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로 철학하기 - 니체부터 들뢰즈까지 나꼼수를 위한 철학적 알리바이
김성환 지음 / 바다출판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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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 나꼼수……. 나는 '나꼼수(나는 꼼수다)'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2012년에 들어서야 1회를 찾아 약 5분 가량 맛만 봤다. 그리고 스피커를 꺼버렸다. 딱히 재미가 없어서는 아니고. 욕도 '뭘 좀 알아야' 할 수 있는 거다(나꼼수 = 욕이라는 논리는 아니다) ㅡ 나중에 보면 꼭 투표 안 한 양반들이 제일 말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팩트를 알고 의심을 가져야만 욕이라는 애정도 생긴다. 그럼 내가 나꼼수를 듣지 않은 이유는? 예전에 한겨레신문의 '직설'이라는 꼭지가 있었는데 이건 그때와 마찬가지 경우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나꼼수에 대한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나왔다 ㅡ 솔직히 나꼼수를 듣지 않았던 건 나 혼자 쓸데없이 바빠 못 들은 거다! 나꼼수에서 한 것들 중 하나는 수용자에게 모리배들의 머릿속을 까발리는 거였다. 이 『나꼼수로 철학하기』는 대놓고 나꼼수를 편든다(나도 마찬가지). 심지어 '철학'이란 단어까지 붙여가면서. 그런데 이거 나꼼수보다 더 재밌다. 왜냐. 원래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후에 그것을 해석하는 데서 쾌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니까……. 나꼼수가 정치적 선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정치적 선동'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그 선동이란 호도(糊塗)나 오도(誤導)가 아니다. 정치참여와 사유와 의심을 유도하는 것이지. 1%와 99%가 패싸움을 벌인다면 언뜻 1%가 질 것처럼 보이지만 그 1%의 주먹이 만화 「주먹대장」의 그것이라면 게임이 안 되는 거다. 해서 의심해봐야 안다(왠지 '주어 나경원'처럼 들리는군). 그래야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어쨌든 『나꼼수로 철학하기』의 테크닉은 흥미롭고 웃기다(이건 칭찬이다). 뭐든 갖다 붙이려면 안 될 게 없지만 이건 참 적재적소에 철학적 포인트를 들이댄다. 영화 《수취인불명》에서 어릴 적 사고를 당해 한 쪽 눈에 백태가 낀 여고생 은옥을 기억하는지. 은옥은 미군 병사의 '애인' 노릇을 하면서 결국 눈 수술을 받는다(나중에 스스로 그 눈을 다시 찌르긴 하지만). 이 육체적 불구, ㅡ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하는 은옥의, 그런 은옥을 두고 미군과 경쟁하는 동네 청년 지흠의 ㅡ 그리고 정신적 불구들이 바로 우리다. 미군 병사 제임스가 잡지에 실린 여자의 눈을 오려 우리의 눈에 붙여준 거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걸 떼내고 죽은 눈을 찔러야 하지 않을까. 죽은 건 도려내고 재생산 공정에 돌입. 뭐, 이런 논리다. 갑작스런 영화의 비유가 적절치 않건 어떻건 간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생각을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정치도 하고 욕도 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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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의 대중 문학 강의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3
나오키 산주고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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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오키 상이란 건 많이 알고 있을 거다. 그의 친구 기쿠치 간(菊池寬) ㅡ 『무명작가의 일기』와 『아버지 돌아오다』를 쓴 그 양반 말이다, 이걸 모른다고 하면 『진주부인』 정도는 알 수도 있으려나 ㅡ 이 아쿠타가와 상과 함께 그들을 기리고 후진 육성에 힘쓰고자 제정한 문학상이다. 그런데 성이 나오키고 이름은 뭘까, 하고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 풀네임을 적는다. 그의 이름은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다. ……사실 이건 필명이고, 본명은 우에무라 소이치(植村宗一) ㅡ 대학 시절 어느 교수가 '우에무라 슈이치'라고 읽는 걸 대놓고 지적했는데도 못 들은 척 넘어갔던 게 생각나는군, 근데 사실은 그렇게 읽는 게 맞는 거면 어떡하지 ㅡ 다. 여기서 우에(植)란 한자를 둘로 나눠 나오키(直木)를 만들었다. 처음 이 필명을 사용한 때가 서른한 살이어서 그때는 산주이치(三十一)였는데 계속해서 나이를 먹으니(당연하다!) 필명도 계속 바뀔 수밖에. 결국 기쿠치 간으로부터 타박(?)을 받아 나오키 산주고란 필명으로 계속 사용하게 된다. 뭐, 하려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나오키의 대중 문학 강의』(에스노벨 시리즈 중 제3권)를 펴보면 지나치게 세심할 정도로 문학을 구분해놓았다. 하지만 내가 이걸 읽고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대중)문학이란 (넓은 의미로)재미있어야 한다'라는 거다. 실제로 나오키는 이렇게 적는다. 「대중 문예란 표현을 평이하게 하고 흥미를 중심으로 하되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 또는 거기에 인생에 대한 해설과 인간 생활상의 문제를 포함하는 것.」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기술(記述)적 센스가 있을 것. 왜냐하면 문학이란 결국 텍스트의 문제이며 독자가 활자를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문학은 언어의 표현에 구애될 수밖에 없다. 이따금 스스로가 상당한 기교를 지녔다는 것을 피력하려는 나머지, 당최 무슨 의미인지 파악조차 하기 힘든 문장을 갈긴 작가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내가 보기엔 애매모호하게 써놓고 심오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심산이다. 물론 추상적이고 모호한 문장은 때에 따라 굉장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며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소설이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반대로 난삽한 문장도 싫은 건 당연하다). 그럼 당연히 문학이란 '이야기'다. 나는 주제를 불문하고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으면 그걸로 그 작품을 최고라 삼는다. 예술이냐 비예술이냐는 과감히 차치한다. 예술과 비예술이란 말의 의미도 모르겠거니와 설령 그렇게 나눈다고 해도 나 같은 독자에겐 쓸모 없는 논리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간과하고 있는 건, 적어도 이런 말들은 내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라는 거다……. 상당히 어중간한 말이다. 그러나 재미있으면 읽는다, 라는 인과관계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이것은 ㅡ 작가와 문학 · 문학과 독자를 떠나 이 책과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출판사 북스피어의 에스노벨 시리즈 중 가장 첫 권 발행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멋지다. 수요가 적을 수도 있다. 다음 시리즈가 출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재미'라는 감정적 요소가 독자와 매치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말에 100% 동의한다.

 

 

 덧) 이 책에는 「대중 문학 강의」와 함께 그의 작품 「간에이 무도감(寬永武道鑑)」도 함께 실려 있다. 그 시작은 다음과 같은데, 첫머리부터 읽고픈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나?

 

桜井半兵衛は、門弟に、稽古をつけながら(何故、助太刀を、このわしが、しなくてはならぬのか?)と、その理由を、考えていた。


사쿠라이 한베에는 제자의 연습을 보아주면서, '왜 이 내가 싸움을 도와야 하는 것인가?' 하고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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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 탱고를 찾아 떠나는 예술 기행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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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가르델의 「포르 우나 카베사(Por una cabeza)」를 오랜만에 들었다. 자그마한 미니 CD가 초판 한정으로 책 뒤에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저 자글자글한 소음마저 달큼하달까.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음악은 너무나 세련되고 매끈해서 날카롭기까지 한데 비해 카를로스 가르델의 음성으로 듣는 건 아련할 정도다. 섹스가 육체의 위로라면 탱고는 영혼의 위로다, 라는 카피가 헛되지 않게 『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유려한 묘사와 함께 곁들여진 사진으로 아르헨티나의 무더운 밤을 맛있게 담아냈다.

 

 

 

그날, 탱고 공연을 보고 나온 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밤하늘에 초승달이 위태롭게 떠 있던 날 (...) 알 파치노가 주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 포스터였는데 거기엔 이렇게 써 있다. 「잘못하면 스텝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추면 돼요.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지요.」 (...) 조금이라도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절대 출 수 없는 춤. 저런 춤을 추는데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 벽에 붙은 포스터의 글씨가 이렇게 읽히기 시작한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돼요. 마음이 엉키면 그게 바로 사랑이죠.」


ㅡ 이병률 『끌림』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 탱고가 원래 남자들끼리 추던 춤이라는 걸. 부두 이민자들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서로 부둥켜안고 추던 춤이라는군. 유흥가를 찾은 노동자들이, 육체의 만족은 얻었지만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자기들끼리 탱고를 추었단다. 그렇게 시작된 탱고는 노랫말도 붙여지고 반도네온 등의 악기로도 악단이 구성됐으며 점점 하류층에서 중상류층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음악을, 우리는 너무나도 유명해진 「포르 우나 카베사」로 오늘날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알게 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시각장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도서관장까지 했던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탱고의 가사도 썼다는 것. 허, 이래서야 정말 나는 탱고란 문화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던 거였다……. 다시 책을 보자면 이건 비단 탱고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아르헨티나라는 도시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도 말했다.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너무나 좋아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 도시를 좋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질투심과 같은 사랑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일본어가 아니라 에스파냐어를 전공할 걸 그랬나…….

 

에이, 그냥 가르델의 노래나 들어보자.

▶ (클릭) http://youtu.be/SJ1aTPM-d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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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평 - 퇴짜 맞은 명저들
빌 헨더슨, 앙드레 버나드 지음, 최재봉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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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인 책을 읽었을 때 「이걸 책이라고! 뭐 이런 게 다 있어!」, 나는 이렇게 욕하며 책을 집어던진다. 물론 그게 나쁜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내 취향이 아닐 뿐이고,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니까 ㅡ 하긴 그럴 정도면 끝까지 읽기도 전에 중간에서 책 읽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반대로 몹시도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면 감상문 따위를 적으면서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는다. 이런저런 검색까지 해가며 '어려운 말들'도 좀 섞어가면서. 참 바보같은 말이지만 나는 '사악한' 서평은 쓰고 싶지 않다. ①작가가 우연히도 내가 써놓은 감상을 읽고서 좌절에 빠질 것이다. ②그 책을 구입하려던 사람이 내 감상 따위에 구애되어 구매버튼을 클릭하는 걸 주저할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생각에서는 아니다. 나는 비평보다 나쁜 것은 칭찬의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 어떤 서평들은 유감스럽게도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하나의 작품을 놓고 정말이지 악랄하게 평가하는 일은 하지 못하겠다. 내 일개 감상이 파급력을 갖는다는 생각에서도 아니고, 언젠가 내가 악평을 퍼부은 책의 작가가 몰래 내 뒤를 캐 나를 납치한 다음 손톱 밑에 엄청나게 큰 바늘을 꽂으며 고문할 거라는 상상 때문도 아니다. 각설하고 여기서 얘기할 건 '악평'에 대해서다. 『악평』에 담긴 '악평.' 왜 이렇게도 훌륭한 작품에 고약한 평가를 내렸을까 하고 의구심을 갖는 대목도 있고, 역시 '이런 평가는 당연해' 라며 동의를 표하게 되는 구절도 있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책을 들여다보자.

 

 

제인 오스틴에 관하여

나는 사람들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왜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보기에 오스틴 소설은 어조가 조야하고 예술적 창의성도 형편없으며 영국 사회의 빌어먹을 관습에 갇혀 있는 데다 (...) 이 작가의 머리를 사로잡고 있는 단 하나의 문제는…… 결혼할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차라리 자살이라면 더 존중할 만할 것이다.

ㅡ 랠프 월도 에머슨, 『일기』(1861)

 

 

오노레 드 발자크에 관하여

이야기를 꾸며 내는 데에서나 인물 창조 및 구성에서나, 또는 열정을 그리는 데에서 상상력이 부족하다……. 프랑스 문학에서 드 발자크 씨의 자리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다.

ㅡ 외젠 푸아투, 『르뷔 데 되 몽드』(1856)

 

 

『위대한 개츠비』에 관하여

F. 스콧 피츠제럴드 씨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로맨스든 멜로드라마든 아니면 뉴욕의 상류 사회를 곧이 곧대로 묘사한 것이든, 바보 같은 이야기다.

ㅡ 『새터데이 리뷰 오브 리터리처』

 

 

『마담 보바리』에 관하여

플로베르 씨는 작가가 아니다.

ㅡ 『르 피가로』

 

 

『율리시스』에 관하여

『율리시스』를 다 읽었다. 이 소설은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산만하다. 상쾌한 느낌이 없다. 허세가 많다. 상식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적인 의미에서도 상스럽다. 내 말은, 일급의 작가라면 글쓰기에 대한 존중 때문에 이렇게 속임수를 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ㅡ 버지니아 울프

 

 

『햄릿』에 관하여

조야하고 야만적인 작품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라면 아무리 상스러운 사람들이라도 참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술 취한 야만인이 쓴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ㅡ 1768년에 볼테르가 한 말, 『볼테르 작품집』(1901)

 

 

『파리 대왕』에 관하여

……극도로 불쾌하다.

ㅡ 『뉴요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 관하여

……거창한 약속들과 배달되지 않은 선물들로 가득한 책.

ㅡ 『커멘터리』

 

 

『악평』에는 이보다 더 심하고, 보다 악랄하고, 작가의 노고를 망쳐버리는, 시쳇말로 요즘의 불온서적이라 느낄 법한 악평과 작가들에게 보낸 가혹한 거절 편지의 내용도 실려 있다.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공공 도서관이 『허클베리 핀』을 금서로 지정하자 마크 트웨인이 「이제 2만 5천 부는 더 팔릴 거야!」라며 기뻐했다는 '환영받은 악평'의 경우는 애교로 넘어가자. 어쨌든 나 역시 모든 작가들에게, 이 책의 편집자 빌 헨더슨이 서문에 써놓은 말을 해주고 싶다. 「당신들이 웃어 넘기기를, 그리고 계속해서 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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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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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떠오르는 추상의 이미지와 눈[雪] 그리고 가족이라는 점에서 영화 《씬 시티(Sin City)》, 페터 회, 로스 맥도널드가 복합적으로 버무려졌다(이런 이유로 좋은 작품이라 말하는 건 아니고). 그런데 너무 많은 걸 집어넣어서일까.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점은 좋았지만, 반대로 조금 빡빡한 감이 없지 않아 독자의 원활한 개입이란 측면에선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과연 등장의 의미가 뭘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곰팡이 제거반은 체호프의 '발사되지 않은 총'처럼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동시에 범인의 살인 동기 또한 내 타입은 아니었다. 그럼 대체 『스노우맨』의 뛰어난 점은 뭔가. 내가 보기엔 '밸런스'다……. 일단 만들어지면 자연스레 녹기 마련인 눈사람의 태생적 명제를 끌어온 것은 매력적으로 보이며, 북 트레일러에 너무 구애된 나머지 초반부터 일종의 '장면'들이 텍스트 읽기를 재촉한다. 과감한 생략과 더불어 과하지 않은 디테일한 연출은 긴박한 속도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독자의 상상을 부른다(앞서 독자의 개입이 힘들다고 한 건 내러티브에 있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 것이다). 말 그대로 텍스트가 그대로 하나의 미장센이 되는 거다. 처음 주인공 해리 홀레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그것도 곧 분산되고 만다. 대부분이 '쓸모 있는' 조연들이었고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역할이 적절하게 부여되어 있으므로.

 

 

또한 현실감. 이 소설에서의 현실감이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리얼리티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면 독자가 받는 보상은 적거나 없다. 그래서 『스노우맨』을 읽게 되면, 허구적 실재를 일단 수용한 후엔 텍스트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만 힘을 소진한다 ㅡ 그래도 나는 이 여정을 끝낸 후에 「이런 소설은 200페이지쯤은 더 있어도 되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니까 이 작품은 독자의 열의를 꺾지도 않고, 극심한 묘사로 혼란을 초래하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심미적 매력에 얽매이지 않았으면서도 영민한 요령으로 '밸런스'를 유지한다. 읽으면서 얼핏 불륜의 죄악 혹은 불륜의 처벌이란 논제를 피력하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그건 아니었다. 말인즉슨 『스노우맨』이 내포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혼전순결'이나 '혼후(後)순결' 따위의 단세포적 이야기가 아니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나아가 '가족신화(family myth)'라고 여겨질 수 있는 거다 ㅡ 이건 가족이란 공동체의 합의된 거짓말로 가장된 것이다. 물론 자칫 확대해설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알레고리에 메스를 들이댄다는 방증은 상당히 농후하다. 왜 작가는 해리 홀레와 독자에게 라디오의 음성을 통해 바다표범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왜 스퇴프의 유전적 결함을 소설의 키워드로 설정했는가? 왜 여기에는 인간의 짝짓기라는 통계가 등장하는가? 뭐, 짚어가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스노우맨』은 본질로 설정한 문제에 스스로 답하는 폐쇄적 구조에서 살짝 비껴나 있다. 이것이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준다는 식의 예술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이 소설이 소위 명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은, 얄팍한 속임수가 없고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속성을 꽤 차분히 조합했다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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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2-04-2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곰팡이맨에 삘받아서 눈팅만 하다 댓글 남겨요.
김전일로 추리를 배운 전 곰팡이맨이 당연하게도 범인인줄 알았지 뭡니까 ㅎㅎ

그레코로만 2012-04-28 09:47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그놈, 뭔가가 있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버려서 약간 실망(?)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혹 다음 시리즈에 그 곰팡이 제거반을 다시 등장시킬 의도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