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평전 : 시대공감
최열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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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총 컬러판 도판으로 되어 묵직한 273페이지 분량의 책이 이렇게나 쉽사리 읽힐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박수근이라는 화가가 남긴 흔적을 따라 대략 300페이지의 분량으로 엮어낸 이 책은 아마도 수많은 박수근 평전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 쉬울 것이다. 본인이 남긴 글이라곤 자신이 죽던 해에 여성 잡지 <여원>에서 청탁받은 ‘신사임당’에 대한 글 뿐이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인데 저자는 책에다 박수근이 살던 강원도 양구의 지역적인 설화까지도 채집해왔다. 그것을 들으니 그 양구라는 곳이라는 곳의 풍경이 그저 눈으로만이 아니라 귀로도, 상상으로도 확 끼쳐 왔다. 실제 이 책의 무거운 두께를 보고 기가 죽기도 했던 터라 이렇게 쉽게 읽힐 것은 예상하지는 못했다.

 

내가 박수근이라는 화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독특한 유화 기법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 그 뿐이다. 일제강점기의 시대를 지나 한국 전쟁을 지나고 15년을 더 산 근현대기의 화가라고, 그것도 조그만 나라의 유화 화가라고 하기에는 그의 화풍이 놀랍도록 독보적이지 않는가.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는 아마도 미술 수업이 있었던 중학교 때쯤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90년대의 어린 내 눈으로 봤을 때도 파격적일 정도로 단순한 그 유화 덩이들이 그렇게나 시선을 잡아끌 수가 없었다. 소재로만 보면 순수하게 우리 조선의 것이지만, 몇 개의 선으로만 그린 소녀나 나무, 엄마는 단순성을 획득하면서 세계성을 지향하지 않는가. 그 당시에는 현대 작가인 줄 알았지만 근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이렇게나 알고 보니 그 세계성이 더 놀랍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그것은 제대로 된 미술 학업을 받지 못 했기 때문에, 순전히 박수근 작가의 독학으로만 얻어낸 화풍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미술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화가와 미술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독자가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이라고 한다면 인연이겠다.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삼대 독자인 아버지는 아들을 그렇게 소망했지만 박수근 이전에 딸만 내리 셋을 낳아놓은 상태라 두 번째 며느리를 더 들이고자 하는 어른들의 소망을 묵살하고 낳은 아들이 박수근이다. 그 이후에도 남동생 동근과 원근이 줄줄이 태어나자 그야말로 부러움이 없던 집안이었다. 대대로 부유했던 가산도 일제의 개발정책과 맞물려 한 몫 잡아보겠다는 아버지가 광산을 개발하는데 다 쏟아 부어 망한 후에는 박수근에게는 가난의 그림자가 떨어진 적이 없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으로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그에겐 그림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보통 학교 시절 그림을 그렸다 하면 교실 벽에 붙여지고 일본인 교장 선생님이 직접 화구들을 사서 챙겨줄 정도로 특출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미술학교 같은 곳은 언감생심이었던 것.

 

그래서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이철이가 조선미술전람회에 두 번이나 연속으로 입선한 것을 보고 그제서야 겨우 출품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 후로부터 여러 번 입선을 했으나 특선도, 작가도 될 수 없었던 그에게는 항상 혹평이 따라다녔다. 제대로 된 미술 수업조차 받지 못했던 그였으니 일반 화가의 눈에 어설픈 붓질이라 여겨진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또한 박수근은 항상 조선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린 탓에 그 당시에 미술계에서 요구했던 세계성을 획득하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전까지 그 어떤 화가들도 시도해본 적 없었던 유화 표현 방식을 보면 그는 이미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가장 세계적인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그림은 동족의 작가들에게 인정받기 전부터 미국에서 호평을 받아 더러 더러 구매가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에서 한국 화가들을 소개하는 잡지 매체에서도 조선이 추천하는 작가들이 아닌 박수근의 이름이 당당히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어떠한 학연도 지연도 얻을 수 없었던 박수근이었기에 주류 화가들에게는 항상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그가 죽은 해부터 그의 이름이 암암리에 알려지게 되더니 이제는 같은 분야에 있는 화가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그의 그림에게서 감동을 받아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죽은 다음이 무슨 소용이냐고 그렇게 생각했던 과거도 있었지만, 어쨌든 예술가에겐 자신의 그림을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그는 전시회 때문에 빌려준 그림을 도둑맞고서도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만 기뻐했던 사람이었으니 그가 안타깝게 죽은 후이라도 그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많은 팬들이 생긴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유화를 두텁게 바르고 하나씩 하나씩 붓질하는 그 어렵고도 힘든 화풍을 제대로 정립한 다음에 완성된 그의 많은 그림들은 절대로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따뜻함이 풍겨져 나와서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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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철학법 - 프로이트에서 뒤르켐까지 최고의 인문학자들, 여행의 동행이 되다
김효경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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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라기에는 너무 뜬금이 없고 철학서라기엔 그 깊이가 없는 책이 등장했다. 단아한 표지에 땀내가 물씬 풍기는 밑낯의 여행기을 볼 수 있겠다 내심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조금 다른 여행기였다. 그녀가 말했다시피, 낭만적인 풍경과 매력적인 날씨를 가득히 드러내는 사진와 소소한 에피소드를 가득히 채운 여행기와 블로거들의 자랑질에 속아서 여행을 오면, 실제로는 그렇게 아름답기만은 않다고 하는 그 부분에서는 깊이 공감되었다. 여행이라는 말에, 불편한 이동 시간과 여독과 짐을 챙겨야 하는 귀찮음만 떠올리는 나로서는 그녀의 푸념이 무척이나 끄덕여지는데 그녀가 말한 것은 겨울비에 뼛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와 바닥난 체력, 벼룩이 창궐하는 공동숙소의 불편함과 삭사를 때워야 하는 번거로움 등이었다. 그녀가 말한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부분이여서 혼자서 배낭 하나만 달랑 들고 여행 떠나본 적 없어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여행을 꾸준히 다녀오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는 공감할 수 없으니 내가 봐도 정말 여행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여행을 다녀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는 요즘 시대에 여행은 갖다오면 혹시나 큰 도움이 될런지는 몰라도 어쩐지 나에게는 그리 가까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훌쩍 떠났다가 다시 훌쩍 돌아오는 진정한 노마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앉아서 제 자리에서 삶을 관조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녀도 말했지만, 제 인생을 사색하며 생각해보는 것을 꼭 먼 타향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새롭게 환기되는 일은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가능은 하다.

 

예전에 중국에 잠깐 다녀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계속 나가고 싶고 다른 곳에서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그것은 단순히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예 정착하고 싶은 생각이긴 했지만 내 나라, 내 땅이 아닌 곳에서 살아갈 마음이 들었던 것은 처음이라 상당히 놀랍기도 했다. 그 때 생각했던 것이 있다. 익숙하고 정든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경험하는,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사소한 물건 하나에도 어떤 의미가 부여되고 반짝반짝 빛나 보였던 것이 사실은 내가 살던 곳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낯선 그 어떤 곳도 내게 새로운 것은 없었던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던가. 내가 지금 거하고 있는 곳에서도 충분히 의미를 만들고 세상을 반짝반짝 빛나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여행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한다. 바로 그것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외국 여행에서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여행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나도 여행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내 생활이 바쁘게 돌아갈 때마다 한가로운 파란 바닷가에서 흰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거니는 상상을 안 하는 것은 아니기에 여행이 그리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적극적인 여행이라기보단 현실에서 회피하고 싶어하는 본능이니까 제외하기로 한다. 하지만 누군가도 나와 같이 여행의 단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이 책과 동질감이 느껴진다.

 

서문에 밝혀놓았듯이,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 대화식으로 풀어놓았다는 것도 어찌 보면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는데 최대한 사실로 복원해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둘 만 하다. 그녀의 목적이 제대로 먹혀들어갔는지 여러 철학자들과의 대화가 무척이나 재미있게 이해됐다. 또한 천재적인 데카르트가 그렇게 오만하고 방자했다는 것도 말이다. 그렇게 힘들고 짜증나는 일을 경험하며 유럽을 돌아다니다가 불현듯 떠오른 것들을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여러 철학자들과 연결해서 갈무리해두었는데 가장 마음에 와닿는 것은 그 중에서 베이컨의 경험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했다고 했던 것과 게으른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대해서이다. 오만 방자하기도 하고 바람둥이 기질이 농후한 데카르트 편도 아주 재미나게 읽었는데 그가 말한 사상이 이전의 시대, 즉 신을 최고로 두고 고속도로를 깔아둔 것 같은 세뇌로 인류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는 신학을 깨부수는 아주 혁명적인 사상이었음을 다시 알게 되었다. 내가 알기론 자신이 생각하는 것 그 자체만 의심하지 않는 아주 시니껄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주 게으른 무척이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별것 아니게 보였던 베이컨의 경험론 또한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라는 의미로, 이전까지의 신학에서 받아들여져왔던 모든 것을 보이지 않는 신을 말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말라는 혁명적인 사상임을 알려주었다. 고등학생 때 잠깐 윤리 과목에서 배웠던 베이컨의 경험론이 이런 의미였는 줄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카톨릭 사상이 지배했던 시대이다 보니 워낙 많은 비리와 많은 부분에서 개혁이 필요했던 시대임은 분명하다. 그런 시대였기에 이런 개혁적인 사상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의 여행 중의 사색이 새로운 앎의 기회가 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경험이었다. 여행을 하진 않았지만 마치 같이 가서 벼룩에라도 뜯기고 온 것처럼 생생한 체험이 있어 반가웠다. 그랬기에 게으른 여행가인 나로선 움직이지 않고서도 좋은 경험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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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의 습격 - 먹거리에 대한 통념을 뒤엎는 놀라운 기록
유진규 지음 / 황금물고기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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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의 습격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어감은 어딘지 모르게 의아할 따름이다. 실제로 옥수수가 우리 몸에 무어 그리 나쁠 것이 있겠냐는 생각이 들기 마련 아닌가 말이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옥수수는 달콤한 맛으로 우리 주변에 머물며 팝콘이나 기름, 콘 후레이크 등으로 우리의 식재료 중에 빠짐없이 등장해왔던 식물이다. 게다가 이렇게 우리가 옥수수를 많이 먹었던 그 근거에는 옥수수가 식물성이니 기름으로 짜도 그리 몸에 나쁠 것이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의 근거 없는 맹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콜레스테롤이 심장질환에 가장 나쁘다는 뿌리 깊은 맹신으로 인해 동물성 기름은 나쁘고 식물성 기름은 아주 좋다는 우리의 믿음은 점차적으로 심장병 질환자들이 증가하는 것으로 보답 받고 있을 뿐이다. 버터가 좋지 않다는 말을 언제부터 들었던가? 그 대체 식품으로 등장한 마가린이 오히려 나쁘다는 말은? 실제로 이 책은 우리가 맹신하고 있던 식물성 기름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오히려 식물성이 동물성보다 나쁠 수 있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 말이 전혀 근거 없지 않은 이유는 이누이트 족이나 아프리카 부족 중에서 마사이 부족들은 육식만 하는데도 우리가 성인병으로 불리는 현대병은 전혀 찾아볼 수가 사실 때문이다. 동물성 기름이 그렇게나 나쁘다면 그런 종족들이 이미 멸종하고도 남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요즘 우리가 심심치 않게 거론하는 중요한 지방산 중에는 오메가-3 지방산이나 오메가-6 지방산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식물성 기름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동물성 기름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등푸른 생선에 많이 들어있다는 오메가-3 지방산은 머리에 좋다는 DHA나 EPA가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인체 안에서 세포를 보호하고, 세포의 구조를 유지시키며, 원활한 신진대사를 돕는다. 또한 혈액의 피막형성을 억제하고, 뼈의 형성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지방을 쌓이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오메가-6 지방산은 동물성 내에서는 합성되지 않는 필수지방산으로 옥수수와 같은 알곡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콜레스테롤의 양을 저하시키기는 하지만 암을 유발하고 지방을 쌓는 등의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에 밝혀진 것이라서 과거 콜레스테롤이 심혈관계 질환의 주범으로 손꼽혔을 때는 미처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콜레스테롤만 잡으면 모든 심혈관계 질환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오히려 동물성 기름을 많이 섭취했을 때, 멀쩡히 살이 빠진다거나 심혈관계 질환이 나아가는 임상실험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니 아예 무시해버릴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동물성 기름을 많이 섭취했을 때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단순히 육류를 먹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들이 충분히 오메가-3 지방산을 섭취했을 때, 즉 풀을 많이 섭취한 동물을 먹었을 때에나 그럴 수 있던 것뿐이다. 지금 현재 소나 돼지, 닭에게 사료로 제공되는 옥수수들은 오메가-6 지방산의 주공급원이 되어 버리기에 그렇게 사육된 동물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저 오메가-6 지방산을 먹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육류를 자제하고 되도록 식물성 기름을 먹으려고 노력해도 그것이 풀잎을 먹어서 키운 동물이 아니고 알곡을 사료로 먹은 동물이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으로 우리에게는 염증과 암과 비만과 심장병이 생길 뿐.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이 놀라운 역할을 하는 오메가-3 지방산이 많은 풀을 동물이 3주만 먹으면 이전까지 먹었던 오메가-6 지방산으로 구성된 육질이 모두 오메가-3 지방산으로 바뀐다는 사실 때문이다. 실제로 겨울에는 풀이 나지 않거나 생산력을 맞추지 못한다는 이유로 옥수수 사료밖에 먹일 수 없는 농가에서 특별히 교수님들이 고안해낸 오메가-3 지방산 특별 사료를 같이 먹여 봤더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껏 잘못 먹였던 모든 가축에게도 지금부터 풀이나 풀 가공 사료를 이용해서 오메가-3 지방산의 균형을 맞춰준다면 충분히 우리에게도 육류를 즐겁게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어떤 병에라도 걸릴 걱정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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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 - 언제 어디서든 거부할 수 없고, 상관해야만 하는 질문
마르틴 부르크하르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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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고 있어서 그 중요성을, 혹은 그 유래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잡동사니 같지만 그렇지 않은 서른다섯 가지의 개념들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가는 책이다. 이것에 '철학'이란 제목이 붙은 이유는 뭘까? 원제가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인데 여러 이야기들의 그 유래를 알려주는 '역사'가 사실은 철학에 한 면을 맞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사인 것도 같고, 철학인 것도 같은 그 부분을 뭐라 이야기할 방법은 없지만 읽고 있으면 이것이 철학인지 역사인지 헷갈릴 만한 이유는 되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판에는 '철학'이라 붙어있어도 별로 어색함이 없다. 누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어는 예리하게 철학을 논하기에 합당한 언어인 것이 아마도 제목에 반영되었던 것도 같다. 실은 독일책이기 때문에 우리의 통념과는 아주 많이 다른 이야기, 혹은 생각들이 있어서 낯설기도 했고 뭐 이런 쓸데 없는 내용에 골머리를 썩혀가며 읽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도 갖기는 했지만 이 책은 여러 모로 내게 다양한 배경 지식과 좀더 폭넓은 시야를 갖게 해주었다. 그것은 살면서 필요한, 혹은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근본적인 입장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고나 할까. 인간은 죄인이라는, 원죄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인간에겐 죄성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나 자신만 봐도 쉽게 확인가능하고 이전에도 몰랐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은 독일의 학교 김나지움의 어원을 설명해주는 페이지를 보면서이다. 얼마나 끔찍하고도 놀랍던지, 알고 있었던 것을 재확인하다못해 끔찍한 상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라 성에 대해 순수하고 싶은 사람은 한 단락만 뛰어넘어 보길 바란다. 그리스어 '김노스 gymnos'에서 유래한 김나지움은 '벌거벗다'란 뜻에서 나왔다. 그리스 시대에 개최했던 올림픽에서는 모두 벌거벗고 순수한 육체의 기량을 확인했던 사실을 모두 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말고도 아주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원전 5세기 김나지움에서는 실제로 소년들이 벌거벗고 학교에 등하교하고 그때 성추행하는 불한당을 상대해서 사형이란 제도가 있었을 정도로 성에 대해 문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동성애가!! 여성들은 그 당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을 때니, 여성이 학교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성추행은 모두 중년의 남성이 소년에게 행하는 일을 말한다. 또한 김나지움 학교에서 단련하는 소년이 행하는 것 중에서는 키스 시합도 있었단다. 언젠가 나이 많은 어른이 소년을 취하는 일이 당연히 오기 때문에 그 때를 대비한 훈련이었고, 그리스의 소년 사랑이 괴벽이 아닌 일종의 제도란 사실을 뒷받침한다. 김나지움의 목표는 결투에 응할 수 있는 당당한 시민을 육성하는 것인데 이 때 중요한 것은 단결심이었다. 단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이인 것이 가장 결속력이 강했을 테니 소년 사랑이 제도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스가 멸망한 것도 당연하지 싶다. 소년 사랑, 즉 동성애가 제도로 굳어진 사회라면 가정이 생겨나지도, 유지되지도 못할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면 성이 문란한 것을 넘어서 한 사회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문이다. 허니문이란 이벤트도 남색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니까 진저리치도록 끔찍할 따름이다.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의 역사가 이렇게나 오래된 것이란 점을 두고 볼 때, 인간의 죄성은 아주 두텁고 견고하다고 보여진다.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기까지에 이르렀던 요즘 세태는 어쩌면 멸망을 향해갔던 고대 그리스를 보는 것과 같지 않나. 성경은 세상에 등장하는 모든 범죄가 다 담겨있는 책이란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구약을 보면서 끔찍한 죄악에 몸서리칠 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 보는 인간의 죄악이란 뿌리 깊고 견고하며 인간으로선 도저히 깨부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할 뿐이다. 인간이 제 쾌락을 위해 저지르는 모든 만행, 즉 사소하게는 자기에게 하는 최면이나 자기합리화부터 자기기만, 사기, 우상 숭배, 성적 타락, 재물에 대한 탐욕 등은 끝이 없이 이어질 뿐이란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인간은 그저 쾌락만을 탐닉하기 위해 태어난, 아니면 생겨난 존재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행복이란 화두가 대세인 요즘에는 돈이 많으면 대다수가 행복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달린다. 나부터도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밀리언즈란 영화를 보면서 당장 써버려야 할 20억이 생기면 무엇을 할까 생각해봤더니 일단 차를 바꾸고, 최신 기종의 스마트폰으로 다섯 식구 다 바꾸고, 집의 가구와 전자 기기, 컴퓨터를 몽땅 교체하고 옷과 가방, 구두를 명품으로 교체하면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돈을 쓸 수 있는 기한이 열흘 밖에 없었기에 빨리 빨리 써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내 상상 속에서는 선행이나 절대자를 향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이 등장한 듯 싶다. 상상 일 뿐인 20억 앞에 나는 하나님을 찾지 못했으니. 마치 20억이면 모든 것이 될 것처럼. 평생 20억을 만져볼 수 없을 테지만 그깟 20억은 생명 하나를 살리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상상 속에서라도 돈이 생기기만 하면 쓰기에 바쁜 나로서는 얼마나 간사한가. 동성애에 치를 떨지만 탐욕이나 자기애에 대해선 똑같이 범죄하는 나인데, 이것이 인간의 전부일까. 평생을 걸쳐 살아가는 목적이 제 욕심 채우기가 전부인가 말이다. 하나님을 믿어도 항상 흔들리고 마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더욱 궁금하다. 평생을 살아도 무엇을 위해 사는지가.

 

이젠 국가에 대해서 생각해볼까. 국가가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얼마나 근거없는 허상인지를. 지금은 국가의 체계가 갖춰져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니 당연히 있는 존재로 생각되어버리고 말지만, 실제로 '국가'란 말은 얼마나 모호한지 모르겠다. 국가 있다고, 행정부에서 일을 하고 시스템을 돌리는 존재가 있으니 '국가'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 국가란 행위의 주체는 없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처럼 무언가 우리를 보호해주고 치안을 유지시켜주는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살아가는데 편리할 뿐, '국가'에 실체가 있을까? 그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 사회가 굴러가는데 도움이 아주 많이 될 뿐, 만약 모든 사람이 그런 믿음에서 벗어난다면 사회는 얼마든지 붕괴되고 말 뿐이다.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이란 책에서도 나왔듯이, 통장에 찍힌 숫자만 보고 그곳에 내 '돈'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주식시장이 거래될 수 있고 신용카드가 사용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사회적 약속 같은 믿음이 없다면 금방 붕괴되고 만다. 그러니까 이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에 코스닥이 바닥을 치는 것처럼. 실체가 없다고 믿게 되면, 뭔가가 의심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생기면 바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주식시장이 국가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 나이 먹도록 주식에 투자해본 적이 없는데 현물은 하나도 없고 숫자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저 주식이 내 상식으로는 아직까지도 이해되지 않아서 투자를 못했다. 통장에 찍힌 숫자도 잘 이해되지 않는 내가 주식을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은 아마도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평가된 주식을 사서 오랫동안 묵혀놨다가 큰 이익을 보는 재미는 아마도 쏠쏠할 듯 싶다. 주가 조작이나 소문을 흘려서 이익을 얻는 잡것이 생기는 것도 이런 실체 없는 유령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 가장 없애버리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실체 없는 주식이다. 저게 없었다면 미국의 금융 위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텐데. 웃기고도 허탈하다,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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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오의 하늘 1 -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 다큐멘터리 만화 요시오의 하늘 1
air dive 지음, 이지현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현재 일본에서 소아뇌신경외과의로 활동하는 타카하시 요시오라는 실존 인물을 들어 만화로 만들었다. 실존 인물을 만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 딱 까놓고 말해서, 그가 말년에 어떤 인간으로 평가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에 대해 만화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출판사측에서 모험을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만일 그가 말년에 구설수에 오르는 일을 저질러서 문제가 크게 난다면 그 출판사의 이름엔 먹칠을 하는 것일 테고, 그가 지금까지 이루어낸 많은 기적들이 모두 구렁텅이에 빠져버리는 것일 테니 말이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들 수 밖에 없고, 돈이 드는 일에는 이익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렇게 돈에 민감한 출판계 사람들이 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를 만들었다면 그 실존인물에 대해서 생각 좀 해봐야 하겠다. 타카하시 요시오는 1974년 삿포로 의대에서 소아뇌신경과를 졸업해서 많은 아이들의 생명과 그 가족들의 마음까지 구해준 의사이다. 소아뇌신경과란 일본 의사들 중에서도 몇 되지 않는 분야로, 수두증, 뇌종양, 두부외상 등을 비롯한 아이들의 뇌질환을 치료하는 분야인데 치료하는 부위가 뇌이다 보니 장애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주 전문적인 분야의 의사들이 흔히 그렇듯이, 객관적으로 감정으로 표현하지 않고 냉철하게 환자를 바라보지 않고 이 의사는 그들을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하고 병만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회에 나가 제 힘으로 살아가고 그들이 사회에 한 몫을 담당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는 것에 그에 대한 놀라움이 생긴다. 의사라면 병만 고쳐주는 것만으로도 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지 않는가. 아니, 비정상적이라 하더라도 그것만 해도 몸이 모자라는 의사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타카하시 요시오란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환자를 바라볼까 궁금증이 든다. 의학 분야가 얼마나 어려운 분야인데, 그들이 흔히 항변하듯 자신의 분야에 대한 의학적인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만도 너무 어렵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타카하시 요시오란 의사는 많은 아이들을 살릴 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에게 희망까지 줄 수 있었을까.

 

어쩌면 희망은 독일지도 모르겠다. 아예 희망까지 주지 않는다면 포기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살 수도 있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희망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 싸움을 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오죽하면 '희망고문'이란 말도 생겨났겠는가. 이런 병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닌데 그는 초지일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희망을 전파한다. 큰 병에 걸렸다고 호들갑이 떨지도, 많이 배운 의사라고 고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은 그저 일상적인 감기에 걸린 것처럼 담담하게 그 병을 바라보게 해준다. 뇌수종에 걸린 코스케도 그런 경우였다. 체내에서 수액이 순환되어 뇌에 몰리지 말아야 하는데 어느 부분이 막혔는지 순환이 되지 않은 수액에 뇌가 점차적으로 커지는 병인 뇌수종은 그대로 놔두면 장애가 생길 수 밖에 없는 병이다. 생후 한 달이 되지 않은 코스케가 그 병에 걸려서 션트 수술을 해야 했을 때, 워낙 희귀한 병이고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도 일본 전체에 통틀어서 20명 안팎이어서 진단해준 의사가 한 번도 그 수술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코스케의 부모는 수소문 끝에 마술사라고도 불리는 어린이 뇌 전문 의사 타카하시 요시오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외진 곳에 위치한 뇌외과를 찾아가는 길은 무척이나 길고 어두웠지만 요시오 선생의 진료실을 여는 순간, 환한 빛과 밝은 생기와 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의 힘찬 격려를 느낄 수 있었다. 환자와 소통하는 의사라는 사실은 그의 진료실 벽 가득히 붙어있는 환자의 사진과 격려 글, 환자에게서 온 편지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일말의 위로를 느낀 코스케의 부모는 내시경 수술이 있다는 설명을 듣고 그것으로 결정하는데, 그 때부터 요시오 선생의 어린 시절로 전개된다. 아직 1권만 봐서 이 만화의 전체적인 구성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확실히 궁금증을 유발하는 구성이긴 했다.

 

아직 코스케의 생사 여부, 장애 여부가 궁금한데 2, 3권에 소개된 이야기도 코스케 이야긴 없으니 앞으로 나올 이야기를 기대하라는 뜻이겠다. 뒤에 등장하는 요시오 선생의 어린 시절은 무척이나 정겹다. 곤충 관찰에 푹 빠진 다섯 살의 요시오가 등장하는데 사랑하는 엄마와 자상한 아빠 밑에서 행복하게 성장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아주 귀엽게 그려진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환자의 마음까지도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는지는 등장하지 않았으니 아쉽긴 하지만 다음 권을 기대해볼 만 하겠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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