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케빈 마이클 코널리 지음, 황경신 옮김 / 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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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대방이 미리 놀라지 말라고 말할 정도라면 반대로 얼마나 놀라울지 상상하기 마련이다. 아니, 나만 그런가. 어쨌든 낮은 구도의 사진도 그렇고, 놀라지 말라는 자극적인 제목도 그렇고, 이 책은 저자를 알기도 전에 어떤 사람일지 예측이 되었다. 그가 어떤 모습의 사람일지가~ 아마도 인터넷 어디에선가 그의 상반신만 있는 사진을 본 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가 단지 정상적이지 않은 몸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아닐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자라다만 혹이 붙어있기만 하고 다른 것은 멀쩡하게 태어난 케빈에겐 가장 큰 질문이었을테지만 말이다. 허나 자신을 알아주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는 그 자체로서 케빈이 되었을 것이다. 장애인이라거나 뭔가 부족한 사람, 동정을 받아야 하는 사람, 돈을 줘야 하는 사람이란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올해로 스물다섯 살인 그가 살아오면서 스스로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낀 과정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스포츠게임에 참여하려고 노력했던 과정들, 제한된 신체를 가지고 있기에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해 발버둥치던 시행착오들부터 이 책에 수록된 사진들 - <롤링 전시회>란 이름으로 열었던 사진전에 출품된 사진 - 을 찍으려는 마음을 먹게 되고 이 책을 내게 된 과정까지가 이 책에 담겨있다. 정말 이 책에 수록된 사진들만 봐도 그 전시회가 얼마나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을지가 상상이 된다. 여기에는 몇 장 없지만 최대한 그가 갈 수 있을 만큼 많은 나라에 가서 찍은 사진이 33,000장이나 된다니까 사진 안에 담겨있는 감정이 얼마나 극명하게 드러났을까. 이 책에 수록된 사진 안에는 당황, 걱정, 의문, 경악 등 정말 다양한 감정이 살아숨쉰다. 어떤 나라에 있건 어떤 사람이건간에 동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어쨌든 케빈 본인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방법을 찾은 셈이다.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하게 된 데는 그의 여행이 시작이었다. 고등학교 때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 세르지를 만나러간 키예프으로의 여행에서였다. 그에게 여행이란 경험이 그것 한번 뿐인 것은 절대 아니지만 키예프에서의 경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해준 유일한 곳이었다. 그것은 키예프가 체르노빌 사건 때문에 사고로 장애인이 되거나 기형아가 많이 태어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케빈의 모습은 거지이거나 성인으로 비쳐졌고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주거나 축복을 빌어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를 케빈이란 이름을 가진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상반신밖에 없는 장애를 가진 신체를 보고 나름의 사연을 만들어내기에 바빴다. 케빈은 사람들에게 깊이 숨겨진 동정심이나 공포,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것은 전쟁의 폭격 때문인지 사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릎 밑과 팔 한쪽이 날라가버린 한 사람을 봤을 때였다. 그에게 일어난 사연이 도대체 무엇일까 무심코 상상해보곤 그제서야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 때문에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찾지 못해 중단할까도 생각했지만 나중에 후회할 것을 알기에, 혹은 돈이 없어 마지막 기회인 것을 알기에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를 그렇게 강인하게 만든 원인은 모르겠지만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사랑하고 증명하는 것 같아서 기특해진다. 이 책에는 스물다섯 살 청년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어서 읽고 있으면 장애란 단지 불편할 뿐 제한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도저히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다. 엄마의 약물 복용 때문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고,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니 그의 존재 이유를 풀어낼 길은 없지 않은가.(그의 여동생은 정상적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내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하고, 놀고 싶어하고,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것만은 비장애인들과 완벽하게 똑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볼 때, 혹은 우리랑 조금 다르게 생긴 이들을 볼 때, 호기심이나 경악, 공포의 반응을 해선 미안해질 것이다. 나랑 완전히 똑같은 인간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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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나게 시니컬한 캄피 씨
페데리코 두케스네 지음 / 이덴슬리벨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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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컬한 것은 평소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다. 시니컬하다~ 이 골 때리는 세상에 얼마나 어울리는 표현인가. 약간 멋들어지게 비틀어진 말투로 세상을 향해 마음껏 비판의 작살을 날리는 것이... 한 번쯤, 아니 평생 사는 동안 우리는 나랏님도 욕하고, 사장님도 욕하고 살지 않는가. 이럴 때는 시니컬한 말투가 제격이다. 남을 부정하고, 세상을 부정하고, 종국에는 자신까지도 부정하고마는 그런 말투가 시니컬하다. 그런데 시니컬함은 그 안에 배려가 없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도록 하는 배려함이~. 또한 시니컬함에는 관용이 없다. 다른 사람이 그럴 수 밖에 없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해해주는 그런 관용이~ 그리고 마침내는 사랑이 깃들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는다.
 
아마도 처음부터 사람들이 시니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서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 바로 그런 모양새로 자리잡았을 뿐. 난 요즘에 이런 생각을 한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가해자만은 아니라고. 그들도 상처를 받고 어디 돌파구를 찾지 못해 그렇게 애쓰다가 결국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들 뿐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내가 마음이 비단 같아서 그들의 잘못을 그대로 넘어가주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행동을 이해는 해주겠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짓을 해서 싸그리 이 땅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을 먹게 하는 인간들도 분명히 있을 테고, 그런 사람들에게 분을 품느라 내 자신이 제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니까, 이젠 조금은 놔줘도 되지 않을까.
 
변호사!! 이 글의 주인공은 대단한 선망의 대상이 되는 변호사이다. 그런데 이혼 전문도 아니고, 상속 전문도 아니고, 일반 사람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기업 전문 변호사인 안드레아 캄피는 그네들이 선망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은 끊임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샘솟아 나오고, 애정 전선은 짙은 구름을 드리우고, 동료와의 관계도 그리 썩 좋지 않다. 더구나 기업을 상대로 하다보니까 고객들은 하나같이 거물급들이라 변호사인 자신을 제대로 존중해주지도 않는 것이다. 돈이나 벌까? 글쎄, 보아하니 돈은 모조리 사장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던데... 도대체 안드레아는 무슨 이유로 변호사일을 하는 것일까.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도, 존경을 받는 것도,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닌 일을 직업으로 삼는 그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만약 내게 그런 일을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그저 특별한 창조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전에 사용했던 양식을 가져다가 숫자와 이름만 바꾸고 실수가 없는지 확인만 하면 끝나는 일을 왜 할까. 전에 사용했던 양식을 찾기 위해 수많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지내야 하는 일이 태반인데 말이다. 그런 인생을 살면서 자기 집에 금붕어가 죽어나가는지, 화분이 말라가는지도 알지도 못한다. 그런 저런 변호사의 일상사를 적나라하게, 혹은 시니컬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묘미다. 그런데 말이다, 내 삶도 그리 화창하지 않는데 집에 기어들어와서 이런 책까지 읽으려니까 솔직히 죽을 맛이었다. 이 소설은 실제 변호사인 작가가 자신의 블로그에다 일상사를 버무려서 올린 것이 인기를 끌어 만들어진 것인데, 같은 변호사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니 아마 직업이 기업변호사인 사람이 본다면 혹 신선함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완전 문외한인 내겐 위태롭고 짜증나는 이야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위태롭고 짜증나는 이야기가 곧 우리네 현실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시니컬해보이는 이야기 속에 묻어나는 애정이 있기에 우리는 이런 소설을 반기는 것이 아닐까. 우리네 삶이 팍팍하긴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살만하기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안드레아 캄피도 자신의 인생이 팍팍하긴 해도 묘하게 자신의 삶이 사랑스러울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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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바보 예찬 - 당신 안의 바보를 해방시켜라!
김영종 지음 / 동아시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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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 바보예찬』의 원전이 되는 『우신예찬(Moriae Encomium)』은 에라스뮈스의 책으로, 빛나는 르네상스 문학 중 하나로 손꼽힌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인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부패한 기성교회에도 급격한 루터파에도 속하지 않아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던 인물이지만 학문적인 면에서는 뛰어난 실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던 인문주의자였다. 그리스, 라틴 고잔의 인문정신과 기독교의 융합을 꿈꾸었던 그는 보편적 인간성에 기초한 미덕에 대한 믿음, 중용과 관용을 통한 개혁이 가능하다는 믿음, 위대한 고전 저작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통해 인간이 좀 더 사려 깊고 선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쓴 『우신예찬』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알프스를 여행하는 중에 떠오른 수도원 생활을 풍자한 작품을 일주일 동안 정리한 책이라는데, 어리석음의 여신인 모리아가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통해 진정으로 현명한 것이 무엇인지 밝히단다. 
 
사실 이 책, 김영종 작가가 쓴 『헤이, 바보예찬』 이란 책이 아니였다면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책이었을 것이다. 『우신예찬』이라니~~ 이 어려워만 보이는 책을 어떻게 읽느냔 말이냐. 그런데  『헤이, 바보예찬』을 읽고 나니까 너무 유쾌하기도 하고 그가 풍자하고자 하는 바가 꼭  『우신예찬』에서 차용한 것 같아서 찾아봤더니 알게 된 내용이다. 처음에 봤던 ‘우신’이 뭔가 싶었는데 ‘어리석은 신’이란 뜻이란 것도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신예찬』 이란 책은 에라스뮈스라는 과거의 인물이 썼을 뿐이지 그다지 현학적이거나 어렵지 않은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상당히 가깝게 느껴진다. 그런데 글의 진행방식이 참으로 독특했다. 『헤이, 바보예찬』의 서두를 읽으면 누군가가 등장해서 아니, ‘바보 여신’이 등장해서 독자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뜬금없는 일이라 읽기에 좀 어색했기 때문에 혹시 『우신예찬』도 그런지 궁금했다. 아직 읽지 않았긴 했지만 김영종 작가가  『우신예찬』에 맞춰서 쓴 것이니 아마도 서술방식이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에라스뮈스가 신학자, 군주, 궁정인, 교황, 추기경, 주교, 수도사, 신부 등 그 시대의 지식인과 지도층을 모두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김영종 작가도 현재 우리가 당면한 하나의 사실을 공격하기에 바쁘다. 가진 자는 더 가질 수 있게 되고, 못 가진 자는 그 빈함을 대물림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그 아래에서 신음하며 소리없이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에 대해, 공공 장소에서의 오버를 하지 못할 정도로 짓눌려 사는 인간의 가슴 아픈 체면에 대해서 시니컬하게 공격한다. 세상에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바보와 똑똑한 체 하는 바보들 중, 똑똑한 체 하는 바보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누군가를 이겨먹으려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그는 그 무지한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한 그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니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아니 축제를 즐기기 위해 방종과 나태함을 요구하는 ‘바보 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가. 아마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바보 신’에게서 절대 충성할 수 있을 것임을 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것에 다 반기를 들라고 하면서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바보 신’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그런 바보라면 나조차도 제일 앞줄에 설 것이다. 다만 절대적인 진리조차도 부인하는 그이기에 나로서는 그의 모든 주장이 달갑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는 이런 파격적인 잡소리도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과거 에라스뮈스가  『우신예찬』를 발표한 때처럼 이번 김영종의  『헤이, 바보예찬』이 발표와 동시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거나 금서(禁書)될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이 시대에는 이 시대만의 풍자가 필요하지 않은가. 요즘엔 세상이 팍팍하게 돌아가니 이런 잡설이나 풍자가 무척이나 반갑다. 유쾌함이나 황당함이 일회성으로 끝나버린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진다면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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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 자유, 그 무한고독의 속삭임
송준 지음, 정형우 사진 / 동녘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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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으로 이 땅에 책이 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예술이 뭐라고, 내 인생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는 그런 예술 나부랭이에 한 평생을 바친 22인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었던 것에, 이 책에게 감사한다. 이 책은 월간 <아트뷰>에 '바람의 묵시록'이라는 코너명으로 연재된 것을 모아 엮은 단행본이다. 내 평생 그런 월간지를 들여다볼 여유나 생길까. 이렇게 단행본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한 평생 살아도 이들 22인에 대해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책의 표지나 속지 디자인도 유려한 미를 뿜어내 아름답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숨쉬고 있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고백하건대 여기에 등장한 22인 예술가 중에서 가수 이상은과 소설가 이외수 말고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분들이 태반이었고, 그나마 알고 있는 두 분도 그들의 근황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니 이 책이 없었다면 나는 완전히 무지한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포토에세이를 펴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기도 했다는 신미식 사진작가도 처음 뵐까 싶고, 소리꾼이라 이름하는 장사익 씨도 저번에 본 에세이집에서 한 번 뵌 것외엔 처음이니, 가요계를 휩쓸다못해 전셰계적으로 이름을 날린다는 그 분을 모르는 내가 같은 한국땅에 살고 있는 것이 맞나 싶다.
 
여기 나온 22인이 그렇게 새로울 수 없이 새로운 내겐 처음부터 이 책은 별천지였다. 나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나와는 정말 다른 삶을 걸어오신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남아있는 천재 예술가의 이미지는 어느 영화에서 보여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기이하고도 천박해 보일 정도로 들끓는 열망을 가진 존재이다. 그저 일순간 참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것이 되지 않는 그들의 천재적인 모습은 일반인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영감과 열망을 가진 존재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삶 자체가 그러함을 알았다. 마냥 신기하게만 여겼던 그들의 모습이 치열한 삶의 흔적이라는 것을. 이제껏 살면서 소위 천재 예술가란 사람들의 폭발적인 열정과 영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선 그들의 삶은 그저 구경거리 그 이상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미처 그들을 알지 못한 내가 미련스러워보인다. 이상은 씨의 <공무도하가>도 듣고 싶고, 신미식 씨의 <여행과 사진에 미치다>도 읽고 싶고, 장사익의 <찔레꽃>에 심취하거나 조갑녀의 7분 명품 춤에 흐느껴봤으면 좋겠다. 정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사실 이름만 아는 이외수 씨의 책도 한 권도 보지 않았는데... 너무 무신경했던 걸까. 아니면 나만 봤던 것일까.
 
간혹 삶이 팍팍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내 삶은 너무 기름기가 없었다. 무언가가 윤활유로 쳐줄 만한 그런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몇 달째 밤에 잠을 자지 못한 채로 어깨는 잔뜩 굳어가면서 그렇게 죽지 못해 연명하듯이 살아왔다. 그런데 그럴 때 느낀 것은 내가 너무 나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찰나의 번뜩임... 세상에는 나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힘들고 아픈 것은 아닐 것인데, 어쩌면 나보다 더 힘겨운 하루를 끝내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하는 뒤늦은 깨우침... 다른 삶에게도 관심을 가져주고 이해해주고 공감을 느낄 만한 구석을 찾는다면 더 이상 삶이 팍팍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다 나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퍽퍽한 삶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멋진 삶에도 기웃거려가면서 나를 정비하는 중이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이 내겐 한 줄기 바람과도 같았나 보다. 무더운 여름날 가끔씩 불어와 더위를 식혀주는 그런 청량한 바람... 두고두고 아껴보면서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내 인생에 하등 쓸모없어 보였던 예술은 아마도 이런 인간의 감성적인 부분, 살아갈 목적을 주는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저 먹고 사는 데는 예술이 필요없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엔 예술이 꼭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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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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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같은 표지가 왠지 나를 휘몰아치는 무언가를 안겨줄 거라 기대하게 했던 소설이었다. 뭔가 묵직하지만 아주 맘에 드는 감동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다 읽고 나서 느낀 결론은 어이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아님 어처구니가 없었다고나 할까.... 아니다,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고 나서 뒷마무리를 하지 않고 나온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딱 알맞겠다. 이 소설은 흔히 기대할 수 있는 결말이 없다. 그저 이야기가 독자의 상상 속에서 계속 진행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결말이라고 여겨질 뿐. 솔직히 말해서 절대 악이라 군림하는 남자와 천재라 부를 수 있을지도 잘 모르는 소매치기의 대결은 그 결말이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인간은 미련하게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동물인지라 범죄자이지만 왠지 약자처럼 보이는 소매치기 니시무라의 승리를 기대하고 끝까지 보게 만든다, 이 소설은. 아마도 일말의 기대감을 버리지 못해 끝까지 보게 만드는 것이 나카무라 후미노리 작가의 매력이 아닐런지...

 

또한 소설 서두에서 밝혀지는 동료의 마지막 진실... 그것도 모두 니시무라를 살아있게 하는 요소가 아니였을까. 찌질한 범죄나 저지르는 소매치기나 되는 녀석들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일말의 애정이란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혹시 걸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면서도 도쿄로 와야만 했던 니시무라와, 니시무라가 죽을까 걱정되어 자신을 희생한 그의 동료 이시카와는 확실히 동료애 때문에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당연히 절대 악이라 불리는 그 남자는 그들의 그런 찌질한 우정을 이용해서 자기 멋대로 규칙을 세워 이용하곤 가차없이 제거해버리곤 만다. 그것이 이 세계의 규칙이니까~. 이 땅에 태어나 그렇게 누군가의 이용물로 살다가 버려지는 것이 정말 멍청해보인다. 그 까짓 우정이 뭐 대수라고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날리냐 말이다. 애초부터 도덕심이란 없는 인간에게, 밥 먹듯이 아니 밥 먹기 위해 남의 지갑이나 터는 주제에 가당치 않은 사치가 아닌가, 우정은.

 

그런데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 같지도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이 나오길 기대하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 개발이 될 것을 기대하고, 아르헨티나 축구팀에게서 우리나라 축구팀이 이기길 기대하는 것 모두 우리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않던가. 분명 인간은 자신을 보호할 능력도, 자신을 드러낼 능력도, 다른 이들을 구해줄 능력도 없지만 다른 어떤 생물보다도 가장 우수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하는 것이 아닐런지. 지금 당장은 이루어질 수 없다손 치더라도 끝끝내 이뤄내고야 말 것임을 다짐하는 그 어떤 희망이나 꿈이 없는 인간은 하나도 없지 않을까. 법을 제대로 지키고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니시무라의 소매치기가 상상을 초월한 정도의 남에게 피해주는 행위이겠지만 이미 그런 정상적인 감정은 거세된 그에겐 생존수단이자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해주는 하나의 지표일 게다. 이 말은 절대 범죄자를 옹호해주려는 것도, 더더군다나 범죄자를 찬양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단지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 그들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좀체 믿지 않는 니시무라도, 소매치기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이시카와도 모두 우정을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런지...

과거의 자신을 보게 만들어준 한 아이의 존재도 그에게 감춰진 인간애를 드러내게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끝이 없어 황당한 소설이지만 한편으론 참으로 묵직한 무언가를 준 소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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