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역 사기본기 2 사기 완역본 시리즈 (알마)
사마천 지음, 김영수 옮김 / 알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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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의 입관과 홍문연(鴻門宴)

 

항우는 진(秦)의 땅을 공략하여 평정하려고 함곡관(函谷關 : 관중 땅의 관문)에 이르렀으나 수비병이 있어 들어가지 못하였다. 게다가 패공(沛公 : 유방이 왕이 되기 전 칭호)이 이미 함양(咸陽 : 관중의 중심부)을 격파하였다는 보고를 받자, 항우는 크게 화가 나서 당양군 등을 보내어 함곡관을 공격하게 하였다. 항우가 마침내 함곡관에 들어가 회수 서쪽에 이르렀다.

 

패공은 패상에 주둔하고 있어서 항우와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패공이 관중((關中)의 왕이 되어 자영(秦의 3세 황제)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모두 다 차지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항우가 몹시 노하여 “내일 병사들을 잘 먹이고 패공의 군대를 격파하리라.”라고 말하였다.

 

이때 항우의 병사는 40만 명으로 신풍(新豊)의 홍문(鴻門)에 있었고, 패공의 병사는 10만 명으로 패상(覇上. 現 서안시 장안구 백록원)에 있었다. 범증이 항우에게 충고하였다.

“패공이 산동에 있을 때는 재물을 탐내고 여자를 좋아하였는데, 지금 입관(함곡관을 넘어 관중에 들어감)해서는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 뜻이 작은 곳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그 기세를 살피게 하였더니, 용과 호랑이처럼 오색이 찬란한 것이 천자의 기운입니다. 서둘러 쳐서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초의 좌윤 항백은 항우의 작은 아버지로 평소 유후 장량과 사이가 좋았다. 장량은 이때 패공을 따르고 있었는데, 항백이 야밤에 말을 달려 패공의 군영으로 가서 몰래 장량을 만나 모든 일을 다 알리고 장량에게 함께 떠나자며 “패공을 따라 함께 죽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장량은 “신은 한왕을 위하여 패공을 따르고 있는데, 패공이 지금 위급하다고 하여 도망치는 것은 의리가 아니니 알리지 않을 수 없겠소.”라고 하였다. 장량이 바로 들어가 패공에게 모두 말하였다.

 

패공은 크게 놀라며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하자, 장량은 “누가 대왕께 그런 계책을 냈습니까?”라고 물었다. 패공은 “웬 무지한 잡놈이 네게 ‘관을 막고 제후들을 들이지 않으면 진의 땅은 모두 왕 차지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그 말에 따랐소.”라고 대답하였다.

 

장량이 “대왕의 병졸이 항왕을 당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자 패공은 잠자코 있다가 “물론 그렇지 않소. 그러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장량이 “항백에게 패공은 항왕을 감히 배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시오.”라고 일러 주었다.

 

패공이 “당신과 항백은 어떤 관계요?”라고 묻자 장량은 “진나라에서 신과 어울릴 때 항백이 사람을 죽인 적인 있는데, 신이 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급한 일이 생기자 달려와 이 장량에게 알려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패공이 “둘 중 누가 나이가 많소?”라고 묻자, 장량은 “항백이 신보다 연장입니다.”라고 답하였다. 패공은 “당신이 나를 위하여 항백을 불러주시오. 내가 그를 형으로 모시리다.”라고 하였다.

 

장량이 나가서 항백을 부르자, 항백이 바로 들어와서 패공을 만났다. 패공은 술잔을 들어 건강과 장수를 빌고는 혼인을 약조하며 말하였다.

“나는 입관한(관중 땅에 들어간) 뒤로 추호도 물건에 손대려 하지 않았고, 인구를 등기하고 창고를 잘 관리하면서 항 장군을 기다렸소. 장수를 보내어 관을 지키게 한 것은 도적의 출입과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소. 밤낮으로 장군 오시기만을 기다렸는데 어찌 감히 반역을 한단 말이오? 항백께서 신이 배은망덕하지 않다는 것을 잘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항백이 이를 허락하며 패공에게 “내일 아침 일찍 오셔서 항왕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패공은 “좋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항백은 그날 밤으로 다시 군영으로 돌아가 패공의 말을 낱낱이 항왕에게 보고한 다음 “ 패공이 먼저 관중을 쳐부수지 않았다면 그대가 어찌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지금 그 자가 큰 공을 세웠음에도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않은 일이니 잘 대해 주는 것만 못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항왕이 허락하였다.

 

패공이 이튿날 아침 100여 기를 대동하고 항왕을 만나러 왔다. 홍문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하였다.

“신은 장군과 더불어 죽을힘을 다해 진을 공격하였습니다. 장군께서는 하북에서 싸우시고, 신은 하남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먼저 관중(關中 : 함곡관의 서쪽지역으로 秦의 본거지)에 들어와 진을 무찌르고, 이곳에서 장군을 다시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인배의 말 때문에 장군과 신의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항왕이 “이는 패공의 좌사마인 조무상의 말 때문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항적(항우의 본명)이 어찌 그럴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 항왕은 이날 패공을 머무르게 하여 함께 술을 마셨다. 항왕과 항백은 동쪽을 향해 앉고, 아보는 남쪽을 향해 않았다. 아보는 범증을 말한다. 패공은 북쪽을 향해 앉고, 장량은 서쪽을 향해 배석하였다. 범증이 여러 차례 항왕에게 눈짓을 하며 차고 있던 옥결을 들어 보이길 세 차례(유방을 죽이라는 신호). 항왕은 말없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범증이 일어나 나가며 항장을 불러 말하였다.

 

“군왕이 모질지 못한 사람이다. 들어가면 앞으로 나가 축수를 올려라. 축수가 끝나면 검무를 청해 틈을 보다가 앉은 자리에서 패공을 쳐 죽여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장차 모두가 그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항장이 바로 들어가 축수를 올렸다. 축수를 마치고는 “군왕과 패공이 함께 술을 드시는데 군중에 즐길 거리가 없으니 검무라도 출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항왕이 “좋다.”라고 하자 항장은 검을 뽑아 춤을 추기 시작하였고, 항백도 검을 뽑아 춤을 추기 시작하였는데 몸으로 계속 패공을 감싸는 바람에 항장이 공격할 수 없었다.

 

이에 장량은 군문으로 가서 번쾌를 만났다. 번쾌가 “오늘 일은 어떻게 되었소.”라고 묻자, 장량은 아주 급하오. 지금 항장이 검을 뽑아 들고 춤을 추는데 아무래도 그 의도가 패공에게 있는 것 같소“ 라고 답하였다. 번쾌가 ”상황이 급박하니, 신이 들어가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라고 하였다.

 

번쾌가 곧장 검을 차고 방패를 들고는 군문으로 들어갔다. 위병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창으로 막자, 번쾌가 방패 모서리로 쳐서 위병을 쓰러뜨렸다. 번쾌가 드디어 안으로 들어가 장막을 걷고 서쪽을 향해 서서는 눈을 부릅뜨고 항왕을 노려보는데, 머리카락은 하늘로 곤두서고 눈 꼬리는 찢어질 것 같았다.

 

항왕이 검을 짚고 무릎을 세워 앉으면서 “그대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라고 물으니, 장량이 “패공의 참승 번쾌라는 자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항왕이 “장사로다! 그에게 술을 내려라.” 라고 하였다. 큰 술잔에 술이 나왔고, 번쾌는 고맙다고 절하고는 일어나 선 채로 다 마셨다. 항왕이 “돼지 다리를 주어라.” 하자, 즉시 익히지 않은 돼지 다리 하나를 주었다. 번쾌는 방패를 땅에 엎어 그 위에 돼지 다리를 올려놓고는 검으로 잘라 먹었다. 항왕이 “장사, 더 마실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니, 번쾌가 말하였다.

 

“죽음도 피하지 않는 신이 술 한 잔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대저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을 가진 진왕이 사람 죽이기를 다 죽이지 못할 듯 죽이고 다 사용하지 못할 듯 형벌을 가하니, 천하가 모두 그를 배반하였습니다. 회왕(楚懷王. 재위 BC208~BC205.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등장하는 초 의제와 동일인물)께서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여 ‘먼저 진을 깨고 함양에 들어간 자를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패공께서 먼저 진을 깨고 함양에 들어갔지만 추호도 물건에 손대지 않으셨고 궁실을 단단히 봉쇄한 다음 패상(覇上)으로 철군하여 대왕께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일부러 장수를 보내어 관문을 지키게 한 것은 다른 도적들의 출입과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듯 힘들게 높은 공을 세웠는데도 제후로 봉하는 상은 없을망정 소인배의 헛소리를 듣고 공을 세운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이는 멸망한 진의 뒤를 잇는 일로 대왕께서는 취할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항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앉으라.” 라고 하였다. 번쾌는 장량을 따라 앉았다.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패공이 측간에 간다고 일어나 번쾌를 밖으로 불러냈다. 패공이 나간 뒤 항왕은 도위 진평에게 패공을 불러오게 하였다. 패공을 불러오게 하였다. 패공이 “바로 나오느라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자, 번쾌는 “큰일에서는 자잘한 것은 따지지 않고, 큰 예의에서는 작은 나무람 정도는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칼과 도마고 우리는 물고기 신세인데 무슨 작별 인사를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곳을 떠나면서 장량에게 남아서 사죄하게 하였다. 장량이 “대왕께서는 선물을 갖고 오셨습니까?”라고 묻자, 패공은 “항왕에게 주려고 백벽 한 쌍과 아보(범증)에게 주려고 옥두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화난 모습을 보고는 감히 올리지 못하였소. 공이 대신 바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장량이 “삼가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항왕의 군대는 홍문 아래에 있었고, 패공의 군대는 패상에 있어서 서로 40리 떨어져 있었다. 패공은 수레와 말을 버려둔 채 몸만 빠져 나와 홀로 말을 탔고, 번쾌와 하후영, 근강, 기신 등 네 사람은 검과 방패를 지니고 걸어서 여산을 내려와 지양의 샛길을 거쳐 왔다. 그에 앞서 패공은 장량에게 “이 길로 우리 군영까지는 20리에 지나지 않소. 내가 군중에 도착할 무렵 공이 바로 들어가시오.”라고 일러두었다. 패공이 떠나고 샛길로 군중에 도착할 때가 되자, 장량은 안으로 들어가 사죄하며 말하였다.

 

“패공께서는 술을 이기지 못하여 작별 인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삼가 신 장량에게 백벽 한 쌍을 대왕 족하께 재배의 예를 올리며 바치게 하셨고, 옥두 한 쌍은 대장군 족하께 재배의 예를 올리며 바치게 하셨습니다.”

 

항왕은 “패공은 어디에 계신가? 라고 물었고, 장량은 ”대왕께서 잘못을 질책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홀로 빠져 나가셨는데 군중에 이미 도착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항왕은 바로 백벽을 받아 자리 위에 두었지만, 아보는 옥두를 받아 바닥에 놓고는 검을 뽑아 깨부수며 ”아! 어린아이와 함께 일을 꾀하는 것이 아닌데!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패공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패공은 군영에 당도하자마자 즉시 조무상을 베어 죽였다. p.206~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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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호 남계우 <호접도> 19세기. 개인 소장.

 

19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철종 연간은 근대의 문턱이었다.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이라 불리는 삼남지방의 농민 봉기 이후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까지 50여 년간 조선왕조에서는 소요와 변란이 5년이 멀다하고 연이어 일어났다.

 

이 격동의 50년은 조선이 세계와 만나는 개항기이자 근대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개화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항은 열강들의 침략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 졌고 낯선 개화의 바람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채로 조선 근대사회로 내몰고 있었다. 사회 전체가 아무런 준비 없이 개화기를 맞았다. 그런 상황에서 미술계의 능동적인 대처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근대성은 사상과 물질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예리한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들은 거의 동물적 감각으로 근대를 감지하였다. 19세기 중반에 나타나는 신감각파의 이색적인 화풍이 이를 말해준다. 북산 김수철, 일호 남계우, 몽인 정학교 등의 신선한 감각파 그림은 이 시기가 개화기이고 근대가 멀지 않음을 작품으로 말해준다,

 

일호(一濠) 남계우(南啓宇.1811~1888)는 나비를 잘 그려 ‘남나비’라는 별명까지 얻은 신감각파의 대표적 화가였다. 의령 남씨 명문가 출신이자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의 5대손으로 용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사까지 지냈지만 세월은 여전히 소론에게 불리하여 그에겐 벼슬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이 56세에 감역(9품)에 제수되고, 72세에 가정대부(嘉靖大夫.종2품)가 내려졌지만 실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남계우는 평생 초야에 묻혀 나비 그림만 그렸다. 그의 나비 그림은 앞 시대 화가들과는 전혀 달랐다. 극사실에 가까울 정도로 정밀했고 너무도 다양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4폭의 <군접도(群蝶圖)>에는 각종 나비 150여 마리가 극사실로 그려져 장관을 이룬다.

 

‘나비박사’ 석주명은 남계우의 작품 속에서 무려 37종의 나비를 암수까지 구별해냈다. 그중엔 남방공작나비라는 열대종까지 있다고 했다. 남계우의 나비 그림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마루야마 오쿄의 <곤충도보>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극찬했다. 남계우의 나비에 대한 연구도 대단히 열심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접도(花蝶圖)> 대련에는 나비에 대한 각 설을 적어 놓았는데 그 한 폭엔 이렇게 씌어 있다.

 

<고금주(古今注)>에서는 귤의 좀이 나비로 변한다고 하였고, <이아익(爾雅翼)>에서는 배추벌레가 나비로 변한다고 했고, <열자(列子)>에서는 까마귀 발의 잎(烏足之葉)이 나비로 변한다고 하였고, <단청야사(丹靑野史)>에서는 색옷이 나비로 변한다고 했으나 이는 모두가 각기 목격한 바에 의하여 말한 것이리라.

 

도대체 이 많은 지식을 어떻게 찾아내어 섭렵한 것인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남나비’는 그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나비를 채집하였다. 나비를 정말로 좋아하고 나비에 미쳐 있었던 것이다. 예쁜 나비를 보곤 갓 쓰고 도포 입은 채로 10리를 쫓아가 잡아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잡아온 나비는 유리그릇에 넣고 관찰했으며, 나비 수백 마리를 책갈피에 끼워 놓고 실제로 보면서 그림을 그렸다. 나비에 유리를 대고 그 위에 종이를 얹어 유탄으로 윤곽을 그린 후 채색을 더하기도 했다. 그는 <영접(詠蝶)>이라는 시에서 나비를 이렇게 노래했다.

 

따뜻한 햇볕 산들바람 날씨 좋은데                暖日輕風好天氣

부드러운 더듬이 비단 날개로 천천히 맴도네.  柔鬚錦翅緩徘徊

전생이 채향사였음을 알겠으니                     前身知是採香使

작은 꽃 숨은 풀까지 뒤적이며 날아오네.        領 略小花幽草來

 

우봉 조희룡이 화제를 쓴 그의 <호접도>를 보면 화면의 경영이 대단히 근대적이다. 막 태어난 새끼 나비들의 모습이 아련하고 나비 한 마리가 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다. 마티에르 감각도 탁월하여 금박지인 냉금지(冷金紙)를 사용하였고, 노란색은 금가루를, 흰색은 진주가루를 사용하여 채색하였다. 모두가 모더니즘적 변형이다. 게다가 우봉의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화제가 그림과 혼연히 조화를 이루어 희대의 명작이 되었다.

 

남계우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무언가 하나에 전념하면서 자신의 감성을 속이지 않고 살아간 사람의 삶에는 시대상이 절로 반영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만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인생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사람들이 그에게 왜 나비만 그리냐고 물으면 그는 쓰르라미와 귀뚜라미는 가련한 벌레지만 나비는 일생을 아방궁에서 살지 않느냐며 ‘나비’라는 시를 읊었다.

 

가련한 저 쓰르라미나 귀뚜라미들은

쓸쓸하고 메마르고 또 바람을 타는데

가장 화려한 건 오직 나비뿐이라

일생을 꽃 밑에서 보내네그려.

 

그렇게 생각했다면 ‘남나비’ 남계우야말로 나비와 함께 평생을 아방궁에서 산 사람이 아닐까.

 유홍준 <명작순례> p.16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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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 새소군전
심치열 지음 /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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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昭君怨(소군원 : 왕소군의 애절함)

 

               東方叫(동방규. 생몰미상. 측천무후 시대의 문인 )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이 피지 않으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허리띠 자연히 느슨해져도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허리를 가늘게 하려는 게 아니라네.

 

동방규는 왕소군(王昭君, BC48~BC6 추정) 이라는 비운의 여인 때문에, 그 여인의 불우한 일생을 그린 시 때문에 유명해진(?) 시인이다. 그런데 유명해지기는 했어도, 그의 생애나 시작 활동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따지고 보면 유명해진 것은 그의 시 <소군원(昭君怨)>이고, 그 가운데서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바로 이 구절이다.

 

이 시에는 왕소군이 고국 한나라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아주 절절하게 담겨 있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9~기원전33)의 후궁으로, 절세 미녀였다. 그 당시 한나라는 북방에 있는 흉노(匈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흉노의 선우(單于: 우두머리) 호한야(胡韓耶. 재위 BC58∼BC31)가 자신의 왕비로 삼겠다고 공주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후궁 한 명을 보내주는 대가로 변경이 잠잠해진다는 것은 한나라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었다.

 

원제에게는 후궁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들을 모두 직접 만나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제는 궁실의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를 시켜 모든 후궁의 화상을 그리도록 한 후, 그 그림을 보고 불러 잠자리를 같이 했다. 후궁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하여 화공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예쁘게 그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도도한 왕소군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제를 가까이에서 모실 기회를 갖지 못했다. 말하자면 ‘유전미녀(有錢美女)’요, ‘무전추녀(無錢醜女)’였던 셈이다.

 

그러던 중 호한야의 청을 받아들여 원제는 후궁 중에 한 명을 고르기로 했다. 원제는 화공이 그린 그림만 보고 그 중에서 제일 못생긴 후궁을 뽑았는데, 당연하게도 왕소군을 흉노의 왕빗감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왕소군이 오랑캐 땅으로 떠나려는 즈음, 그제야 원제가 그녀를 보게 되었다. 왕소군은 여러 후궁 중 제일 가는 미인일뿐더러 언사와 행동거지가 출중했다. 원제는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라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녀가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진 사정을 알게 된 원제는 대로(大怒)하여 모연수를 죽여 버렸다. 마침내 그녀는 쓸쓸히 흉노 땅에 들어가 마음에도 없는 오랑캐의 왕비가 되었다. 흔히 왕소군으로 알려진 이 여인의 본명은 왕장(王牆)이며, 소군은 그녀의 자(字 )다. 뒷날 왕소군이 죽어 흉노의 땅에 묻혔는데, 겨울이 되어 흉노 땅의 풀이 모두 시들어도 그녀 무덤가의 풀만은 푸르렀다 하여 그 무덤을 ‘청총(靑塚)’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후세 시인들은 왕소군을 주제로 그 애절한 사연을 시에 담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역대 우수한 문학 작품만을 모아 엮은 <문원영화(文苑英華)>라는 책에는 왕소군을 기리는 송대(宋代) 이전 시인들의 시 35수를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이름으로 수록하고 있다. 동방규의 작품과 더불어 이백의 ‘소군원(昭君怨)’도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昭君怨(소군원)

 

                                   이백(李白. 701~762)

 

昭君拂玉鞍 (소군불옥안)  왕소군 옥안장에 치맛자락 스치며

上馬涕紅頰 (상마체홍협)  말에 오르자 붉은 뺨에 눈물 적시네.

今日漢宮人 (금일한궁인)  오늘은 한나라 궁녀의 몸이지만

明朝胡地妾 (명조호지첩)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의 첩이라네.

 

왕소군이 눈물을 흘리며 머나먼 오랑캐 땅으로 떠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렇듯 뺨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떠날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무 살 안팎이었다. 그녀도 그녀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또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왕소군의 생애를 담은 영화로 친다면, 이백의 시가 전편(前篇)을 그린 셈이고, 동방규의 시는 후편(後篇)을 그린 셈이다. 왕소군의 애절함을 그린 시인들의 다른 작품도 비교해서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이별은 늘 아쉬움을 남긴다. 바로 다음날 또 만나는 연인들도 밤에 헤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러니 몇 달이나 몇 년 만에 만나고는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도 하지 못한 채 헤어지는 사람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이별 가운데 가장 마음 아픈 이별은 생사(生死)의 헤어짐이다. 살아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헤어짐, 그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이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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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강설 사서삼경강설 시리즈 1
이기동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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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誠)은 하늘의 도(道)이고 성(誠)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道)이다. 성(誠)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며 저절로 도(道)에 적중하니 성인(聖人)이다. 성(誠)해지려고 하는 자는 선(善)을 선택해서 굳게 붙잡는 자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하나를 할 수 있으면 자기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할 수 있으면 자기는 천을 한다. 과연 이 방법을 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연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誠者는 天之道也이요 誠之者는 人之道也이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여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이오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니라. 博學之하며 審問之하며 愼思之하며 明辯之하며 篤行之니라. 有不學이언정 學之인댄 弗能을 不措也하며 有弗問이언정 問之인댄 弗知를 弗措也하며 有弗思이언정 思之인댄 不得을 弗措也며 有弗辨이언정 辨之인댄 弗明을 弗措也하며 有弗行이언정 行之인댄 弗篤을 弗措也하며 人一能之어든 己百之하며 人十能之어든 己千之니라. 果能此道矣면 雖愚나 必明하며 雖柔나 必强하니라.

 

 

정성스러운 것은 하늘의 작용이고 정성스럽게 되도록 노력해 가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다. 완벽하게 정성스러운 것은, 삶을 유도해 가는 근본적인 의지인 성(性)이 그대로 발로된 것이므로 이때는 삶이 가장 충실해진다. 젖먹이 아이들이 알맞게 먹으면 저절로 그침으로써 과식하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적중하고 생각해서 하지 않아도 저절로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되어 최선의 도리에 적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고플 때 먹도록 유도하는 것이 삶을 유도하는 성(性)의 작용이기 때문에 이 성(性)의 작용에 충실하면 삶에 가장 알맞은 양만을 먹고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외적인 행위에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목적지로 가는 길이 두 갈래가 있다고 하자. 하나는 순조로운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험난한 길이라고 할 때, 성(性)의 작용이 충실히 발휘되면 힘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순조로운 길을 택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 중에서 성(誠)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성(性)에 따라서 사는 자이고 성(誠)을 실천하는 자인데 이를 성인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인은 하늘의 작용을 실현하는 하늘이다.

 

성인은 무심히 성(誠)을 실천하기만 하면 저절로 최선의 도리가 실현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느 정도 먹는 것이 좋고, 어느 길을 가는 것이 좋으며,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지 객관적으로 살펴 그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여 흔들리지 않고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살펴 그 최선의 방법을 알고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널리 배우고 자세하게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분별해야 하고 독실히 행해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몰라도 배우기로 작정하면 다 배울 때까지 계속하고, 묻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묻기로 하면 다 알 때까지 끝까지 묻는다. 또 생각하지 않으면 몰라도 생각하기로 작정하면 다 알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생각하고, 분별하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분별하기로 작정하면 완전히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한다. 그리고 실천하고 행하는데 있어서도 일단 하기로 하면 끝까지 독실하게 해야 한다.

 

남이 하나를 하면 나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하면 나는 천을 한다는 각오로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 즉 끝까지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실천하고 행하기를 남보다 백 배 노력할 수 있다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반드시 밝아지고 비록 나약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p.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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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시선 지만지 고전선집 469
이하 지음, 이규일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莫種樹(나무를 심지 말자)

 

                                     이하(李賀.791~817)

 

園中莫種樹 (원중막종수)  뜰에 나무를 심지 말자.

種樹四時愁 (종수사시수)  나무를 심으면 사시사철 근심하게 되느니

獨睡南床月 (독수남상월)  홀로 잠들면 남쪽 침상으로 스며드는 달

今秋似去秋 (금수사거추)  올 가을이나 지난 가을이나 한결같다.

 

 

이 시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올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한 스피노자(1632~1677)의 명언과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던 가수 이용의 노래 <서울>과는 너무도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굳이 지구 온난화 현상, 환경 파괴 같은 거창한 단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나무 심는 데 이견을 내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이 시에서처럼 “나무를 심지 말자.”라고 강변하는 사람은 더욱 없다.

 

그럼 이 시인은 무슨 이유로 뜰에 나무를 심지 말라고 했을까? 왜 나무를 심으면 사시사철 근심하게 된다고 했을까? 나무를 심지 않은 텅 빈 뜰이, 그런 뜰을 바라보는 사람이 사시사철 근심하게 되지는 않을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심는 사람에게는 무엇인가에 뜻을 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묘목을 심은 다음부터 하루하루 물을 주면서 그 나무가 커가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뜻도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되새겨보게 된다. 나무가 잘 자라면 잘 자라는 대로, 자신의 뜻은 언제나 이루어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고,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거나 잎새가 시들게 되면 행여 자신의 뜻이 펴지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나무를 심으면 사시사철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나무를 심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 와중에 달마저 떠서 외로움, 낙담을 더욱 부추기지 않는가.

 

시인이 오래 살아서 쉰, 예순이 넘어서 이 시를 다시 보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이 되면 뜰에 나무를 심어도 그저 관조하게 된다.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짐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인생의 관조나 여유는 확실히 나이가 들어야 알게 되는 듯하다.

 

이하에 관한 일화가 있다. 이하는 아침에 해가 뜨면 쇠약한 말을 타고 까까머리 어린 종을 앞세운 채 자신은 오래된 금낭(錦囊 : 비단주머니)을 등에 메고 문을 나섰다. 그러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이를 적어 그 비단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무릇 그의 시는 먼저 제목을 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그의 어머니가 여종으로 하여금 그 비단 주머니를 뒤지게 해서 많은 글이 쏟아져 나오면 곧 화를 내었다.

 

“ 이 아이는 마음을 다 토해내고 나야만 그만둘 성질이로다!”

저녁을 차려놓아도 이하는 거들떠보지 않고 여종에게 그 글을 모두 꺼내 놓게 하고는, 먹을 갈아 종이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글을 보족(補足)하여 완성했다. 그는 술에 아주 취하거나 남의 상사(喪事)에 참가하는 경우가 아니면 항상 이렇게 살았다. 그의 시는 기이한 풍격을 매우 숭상했으며, 결구(結句)는 마치 화초와 같아 편편이 문채(文采)가 뛰어났다. 그리고 모두가 놀랄만큼 문장이 고매하여 보통 시인의 경지를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그를 흉내 낼 수가 없었다. 넘치는 재능과 열정을 주체하기 어려워 건강을 해쳤는지 안타깝게도 겨우 스물일곱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그를 금낭시인(錦囊詩人)이라 불렀다.

 

요절한 이하(李賀)를 생각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빠른 자는, 뒤로 물러나는 것도 빠르다(其進銳者, 其退速).”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맹자>의 <진심(盡心)> 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하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 성취가 남달랐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은 일찍 세상을 떠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오래 사는 듯한데, 비범한 사람들은 꽃처럼 너무 빨리 지고 마니 야속하기만 하다. 채 마흔이 안돼서 세상을 뜬 인물이 많은데, 당나라 왕령이 스물여덟, 이하가 스물일곱, 유희이 서른, 항우가 서른하나, 허난설헌이 스물일곱에 졸(卒)했다. 그래도 그들이 남긴 좋은 작품이 또한 세상 사람들을 위로하니 이를 다행으로 여겨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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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10-01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왕각서를 쓴 왕발도 27살에 세상을 떠났죠...저도 한 때는 ˝남창은 고군이요,홍도는 신부라...˝로 시작하는 등왕각서를 외우고 또 헛되이 당시선을 끼고다니며 쓸데없이옥편을 뒤적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시골향기님의 한시 리뷰들을 보니 그때 생각이 납니다. 그때 읽고 외웠던 시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만....뭐 별 수 없죠 ^^

금낭시인이란 말은 의미도 마음에 들고 어감도 좋은 것 같습니다..^^

시골향기 2015-10-0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돼지님 반갑습니다. 저도 한문의 명문장들을 외우고 한때는 깊이 빠져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잊히고 기억조차 희미해져 갑니다. 그래도 한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정서가 풍요로울 듯 합니다. 옛 기억을 되살려 자신이 좋아했던 한시를 떠올려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금낭시인`하니 `금낭화`가 떠오르네요. 이름도 맑고 고와 왕발의 별칭으로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