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중용 강설 사서삼경강설 시리즈 1
이기동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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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학문의 길은 밝았던 덕을 밝히는데 있고, 백성과 하나가 되는데 있으며, 지극히 좋은 상태에 머무는데 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하니라>

 

 

대학(大學)은 소학(小學)에 대(對)가 되는 말로, 어른들이 하는 학문이라는 뜻과 삶의 도리를 배우는 철학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어른들이 배우는 큰 학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공자는 “배우고 제때에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고 퇴계는 학문을 일컬어 “일생 일대의 기쁜 일“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우리는 즐거움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가. 우리가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문제를 풀고 국어문법을 익히던 배움의 과정이 기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배운 내용은 공자나 퇴계가 말하는 배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왜 우리의 공부는 기쁘지 않은데, 공자나 퇴계가 말한 학문은 기쁜 것인가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가. 의·식·주를 마련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일 것이다. 우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고,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했으며, 취직하기 위해 대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취직이란 결국 내 육신의 먹고 입고 거주하는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질이며 다른 물질을 섭취해야 유지되는 속성을 지녔다. 음식 또한 물질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이 먹어버리면 나는 먹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사회는 제한된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서로 투쟁하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으며, 나 또한 이런 사회에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학문의 목적도 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었다.

 

내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많은 친구들의 불합격을 전제로 하고, 친구들의 진학은 나의 불합격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나의 공부는 근본적으로 친구들을 불합격시켜야 하는 서글픔을 안고 있으며,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내가 낙오되지 않아야 하는 고달픔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공부는 괴로운 것이며 공부에 시달리는 육체는 더욱 고달프다.

 

하지만 앞으로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노력으로 일관한다면, 나의 앞길에는 어떠한 것이 예상되는가. 정년퇴직 후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을 자신을 상상해 보자. 그리고 향유할 수 있는 삶의 기간이 점점 줄어들어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직면하게 될 자신을 상상해 보자.

 

육체를 위해 추구해온 모든 것은 육체가 없어지는 순간 그 가치와 의미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살아오면서 추구해온 모든 것에 대해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면, 한때는 영광스러운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일생은 결국 허무한 것으로 귀결되므로 삶 자체가 그 가치를 잃게 되고 말 것이다. 괴로움과 고달픔을 참고 견디며 노력해온 공부의 대가도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이와 같은 일생을 예견한다면, 앞으로의 생애를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무엇 때문에 살며,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봉착하여,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된다.

 

지금까지 나의 육체를 계속 살아오도록 유도한 근원적인 존재는 바로 ‘살려는 의지’이다. 나의 이 ‘살려는 의지’는 한순간의 정지도 없이 심장을 뛰게 하고, 호흡이 이어지게 하며, 배고플 때는 먹도록 하고, 피곤할 때는 쉬도록 하는 것이다.

 

나의 육체에 작용하는 이 ‘살려는 의지’는 다른 사람의 육체에 작용하는 ‘살려는 의지’나 동식물에 작용하는 그것과도 일치한다. 즉 나의 본질로 존재하는 ‘살려는 의지’와 똑같은 게 너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살려는 의지’를 나의 참다운 존재로 파악한다면 나는 곧 너이며 만물이다. 본질인 나는 나의 육체를 중심으로 파악되는, 남과 구별되는 유한자인 나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본질 세계에서 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용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 무한자이며, 나의 육체를 포함한 만물이 모두 살아가도록 유도하는 '살려는 의지‘이다. 이 의지는 남과 나의 구별이 없으므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나는 남과 나를 구별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갈등인 질투, 미움, 시기, 투쟁, 배신, 압박, 착취, 독재 등이 없는, 영원과 평화, 사랑과 조화로 충만한 아름다운 존재이다.

 

이러한 본질 세계 속의 존재가 나의 본래 모습이라고 한다면, 나의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현재의 나는 본래의 나를 잃고 있는 것이다. 나를 잃어버린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불행한 삶이다.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나를 되찾아야 한다. 공자나 퇴계가 말하는 학문의 길이란 잃어버린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학문의 길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길이 된다. p.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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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집주 - 개정증보판 동양고전국역총서 2
성백효 옮김 / 전통문화연구회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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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사람의 태도는 활을 쏘는 것 같으니 활을 쏘는 사람은 자기의 정신자세를

바로 잡은 후에 활을 쏴서 명중되지 않아도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서 자기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맹자 공손추 편(孟子 公孫丑篇)>  

*돌이킬 반 / 구할 구 / 지어(之於) , 모두 제 / 몸 기 

<仁者 如射 射者正己而後發 發而不中 不怨勝己者反求諸己而已矣 >  

 

              

남을 사랑하는데도 친해지지 않으면 자신의 인자함을 돌이켜 보고

남을 다스리는데 다스려지지 않으면 자기의 지혜를 생각해 보고

남을 예우하는데 답례가 없으면 자신의 공경하는 자세를 반성한다.”

<맹자 이루장구 상편( 孟子 離婁章句 上篇)>

<愛人不親 反其仁 治人不治 反其智 禮人不答 反其敬>

 

 

반구저기는 '맹자' 공손추 편에 나오는 글귀로 '활을 쏘아서 적중하지 않아도 나를 이기는 자를 원망치 않고, 돌이켜 자기에서 원인을 찾을 따름'이라는 의미다. 어떤 일이 잘못됐을 때 남 탓을 하기보다 원인을 자신한테서 찾아 고쳐 나간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임금의 아들 백계(伯啓)로부터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우임금이 하나라를 다스릴 때, 제후인 유호씨(有扈氏)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우임금은 아들 백계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우게 하였으나 참패하였다. 백계의 부하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여 다시 한 번 싸우자고 하였다.

 

그러나 백계는 "아니되오. 나의 땅은 좁지 않고 나의 백성은 적지 않은데도,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 것은 나의 덕이 박약하고 교화가 착하지 않기 때문이오" 라고 대답하고는, 거처할 때에는 겹으로 깐 자리에 앉지 않았고, 밥을 먹을 때에는 두 가지 맛을 즐기지 않았으며, 거문고를 펴 놓고 즐기지 않았고, 종과 북을 세워놓고 두드리며 즐기지 않았으며, 자녀들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가까이하고 웃어른을 공경했으며, 현명한 자를 존중하고 능력 있는 자를 등용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자 유호씨가 복종했다.  그러므로 남을 이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이겨야 하고, 남을 논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논해야 하며, 남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로부터 '반구저기'는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말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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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 관자 - 깊이 생각하고 빨리 결정하라
류예 지음, 하진이 옮김 / 미래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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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을 지키면 백성들이 믿을 것입니다.”

 

“信也者(신야자), 民信之(민신지)“

                       관자・소문小問

 

 

관중(管仲. BC725~BC645)은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 환공에게도 신용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기원전 681년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하자, 노나라는 장수 조말曹沫을 선봉으로 병사를 이끌고 출격했으나 세 번을 연속으로 패하고 말았다. 겁에 질린 노魯 장공莊公은 제나라에 땅을 바치며 화친을 요청했고, 제 환공은 노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을 수락했다.

 

노 장공(재위BC693~BC662)과 제 환공(재위BC685~BC643)이 중간 지점에서 만나 화친조약을 맺을 때였다. 노 장공을 호위하던 조말이 갑자기 옷소매에서 비수를 꺼내들고는 제 환공에 달려들어 목을 겨누었다. 제 환공의 부하 장수들은 자칫 잘못하다가 제 환공에게 위해를 입힐까봐 감히 덤비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제 환공이 물었다.

“도대체 어찌 할 셈이냐?”

그러자 조말이 말했다.

“제나라(BC1046~BC221)는 강국이고 우리 노나라(BC1046~BC256)는 힘없는 약소국이오. 헌데 당신들은 힘을 앞세워 우리를 너무 괴롭히고 있소. 대왕, 당신 생각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소?” 제 환공은 마지못해 그동안 빼앗은 노나라 땅을 전부 되돌려주기로 약속했다. 조말은 제 환공의 약속을 얻어내고 나서야 비수를 거두고, 다시 대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 제 환공이 약속을 어기고 조말을 죽이려 들자 관중이 만류했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약속한 것이라 해서 어기고 이제 와서 그를 죽인다면, 비록 한순간의 분노는 가라앉힐 수는 있겠지만 여러 제후국들에 신용을 잃을 것입니다. 또한 천하 만백성의 지지도 잃게 되니 그리하시면 안됩니다.”

 

제나라 환공은 관중의 말에 따라 세 번이나 전투를 벌여 빼앗은 노나라 땅을 약속대로 전부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각 나라의 제후들은 제나라를 신뢰할 수 있는 나라라 판단하고, 너도 나도 속국이 되겠다고 자청해왔다. 관중은 신용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소중한 미덕이며 처세의 기본원칙이라고 말했다.

 

<역사에서 배우기>

증삼(曾參 : BC505~BC435)은 춘추시대 말기 노나라 유명한 사상가이자 유학자로서, 공자의 제자이기도 하다. 박학다식하고 재능이 출중했으며 덕행과 기품을 갖춘 사람이었다. 어느 날, 증삼의 아내가 장을 보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어린 아들이 따라간다며 엉엉 울고 보채자 증삼의 아내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집에서 얌전히 놀고 있으렴. 엄마가 시장에 다녀온 뒤에 집에 있는 돼지를 잡아서 맛있게 삶아줄게.” 맛있는 고기라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진 아이는 엄마를 더는 보채지 않았다. 증삼의 아내는 그저 아이를 달래려고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기에 금세 잊어버리고 장을 보러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증삼이 진짜로 돼지를 잡은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증삼의 아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남편을 타박했다.

“아이를 집에 얌전히 있게 하려고 그냥 한 말인데, 진짜로 돼지를 잡아버리면 어떡해요?”

그러자 증삼이 말했다. “아이에게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 법이오.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려 세상 이치를 모르니 그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기 마련이오. 게다가 부모는 마땅히 아이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겠소? 오늘 당신이 아이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내일은 아이가 당신과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오. 또한 이렇듯 아이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이는 이제 다시는 당신을 믿지 않게 될텐데, 그래도 괜찮겠소?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이다. 약속을 잘 지키면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신용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관중은 신용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소중한 미덕이며 처세의 기본원칙이라고 여겼다. 신용이 좋은 사람일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서 쉽게 도움과 협조를 이끌어내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반대로 거짓말하는 사람은 싫어하기 때문이다. p. 99~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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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 샘깊은 오늘고전 3
허난설헌 지음, 이경혜 엮음, 윤석남.윤기언 그림 / 알마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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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採蓮曲 (채련곡 : 연꽃을 따며 부르는 사랑노래)

 

                                                       허난설헌(許蘭雪軒 : 1563~1589)

 

秋淨長湖碧玉流 (추정장호벽옥류)   맑은 가을 널찍한 호수에 맑고 푸른 물 넘실대는데

荷花深處係蘭舟 (하화심처계난주)   연꽃 깊은 곳에다 예쁜 배 매어 두고

逢郞隔水投蓮子 (봉랑격수투연자)   임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恐被人知半日羞 (공피인지반일수)   행여 남들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이나 부끄러웠네.

 

 

<해 설>

 

허난설헌으로 널리 알려진 허초희(許楚姬)의 사랑가다. 요즘처럼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이런 사랑 노래를 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이 시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셋째 구절이다. 이 책에서는 ‘임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로 풀었는데, 여러 해설서를 봐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글자 그대로 하면, 임을 만나서 서로 시시덕거리며(?) 물 저만치로 연밥을 던지며 노는 장면이 연상되는데, 그렇게 하면 이 시의 묘미와 맛이 사라져 버린다. 너무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너무나도 맑은 가을날 마음이 싱숭생숭한 처녀가 호수로 나왔다. 물론 평소 사모하던 총각과는 이미 연락이 오고간 뒤였다. 작고 예쁜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간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연꽃이 무성한 곳에 배를 대고 기다린다. 저만치 총각이 나타나 두리번거리며 처녀를 찾고 있다. 하지만 연꽃 숲에 들어 있는 처녀를 쉽사리 찾을 리가 없다. 처녀의 마음 같아서는 “저 여기 있어요!” 하고 소리치며 손짓이라도 하고 싶지만, 여기저기 있는 사람들 눈에 띌까봐 그마저도 마음뿐이다.

 

생각 끝에 처녀는 저만큼 호숫가에 서 있는 총각에게 신호를 보내려고, 총각이 알아차리게 하려고 연밥을 던진다. 던진 연밥이 총각 눈에 띄거나, 연밥을 던져 물이라도 튀면 총각이 알 수 있겠거니 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적극적이고 돌발적인- 물론 요즘에 이런 얘기를 하면 지나가는 개도 웃겠지만 허난설헌이 살던 당시야 능히 그럴 수 있지 않은가- 행동이 행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나 않았을까 해서 반나절이나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이 시의 맛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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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莊子) - 그림으로 쉽게 풀어쓴 지혜의 샘
장자 지음, 완샤 풀어쓴이, 심규호 옮김 / 일빛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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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우물에 사는 개구리가 동해에 사는 자라한테 말했다. “난 참 즐겁다네. 우물가 난간으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우물 안 깨진 벽돌에서 쉬기도 한다네. 물에서 노닐 때는 양쪽 겨드랑이를 펴서 떠오르고 턱을 위로 들어올리며, 진흙으로 뛰어들 때는 발등까지 푹 빠지곤 하지. 주변에 있는 장구벌레나 게, 올챙이 등을 살펴봐도 나만한 놈들이 없다네. 게다가 우물을 혼자 차지하고 편안하게 머무르고 있으니, 어찌 최고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자네도 가끔 보러 오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들은 동해의 자라가 우물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왼쪽 발을 채 뻗기도 전에 오른쪽 발이 걸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몸을 돌려 나온 자라는 개구리를 향해 큰 바다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바다는 천 리의 먼 거리로도 그 거대함을 표현하기에 부족하고, 천 길의 높이로도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네. 우(禹) 임금 시절에 10년 동안 아홉 번이나 홍수가 났지만 바닷물이 불어나지 않았고, 탕(湯) 임금 시절에 8년 동안 일곱 번 가뭄이 들었어도 바닷물은 줄어들지 않았네. 시간의 길고 짧음에 따라 변화하는 일도 없고, 비가 많게 오든 적게 오든 불어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으니, 이 또한 동해의 커다란 즐거움일세.” 얕은 우물에 사는 개구리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멍하니 자신을 잃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추수(秋水)’편에 나오는 ‘정저지와(井底之蛙)’ 이야기다. 여기서 ‘정저지와’는 공손룡자(公孫龍子: BC320~BC250.중국 조나라 문인)를 비롯한 명가(名家)를 지목하고 있지만, 실제로 제자백가 모두를 포함한다. 흑백이 뒤섞이고 시비가 전도된 명가의 짧고 좁은 식견은 사실 ‘선입견’에 얽매인 제자백가의 편협한 변론을 비유하고 있다. 이렇듯 우물 안 개구리는 명가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좁은 울타리에 갇혀 세상이 넓은 줄 모르고 떠들어대는 것을 빗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우물에서 살고 있는 개구리인지도 모른다. 다만 누군가는 그저 우물 밑바닥에 엎드려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고, 또 누군가는 우물가를 벗어나려고 뛰어오를 뿐이다. 내심에 얽매여 자신의 울타리에 속박당한다면 외부와 어떤 교류도 나누지 못하고, 결국 천변만화하는 세계에 적응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사람은 삶의 즐거움을 모른 채 결국 사회에서 도태될 것이다.

 

마음이 풍족해야만 다른 이들이나 사물에 대해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그래야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누군가는 인생을 향유하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하면, 누군가는 자신의 삶에 탄식을 거듭하면서 스스로 비애와 고통을 느끼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 하늘을 비상하는 독수리가 되라! 어두운 우물 속에서 자기도취에 만족하는 개구리가 되지 말고! p.13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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