 있는 독자들만 좋은 일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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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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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노 쇼고 曰, 「いろいろな意味で今までにやったことのないこともやっているので、何とも言えません。読んだ人がどういう風に感じるのかが、楽しみというか怖いというか。今回はシンプルに物語を書くことを心がけてつくったので、そのあたりを読んでいただければと思います。」 이대로라면 '참 속 편한데' 라기보다는 '쿨해도 너무 쿨한 거 아냐?' 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얄밉다. 내용도 현실성이랄지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긴 해도 짐짓 모르쇠로 방어하는 무관심한 필치는 발군이다. 소설은 작가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든가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또는 누쿠이 도쿠로의 『통곡』과 궤를 함께하지 않을까 했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버렸다. 그것도 뒷맛이 좋지 않고, 씁쓸하게. 그런데 말인즉(표현이 이상할까?), 슬픈 것도 재미의 일종이고, 무서운 것도 재미의 한 축이며, 심지어 짜증이 난다 하더라도 넓은 의미로 보자면 그것 역시 재미의 하위 카테고리에 들어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한 번 더 꼬아서, 그러니까 '히라타의 간파(혹은 오해)'가 의도된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아니면 마스미 역시 결과를 예측했으면서도 의도한 것이라면). 그 이후는 작가가 알아서 할 일이고. ……'마지막 5페이지로 세계가 반전'이라는 식의 가열한(!) 일본 측 카피가 절반의 성공으로 느껴질 만큼, '몸서리가 쳐지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어이쿠 하고 놀라기는 했다. 앞서 말한 '부족한 개연성' 보다는 이쪽이 낫달까, 아니면 미스터리 같지 않은 미스터리랄까. 우타노 쇼고답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의 세계에서 대체 누가 헌신했고 누가 구원받았나? 누가 거짓말을 했고 누가 보상받았나? 누가 주체이고 누가 객체인가?



저자 인터뷰 ①


저자 인터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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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집사를 믿지 마라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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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무리 '전형적'이란 관형사인지 명사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 표현을 질릴 대로 우려먹어서 이제는 신물이 난다고 해도 이번 한 번만은 더 써야겠다. 『네 집사를 믿지 마라』는 전형적인 칙릿에다가 전형적인 미국식 사르카즘(이것도 많이 썼지, 참)으로 똘똘 뭉친 소설이라는 것. 지금 나는 책을 완독하자마자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협박, 사건, 사고(라 부를 수 있다면) 도청, 사기, 감시 따위에 놀아나고 싶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이지처럼 서류 보관실에 11시간이나 감금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싫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족속은 뻥 뚫린 곳이건 폐쇄된 곳이건 상관없이 어느 한군데에 붙박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군대에 있을 적에 지뢰를 밟은 채로 17시간이나 있어봤지만 그런 건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물론 거짓말이다). 그나저나 이 품행제로 스펠만들에게는 도저히 희망이 안 보인다. 개과천선? 인과응보라면 몰라도 그들에게 참사람이 되라는 식의 간곡한 부탁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ㅡ 어렸을 때(적어도 바지에 오줌을 지릴 정도의 나이가 지나서), 친구를 골탕 먹이기 시작하면 그 친구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 때까지 끝장을 보는 녀석이 한둘쯤은 있지 않았나.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이들이 한데 뭉쳐 사는 이유는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말장난? 장전 준비. 휴대전화 몰래 보기? 이미 완료. 남의 집 쓰레기봉투 훔치기? 돈만 준다면야. 싫어하는 티셔츠 억지로 입히기? 선동 시작. 애인이 다른 남자와 선보는 것? 참을 만큼 참았다. 여긴 웬일이냐고 묻는 말에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다고 말하기? 다들 그러지 않나. ……『네 집사를 믿지 마라』를 읽는 데는 번역의 묘미도 한몫 했다고 본다. 시리즈를(본작은 네 번째) 통째로 읽지는 않았지만 전작들이 어땠을지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작가가 페이지의 하단에 넣은 각주만 해도 그렇다. 최소한 이자벨이란 인물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은 곳곳에 널린 각주만으로도 충분하다(상당한 센스다). 소설은, 조금은 악랄한 시트콤처럼 보이는데 ㅡ <프렌즈>의 정색한 조이보다 더! ㅡ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이리라(적어도 여든 넘은 남자가 위트를 가지고 사는 모습은 언제 봐도 멋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20편이나 30편이 훌쩍 넘게 출간되어 그들의 세월을 훑을 작정이라면 나는 더 이상 읽을 용의가 없다(이유는 이미 앞서 밝혔다). 물론 다섯 번째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아마 여섯 번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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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작별 트래비스 맥기 Travis McGee 시리즈
존 D. 맥도널드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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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ge Specialist. 트래비스 맥기의 직업이란다. 그러면서 보수는 의뢰인이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금액에서 경비를 제하고 남은 것에서 절반. 도둑에다가 사기꾼이다. 더군다나 여자까지 후리고 다니는 꼴이라니(자의건 타의건). 섹스와 폭력이 점철된(?) '전설'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이 『푸른 작별(The Deep Blue Good-by)』로부터 시작한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전체적인 흐름 역시 말랑말랑한 필립 말로와 까끌까끌한 샘 스페이드와도 약간 다르다. 으레 그렇듯 주인공을 도와주는 협잡꾼 장물아비도 하나 등장해 주시고 말이지 ㅡ 이 점에서는 매그레와도 다르군(그럴 수밖에).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구분 짓는 '본격'도 아니니까 그저 능수능란한 문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배빗』에서 속물 덩어리를 맛보았다면 여기서는 천박(이라면 천박)의 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서. 주인공 맥기를 포함해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마초도 등장하지 않는 본작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영화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고 있는데, 이 얘기는 꽤 오래전부터 나와서인지 지금은 좀 시들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기야 그의 인상은 미국인의 전형이긴 한데 썩 신뢰 가는 얼굴은 아니라서……. 어쨌거나 맥기가 셜록 홈스를 흉내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까지 쥐어터질 줄은 몰랐다. 상대방을 끝장내는 것도 참 우악스럽기 짝이 없고. 게다가 맙소사, '찰리네 숯불구이'라니(아마도 Charlie Char-Broil?). 명륜동 막걸리집이나 원할머니 보쌈도 아닌 마당에 찰리네 숯불구이라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에서 급작스런 이스트 터닝이라니! (말년에 유격이라니!) 뭐 우리말로 옮겨놓으니까 당연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좀 구수한 감은 있다. 하여간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커트 보네거트가 「앞으로 천 년 뒤의 발굴자에게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은 투탕카멘의 무덤 같은 보물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던졌으니 나로서는 차근차근 작품을 읽어나가기만 하면 되지 않으려나. 마지막으로, 페미니스트가 맥도널드를 읽으려 하면 절대적으로 말릴 것을 당부하면서.



덧) 아래는 UMC의 「자영이」란 곡인데, 『푸른 작별』에 나오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보니 문득 떠올랐다. (모 사건과는 관련이 없음. 그 사건이 있기 전 만들어진 노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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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꽃, 눈물밥 - 그림으로 아프고 그림으로 피어난 화가 김동유의 지독한 그리기
김동유 지음, 김선희 엮음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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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간해서는 에세이를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꽃, 눈물밥』은 그림 이야기를 품고 있어 읽기가 가능했다. 좋아하는 것에의 천착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문득 그것만의 형형한 빛을 내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제 흥에 겨워 혼자서 일구어내는 외로운 투쟁이라는 것 또한 안다. ……밖에 눈이 날리든 비가 내리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지. 반드시 내가 이 세계의 톱니바퀴 중 하나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굳이 외면하면서까지 침잠한다는 것은, 양껏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물리는 것과 매한가지다. 그래서 어렵다. 화가 김동유는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중 이미지'는 음악으로 따지면 모노가 아니라 스테레오다. 보통 팝아트 작업은 빨리빨리 대량으로 생산하지만 나는 거꾸로 더 아날로그적으로 작업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이중그림(the face homage)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나는 모른다. 단지 재미있고 멋지고 흥미로울 뿐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재미'와 '흥미'가 최고의 찬사이니, 그는 그림에 문외한인 그저 그런 소시민의 마음까지 동하게 만든 셈이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구별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있을 텐데, 산업자본주의는 잉여가치를 남기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않나. 그런데 이제는 죽고 없는 리오타르의 말을 들으면 더 알쏭달쏭해진다. 「어떤 작품도 우선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하게 될 수 있다.」 김동유의 이중그림도 자꾸 보다 보면 언젠가는 처음 그것을 맞닥뜨렸을 때 느꼈던 감정을 더 이상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하얀 도화지에 채울 그림은 성공한 화가의 자기 복제가 아닌 새로운 시도'여야만 한다. 나는 『그림꽃, 눈물밥』에서 일말의 교훈보다는 그저 그림을 보았다. 밖으로 움직였다가 분쇄해 다시금 집적되는 '그림꽃'을.



「John F. Kennedy & Marilyn Monroe」

2010, Oil on Canvas, 194x1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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