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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
이시카와 이쓰코 지음, 손지연 옮김 / 삼천리 / 2014년 9월
평점 :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한(恨)’ 아닐까 싶다.
백의민족답게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거의 침범한 적이 없었고,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일이지만 주로 외침(外侵)을 당하면서 살아온 민족이기에 ‘한’이 우리민족의 정서로 각인된 듯하다. 고전문학에 있어서도 여성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정한(情恨)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숱한 전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성리학의 울타리에 갇혀 자기표현을 못하고 살았기에 가슴에 한이 응어리져 있을까 생각해보니 착잡하기 그지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위안부(慰安婦)’라는 명칭도 곰곰이 살펴보면 역사적 상흔이 고스란히 어려 있다. 나라가 망하여 백성을 지켜줄 수 없는 지경에 처한 참혹한 시대에 여성들의 삶인들 오죽했을까? 예부터 우리 땅에 사는 여인들의 수난은 수없이 되풀이 됐었다. 몽골이 침입하여 우리 강토를 짓밟았던 고려시대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고, 명분론에 휩싸여 당파싸움으로 국력을 낭비한 조선시대에도 청나라의 침략으로 수많은 여인들이 치욕을 당했다.
몽골이 오랜 전쟁 끝에 고려를 복속한 이후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공녀(貢女)로 보내졌던가? 아마 몽골 지배기간 약 100여 년 동안 수만 명의 여인들이 동토의 땅으로 보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대갓집 규수부터 하층의 노비까지 반반한 여인들은 닥치는 대로 거두어 갔으니, 열에 아홉은 불행한 삶을 살았고, 가는 도중에 목숨을 끊는 여인들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간혹 원나라에 바친 공녀 중에 ‘기황후’라는 불리는 특이한 케이스의 여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 많은 삶을 살았다.
조선조 병자호란 때의 상황은 어떤가? 지금 상황에서 돌이켜 보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지배층의 명분론에 집착한 나머지 막을 수 있었던 불필요한 전쟁을 초래했고, 권력층의 판단 착오는 자신들의 고난은 물론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어리석은 행위였다. 물론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그 카테고리를 갇혀 명분론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대의명분’에 집착하다 무고한 백성들을 숱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1만 명이 넘는 여인들을 공녀로 보내졌는데, 유교의 영향에 따라 고려보다 정조관념이 철저했던 조선조 여인들은 자살자가 더 많았다. 끌려간 여인들 중에 간혹 그곳에 정착하는 여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심한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살았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청나라인의 성노리개로 전락한 여인들의 삶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 맞아 죽는 여인들도 많았다. 이런 지옥의 땅에서 벗어 나기위해 많은 이들이 몸부림쳤다.
청나라에 머물면서 조선의 상인을 통해 조선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또 학대를 견디다 못해 탈출한 여인들은 물어 물어서 무작정 조선 땅으로 귀향하는 이도 많았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그 유명한 ‘환향녀(還鄕女)’였다. ‘고국(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란 단순한 뜻이 나쁜 뜻으로 변질된 것도 이때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수많은 여인들이 케케묵은 성리학의 악습에 얽매여 몸을 더럽힌 여인이라 오명을 둘러쓴 채 박대를 받으며 집안에서 쫓겨났다. 그들이 택할 곳은 오직 죽음 밖에 없었다. 구사일생의 위기에서 벗어나 그나마 혈육의 땅을 간신히 찾아왔건만 동네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가족조차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비통한 삶인가!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탈출하거나 마른 담배 잎과 바꾸어 교환해 온 ‘환향녀(還鄕女)’들이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례가 속출하자 한 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인조는 각 고을에 ‘홍제탕’을 만들어 이곳에서 몸을 씻은 환향녀는 죄를 없애주겠다는 것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조선 여인들의 목숨을과 정절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무능한 조정이 죄라면 죄지 나라 잃은 백성들이 당한 능욕이 어찌 죄가 될 수 있겠는가? 일제 강점기나 병자호란 때나 이러한 현실은 ‘오십 보 백 보’란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1941~1945)때 군인들의 성노리개로 아무런 연유도 모르고 끌려간 조선 여인들을 일컬어 ‘위안부(慰安婦)’라 부른다. 난 사실 위안부란 명칭조차도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위안을 받을 사람이 누군데, 일본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군인들의 성노예로 희생된 여인을 위안부라 무르는 것이 마뜩찮다. 우리 스스로 젊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할머니들을 한 번 더 죽이는 꼴이다. 그런데 여태껏 마땅한 명칭조차 짓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에 오랫동안 밀고 당기기를 해오던 일본과의 ‘위안부협상’이 타결되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군 위안부 동원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위로금으로 우리 돈 100억 원을 내놓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위안부 동원사실을 부인하는 일본에 항의하는 천 번이 넘는 수요 집회와 수많은 나날 동안 싸워 온 그동안의 노력이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로 협상은 비밀리에, 단번에 이루어졌다. 1965년 한일협정 때와 마찬가지로 내용은 사전에 전혀 몰랐고 철저히 정부 주도로 진행되어 위안부 할머니조차 내막을 알 수 없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일제강점기 역사적 피해자로서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와 돈으로 배상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사죄에 상당하는 충분한 배상금이 따르기를 바랐다. 독일의 경우에서 보듯이 유대인 학살에 독일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총리가 직접 찾아가서 사죄를 한 것처럼 아베 총리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직접 사과하길 바랐지만, 아니 수위를 좀 낮춰 공식적인 방송을 통해 일제강점기 한국에 큰 죄를 죄었다고 세계만방에 죄를 고하는 사과방송이라도 했으면 그나마 마음에 위로라도 되었을 것이다.
고작 돈 100억에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팔아버린 느낌이다. 이제 미안하다고 인정했고 100억을 배상했으니 두 번 다시 위안부 얘기는 꺼내지 말라는 협박조의 협상이다. 우리가 뭐가 그리 급해서 빨리 협상을 종결지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일본입장에서도 우익들의 반발과 일본의 체면을 생각하면 한국이 바라는 만큼의 굴욕적인 협상에 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일본과의 민감한 역사적 협상을 명쾌하게 해결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 실정에서 보면 어떤 협상도 국민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 협상 결과는 많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위안부 당사자는 물론 국민들의 60%가 잘못된 협상이라는 결과만 보아도 너무 성급하게 협상 결론이 이르지 않았나 싶다. 일본은 더 이상 위안부에 대한 거론을 거부할 것이며, 심지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위안부의 상징인 ‘소녀상 철거’도 주장할 개연성이 높다. 앞으로 ‘위안부’의 상흔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나라간의 약속인 ‘협상타결’이 세계만방에 알려진 지금, 타결된 협상을 다시 무를 수는 없겠지만, 일제에 강제 동원된 위안부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역사교육과 소녀상 유지 및 확대 설치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