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김정은
이영종 지음 / 늘품(늘품플러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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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재 독재 정권 3대 세습이 거의 확정시되는 김정일의 후계자 김정은에 대한 모든 사건의 정황들이나 고급 정보 및 앞으로의 전망 등을 묶은 것이다. 기자의 손에서 쓰여져서 그런지, 다소 자극적인 어투로 쓰여진 것을 제외하고는 쉽게 읽을 수 있어 이제껏 알지 못했던, 혹은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던 북한 체제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기회가 되었다. 올해 초부터 천안함 사태이다 뭐다 해서 대북관계가 상당히 험악하게 돌아가는 것이 안타까웠던(그리고 무관심했던) 한 독자의 입장에서 이전보다는 조금 더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줘서 좋았다. 사실 말은 바른 말이지, 북한이나 남한이나 같은 민족이고 동포인데, 평소에는 완전히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을 때가 좀이나 많은가. 또 언론매체에서 북한의 강짜 부리는 행동이나 이번의 천안함 사태 같은 일을 보도라도 할라치면 자연히 욕부터 나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올해 4월 14일에 있었던 일만 해도 그렇다. 그 날은 김일성의 98회 생일을 하루 날로, ‘태양절 축포야회’가 개최되었는데 그때 쏟아부은 폭죽이 60억 원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인민들은 먹고 죽으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다는데...쯧쯧 하며 싫은 소리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혹은 내가 반드시 생각할 것이 있다. 이 책 속에 있는 모든 일들은 김정일을 위시한 일부 특권층 세력의 이야기이지, 일반 인민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야말로 이 난세에서 가장 큰 피해자인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죄(일부 특권층)는 미워해도 사람(인민)은 미워하지 말아야할 일이다.

 

김정일의 후계자를 추격하는 스토리는 지금에 와서 보면 좀 유행이 지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거의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기자들간의 정보 전쟁이 일어났어도 2010년 현재에는 온 세계에 다 까발려진 이야기를 되돌려서 듣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후계자 이야기가 등장했던 시점이 2003년쯤 되었으니 우리가 현재 쉽게 접하는 김정은 후계자 이야기가 상당히 끈질기게 파악한 고급 정보이고, 또한 그만큼 그 정보가 우리에게, 또 대북정세, 더 나아가서 지구촌 정세에 아주 중요한 정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던 내게, 꼭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내 눈 앞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아주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전 안기부 같은 기관에서 북한만 담당하는 직책이 따로 있고, 유엔에서도 그런 직책이 따로 있고, 미국에도 그런 직책이 따로 있는지는 아마 알고 있었겠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알지는 못했던 것을 일거에 밝혀진 느낌이 든다. 독재정권 때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그랬다는 전 안기부 같은 기관에서 북한에 대한 것도 담당하는구나~! 하고 아주 놀랍기도 했다. 물론 읽다가보면 북한에 숱한 직책 이름들이 딱 머릿속에 와박히지 않아서 읽기에 좀 더딘 느낌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속도감있게 읽을 수 있게 되어 있어 누구나 한번 잡으면 끝까지 가게 되리라 보장한다.

 

내가 이제껏 알고 있는 북한에 대한 지식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전에 나는, 누군가 “북한에서는 00 같은 일을 당한대~”라고 말해줘도 그것이 너무 말도 안되는 끔찍한 일일수록 믿지 않았던 경향이 짙었다. 정말, 이럴 수는 없다고.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일을 자행하는 나라가 있을 수가 있냐고. 그것도 전쟁 후 포로들에게가 아니라 제 나라 국민들에게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전에 조금 들은 이야기도 있어서 이미 믿고 있기도 했지만, 이 책 전반에 걸쳐 북한의 인권 침해와 같은 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아닌데 이미 그런 문제는 은연중에 깔려서 공공연한 진실로 여기는 뉘앙스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었구나. 그런데 더 가슴이 아팠던 것은 안성의 탈북자 지원 시설에 갔다가 들은 기사거리를 옮기는 중에 북한의 인권 유린 문제를 기자분들이 너무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다. 한 교육생과의 대화 중에서 김정은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를 ‘영양가 있는’ 기사거리라고 부르고, 북한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인권침해 등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의례적인 증언’ 으로 취급하는 것이 좀 안타까웠다. 정말로. 기자의 신분이라면 후계자 문제가 특종이니까 그렇게 중요도순이 뒤바뀔 수 밖에 없을까 싶었다. 대북지원할 수 있는 방안도 제한되어 있는 실정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더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없지만 그렇게 ‘취급’받는다는 것이 좀 안타까웠다. 역시 나라가 힘이 없으면 그 국민들이 당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남한도 탈북자들에 대한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으니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를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먹고 싶은 것을 어느 때라도 먹을 수 있고, 따스한 곳에서 몸을 누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옷도 갖춰 입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만들어 가지고 머리에 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그들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순 없어도 마음만이라도 애정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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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과 스테이크
황진순 지음 / 발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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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쩐 일인지 계속 황진순 작가의 로맨스 소설만 보게 되었다. 그녀의 작품 중 『반지』로 처음 만나고 나서, 그녀의 작품을 계속 보고 싶었었는데, 그 당시에는 구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만 흘러버렸다. 그러던 차에 도서관에 있을까란 생각이 들어서 가봤는데, 떡 하니 있는 게 아닌가. 그 뒤로 몇 번을 더 기웃거린 후에야 바라고 바라던 이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그녀의 이야기는 깊었다. 아주 깊은 바닷속, 너무 깊어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칠흑 같은 바닷속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와 그의 이야기가 사실은 피부에 와닿지 않아서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재미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여주와 남주의 대화가 참 깊어서 나름 따라가기는 했지만, 내 취향이 달라졌는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이랄까.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버지에게서 냉대와 무시만 받아온 남자 고등학생(서강우)이 2학년 때 아이들을 패고 나서 바람을 쐬러 부산까지 나갔다가 라면집을 운영하는 한 여자(나미선)를 만난다. 나이는 4살 정도 연상인 그녀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실직한 친구에게 재정을 맡겼다가 들고 튀는 바람에 옥살이를 하게 되어 혼자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까칠하게 구는 사람, 상대도 안 해주는 그녀가 왠지 그에게는 틱틱거리면서도 챙겨주게 된 것은 첫 눈에 알아봤기 때문일까.

 

너무 극적인 만남이 휘리릭 지나가버려서, 그들의 입장이나 심리가 쉽게 파악되지 않았었다. 물론 여자 주인공 입장에서 진행되는 로맨스 소설의 특성답게 나중에서야 남자의 심리가 드러나 어안벙벙해지는 신선함을 얻을 순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힘든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점도 갖게 된다. 간략하게 말하면, 미선이는 가볍게 말한 것 같은 ‘배부른 소리하지 말고 대학 가지 않으면 우리 가게에 오지마!’, ‘남자라면 군대를 다녀와야 어른이지!’, ‘수업 시간에는 우리 가게에 얼씬도 하지 마!’, ‘빚 갚아주겠단 소리를 할 거면 어서 나가!’ 란 소리에 냉큼 행동에 옮겼던 강우는 실은 미선이가 만나주지 않을까봐 불안에 떨면서 행동에 옮겼다는 것이다.

 

열여덟에 만나 십 년간 사랑에 빠진 줄 알았더니만 실은 언제 자기를 내칠 지 몰라 불안에 떠는 생활을 더 오래 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제는 행동에 나서기 시작하는 강우는 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서야... 물론 자격지심에, 없는 살림에, 누군가를 만나 행복하고 결혼하는 삶을 꿈꿔보지 않은 것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억울해서, 제 피폐해진 삶이 너무 억울해서 그렇게 십 년동안이나 강우를 나몰라라했던 미선이, 이제 그에게 다가간다. 이 둘의 이야기는 아마 이 만큼의 시간이 딱 필요했을게다. 물론 좀 더 빨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이해하고 공감했다면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서로에게 사랑이었다는 것을 일찍 알았겠지만, 이것도 좋다. 그들에게는 이것도 나름의 사랑하는 방법이었을까.

 

이제 사랑을 알고, 그 행복을 찾고자 한 걸음 디딛는 미선의 행동이 멋지다. 제 남자를 지켜내려는 그녀의 말 속에서 강우는 뜨거운 사랑과 감동을 받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아끼며 하루를 이어가겠지....

 

역시나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황진순 작가다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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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1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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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드라마가 나오기도 훨씬 전에 읽었던 책이다. 너무나 쏘옥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남장여자 이야기!! 전에 했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처럼 남장 여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날 설레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든다. 남장을 했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한계점을 지니는 것!! 그래서 그렇게 책 속의 윤희가 선준에서 저돌적으로 들이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김윤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동생을 대신에 '김윤식'이라는 동생 이름으로 대필을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그것이 아녀자의 몸으로 명석함을 갖춘 윤희에게 불행의 시작이라면 시작일 것이다. 드라마와는 다른 부분이 많이 있어 헷갈리기도 하지만 책에서는 명석했던 아버지가 윤희를 안쓰럽게 여긴 대목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그녀를 직접 가르쳤을 뿐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일취월장했던 그녀는 대필 인생으로 살다보니까 빠른 시간에 아름답게 쓰는 법을 생존의 기술로 익힐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명필가 김윤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시험을 보는데 대신 봐주는 불법을 저지르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제 자신이 합격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얼떨결에 과거 시험에 응시하게 되고 거기서 운명적으로 제 짝을 만나고 만다. 노론 실세의 아들, 이선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까칠한 성격의 그는 처음 윤식(윤희)를 봤을 때부터 그(그녀)에게 왠지 모를 관심이 갔다. 워낙 혼자 학문을 했던 까닭에 남에게는 전혀 신경조차 써본 적이 없는 선준이 처음 봤던 순간부터 그녀에게 신경이 가는 것이다. 윤희의 실력도 제 학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 줄 모를 뿐 대단한 실력이라고, 필체는 예술적이라고까지 생각하면서, 단지 동문 수학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게 되어 기쁜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 아파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호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처음 시험을 같이 치르고 헤어지면서도 다음 시험 때도 또 봤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선준은 두 번째 시험을 보고 합격자들을 모인 자리에게 겨우 인사를 했다. 남자에게 인사하는 게 이렇게나 어색할 줄은 몰랐던 그는 이상한 느낌을 처음부터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같이 수학하고 싶은 마음에 정조대왕께 필체가 아주 훌륭하단 말을 아뢰어 극구 만류하는 윤희를 제치고 성균관에 들어가게끔 만든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러니까 이 둘의 만남은 운명을 뛰어넘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선준은 그녀를 남자라 생각했을 테니...

오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가는 것도 있는 법.
윤희도 선준과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 윤희가 선준의 손길을 의식되어 피한 것과는 다르게 선준과 윤희는 항상 같이 붙어다녔고 어미 닭이 병아리 챙기듯 그렇게 선준이 윤희를 챙기기에 바빴다. 아마도 본능이었을 게다. 서로를 바라보고 챙기는 것이... 그런데... 문제가 되는 여림 구용하와 걸오 문재신은 역시나 드라마와 비슷하게 돌아간다. 처음 여자임을 굳게 확신한 구용하가 성균관 신고식 때 초선이의 속치마를 가져오라고 시켰던 것이고, 그것을 해낸 이후로부터 은근슬쩍 그녀를 보호해주는 등 속깊은 정을 보여준다. 걸오 문재신은 다른 녀석과는 다르게 주먹이나 발길질이 안 나가는 윤희를 알뜰히 챙긴다. 나중에 술 취해 자버린 윤희를 옮겨주다가 그녀석이 여자임을 알게 되어 좋아하게 되지만, 끝내 이선준에게 질 수밖에 없음을 안다. 왜냐, 그녀가 그를 사랑하니까...

돈이 없어 궁색하게 살아가는 윤희이지만 뛰어난 머리와 재빠른 아이디어, 행동력은 그 잘금 3인방을 뭉치게도 하고, 재신이가 저질렀던 홍벽서 문제의 불똥이 선준에게 튀어 그가 의금부로 잡혔을 때 그를 좋아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해결하게 하는 등의 큰일에서도 윤희는 아녀자의 몸으로도 충분히 능력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네 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데 역시 뭐니뭐니 해도, 이 작품의 압권은 그녀가 여자임을 선준이 알게 되는 일이다.
더운 여름날, 물놀이에 간 성균관 유생들이 한창 물놀이를 하고 있을 때, 윤희가 물에 못 담그는 것을 부끄러워서라고 여긴 선준이 폭포 위쪽에 데리고 가서 씻을 수 있게 분위기를 조성했고 그 때 바로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선준은 성균관을 나가겠다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 때 가슴가리는 수건이 떨어져버려 둘은 극적인 상태로까지 치달아버렸다. ㅋㅋ 이 때, 윤희의 저돌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게지.

그 이후는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끝은 2탄이다. 김윤희가 김윤식으로 남장을 했다는 사실을 이선준의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 남아있으니까... 가만 보면 윤희가 선준보다 더 대범하고 지략이 뛰어난 듯 싶으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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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후웨이홍 지음, 이은미 옮김 / 라이온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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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은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책이고, 『도덕경』은 고대 중국사상가인 노자의 책이라는 것은 대다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명서 중의 명서들을 면밀하게 살펴볼 기회가 흔치않아 냉큼 주워들었다. 이 기회에 동서양의 사상을 한번에 비교해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명상록』은 금욕과 극기를 중시하는 스토아 철학의 사상이라 우리에게 익숙한 동양 사상과 아주 흡사했다.  

 

이 둘의 사상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본성’이란 ‘자연법’과 일맥상통하는데, 우주에 존재하는 지배적인 잣대로써 사람의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보편법을 말한다. 이 ‘자연법’은 현대 철학의 ‘자연 규율’과 유사하며 고대 중국 철학의 ‘도’와도 같다. 그러니 로마와 중국의 두 사상가의 중심 사상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벗어나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번뇌가 생기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인간이나 번뇌를 겪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대로 우리의 본성을 가만히 놔두면 그리 슬퍼할 일도, 분노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법, 자연법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순 없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의 생각이 진실이라고 치고 가정해도, 인간이 제 본성대로 행동하는 순간 모든 어려움은 끝이고, 행복 시작일 수 있을까 싶다.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모든 범법 행위들이 실은 제 ‘본성’대로 저지른 것이 아닌가 말이다. 어느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이, 비교하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고, 진정한 수확을 똑바로 보는 방법으로 번뇌에 빠지지 않도록 즉, 본성대로 행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스스로 그런 모든 방법대로 행했다고 하며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이중인격자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처럼 우주에는 인간이 거스를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어떤 보편 법칙이 존재하고, 인간도 그런 우주 속의 한 일부분이기에 인간에게도 밑바닥에 깔려있는 성품이 그런 보편법을 따르고 있을 거라 여겨, ‘본성’이란 단어로 자연법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 말은 상당한 자의적인 해석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기독교도라서 스토아 철학에 딴지를 걸거나 금욕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의 사상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도 평소 내가 보고 싶었고 흠모했던 책 목록에 들어가있었고, 그런 이유로 이번에 이 책을 냉큼 골랐던 것이니 이런 위대한 사상가들이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나쁘다니? 그렇게 말할 자격도 내겐 없다. 하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딴지를 걸고 싶게 만드는 것은 ‘본성’이란 단어 때문이다. 매 순간 끊임없이 내 안에 존재하는 욕망과 거짓과 추악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 단어가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일 뿐 다른 것은 하등 문제되지 않는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이 단어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궁금하다.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비판철학을 확립시킨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가 가장 확고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이성’도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하며 그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을 썼는데, 하물며 ‘본성’을 따르며 살라니~. 이것이 과연 말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칸트가 말하는 ‘이성 비판’이란 바로 이것이다. 인류 역사를 돌아볼 때, 인간이 이성을 잣대로 두고 일궈왔던 모든 역사들이 사실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우매하고 광기에 빠져있던 일밖에는 하지 않았다는 것. 독일 유대인 학살 사건도 그렇고, 미국의 9.11 테러에 대한 보복 전쟁도 그렇고, 기타 등등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건들이 실은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지만, 그 이면에 ‘이성’이란  욕망과 권력의 포로가 되어 있을 뿐이란 것이다. 그나마 머리로 판단하는 ‘이성’이란 놈이 그러할진대 감정으로 좌지우지되는 ‘본성’이란 놈을 믿을 수가 있을 것인가. 우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규칙이고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놈이라지만, 그것이 제가 가진 틀로만 세상을 보는 인간이 비교하지 않는 것만으로, 반성하는 것만으로, 똑바로 수확을 보는 것만으로 분별할 수 있을지는 가히 의심스러운 바이다. 아마 이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겠지만,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는 이런 답변만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내용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중국인 저자가 저술한 특성이 그대로 살아있어 읽기에도 쉽고 재미있으며 유익하다. 특히 서양의 명상록』을 설명할 때, 노자의 사상, 불가의 사상, 다른 중국 문헌들에서 발췌한 이야기 등 여러 생각할 거리, 읽을 거리들로 풍성하고 즐겁게 해준다.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에 맞게 조목조목 열거한 것을 보고 있으면 아우렐리우스나 노자가 하지 못한 어떤 것을 저자가 해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싶다. 적재적소가 맞게 여러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도 능력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꼭 서양의 『이솝우화』처럼 간단히 예화 같은 이야기를, 그것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날라다주니, 가만히 앉아 꼭꼭 씹어 먹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저자가 했던 말처럼, 은은하게 영혼으로 느껴지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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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 행복한 삶을 위한 인문학
김종엽 지음 / 가즈토이(God'sToy)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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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책은 내가 읽었던 철학책 중에서 본격적으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철학책이라고 단언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현실적이고 인간의 삶을 잘 그려냈다. 그만큼 아주 어려운 책이었고, 또한 읽는 보람이 있는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 본인이 한 말처럼 ‘철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철학자에서 이미 굳어진 개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끔 어려운 개념이 등장해서 몇 번을 다시 읽어야 겨우 의미 파악을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역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일단 서문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철학적 상상력 혹은 정체성이 망각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인간 상실이라는 병폐, 즉 자살이 벌어진다고 진단을 내린다. 인간이 외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결정할 때 자기 정체성은 쉽게 망각되어 버리고, 그런 외적인 사회적 조건이 상실되었을 때 우리는 ‘참을 수 없이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권력만을 추구한 사람이 권력을 잃어버렸을 때, 잘 나가던 스타가 팬들에게 잊혀졌을 때,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사람이 주식 폭락으로 깡통을 찼을 때 우리는 자살이라는 도피성 도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자살’이란 사회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의 말이 은근히 수긍된다.

 

그런데 무조건 가난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자살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누구나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한낮 사회적, 물질적 조건으로 환원시켜 버린 현대의 철학적 빈곤이 우리를 자살로 내몰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자살을“삶을 선택하듯 죽음 또한 선택할 수 있는 한 개인의 권리 행사가 아니라, 그러한 권리의 본질적인 포기”했다고 표현했다. 인간으로서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 자기 정체성을 찾아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기 본연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권리, 실존의 분열을 의미로 메워져갈 권리를 스스로 놓아버린 것이다. 더불어 자유민주주의의 기치 아래에 기업의 과도한 경쟁이 장려되고 그로 인해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해야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더 나은 명품, 더 나은 차, 더 나은 집 등의 물질을 소유해야만 스스로를 내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까지에 이르른 것이다.

 

이 모든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이 자신의 본성대로 행동할 때 그렇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유감스러움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내게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내가 호감을 느끼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은 하등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마음에서 그런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경우, 자기다움을 부정하지 않게 되고, 나를 내 자신과 하나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의미의 세계로의 진입이다. 우리는 모두 의미를 찾아야만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소유로 표현해내는 정체성인 ‘질적 동일성’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인,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의 자리로 보는 ‘수적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대안이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받을’ 줄만 알지 ‘할’ 줄 모른다고 했던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우리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발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소유물이나 그의 사회적 지위로서만 그 가치가 평가되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만 존재 의의를 가진다면 ‘자살에 이르는 병’은 어느덧 사라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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