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본색, 뿔 난 한국인 - 김열규 교수의 도깨비 읽기, 한국인 읽기
김열규 지음 / 사계절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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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 교수의 도깨비 읽기, 한국인 읽기」란 부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도깨비가 곧 한국인의 내적인 욕망을 투영한 대상이라는 말이 이 책의 주요 골자이다. 옛날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도깨비가 실존할 것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지만, 그런 괴물의 존재를 옛날부터 전해져내려온 이유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김열규 교수의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아귀가 들어맞았다. 뭐, 살기도 바쁜데 도깨비 같은 상상의 괴물에 대해서 굳이 논할 것은 무어냐고 되묻는다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우리 민족의 과거의 모습을 전달한다는 점에서만큼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면서 내가 먼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무척 어이가 없었다. 우리 선조들이 남겨두신 문헌이나 구전된 이야기 속에는 그 시대의 열망과 소망, 문화가 담겨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정말 우리 조상들은 도깨비란 괴물을 왜 만들어냈을까? 도대체 그런 이야기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이택광 교수의 『영단어 인문학 산책』이란 책을 봤었다. 그 책을 볼 때만 해도 이 책과 관련 있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는데 이제 와 보니 이 책과 그 근본이 비슷하다 여겨진다. 그 책은 영단어에 숨겨진 의미의 변천사를 통해 과거 영국의 중세 시대, 그 때쯤의 사회 모습이 어떠한지를 나름 알려주는 책이었다. 물론 처음 볼 때는 유래되어 인용된 라틴어나 독어, 프랑스어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계속 읽다보니까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중세 때는 겁에 질린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개화되지도, 전깃불이 환하게 밝히지도 않았던 시대인지라 장원을 벗어난 숲은 중세인들에겐 공포였다는 것이다. 그런 공포스럽고 으스스한 사회 분위기가 영단어에 박제되어 제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다 18, 9세기가 되면서 그 단어에 들어가 있던 으스스한 의미는 사라지고 다른 좋은 의미로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어휘의 의미가 달라진 것처럼 우리의 도깨비 이야기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혹은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만 싶었던 우리네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장난질이나 치고, 지나가는 과객을 붙잡고 씨름이나 한 판 하자고 달려들다가 지고, 도깨비불로 유혹해서 빙빙 돌다가 혼절하게 하고, 효심이 깊거나 착한 사람에게 뜬금없이 도움을 주는 등 익살스럽거나 해괴하거나 인정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도깨비는 한 가지 유형으로 딱 정의된다기보다는 여러 모순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한국인’을 투영한다고 볼 수 있다. 정의스럽지만 어딘가 욕심꾸러기고 마구 해코지를 하고 싶으면서도 익살스러운 그런 자유스러운 모습, 그것이 ‘한국인’이 원해왔고, 간직하고 있던 모습인 것이다. 도깨비이야기가 문헌에 등장한 것이 까막득한 옛날인 삼국 시대부터였다고 하는데, 그 시기부터 우리는 바깥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우리의 욕망을 그렇게나마 해소하면서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서양보다도 훨씬 현명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으로서 차마 해선 안 될 행동을 몰래 하기보다는 이야기로나마 표현해내고 발산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미련한 사람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도깨비가 저질렀다는 수많은 장난질을보자면 영특하고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많은데, 그것만 보더라도 우리 선조는 워낙 영특하고 재치가 넘쳤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아, 그런 민족성이 우리 안에 있구나. 다양 복잡하면서도 재치와 익살맞은 모습이 우리 한국인의 정서라면 이렇게 어렵고도 힘든 시기도 익살과 재치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조금은 위안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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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가 큰 아이들
윤병훈 지음 / 다밋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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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교육에 뜻을 두신 윤병훈 신부님께서 교감 연수를 받고 있을 때 공교육에서 튕겨져 나간 우리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세우고 싶단 소망에서부터 시작한다. 대안학교라~ 사실 대안학교가 있다면 내가 먼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가진 나로선 이런 멋진 분이 계시다는 것에 손을 들고 환영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지만 막상 나는 한 번도 학교를 세우겠다는 거창한 뜻을 품은 적이 없어서 그렇게 간단히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물론 생각해보면 신부님이시니까 도움의 손길을 주시는 수녀님들도 모을 수 있었을 테고, 본인이 교감 연수를 받고 있으셨으니까 교장 선생님이 되시는데 어떤 결격 사유가 없으니 아주 편리했을 테고, 그런 저자의 뜻을 인정해주는 많은 선생님과 자원봉사들까지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을 테니까 라고 내심 생각해보지만 책으로만 보니 모든 것이 쉬워보였다. 그렇게 쉽게 만든 것처럼 보인 학교가 바로 ‘양업고등학교’였다. 하지만 부지 선정에서부터 문제가 많았단다. 대안학교이다 보니까 소위 말하는 문제아들만 오는 줄 알고 부지 선정한 지역 주민들이 절대 안된다는 으름장만 놓기 일쑤였기에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오히려 산 좋고 물 좋은 ‘환희리’라는 곳을 예비해놓으셨기에 더 큰 복을 받았다고 할 수도...

 

처음엔 학교를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놀랐지만, 가슴을 진정 시키고 찬찬히 읽어가니 정말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많이 겪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유’와 ‘방종’을 알려주기 위해 두발 단속이나 강제 규칙은 없고 그저 원칙을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는 조용히 넘어가는 훈계를 했더니 처음에는 학교 전 건물의 흡연실화와 망가져가는 기물들이 늘어만 갔다. 교육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치고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냥 넘어가기가 솔직히 쉽지 않다. 아이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보다는 그런 행동이 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싫은 소리부터 나가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윤병훈 교장 선생님도 다짜고짜 소리를 지른다거나 화를 낸 적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 후에 오는 아이들의 상처 입은 표정과 말 한 마디가 그를 돌려놓았다고. 알고 보면 아이들은 거부당하고 상처 받았던 것을 그런 식으로밖에 풀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적인 문제 행동을 했던 것이었다. 아이들을 점차 알아가면서 ‘문제아’는 없고, ‘문제 행동’만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저자는 앞으로 ‘문제아’란 말 대신에 ‘청소년 문제’라고 썼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도 학원에 오래 있으면서 느꼈던 것은 ‘문제아’는 없고, 오로지 ‘문제 부모’만 있을 뿐이란 사실을 여실히 깨달을 때가 많았다. 아이의 잘못된 행동은 사실 그 부모에게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것인데, 부모는 제 행동은 돌아보지 않고 항상 학원 탓, 학교 탓, 남 탓만 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가끔은 학부모들에게 공격적인 마음이 들기도 하고(아이들을 아프게 하니까) 질책 어린 어투로 말하기도 했던 철 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좀 더 나이를 먹고, 보는 것도 많아지다 보니까 그런 부모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먹고 살기에 바쁘니까 아이들의 상처 받고 여린 마음을 헤아려주기가 쉽지 않았던 것을 어찌 부모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아이도 안쓰럽고 부모도 안쓰러울 뿐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부모는 어른이라는 것이다. 아이에게 어른을 이해해달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해를 하더라도, 기다려주더라도, 참더라도 그 모든 것은 부모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미성숙된, 자라나고 있는 인격체이기 때문에. 양업고등학교에 아이를 보낸 어떤 학부모 중에는 어릴 적에 아이를 너무 몰아붙이고 폭력적으로 대해서 아이가 어디 마음 붙일 데가 없어 학교를 벗어나기만 했던 것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학교로 아이를 찾아와서 울고 가기도 한단다. 그런 행동을 보인다고 해도 이미 상처를 받아버린 아이는 그 아비를 용서해주지 않았지만 그런 시기를 계속 보낸다면 그 아이도 결국은 마음을 열지 않을까. 

 

어른들이 잘못 해놓고서 마치 아이들에게만 모든 책임이 있다는 듯이 ‘문제아’라고 쓰는 것은 어른들의 무책임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앞으로는 ‘청소년 문제’라는 말을 써서 그것이 오로지 청소년들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저자의 논지였다. 그 말에 100% 동의한다. 처음부터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는 없다. 아무런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딴 곳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멍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운동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윽박지르는 선생님, 해코지 하려는 선배들, 소리 치는 부모 밑에서 있다 보니까 그렇게 자아가 상처 입고 갈갈이 찢겨져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생각이 있고 표현을 하고 웃을 수 있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을 보니, 정말 놀라웠다. 졸업생 중에는 명문대를 간 친구도 있고 사업을 해서 60억을 번 친구도 있다니까 정말 성공적인 학교가 아닐까. 결과로만 평가하는 것은 정말 나쁘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좀 더 내용을 살펴보자면, 일 년에 지리산 같이 명산을 종주하는 과정도 있고 봉사하는 활동, 연극, 전시회 등을 즐길 시간도 있으며, 중국 여행도 간단하게 다녀오기도 한다니까 24시간을 쪼개어 쓰는 일반 고등학생과는 정말 질적으로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는 입학하기 위해 장난 아닌 경쟁을 한다니까 양업이 잘 되긴 되었나보다.

 

이런 학교, 이렇게 초심으로 기본을 정해놓고, 그것이 설사 죽을 만큼 힘들지만 화를 내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참고 기다려주고 인내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일어날 기회를 주는 학교가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직도 희망 없는 공교육 속에서 짓물리고 버겁고 숨막히면서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고등학생들이 불쌍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긴 하다. 그런 온갖 말썽은 다 부린 아이들을 어떤 식으로, 어떤 말로 기다려주고 인정해주었는지 일지 같이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았던 점이 바로 그렇다. 아무래도 교육계에 관심이 있다보니까 상처 입고 내쫓김을 당한 아이들의 상처에 새 살을 돋게 하는 방법이 무척 궁금하기에 그런 점이 없던 것이 정말 아쉬웠다. 하지만 이런 성공적인 대안학교가 생겼으니 다른 대안학교도 내실을 기해서 아이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나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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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해요 2010-07-0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감사합니다.~☆
 
나를 찾아온 철학씨 - 문득 되돌아보고픈 인생
마리에타 맥카티 지음, 한상석 옮김 / 타임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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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온 철학 씨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그 철학 씨는 내게 행복한 삶 Good life를 살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해주었다. 우리가 읽고 듣고 느끼고 즐기는 열 가지 주제들을 놓고 곰곰히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통로를 놓아준 것이다. 그 열 가지란 바로 이것이다. 단순함, 의사소통, 시각, 유연함, 공감, 개성, 소속, 평온함, 가능성, 그리고 마직막으로 기쁨까지!! 총 473페이지의 묵직한 책으로 펼쳐진 맥카티의 열 가지 철학 지침은 형식은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읽고 있으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묶어두었다. 또 그런 열 가지 지침을 훨씬 충분히 체험하기 위해 영화나 음악, 다큐멘터리, 시, 소설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그런 자료가 뒤에 첨부되어 있다. 음악에 관심이 많다면 실제로 찾아서 듣고 읽고 즐기고 체험한다면 내게 온 철학 씨를 그냥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다양한 철학자들을 알고 싶어도, 혹은 알고 있어도 유용하거나 친근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 이 책이 말하는 열 가지 철학 지침에는 항상 두 명의 철학자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에서부터 리타 매닝 같이 현대 철학자나 노자처럼 동양철학자 등 여러 범주에 속한 다양한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니 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읽기에 부담이 없을 만한 책이었다. 평소라면~.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접했을 때라는 시기가 무척 안 좋았다. 현대인들은 너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고, 그렇게 일의 쳇바퀴를 돌고 있기에 행복이라고 하는 키워드를 찾을 수 없게 된다고 설파하는 맥카티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어찌해볼 도리 없이 돌아가는 터라 그렇게 마음의 위안을 찾기가 불가능했다. 한참을 책의 표지만 멍하니 보다가 책을 들여다보기를 수차례 한 뒤에서야 문득 정신이 들었으니까.

 

그러니 열 가지 지침들을 다 숙고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으로도 내 미래에 대해서 어떤 방향으로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조금 풀 수는 있었다. 보통 나는 한 가지 고민이 생기면 다양한 책을 읽든지, 일을 하든지, 사람을 만나도 그것에 대한 의문과 물음을 항상 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도 고민에 대한 실마리가 잡히면 책의 주제와는 다르지만 그 고민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편이다. 이번 주는 정말 그 고민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 계속 불안해지고 도망가고 싶어하는 내 오랜 본능을 억제하느라고 힘들었던 한 주였다. 그런 후에 느낀 것은 이 책이 말하는 평온함을 느끼는 방법이었다. 누군가 내게 기도는 기도를 하고 나서 불안함이 가실 때까지 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해준 것이 있었다. 이 때까지 기도하고 마음을 놓지 못했던 적이 없었는데 그 때만큼은 상당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난다.

 

스토아 철학의 중심인 에픽테토스는 도구 가방에서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우리에게 들려준다. 수준기를 꺼내어 내면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계측기를 꺼내어 사물의 본질을 직시하라고 조언하고, 가위를 꺼내어 교만을 잘라버리라고 하고, 드릴을 꺼내어 분노를 꿰뚫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땐 계측기로 인간의 본질은 어쩔 수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라는 것이다. 아하!! 내 본질, 내 본성은 항상 변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괴로웠던 것은 자그마한 내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그보다 더 큰 존재이길 바라는 내 욕심, 교만 때문이었던 것이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본질은 어디론가 내빼버리고 껍데기만 가지고 가려고 했던 교만 때문에 그렇게나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부족한 것, 못난 것 다 아시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포장해서 내보일 순 없을까 고민하다 보니 그렇게 힘들었던 거였다.

 

인간이라는, 사람이라는, 죄인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고 있다면 그 평정심이 흔들릴리는 없는 것인데....

아주 많이 어리석었다. 하지만 그런 어리석음을 이제라도 깨달아 알아 기쁘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관계로 많이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좋은 도구가 되어준 고마운 책이다.

 

20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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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2010-07-07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보았습니다^^
 
자유방목 아이들 - '만들어진 공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아이 키우기
리노어 스커네이지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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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키울 수만 있다면, 아무도 내 아이를 해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생각한 저자의 작은 모험들과 그것 때문에 주변에서 받아온 여러 반응들을 묶은 책이다. 십계명에다 네 개의 계명을 덧붙인 간단한 자유 방목 양육하는 법이라고나 할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현재 부모들의 어린 시절에는 당연히 했어야 하는 행동들을 똑같은 나이의 자녀에게는 용납해주지 않는 행동들이 물론 아이들이 다칠거나 힘들어질 것이란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로서의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함이었단 것!!! 주변에서 - 즉 다른 학부모, 매스 미디어, 소위 말하는 양육 전문가들 -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아이가 유괴당한다고 하거나 상처입는다고 하는 호들갑을 견디지 못한다면 끝내 불안증 부모로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꽁꽁 감싸두고 헬리콥터 엄마가 되어주어야 할까. 아니면 쿨하게 아이들을 내버려두어야 할까. 우리는 여기서 근거 없는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성범죄율이 줄어들고 있으며 토요일 오전에는 강도가 들어올 일이 없다는 것쯤은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냉정한 판단이 없다면 아이를 보호하려던 모든 행위가 아이에게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강탈해버리는 것으로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니, 우리의 실정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교외에 사는 미국 중산층 집은 학교까지 걸어갈 수 있는 도로가 만들어지지 않은 곳도 많이 있고, 혹은 인도가 있다고 해도 다섯 블록 정도 되는 거리를 혼자서 걸어가는 것도 상당히 경악스러운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우리보다도 훨씬 더 과보호 부모가 될 수 밖에 없을 것도 같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두려움을 전가하기 위해서, 혹은 나는 저런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면죄부를 얻기 위해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키우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까 정말로 다른 사람들의 양육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포장하거나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들을 남탓을 해 머릿속에서 몰아내 버리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웃 중 어떤 아이 하나가 유괴를 당했거나 성폭행을 당했다고 가정한다면, 그럴 때 하는 가장 일반적인 행동이 비난이다. “거봐, 토요일 오전에 아이들을 집에 혼자서 놔두니 저렇게 됐어!” “어쩐지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더라니까!” “글쎄, 아이에게 혼자서 학교에 걸어가라고 했대요.” 이런 비난은 자신은 이런 행동을 안 했으니 절대 이런 불미스런 일들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동이란다. 혹시 자기 아이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아이들을 꽁꽁 싸매어둘 필요는 없다. 한 여자아이의 엄마는 10명 남짓 되는 아이들과 두,세 명의 어른이 함께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고 쏜살같이 달려와 자기는 이런 식으로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고 비난을 하기도 했다. 토요일 한낮에 제 또래의 아이들과 어른이 있는 곳에서 유괴라도 당할까봐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정말 가만 보면 과도한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런 부모들의 양육방식이 아이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솔직히 저자의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제 부모가 너무 과잉보호를 해서 쓸데없이 두려움만 많아졌다고 토로하는 어른들도 많단다. 부모의 말대로 혼자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으니 자신감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두려워보이는 행동 하나씩 해보는 것을 숙제로 내주신단다. 그리고 그것을 하는 중의 기분과 상황을 설명해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하나같이 누군가 자신을 잡아채 유괴를 할 것 같은 두려움에 숨이 막혔단다. 그러나 혼자서 집에 오면서 스스로도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고.
 
이렇게 아이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공포를 심어주면 아이들을 공포를 학습할 수 밖에 없다. 적절한 공포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이제는 과도한 공포 속에서 허우적대는 꼴이지 않나. 분명히 이런 부분은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물론 유괴나 납치, 강간이란 범죄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학교 가다가도 성폭행을 당할 수 있고, 놀이터에서도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스스로 방어하는 법을 알려주면서 공포에 맞서도록 해야 아이가 스스로 성장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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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그린 그림 - 미술사 최초의 30가지 순간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최기득 옮김 / 예경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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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최초의 30가지 순간 : 관습을 뒤집고 전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화가들의 특별한 도전

 

내게 이 책은 아주 특별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단단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서문부터가 아주 특별하고 친절했기 때문이다. 이제껏 여러 권의 미술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작품은 아름다운 대로, 낯선 작품은 낯선 대로, 예쁘지 않은 작품은 예쁘지 않은 대로 그저 주어진 것만 봤을 뿐, 그것이 왜 명화로 칭송되는지 잘 모른 채로 읽기만 했었는데 이 책은 그것에 대한 의문을 다 풀어주었다. 물론 레오나드로 다 빈치의 「모나리자」처럼 몇몇 유명한 명화는 왜 명화로 칭송받는지 여러 권에 걸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익숙해진 것도 있지만, 대다수의 작품은 왜 지금까지 보여지고 있고 칭송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특히나 이 책을 보기 바로 전에 봤던 『뉴욕에서 꼭 봐야 할 100점의 명화』란 책에도 꼭 나왔던 조토의 작품은 그것이 어떤 상황을 그렸고, 작가가 누군지에 대해서만 명확하게 설명되었을 뿐 이 책처럼 표현법이나 그 이전의 시기와의 비교를 해주진 않아서 전미술사를 통틀어서 조토의 작품이 가지는 가치나 ‘미술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르조 바사리의 “조토에 의해 미술이 다시 태어났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명화가 왜 명화로 불리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13세기의 미술부터 논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원근법조차 제대로 사용되지 않은 평면적인 그림을 가지고 대단한 작품이라느니, 그 때부터 르네상스 예술이 시작되었다느니 하는 평가를 보면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 너무 미술이 재미있어졌다.

 

일단 먼저 말이 나온 조토의 그림을 보자. 조토의 『세속을 떠난 프란체스코』를 보면 21세기의 우리 눈에는 상당히 이상해보인다. 오래된 작품이라 색이 바랜 것은 차치하더라도 생기가 없고 현실을 똑같이 모방하지 못한 그림을 보면 갖다가 버리도 시원찮을 것인데, 이 작품은 동시대와 그 앞선 시기에 비해 상당히 파격적인 표현양식을 가지고 있기에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문예 부흥기라고 불리는 르네상스의 예술을 연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상당히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정도이니 우리는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예술적인 가치로써의 미술은 없어지고 오로지 신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서만 미술이 존재했기 때문에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단 하나의 상징과 기호로써 표현되었다. 그래서 숲을 표현할 때는 나무 한 그루만 그려놓아도 되고 큰 바위는 산을 의미해서 현실을 닮은 사실적인 그림이 등장할 필요가 없어 중세 시대의 그림은 상당히 평면적이었고 원근법이란 기술은 필요조차 없었다. 그리고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 각 성인들의 얼굴 뒤에 금빛으로 칠했기에 항상 교훈적인 의미만 전달하는 것이 그 이전 시대의 그림의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토는 이제껏 진행되어왔던 관행을 무시하고 자연과 인간의 형상에 대해 관찰한 것을 모아 그림을 그린 것이다. 얼굴에는 각기 표정을 담겨져 있고, 예전처럼 등장인물이 평행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고 자유스럽게 공간을 형성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제까지의 관행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조토는 진짜 천재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13세기의 미술부터 연구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고대시대에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던 화가들의 실력이 중세 때 들어와서 깡그리 사라졌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그저 사회에서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능력들이 자연스럽게 사장되었을 뿐. 그러나 우리가 중세 시대의 미술가들을 연구할 수가 없는 이유는 그 시대의 화가들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화가들은 그저 장인의 일부로만 받아들여졌을 뿐 화가 그 자체의 가치는 없었기에 누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의 자료로 남아있지 않다. 물론 그렇게 자료가 완전히 남아있지 않은 이유에는 서로마 제국의 몰락이 한 몫을 했을 테지만. 그래서 우리는 13세기의 작품 중 조토의 작품으로부터 르네상스를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중세까지만 해도 풍경은 하나의 배경일 뿐 그리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어, 주요 인물을 그린 후 상상을 동원해 공간을 채워넣는 시도만이 이루어졌다. 그랬기에 사실적인 배경을 보고 그렸다기 보다는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 대다수였다. 그러다가 콘라드 비츠의 「기적의 고기잡이」란 그림에서 그나마 배경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전달해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점점 배경의 중요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최초의 순수한 풍경화는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의 「레겐스부르크 근처의 도나우 계곡 풍경」이다. 그 때부터 다른 화가들도 영향을 받아 순전히 자연의 모습만 화폭에 담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화가의 위치가 높아지면서 가장 괄목할 만한 특징은 자화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래도 장인으로만 취급되던 화가의 위치에서 한 단계 도약했다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 조토도 그 시기에 일약 ‘스타’였던 것처럼 이제는 화가가 고위 관리직에도 몸담을 수 있을 정도가 되니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 중 가장 압권인 작품은 얀 반 에이크의 「자화상: 붉은 터번을 두른 남자」이다. 후에는 그의 붉은 터번는 그의 상징처럼 여겨져 에이크만 쓸 수 있을 정도로 에이크의 명성이 높아졌단다. 

 

이 외에도 성모 마리아가 중앙에서 빗겨난 최초의 그림이나 최초의 꿈 그림, 최초의 나체 그림 등 미술사상 최초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한 권의 책에 다 나와있다. 너무 귀중하면서도 재미있는 정보이다. 정말 이제라도 보길 잘했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 소중한 책이다. 미술에 관해 관심은 있지만 잘은 모르는 사람이라면 한 가닥을 잡게 해줄 책일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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