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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 - 언제 어디서든 거부할 수 없고, 상관해야만 하는 질문
마르틴 부르크하르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고 있어서 그 중요성을, 혹은 그 유래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잡동사니 같지만 그렇지 않은 서른다섯 가지의 개념들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가는 책이다. 이것에 '철학'이란 제목이 붙은 이유는 뭘까? 원제가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인데 여러 이야기들의 그 유래를 알려주는 '역사'가 사실은 철학에 한 면을 맞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사인 것도 같고, 철학인 것도 같은 그 부분을 뭐라 이야기할 방법은 없지만 읽고 있으면 이것이 철학인지 역사인지 헷갈릴 만한 이유는 되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판에는 '철학'이라 붙어있어도 별로 어색함이 없다. 누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어는 예리하게 철학을 논하기에 합당한 언어인 것이 아마도 제목에 반영되었던 것도 같다. 실은 독일책이기 때문에 우리의 통념과는 아주 많이 다른 이야기, 혹은 생각들이 있어서 낯설기도 했고 뭐 이런 쓸데 없는 내용에 골머리를 썩혀가며 읽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도 갖기는 했지만 이 책은 여러 모로 내게 다양한 배경 지식과 좀더 폭넓은 시야를 갖게 해주었다. 그것은 살면서 필요한, 혹은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근본적인 입장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고나 할까. 인간은 죄인이라는, 원죄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인간에겐 죄성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나 자신만 봐도 쉽게 확인가능하고 이전에도 몰랐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은 독일의 학교 김나지움의 어원을 설명해주는 페이지를 보면서이다. 얼마나 끔찍하고도 놀랍던지, 알고 있었던 것을 재확인하다못해 끔찍한 상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라 성에 대해 순수하고 싶은 사람은 한 단락만 뛰어넘어 보길 바란다. 그리스어 '김노스 gymnos'에서 유래한 김나지움은 '벌거벗다'란 뜻에서 나왔다. 그리스 시대에 개최했던 올림픽에서는 모두 벌거벗고 순수한 육체의 기량을 확인했던 사실을 모두 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말고도 아주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원전 5세기 김나지움에서는 실제로 소년들이 벌거벗고 학교에 등하교하고 그때 성추행하는 불한당을 상대해서 사형이란 제도가 있었을 정도로 성에 대해 문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동성애가!! 여성들은 그 당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을 때니, 여성이 학교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성추행은 모두 중년의 남성이 소년에게 행하는 일을 말한다. 또한 김나지움 학교에서 단련하는 소년이 행하는 것 중에서는 키스 시합도 있었단다. 언젠가 나이 많은 어른이 소년을 취하는 일이 당연히 오기 때문에 그 때를 대비한 훈련이었고, 그리스의 소년 사랑이 괴벽이 아닌 일종의 제도란 사실을 뒷받침한다. 김나지움의 목표는 결투에 응할 수 있는 당당한 시민을 육성하는 것인데 이 때 중요한 것은 단결심이었다. 단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이인 것이 가장 결속력이 강했을 테니 소년 사랑이 제도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스가 멸망한 것도 당연하지 싶다. 소년 사랑, 즉 동성애가 제도로 굳어진 사회라면 가정이 생겨나지도, 유지되지도 못할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면 성이 문란한 것을 넘어서 한 사회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문이다. 허니문이란 이벤트도 남색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니까 진저리치도록 끔찍할 따름이다.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의 역사가 이렇게나 오래된 것이란 점을 두고 볼 때, 인간의 죄성은 아주 두텁고 견고하다고 보여진다.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기까지에 이르렀던 요즘 세태는 어쩌면 멸망을 향해갔던 고대 그리스를 보는 것과 같지 않나. 성경은 세상에 등장하는 모든 범죄가 다 담겨있는 책이란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구약을 보면서 끔찍한 죄악에 몸서리칠 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 보는 인간의 죄악이란 뿌리 깊고 견고하며 인간으로선 도저히 깨부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할 뿐이다. 인간이 제 쾌락을 위해 저지르는 모든 만행, 즉 사소하게는 자기에게 하는 최면이나 자기합리화부터 자기기만, 사기, 우상 숭배, 성적 타락, 재물에 대한 탐욕 등은 끝이 없이 이어질 뿐이란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인간은 그저 쾌락만을 탐닉하기 위해 태어난, 아니면 생겨난 존재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행복이란 화두가 대세인 요즘에는 돈이 많으면 대다수가 행복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달린다. 나부터도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밀리언즈란 영화를 보면서 당장 써버려야 할 20억이 생기면 무엇을 할까 생각해봤더니 일단 차를 바꾸고, 최신 기종의 스마트폰으로 다섯 식구 다 바꾸고, 집의 가구와 전자 기기, 컴퓨터를 몽땅 교체하고 옷과 가방, 구두를 명품으로 교체하면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돈을 쓸 수 있는 기한이 열흘 밖에 없었기에 빨리 빨리 써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내 상상 속에서는 선행이나 절대자를 향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이 등장한 듯 싶다. 상상 일 뿐인 20억 앞에 나는 하나님을 찾지 못했으니. 마치 20억이면 모든 것이 될 것처럼. 평생 20억을 만져볼 수 없을 테지만 그깟 20억은 생명 하나를 살리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상상 속에서라도 돈이 생기기만 하면 쓰기에 바쁜 나로서는 얼마나 간사한가. 동성애에 치를 떨지만 탐욕이나 자기애에 대해선 똑같이 범죄하는 나인데, 이것이 인간의 전부일까. 평생을 걸쳐 살아가는 목적이 제 욕심 채우기가 전부인가 말이다. 하나님을 믿어도 항상 흔들리고 마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더욱 궁금하다. 평생을 살아도 무엇을 위해 사는지가.
이젠 국가에 대해서 생각해볼까. 국가가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얼마나 근거없는 허상인지를. 지금은 국가의 체계가 갖춰져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니 당연히 있는 존재로 생각되어버리고 말지만, 실제로 '국가'란 말은 얼마나 모호한지 모르겠다. 국가 있다고, 행정부에서 일을 하고 시스템을 돌리는 존재가 있으니 '국가'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 국가란 행위의 주체는 없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처럼 무언가 우리를 보호해주고 치안을 유지시켜주는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살아가는데 편리할 뿐, '국가'에 실체가 있을까? 그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 사회가 굴러가는데 도움이 아주 많이 될 뿐, 만약 모든 사람이 그런 믿음에서 벗어난다면 사회는 얼마든지 붕괴되고 말 뿐이다.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이란 책에서도 나왔듯이, 통장에 찍힌 숫자만 보고 그곳에 내 '돈'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주식시장이 거래될 수 있고 신용카드가 사용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사회적 약속 같은 믿음이 없다면 금방 붕괴되고 만다. 그러니까 이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에 코스닥이 바닥을 치는 것처럼. 실체가 없다고 믿게 되면, 뭔가가 의심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생기면 바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주식시장이 국가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 나이 먹도록 주식에 투자해본 적이 없는데 현물은 하나도 없고 숫자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저 주식이 내 상식으로는 아직까지도 이해되지 않아서 투자를 못했다. 통장에 찍힌 숫자도 잘 이해되지 않는 내가 주식을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은 아마도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평가된 주식을 사서 오랫동안 묵혀놨다가 큰 이익을 보는 재미는 아마도 쏠쏠할 듯 싶다. 주가 조작이나 소문을 흘려서 이익을 얻는 잡것이 생기는 것도 이런 실체 없는 유령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 가장 없애버리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실체 없는 주식이다. 저게 없었다면 미국의 금융 위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텐데. 웃기고도 허탈하다, 인간은.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