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창과 홍랑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미친 듯 몸부림쳐 천릿길 달려가 겨울 한철 아끼듯 품었던 사랑. 봄날에 문득 풀꽃처럼 내놓고 돌아선 여인이, 돌아보고 돌아보다 못내 아쉬워 길가의 버들가지를 꺾어 들고는 저 멀리 가고 있을 그에게 보내네. 왜 하필 버들가지던가? 피리곡인 <절양류>를 떠올린 것이라네. 고죽이 마지막으로 불어주던 그 곡조, 버들가지 보니 눈물이 왈칵 솟았네. 왜 가려 꺾어 보냈던가? 저마다 물오른 가지건만 더욱 귀한 것을 보내고 싶었네. 내 마음 한 가닥 같은 가지를 골랐다네. 왜 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라 하였는가? 굳이 님더러 방안에 두라고는 못하겠네. 세상의 이목이 있으니 한데라도 심어주오. 다만 동침하던 그 눈길로 가끔씩만 보아 주오. 왜 새잎을 ‘날 인가도 여기소서’라 했던가? 여자 많은 서울에서 어찌 나만 생각하랴? 가끔씩 나를 잊어도 나무라지 않겠으니, 가끔은 저 버들을 홍랑이라 여겨주오.
이 시조는 조선 선조때 홍원 출신 기생 홍랑(洪娘)이 한결같이 사랑했던 사람, 최경창(崔慶昌, 1539~1583)과의 이별을 하고 나서 보낸 시조다. 홍랑은 선조 때의 이름난 기생으로 태어난 때와 죽은 때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홍랑이 유명한 이유는 최경창과의 사랑 때문이다. 최경창은 호는 고죽(孤竹)으로 선조 6년(1573), 함경도 북도평사(北道評事)로 근무하였을 때 홍랑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이들의 사랑에 대한 일화는 조선시대 기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선 해어화사’에 소개되어 있는데, 홍랑은 최경창과 사랑에 빠지지만 최경창이 임기가 끝나 경성을 떠날 때 홍랑은 최경창을 따라서 함경도 함흥까지 따라와 이별하고 나서 앞의 시를 최경창에게 보내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화답 시로 쓴 ‘송별’ 시에도 고죽(孤竹)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송별(送別)
말없이 마주보며 난초를 주노라 (相看脉脉贈幽蘭)
이제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此去天涯幾日還)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말라 (莫唱咸關驀時曲)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至今雲雨暗靑山).
왜 하필 유란(幽蘭 : 그윽한 난초)를 주었나? 그대가 피리곡인 <절양류>를 청했으니, 나는 거문고곡인 <유란곡>을 청했다네. 버들피리 위에 난초 잎이 슬프게 하늘거리네. 왜 비구름은 까맣게 모였는가? 지난 겨울 나눈 석달의 운우(雲雨 : 남녀의 사랑). 이 봄에는 눈물과 한숨으로 변했네. 한꺼번에 몰려든 슬픔에 눈앞이 캄캄하다네.
서울로 돌아간 최경창은 몸져 눕게 되었다. 어쩌면 상사병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조정에 들어가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다. 때는 명종비의 죽음으로 국상기간, 더욱이 동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자리 잡던 시절이라 이들의 행각이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홍랑의 일로 파직 당한 뒤,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이승에서 그들의 사랑은 신분의 차이와 죽음으로 계속될 수 없었다. 최경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무려 9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시작한다. 평생 세 번을 만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산 홍랑은 결국 죽고 만다.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유희경과 계랑(이매창)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계랑(癸娘or桂娘.1573~1610)은 조선시대 3대 기생 중 하나로 호는 매창.
부안의 기녀로 고을 아전의 딸.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기에 계생 또는 계랑이라 불렸다고 한다. 시와 노래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 특히 한시에 능했는데 시조 및 한시 70수가 전해져 내려온다. 기녀의 신분이었기에 많은 사대부와 교류하였으나, 그녀의 성품은 고결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매창은 촌은 유희경(劉希慶. 1545~1636)과 각별한 애정을 나누었다.
촌은은 일찍이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매창을 보고 파계하였으며 서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계속될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촌은이 의병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갔기 때문에. 그를 그리워하며 매창은 시조를 지었고 그 중 유명한 작품이 ‘이화우 흩뿌릴 제’로 시작되는 시조다. 매창에 대한 촌은의 사랑도 각별하여 그는 매창을 그리는 시 여러 편을 지었다. 그 중 <도중억계랑>은 매창과 헤어진 후 객지에서 길을 가다 문득 매창이 그리워 쓴 시라고 한다.
도중억계랑(途中憶癸娘 : 길에서 계랑을 생각하다)
고운 임 이별한 후 구름이 막혀 (一別佳人隔楚雲)
나그네 길 심사가 어지럽다오. (客中心緖轉紛紛)
파랑새가 오지 않아 소식 끊기니 (靑鳥不來音信斷)
벽오동 찬비 내리는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碧梧凉雨不堪聞)
매창은 촌은과 헤어진 뒤 실의에 잠겨 삶의 의미를 잃었고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병을 얻었다. 훗날 허난설헌의 동생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매창과 오래 교류하였으나 남녀관계가 아닌 시문과 인생을 함께 논하는 교우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매창을 처음 만난 것은 1601년인데 그는 매창이 재주와 정이 있어 더불어 이야기할만하여 종일 시와 노래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10년간 서로 돈독한 우의를 다져왔고 매창은 허균의 영향을 받아 선계를 지향하는 시를 몇 편 짓기도 하였다.
중우인
일찍이 동해에 시선(詩仙)이 내렸다는데
지금 보니 말은 고우나 그 뜻은 서글퍼라.
구령선인 노닐던 곳 그 어디인가.
삼청 세계 심사를 장편으로 엮었네.
호중 세월은 차고 기울지 않지만
속세의 청춘은 소년시절 잠깐이네.
훗날 만일 선계(仙界)로 돌아가게 되면
옥황 앞에 청하여 임과 함께 살리라.
그녀가 죽은 뒤 허균은 그녀를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계랑은 부안의 기생이다. 시를 잘 짓고 문장을 알았으며 노래를 잘 부르고 거문고를 잘 탔다.
성품이 고결하여 음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거리낌 없이 사귀었다. 비록 우스갯소리로 즐기긴 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 이르진 않았다." 는 주가 있어 매창의 성정이 개끗하고 맑아 몸가짐이 정숙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죽은 지 45년만인 1655년에 무덤 앞에 비가 세워졌고, 58년 뒤인 1688년에는 시집 <매창집>이 간행되었다.
백석과 자야
일제시대의 시인 백석(1912~1996)의 본명은 백기행.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 유학한 영문학도이자 시인이었던 백석은 귀국후 조선일보에 잠시 입사하였다가 사퇴하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전근한다. 함흥은 백석에게 바리끼노(지바고와 라라가 마지막 며칠을 지냈던)였다. 자작나무가 둘러친 그의 시세계로 무작정 걸어 들어온 여자가 있었다. 22세의 기생 자야(본명 김영한. 1916~1999). 자야는 생활고때문에 권번으로 들어가 예인의 길을 걸었던 신여성이었는데, 독립운동혐의로 감옥에 갇힌 그녀의 후원자를 만나러 함흥으로 갔었다. 백석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불꽃이었다.
"단 한 번 부딪힌 한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 (김자야,<내 사랑 백석>) 그들의 바리끼노, 함흥의 시간은 짧았다. 부모의 강권으로 세 번이나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백석은 도망쳐 태연히 자야의 곁으로 돌아왔다. 자야는 홀로 함흥을 떠났다. 경성 청진동에 은거하던 자야를 찾아 백석은 태연하게 시 한 편을 전했다. 자야가 <삼천리>에 발표했던 '눈 오는 날'을 시화한 백석의 사랑 고백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8.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
백석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 '마가리'로 떠나고 자야는 경성에 남았다. 자야는 그가 또 태연하게 나타날 것으로 믿었을 거다. 백석은 만주에서 몇 년 방랑 생활을 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 언제라도 자야에게 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팔선이 그어지고 전쟁이 터졌다. 재북 작가가 된 백석은 사회주의풍의 시를 자주 써야했지만, 그것의 배경에는 항상 자작나무가 둘러친 토방의 공동체가 있었다. 자야가 남한에서 전기 형식의 사랑 얘기를 출간한 무렵(1995년), 백석은 북녘의 어느 산골에서 죽었다. 자야가 지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을 게다.
세속적 평가를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평생을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보통 이상의 사람됨이다. 자야는 시인 백석과 나눈 3년의 사랑에 생의 의미를 모두 바쳤다. 그래서 자야는 보통 이상의 사람됨으로 높은 수준의 인간만이 얻을 수 있는 성취를 이루었다. 그녀는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다가 자신이 일생을 바쳐 일군 대원각을 헐고 그 자리에 길상사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