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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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티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종결지을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무지렁이이면서도 실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인 사람을 끝장내기엔 모리어티만한 정도의 설정은 불가피했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만이 홈즈에 대적할 만한 인물로 그려졌고 동시에 영영 셜로키언들의 미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을지도(모리어티가 가상의 인물이라는 둥, 실은 범죄자가 아니라는 둥, 홈즈의 배다른 형제라는 둥 별의별 이야기도 난무한다). 『셜록 홈즈: 모리어티의 죽음』은 애설니 존스 경감과 핑커턴 탐정 사무소(도일의 『공포의 계곡』에서도 등장한다)의 프레더릭 체이스 콤비를 내세워, 홈즈와 모리어티의 마지막 대결이 이루어졌던 라이헨바흐 사건 이후를 다룬다. 홈즈와 왓슨 없는 셜록 홈즈 시리즈이며 진행자는 왓슨이 아닌 탐정 사무소의 체이스. 이야기는 모리어티가 홈즈와 함께 폭포에서 떨어지기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에 모리어티에 버금갈 만한 클래런스 데버루라는 악명 자자한 인물이 떠오르고, 존스와 체이스 콤비는 소설 끝까지 그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기어이 모리어티 시신의 재킷에 비밀스레 꿰매진 솔기를 뜯어 모종의 쪽지를 발견하는데, 내용은 당연히 대문자와 소문자로 이루어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 클래런스가 모리어티를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 그의 얼굴은 알지 못한다는 것에 착안한 존스 & 체이스 콤비는 급기야 모리어티 흉내를 내며 약속 장소로 나가지만 '런던탑에서 날아오른 까마귀가 몇 마리였는가?' 라는 수상쩍은 암구호 앞에서 낭패를 보고, 이어 경시청 폭발 사건, 존스 경감의 딸 납치, 치외 법권에 가로막힌 끕끕수, 과거 홈즈 시리즈에서 다루어졌던 다종다양한 트릭의 차용 등이 어지러이 얽히고설킨다. 홈즈라 하면 나는 일단 가스등과 마차가 떠오르고 호로비츠의 소설에서도 그 같은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이는데(다소 폭력적이거나 얌체 같고 추잡한 짓거리를 일삼는 인물의 행동 탓에 뤼팽의 냄새도 살짝 풍기기는 하지만), 특히 개인적으로 가스등이 나간 상태에서 불을 뿜으며 난사되는 총격, 점멸하면서 앞뒤 분간이 어려운 시각적 분위기와 그 속에서 또다시 생겨나는 칼잡이의 의문스런 행동이 가장 마음에 든다. 결말은, 글쎄, 기막힌 반전이 준비되어 있긴 하나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나뉠 것만 같다. 나는 나름대로 괜찮은 생각이라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으며, 선한 자는 더욱 선하고 악한 자는 더욱 악하게, 라는 말을 적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보았다. 잘 만들어진 패스티시는 원작을 조악하게 난도질하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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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아 1호 - 창간호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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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말마따나 풍경화는 자연 경관이 살벌한 곳에서, 신문은 인간관계가 소원한 곳에서 발달한다든가. 한국 미스터리를 불모지, 척박, 혹은 '없다'는 부정어와 함께 일컫는 건 이런 이유에서일까? 현실이 팍팍하고 온갖 미스터리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마당에 굳이 책에서까지 비일상의 미스터리를 찾아야 하느냐, 하는 거다. 그런데 영화판을 보면 그건 또 아니다. 심심찮게 몇 백만, 몇 천만 관객이라는 표현을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심심찮다'는 말은 이런저런 문학지가 등장했다 사라지는 저간의 광경에 더 어울릴 지경이 되었으니. 이런 만만찮고 녹록찮은 계란유골 같은 와중에 새로이 창간한 격월간 미스터리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 일단 만듦새는 '멋지다'는 형용사 하나만으로 충분히 멋지다. 특히 겉표지는 직관적다 못해 야시시하기까지 한 디자인을 취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바타유는 에로티즘을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 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야스이 도시오의 대담집 『밀실 입문』 연재분은 『유리 망치』의 에노모토를 상기케 하고, 한국 소설 속 '범죄의 낌새'를 조망한다는 꼭지 <집안의 괴물들>은 조정래가 자신의 중편에서 묘사한 '상상할 수조차 없도록 비싸고, 머리 위에서 불을 때고 그 머리 위에서 또 불을 때고, 오줌똥을 싸고,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사람이 사람 위에 포개지는 아파트'의 무시무시함을 떠올리게도 한다. 출판사 관계자들의 한국 미스터리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법의학자의 사건 기록 들추기와 경찰서 출입 기자의 취재 비화 또한 흥미롭다. 확실히 한국 미스터리는 최근 들어 판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때마침 하늘의 도우심이런가. '장르'와 '순'이라 구분 짓는 한국 문학판의 수상쩍은 심보에 맞서 바로 그 장르문학을 다루는 잡지가 탄생한다는 것은('장르'와 '비장르'가 실은 더 어울린다). 게다가 이미 주화입마에 빠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매체들이 몇몇 있었으니 독자 된 입장에선 기대와 불안감이 동시에 드는 것이 사실이어서, 『미스테리아』가 들어올 적엔 보무당당, 나갈 땐 죽상이라는 3D 아르바이트와 동의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장르문학의 옐로페이지가 되는 것도 원치는 않는데, 일상의 미스터리를 자유롭게 탐색하겠다는 편집자의 변이 반가운 것은 앞으로 잡지에 싣게 될 다종다양한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소망이 함량 미달의 턱없는 바람이었음이 밝혀질지, 신통방통하게도 대법원 확정 판결만큼이나 일호의 가차 없이 들어맞을지는 조금 더 두고 볼 노릇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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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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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구태여 설명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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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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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60년대라는 상투적 표현에 따라 나 또한 ‘격동의 80년대’를 살아왔다며 때때로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향해 당시의 느낌과 분위기를 희화화해 전달하기도 한다(내가 ‘꼰대들’을 싫어하면서도 이제는 나 자신이 ‘꼰대’가 된 셈이다). 과거를 자꾸 이야기하다 보면 내세울 것이 과거뿐인 처량함에 휩싸인다는 말도 있으나, ‘어쨌든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 쉬 잘라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현재는 과거와 다르고, 미래 또한 과거가 될 현재와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저 아련한 노스탤지어,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다양한 매체를 통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라는 방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분명 브라우티건의 노스탤지어는 나는 어렴풋하게라도 겪어보기는커녕 그 시대가 어떤 시간 주기를 가지고 작동했는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는 완벽한(여기서 ‘완벽하다’는 형용사는 질 나쁜 부정어와 함께 쓰였다고 봐야 하겠지만) 낭만과 예스런 향수와 추억을 가지고 올는지 모른다(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 앞으론 2000년대가 아련한 노스탤지어가 될 거다. 더 이상 60년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지 않을 것이므로). 물론 『워터멜론 슈가에서』와 『미국의 송어낚시』에서 줄기차게 송어(과거)를 끄집어냈던 것과 대동소이하지만 이쪽은 다소 힘을 뺀 수필처럼 상대적으로 덤덤한 기운이 있다. (맥락이 전혀 맞지 않으나, 책을 중반쯤 읽었을 때 영화 《쇼생크 탈출》이 떠올랐다. 앤디의 수수께끼 같은 지령에 따라 벅스톤의 흑요석을 찾으러 가는 레드의 모습.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느릿느릿한 버스를 타고, 히치하이킹을 하고, 고동색 웃옷을 벗고 땀을 식히며 끝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은 무척이나 ‘느렸다’) 특히 삼분의 일쯤 읽다 보면 「낡은 버스」라는 글이 나오는데, 거기서 ‘나’는 날씨가 좋아 버스를 타게 된다. 그런데 버스 안 승객은 20대인 나와는 달리 죄다 6, 70을 넘긴 노인들뿐이다. ‘나’도 그들도 불편하고 당혹스럽다. 결국 ‘나’는 목적지에 가려던 생각을 바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버리고, 그러자 모두가 그것을 반기며 기뻐한다(마치 저 옛날 백인투성이인 버스에 외따로 ‘침입한’ 흑인 같다). 낡고 오래되어 모든 것이 느리게만 흘러가는 시골길 사이로 갑작스레 뛰어든 포드의 대량생산 자동차가 따로 없었던 거다. 이런 ‘완벽한’ 진일보가 한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가 타임머신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날개 달린 자동차가 건물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며, 택시 미터기와 선풍기는 모양만 변했을 뿐 예전의 기능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문득 몇십 년을 뛰어넘어 먼 과거를 돌이켜보는 순간 그것들은 상당히, ‘완벽하게’ 달라 보인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가 보편성을 띠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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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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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아니다. 첫머리의 '재벌여지도'가 아닌 '노동여지도'를 그리려고 애썼다는 가만한 토로 말이다. '노동여지도'를 읽으면서도 동시에 '재벌여지도'와 같이 느껴지는 것은 상반된 두 가지 사실이 전혀 어긋나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으로, 결코 이것은 모순이나 이율배반이 아닌 이음동의어인 거다.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마음,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이라는 그리움, 침묵의 컨베이어 벨트보다는 연대의 노동, 농성 천막이 아닌 활력의 공장.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이라는 부제는 응당 '정직한 땀의 대가'과 짝을 이루어야 할 것만 같은데도, 은근슬쩍 '쇳물'이라는 단어가 어디선가 날아와 쿡 하고 박힌다. 정글 자본주의가 상생경제로, 승자독식 자본주의가 소비자선택 자본주의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기업의 사회 공헌으로, 낙수효과가 소득창출효과로, 재벌이 대기업 집단으로, 그리고 노동자가 근로자로. 실질적인 노동 지도를 만들기도 전에 입말과 글말에서부터 작은 골목골목을 옥죈다. 꼭 일 년 전 출간된 『노동자, 쓰러지다』를 두 번 읽는 기분이다. 그보다 더 전에 있었던 개그 프로그램 꼭지의 '사장님 나빠요'가 유행어가 되었을 무렵,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느낌이다. 50도가 넘는 탱크 속에서의 용접 노동, 머리카락과 휴지 섞인 도시락을 거부하며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던 도시락 거부 투쟁, 그때가 1986년 무덥던 여름이었고, 분명 지금 21세기 어디쯤에도 존재할 것이다.(p.79) 자국인도 이럴진대 외국인 노동자는 더할는지 모른다. 내 아버지는 택시기사다. 이따금 한국에 와 일하는 까무잡잡한 피부색의 남자들을 승객으로 태울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하지만 내가 그런 '안쓰러운' 외국인 노동자였을 때도 있었다. 육칠 년 전쯤 일본에서 일 년 동안 생활하다가 돌아왔다. 이쪽이야 전공이 일문학인 탓에 겸사겸사 좋은 경험을 했다고 여기고 있으나 그쪽 사람들은 나를 외국인 노동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지금 한국사회에서, 또 『노동여지도』에서와 같은 '봉 취급'은 아니었을지라도. '사람 장사'를 한다는 끔찍한 단어 조합에서부터 귀신보다 사람, 사람보다 회사가 더 무섭다는 웃을 수 없는 푸념, 하청의 하청의 하청까지 이어지는 끝도 없는 가지치기까지(훗날 노동자가 될 청년들도 무사할 수 없다. 3포(抛)니 5포니 하는 말도 있으나, 나는 책에서 '1년 세대'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 1년 뒤에 뭐가 돼 있을지 모르고 예측이 안 되는 세대를 뜻하는 말이란다). 박점규의 마지막 한숨, '2015년 이 땅의 노동여지도는 전국이 흐리고 비가 내립니다.' 노동 현장엔 숭고한 노동만이 존재해야 할 텐데, 지금도 그곳 한쪽엔 투쟁의 먹구름이 자리하고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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