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 답이다 -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
리처드 윌킨슨 & 케이트 피킷 지음, 전재웅 옮김 / 이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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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은 사회를 좀먹는다.’ 서문의 타이틀이다. 그런데 참 애매모호한 것이, 대개 이런 사실은 누구나 다 빠르게 직감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우리의 눈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 이 책의 원제 『The Spirit Level』은 그래서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하겠다. 인류는 지금까지 엄청난 풍요를 누려오긴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정치판에서도 이런 평등에 관한 쟁점은 와류에 휩쓸리며 오갈 데가 없어 보인다. 평등이란 단어만 나와도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기만 할뿐이지. 많은 선진국이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사회적으로는 실패하고 있다 ― 이 대조되는 두 현상은 중요한 이정표다(p.22). 특히 저소득층의 사회 구성원들이 더 많은 문제를 겪는 이유는, 그들이 처한 환경 자체가 문제를 일으킨다기보다 그들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문제들에 더 취약하기 때문에 사회 ‘밑바닥 계층’에 속하게 되는 것 같다. 수치나 가난이라는 낙인 없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자신 있게 내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애덤 스미스의 강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p.45). 불평등이 매우 강력한 사회 분열 요소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분명히, 불평등은 분열을 낳는다. 특히 시장 민주주의에서의 사회 이동성이란 얼마나 벅찬 일인지! 가정에 있는 물건들이 사회적 계급의 상징으로 사용되고(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들을 따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받아 엘리트가 된다. 그럼 그렇게 자란 상위층은 무슨 일을 할까. 하위층이 상향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지 않던가 ― 알량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엡스타인(Joseph Epstein)이 말하는 우월감이란 이런 것이다. ‘BMW 740i에 앉아 자신이 가난한 속물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면서 (...) 빨간 신호등 앞에 멈췄을 때, 내 차 옆에 선 촌티 나는 캐딜락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조용히 음미하는 것이다. 또한 내 딸이 하버드에서 미술사를 전공할 때, 방금 인사 받은 여자의 아들이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포토저널리즘을 전공한다는 이야기를 기껍게 들으며 느끼는 조용한 기쁨.’(p.205) 이게 정서적 측면에서 볼 때 문학적으로 느껴진다면 그보다 확실하고 무섭게 실감할 수 있는 것은 그래프와 수치다. 여기서 가장 취약하고 부족한 것은 ‘평등해지려는 정치적 의지’라고 본다. ……일본이나 스웨덴을 보면 자꾸 슬퍼지는데, 정치판과 기득권(특권)층의 논쟁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을 놓고 벌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더욱 더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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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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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에는, 나는 100%까지는 동의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좋은 말 ․ 올바른 말을 이해하고 알고 있으면 된다는 거다. 사실 책에 나온 대로 모든 말을 억지로 고치게 되면 굉장히 어색할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뿌리 깊은 글쓰기』를 읽으며 아, 앞으로는 이렇게 고쳐 말하고 쓰는 게 맞는 거고 당연히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게 아니라, 우리말의 뿌리를 알고 바른 표현을 습득해 그것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본문에서 ‘나무 벤치’를 ‘나무 걸상’으로 다듬는 부분. 당장 이렇게 바꿔버리면 혼란스럽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의미가 잘 흐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저러저러한 ‘미국말’은 이러이러한 우리말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정도만 알고 가면 되겠다. 물론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도 있고 거부감 드는 설명도 있다. 「저 같은 사람들이야 ‘싱글 맘’이나 ‘싱글 대디’가 낯설 뿐 아니라 낯부끄러운 낱말이라 느끼지만, 이 나라 구석구석 이 낱말이 두루 퍼집니다. 이 낱말을 쓰는 분들은 더없이 당차고 떳떳하며, 영어로 가리키는 당신들 이름이 번듯하다고 느낍니다.」(p.185) ― 바로 이 부분, 첫 문장은 아무렇지 않게 읽었지만 그다음 말이 우습다. 대체 누가 당차고 떳떳하며 번듯하다고 느끼는가. 물론 그런 이들도 있겠지만 ‘싱글 대디’를 ①아버지와 아들네 ②아버지와 딸네 ③아빠만 있는 식구들, ‘싱글 맘’을 ①어머니와 딸네 ②어머니와 아들네 ③엄마만 있는 식구들, 이렇게 바꿔버리면 지금으로선 어색하기 그지없다. 당연히 우리말 표현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쓰기는 버거워 보인다. 그럼 무조건 짧고 간편하게만 고치면 뭐든 괜찮다는 거냐, 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취지도 알겠고 이해도 되지만 용납되지 않는 부분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앞서 말했다. ‘이해하고 알고 있으면 된다’고.

 

 

참 좋고 흥미로운 책이며 아, 그래, 잠깐만 생각해보면 예쁜 우리말이 있었지,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부분적으로 왠지 강요당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그러나 화내기 전에 생각해보자. 나는 ‘우리말’을 얼마나 알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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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 - 하 - 미야베 월드 제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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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한효석의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 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 시리즈 ― 찾아보고 놀라지 말라 ― 는 인두겁의 사회 ․ 문화적 징표를 보여준다. 각 작품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감추고 있긴 하지만 ‘인간의 쓸데없는 피부’에 대한 것만은 동일하다. 다음은 한효석 작가의 말. 「5밀리미터만 벗겨도 우리는 고깃덩어리다. 부와 명예를 가졌을 때에 자신을 신격화하고 착각하며 남을 지배하려 하다 보면 동물들 사이에서는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마루미의 바다에 토끼가 날면서부터, 이 고깃덩어리들 사이의 카드놀음이 시작된다. 드라마틱하다는 건 이런 거로군.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가가 님의 신비가 끝내 신기루로 남을 것임을 짐작했을 땐 좀 너무하다 싶었지만 어차피 그보다는 ‘가가 님과 아이들’의 이야기니까 뭐 그쯤은 봐주기로 했다(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인즉슨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낸 셈. 홑 떨어져있는 가가 님임에도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데, 오히려 외딴집을 둘러싼 바깥의 외딴집들이 더 두려움에 떨게 되고 ― 우사나 호가 시도하는 선문답은 좀처럼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으면서 마루미의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진다. 그리고, 적어도 라스트신을 향해 갈 때에도 와타베와 우사는 살아있어 주길 바랐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었다. 이래서는 ‘민폐 가가’다. 그 때문에 와타베의 르상티망이 과연 제대로 결실을 맺은 것인지, 우사와 호의 텔레파시가 제꺽 잇닿아있긴 한 건지도 의문스러워진다.

 

 

 

「비는 누구의 머리 위에나 똑같이 내린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ㅡ 하권 본문 p. 338

 

 

 

읽어보면 알겠지만 『외딴집』은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할 때 그 일상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 주어진 시대를 백그라운드로, 연기하는 건 개개인이. 그런데 이따금 이 작품을 두고 쉽게 읽을 수 없다는 얘기를 주워듣는다. 에도 시대의 어려운 관직명 때문일 수도 있고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변죽만 울리는 가가 님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얘기들은 작품을 읽을 때의 노선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듯싶다. 초반부터 시작되는 잠잠한 드잡이를 맛보고서도 이런 소리가 나올까. 게다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어떤 현대 스릴러물에도 뒤지지 않는 박진감도 엿보이는데 말이지, 그리고 감동도. 앞서 언급했듯 ‘드라마틱하다’는 건 ― 여기서의 방어기제 ― 호의 바보스러울 정도의 맑음(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호를 보면서, 호의 얼굴 위로 치매에 걸린 우리 할머니가 겹쳐졌다)이 외딴집과 마루미를 무대로 한 수수께끼 같은 원흉에 대립항으로 작용하면서 만들어지는 애달픔에서 파생된다고 본다. 그럼으로 ‘민폐 가가’에서 ‘신(神) 가가’로의 자연스런 연착륙도 이루어진다. 여전히 마지막 맺음은 슬퍼서 싫지만…… 아 씨, 눈물이 다 나네.

 

 

덧) 원제 『孤宿の人』의 ‘人’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마루미에 내리던 비는, 이제 조금은 그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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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도서관
아비 스타인버그 지음, 한유주 옮김 / 이음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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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도서관 사서는 여성 재소자 대상 글쓰기 강좌에서 만난 쇼트(short)에게서「나랑 한 번 할래?」소리를 듣거나 속사포 장광설을 자랑하는 프랭크로부터「신을 믿나?」하는 말을 듣는다. 사실 쇼트의 말을 듣는다면 친절하게 윙크라도 찡긋했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홉스의『리바이어던』을 떠올리며 고독하며(solitary), 비루하고(poor), 악랄하고(nasty), 난폭하며(brutish), 짧은(short) 카테고리로 여성 재소자들을 머릿속으로 가름했다. 그가 그녀의 농담에 멋진 리시브를 하지 못한 이유는 거기 있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교도소 도서관 사서로 취직한 주인공은 한마디로 ‘먹물’이었다.「폭력배들이 언제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것 봤어? 이 새끼들은 일 좀 해야 돼. 일이라도 하는 게 걔들한테도 좋아. 우리는 걔들한테 빚진 거 없어. 걔들이 우리에게 빚을 졌지. 봐, 걔들은 인생을 완전히 망쳤어. 자네는 그들에게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주는 거라고. 자네가 그들에게 일을 시키고 또 그들이 일을 잘해낸다면 그들은 여기서 나가는 날 이렇게 말하겠지. ‘뿌듯한 수감 생활이었어.’ 그러면 된 것 아닌가?」이런 교도관의 말에 분개했다면 주인공 아비는 이미 그들과 같은 수감자가 된 것이리라. 감옥이든 사회든, 세상은 인간의 복수형이 아니던가? 어딜 가나 인간, 인간, 인간이다. 그리고 교도소에는 수감자가 있었다. 교도소라는 공간이 유토피아적 환상을 산산이 깨뜨려버릴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들‘을’ 바라보느냐 혹은 그들‘과’ 바라보느냐의 차이가 될 것이므로. 아비가 조금씩 투어(tour)하는 기분으로 교도소에 드나들 때 비로소 그는 ‘교정’이라는 단어가 과거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감옥의 문이 있던 텅 빈 장소처럼 공허한 말이라는 걸 깨달으리라. 재소자들을 보며 아비가 어떤 종류의 감화를 받든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서로의 관계가 관찰하거나 관찰당하거나 하는 평행선이 아닌 그저 물음표와 느낌표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채는 일일 테니까(이따금씩 온점도 찍어주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똑같이, 동등한, 그런 권리 ― 아비는 재소자들보다 더 재소자같이 되어간다.「너는 체제의 일부가 되기를 선택한 거야. 너는 그 체제로 먹고 살지.」주인공 먹물은 과연 어느 쪽을 선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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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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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텍스트와 서브텍스트의 맞물림. 그거다. 미스터리나 이런 괴담이 갖는 강력한 헤게모니는 현실에서 느끼는 두려운 마음을 일종의 (설명하기 힘든) 형태로 만들어준다는 것에 있다고 여기고 싶다. 뭔가를 맞닥뜨리고 인식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퓽, 하고 쏟아내는 거다. 어떤 생각들을 전부 마음에 넣어 뚜껑을 닫아버리면 그만이지, 하고 쉬이 치부할 수 없다.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짐을 내려놓는다는 뜻도 될 수 있으며, 타자에게 마음을 내비침으로써 그 두려움이 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마지막 이야기「이에나리(家鳴り)」에서 저택을 지키는 관리인 ― 왠지 웃을 수만은 없는 ‘끝판 왕’ 같은 느낌인 걸 ― 이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길목에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을 이『흑백』의 무대인 미시마야(三島屋)라는 주머니 가게에 빗대어 말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아마도 사람들의 마음을 그러모을 수 있는 주머니에 주인공 오치카(おちか)를 대입하려는 뜻이겠지. 그녀의 오빠 기이치(喜一)가「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조금은 구원받았다는 거냐?」라고 묻는 대목은 숙부 이헤에(伊兵衛)가 ‘흑백의 방’을 그녀의 물리치료실로 사용한다는 뜻도 되리라. 사실 이런 전개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잠깐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사소하고 계산적인 게 아니라며 이렇게 말한다.「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내가 뭘 무서워하는지 알아 가고 있는 거야.」살아 있었을 때 저지른 어리석은 잘못에 대한 후회를 듣는다 ― 이거 원 장화홍련이 따로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은『흑백』은 모노노케(物の怪) 이상의 것을 선사한다.

 

 

이탈리아의 소도시 팔치아노 델 마시코(Falciano del Massico)에선 죽음이 불법이라고 한다. 죽는 걸 금지한 조례. 그간 묘지를 할애해 주던 옆 도시에서 더 이상 그렇게 못 한다고 선언하자 시장이 주민들에게 죽지 말라고 법으로 정해버린 것인데, 그가 새 묘지를 세울 때까지 시민들에게 죽지 말라고 명령했단다. 세 번째 이야기「사련(邪恋)」과 네 번째 이야기「마경(魔鏡)」에 등장하는 마쓰타로(松太郎), 오사이(お彩), 이치타로(市太郎) 등은 이래서야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해야하는 것일까……. 그러나 어쨌든 귀신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산 사람이다. 이건 틀림없다. 나와는 ‘다른’ 마음들을 듣는 것. 아니 들어주는 것. 귀신의 처지라면 산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 아닐는지. 그저 잠시만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마음 한켠만 내어주었으면 하는 거다.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 이것들은 어쩐지 친숙하지 않은 상황에 마주할 때만 그 효력이 있는 것 같다.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은「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心外無物]」고 설파했다. 어느 날 제자가 꽃을 가리키며, 세상에는 마음 바깥에 사물이 없는데 이 꽃은 깊은 산에서 저절로 피어나 저절로 지니 그것이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자 선생이 말했다.「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 이 꽃은 그대의 마음과 함께 고요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는 순간 이 꽃의 모습은 일시에 분명해진 것이네. 이로부터 이 꽃이 그대의 마음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네.」음, 그러니까, 만약 꽃을 보지 않았다면 꽃에 대한 사변도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말일 것이다.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거창하고 대단한 일인가(이렇게 적고 보니 작가의 다른 작품『화차』가 생각난다. 단지 말하고 듣는 행위가 질펀한 어둠으로 끝났으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기쁨의 윤리학’은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듣는다’와 ‘말한다’, 이것으로 나는『흑백』은 이미 정의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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