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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집사를 믿지 마라 ㅣ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내가 아무리 '전형적'이란 관형사인지 명사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 표현을 질릴 대로 우려먹어서 이제는 신물이 난다고 해도 이번 한 번만은 더 써야겠다. 『네 집사를 믿지 마라』는 전형적인 칙릿에다가 전형적인 미국식 사르카즘(이것도 많이 썼지, 참)으로 똘똘 뭉친 소설이라는 것. 지금 나는 책을 완독하자마자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협박, 사건, 사고(라 부를 수 있다면) 도청, 사기, 감시 따위에 놀아나고 싶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이지처럼 서류 보관실에 11시간이나 감금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싫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족속은 뻥 뚫린 곳이건 폐쇄된 곳이건 상관없이 어느 한군데에 붙박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군대에 있을 적에 지뢰를 밟은 채로 17시간이나 있어봤지만 그런 건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물론 거짓말이다). 그나저나 이 품행제로 스펠만들에게는 도저히 희망이 안 보인다. 개과천선? 인과응보라면 몰라도 그들에게 참사람이 되라는 식의 간곡한 부탁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ㅡ 어렸을 때(적어도 바지에 오줌을 지릴 정도의 나이가 지나서), 친구를 골탕 먹이기 시작하면 그 친구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 때까지 끝장을 보는 녀석이 한둘쯤은 있지 않았나.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이들이 한데 뭉쳐 사는 이유는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말장난? 장전 준비. 휴대전화 몰래 보기? 이미 완료. 남의 집 쓰레기봉투 훔치기? 돈만 준다면야. 싫어하는 티셔츠 억지로 입히기? 선동 시작. 애인이 다른 남자와 선보는 것? 참을 만큼 참았다. 여긴 웬일이냐고 묻는 말에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다고 말하기? 다들 그러지 않나. ……『네 집사를 믿지 마라』를 읽는 데는 번역의 묘미도 한몫 했다고 본다. 시리즈를(본작은 네 번째) 통째로 읽지는 않았지만 전작들이 어땠을지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작가가 페이지의 하단에 넣은 각주만 해도 그렇다. 최소한 이자벨이란 인물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은 곳곳에 널린 각주만으로도 충분하다(상당한 센스다). 소설은, 조금은 악랄한 시트콤처럼 보이는데 ㅡ <프렌즈>의 정색한 조이보다 더! ㅡ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이리라(적어도 여든 넘은 남자가 위트를 가지고 사는 모습은 언제 봐도 멋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20편이나 30편이 훌쩍 넘게 출간되어 그들의 세월을 훑을 작정이라면 나는 더 이상 읽을 용의가 없다(이유는 이미 앞서 밝혔다). 물론 다섯 번째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아마 여섯 번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