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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코끼리는 자신이 죽음을 알아차렸을 때, 무리를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고 한다.
자신의 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의 미련을 끊고 싶기 때문일까? ... 하지만...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어 할까, 아니면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매달리게 될까.
서른 해 남짓 살아온 나로선 아직 어느 것도 선택을 내리기가 어렵다.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배우자도, 자식도, 애인도 없으니까.
만약 살아갈 수 있는 나날이 6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면,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더 힘들까. 못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더 힘들까.
기억에 남을 찬란한 기억들이 무수한 사람이 더 힘들까... 아니면 별다른 일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 더 힘들까....
이런 찬란한 기억을 다시금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 가슴에 사무칠지... 아니면 그런 기억조차 가지지 못한 자신의 삶이 더 사무칠지...
이 물음에도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건 죽음을 문턱에 놓아둔 자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일 테니까.
이 소설은 채 쉰 살도 되지 않은 남성이 6개월 남짓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자신의 삶을 갈무리지어가는 이야기다. 남은 6개월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돌아보기 위해 만나지 못했던 옛 기억 속의 사람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고백도 해보지 못했던 첫사랑의 그녀, 고등학교 때 절교한 친구, 매정하게 뿌리쳤던 전 애인, 실수했던 직장 동료, 원한을 산 전 회사 사장까지 만나보고 나름의 유서를 남기고 돌아서는 그에겐 어쩜 더 잘 살지 못했던 회한이 남았겠다.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거라 여겨 실수해놓고서도 되돌리지 않았던 지난 날의 후회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어쩜 비단 나만이 느끼는 것은 아닐 게다. 꼭 내일이 있을 거라고, 내 잘못은 다음에 고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무심히 넘겨버렸던 많고 많았던 시간들... 그 시간의 부재가 주는 회환과 감동이 그를, 그리고 나를 울렸다.
아름다운 아내와 대학생의 아들, 고등학생의 딸을 하나씩 둔 48세의 샐러리맨인 후지야마 유키히로는 부동산회사에서 사장에게 신임을 받고 부하직원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신만만한 사내다. 어디 가서도 싫은 소리를 들을 것 같지 않은 그는, 사나이다운 패기와 열정, 그리고 애인에게도 살갑게 다가갈 수 있는 애정도 한껏 갖춘 미워도 밉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지만 그래도 자신만의 패기로 기준과 이상을 놓지 않은,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질 만한 그런 멋진 사내. 어느 정도는 고집이 있어 실수도 할 수 있지만, 언제나 그런 실수 정도는 애교로 보아 넘겨줄 수 있는 그런 매력을 가진 사람, 자상한 아버지, 부드러운 남편이었다. 어쩜, 48년의 시간이 너무도 짧게만 느껴질 그런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창 일할 나이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자신이 평가하는 자신과 남이 보는 자신은 분명한 간극이 존재할 것이다. 망나니짓을 한 사람도 그 자신은 합리화하니... 그런 그에게 남아있던 6개월의 시간은 자신이 한심한 인간이었음을 보게 했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남자였음을 똑똑히 제 눈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그에게 남겨진 것은 이제껏 자신이 받은 넘칠 만큼의 사랑의 기쁨과 감격!! 그것 뿐이었다. 제것만 챙겼던 그에게 무한히 베풀어주기만 한 아내의 무한한 헌신과 든든하게 자라준 아들의 존경심, 쾌활하고 자신감있게 자라준 딸의 애정, 불륜을 들키지 않게 갈무리한 애인의 배려심까지 그는 무한정 받기만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하지만... 인간에게 제 죽을 날을 미리 아는 것은 형벌일까, 축복일까?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릴 기회는 없지만 제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진다면, 어쩜 미리 아는 것은 축복일 수 있겠다. 암, 그렇고말고.
후지야마 유키히로. 그는 갔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남았다.
아마도 마지막까지 그가 바라고 원했던 것은 그것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기억되어지는 것.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알고 갈 수 있었던 그는 아마도 큰 축복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딸이 결혼하는 것도,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것도 못보고 가는 하잘 것 없는 인생이지만 그 자신의 기억만은 오롯이 가져갈 수 있었을 테니까. 아마 무섭도록 두렵고 슬플테지만 아마 그래서 행복했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은 무섭도록 재미있다. 방송 작가, 작사가, 음악 · 텔레비전 · 영화 프로듀서, 극작가, 영화감독, 만화 원작자, 텔런트, 이제 작가까지 손을 뻗은 다재다능한 아키모토 야스시의 이름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23년 동안 살아온 아내가 있으면서 5년 동안 애인을 곁에 둔 파렴치한 남자주인공을 만들어내고도 그런 주인공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그는 정말 천부적인 작가답다. 단순히 인생의 의미를 알려하지 않아도 재미를 찾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