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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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음. 내가 보기에 마초는 아냐. 마지막에 로셸을 때려치웠잖아. 단지 ‘마지막 한 번’이란 게 좀 걸리긴 하지. 하지만 심지어 강간하거나 강간당하거나 핥거나 치마를 추어올리는 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다. 문제는 솔직함을 덮고 점잖은 체할 수 있냐는 건데, 그렇게 못해서 이건 마스터피스, 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신춘문예에『여자들』을 냈다간 바로 아웃이다. 사실 어딘들 그럴 테지. 나는 섹스를 통해 신과 합일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고, 섹스를 하고 나면 편두통이 사라지며, 다른 애들의 부러움을 사려고 인기 있는 남자와 섹스를 하고,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남편이 반대할 것 같으면 섹스를 해준다는 여자를 수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이런 얘기는 대체 왜 여자들이 섹스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늘어놓은 어떤 책에 나와 있기도 하다. 냄새, 얼굴, 태도, 유머 면에서 치나스키는 합격이다. 특히 침대 위에서. 섹스는 교환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단순한 희열 때문에 이루어지기도 하며 의무감으로 인해 인간을 구석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건강상의 이로움도 있다고 여기고 싶은데, 여기서 자꾸 섹스 얘기만 한다고 색정광으로 몰리는 것 또한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이 책에 대해서는 이것밖에 얘기할 게 없다! ‘옮긴이의 말’의 ‘이 소설에서 치나스키가 하는 일이라고는 여자들에게 사정(事情)하고 사정(射精)하는 것뿐이다’라는 대목은 그래서 재미있다……. 나는, 극에 달하면 다시 반대로 돌아온다고, 그러니까, 여기에 낭만이 있는 거라고 본다. 더치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씹할’ 소리가 튀어나가고, 배척당하기 위해 배척하며, 무엇보다 여자들의 속내를 기가 막히게 알아낸다. 그리고 치나스키는 적어도 여자를 속이진 않는다. 뭐, 그의 삶에서 굉장히 중요했던 리디아에겐 뻔히 보이는 거짓말도 하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대놓고 들킬 것을 상정하고 있다. 그럼 이제 뭐가 남았을까. 튼실한 보라색 물건밖에 없나? 과거 에드워드 애비가 그의 작품으로, 거세해서 영원히 감금시켜야 한다는 평을 들었던 게 기억난다. 그는『몽키 스패너를 든 강도들』에서 아주 ‘점잖은’ 환경운동가들을 그렸지만 거세당해야 한다는 혹평을 들었다. 부코스키야 어련하시겠어. 그건 그렇고, 치나스키가 그러길, 친절한 사람이 섹스를 더 잘한다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꽤 친절하다고…… 라는 건 반쯤은 농담이고,『여자들』을 읽기 전에『우체국』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 편이 충격이 덜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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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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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악!

 

 

 

 

덧)

송구하다. 이게 내 감상이다. 영원한 임시 비정규직 보결 사무원 치나스키.

그러니 (치나스키식으로 말하자면) 이 좆같은 책을 당장 읽지 않으면 좆될 줄 알아.

읽기 싫으면…… 그냥 그러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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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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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1948년 UN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제1조에 명시된 항목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각국의 지식인, 정치지도자들에 의한 의견으로 이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뜻밖에도(?) 국제적 권위를 얻게 되어 수많은 나라들의 헌법 구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어떤가. 이 ‘만인에 평등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현상을 보면 그것은 결코 ‘만인에 평등하지 않다.’(서구식 자본주의의 헤게모니가 담겨있다는 것 또한 비판을 받지만 말이다) 왜? 그것은 선언이 각 나라의 현실에 맞춘 ‘경제적’ 인권실현의 뜻을 무의식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제25조를 한번 볼까. 「모든 사람은 먹을거리, 입을 옷, 주택, 의료, 사회서비스 등을 포함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것은 세계인권선언에 분명히 명시된 내용이다. 무상급식, 학생인권조례 등을 관통하는 것 역시 바로 이 세계인권선언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꽝, 이다. 자, 제20조를 보자.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세계’인권선언이지만 왠지 2008년부터 불붙은 한국을 염두하고 만든 조항 같기만 하다……. 문제의식, 말로만 문제의식이 아니라 좀 더 새로운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이건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공적 영역이다. 소위 국제레짐.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범. 하지만 국제레짐은 기본적으로 국가들이 서로 상호의존적일 때만 가능하지 않나. 그런데 알다시피 국제사회는 아나키즘의 덮개 아래 있다. 왜일까. 어떤 나라든 상호의존이라기보다는 배타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정치적 힘을 이용하는 소수집단만을 위한 인권은 인권이 아니다(특히 아시아를 보면 잘 드러난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세계인권선언은 일상 언어에서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내 생각은 그렇다, 이다. 비록 아무리 정직하고 누구나 끄덕일만한 내용을 담고 있을지언정 그것이 텍스트를 벗어나 사람들의 생활에 파고들면 순식간에 악마적으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궁극적인 문제는 텍스트 밖에 있다. 앞서 말했듯 국가가 우리를 상호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일러도 안 된다면 ‘분노’라도 내어 침을 뱉는 게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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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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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얘기지만 야마구치 마사야의 책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生ける屍の死)』에는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옛날 옛적 하느님이 생물의 수명을 결정할 때의 일. 하느님이 당나귀에게 30년의 수명을 주자 당나귀는 ‘무거운 짐을 지고 30년이나 살기는 싫다’고 하여 하느님은 18년의 수명만 주었다. 그 다음 개에게 똑같이 말했지만 개 역시 ‘30년은 너무 길다, 늙어서 이빨도 없이 구석자리에서 낑낑대는 건 싫다’고 하자 12년의 수명만 주었다. 그 다음으로 원숭이 또한 ‘그렇게 오랫동안 기묘한 재주를 부리며 인간의 웃음을 사는 건 너무하다’고 하여 10년의 수명만 주었다. 하느님은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30년의 수명을 주겠다고 하자 인간은 ‘30년 동안 애써서 겨우 집을 짓고, 이제부터다 싶을 때 끝난다니 시시하다, 30년은 짧다’고 했다. 하느님은 당나귀의 18년을 더 주겠다고 했지만 인간이 그것도 짧다고 하자, 개의 12년과 원숭이의 10년까지 주어 결국 인간은 70년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진짜 수명은 30년이다. 그 나이를 지나고 나면 인간은 당나귀의 18년 수명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개의 12년 수명 동안 이가 빠지고 끙끙대며, 마지막 원숭이의 10년 수명 동안 둔해지고 멍청한 짓을 해서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 그런데 인간은 이미 마지막 10년에 다다라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뭐,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아주, 무척이나 오만한 발상. 우리가 침묵하면 봄도 침묵한다. 핵, 멕시코 만 기름유출, 4대강 등등. 침묵하는 봄을 맞으려고 안달이 났다. 물론 지금은 책이 집필될 당시와 시대상황이나 법규 등에서는 다른 면이 많지만, 가해자 측면의 우리에게서는 과거와 그다지 변화를 느낄 수 없다. 아, 한 가지, 일종의 과학연구라는 것이 어느 때는 파괴연구, 살인연구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의 봄』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고 선구자적 역할을 했는지 알만하다. 루소가 문명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염증을 느끼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다지만, 희한하게도 인간은 정말 ‘자연’으로 돌아가 모든 걸 채취하고 버리고 있다. 음식, 옷, 집, 명예를 원하는 만큼 가지고도 ‘자연’ 또한 가지려고 한다. 이 침묵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줄 봄이 과연 인간의 손에서 나올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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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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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자들’이라니.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를 옮겨놓고서 반란자라는 표지(標識)를 달아놓은 건 왜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작가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최소한 세상을 향해 문제제기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응당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래, 그런 의미에서라면 ‘반란자’라는 타이틀은 꼭 맞다. 사비 아옌은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것들과 그 사회의 지배논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들과 뜻을 함께했으며, 권력의 저변을 이루는 근본적인 속성에 맞서는가 하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많은 이데아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든다.

 

 

노벨상과는 전혀 다른 얘기지만, 이런 의미에서라면 미술가이자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이자 큐레이터이기까지 한 중국의 아이웨이웨이(艾未未)가 왠지 생각난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사실 우리가 현실의 일부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생산적인 현실이다. 우리는 현실이지만, 현실의 일부라는 것은 우리가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인터뷰,『Ai Weiwei 육성으로 듣는 그의 삶, 예술, 세계』)

 

 

처음엔 글보다 사진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 사진들에 뭔가 관통점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인터뷰와 함께 실린 사진들에는, 크든 작든 어김없이 ‘손’이 있었다(흡사 존 네이피어의『손의 신비』라고도 할 수 있을까). 글이 아닌 방법론으로 사회에 자신의 ‘손의 신비’를 뿌리는 이들. 낚싯바늘에 걸린 소리치지 못하는 물고기, 역사책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 차라리 교도소장이 되는 게 바람직한 문화부장관, 인간의 모든 위대함과 비천함을 취하고 있는 권력, 치료제로도 쓰일 수 있는 거장의 문학작품…….

 

 

작가들의 열여섯 가지 이야기에는 자신들의 ‘문학’과 ‘반란’과 ‘인간’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문학, 반란, 인간들 속에는 거꾸로 작가 그 자신들이 있었다. 그 주름 많고 질곡이 담겨있는 손으로 또 다른 자기(自己), 타자(他者)를 그려내고 있었다. 임레 케르테스의 아우슈비츠는 프리모 레비를, 월레 소잉카는 알렉스 헤일리를, 오에 겐자부로는 왠지 펄 벅과 영화《샤인》을 연상케 했다. 그들은 모두가 상처 아닌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투쟁 아닌 투쟁을 한다. 왜냐고 묻지 마라. 저들은 ‘새로운,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니까.

 

 

덧) 아, 역시 제목에 ‘반란’을 넣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이 책의 원제는 ‘Rebeldia de Nobel’이다. 영어로는 ‘Nobels Rebell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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