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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후웨이홍 지음, 이은미 옮김 / 라이온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명상록』은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책이고, 『도덕경』은 고대 중국사상가인 노자의 책이라는 것은 대다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명서 중의 명서들을 면밀하게 살펴볼 기회가 흔치않아 냉큼 주워들었다. 이 기회에 동서양의 사상을 한번에 비교해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명상록』은 금욕과 극기를 중시하는 스토아 철학의 사상이라 우리에게 익숙한 동양 사상과 아주 흡사했다.
이 둘의 사상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본성’이란 ‘자연법’과 일맥상통하는데, 우주에 존재하는 지배적인 잣대로써 사람의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보편법을 말한다. 이 ‘자연법’은 현대 철학의 ‘자연 규율’과 유사하며 고대 중국 철학의 ‘도’와도 같다. 그러니 로마와 중국의 두 사상가의 중심 사상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벗어나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번뇌가 생기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인간이나 번뇌를 겪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대로 우리의 본성을 가만히 놔두면 그리 슬퍼할 일도, 분노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법, 자연법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순 없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의 생각이 진실이라고 치고 가정해도, 인간이 제 본성대로 행동하는 순간 모든 어려움은 끝이고, 행복 시작일 수 있을까 싶다.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모든 범법 행위들이 실은 제 ‘본성’대로 저지른 것이 아닌가 말이다. 어느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이, 비교하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고, 진정한 수확을 똑바로 보는 방법으로 번뇌에 빠지지 않도록 즉, 본성대로 행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스스로 그런 모든 방법대로 행했다고 하며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이중인격자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처럼 우주에는 인간이 거스를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어떤 보편 법칙이 존재하고, 인간도 그런 우주 속의 한 일부분이기에 인간에게도 밑바닥에 깔려있는 성품이 그런 보편법을 따르고 있을 거라 여겨, ‘본성’이란 단어로 자연법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 말은 상당한 자의적인 해석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기독교도라서 스토아 철학에 딴지를 걸거나 금욕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의 사상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도 평소 내가 보고 싶었고 흠모했던 책 목록에 들어가있었고, 그런 이유로 이번에 이 책을 냉큼 골랐던 것이니 이런 위대한 사상가들이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나쁘다니? 그렇게 말할 자격도 내겐 없다. 하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딴지를 걸고 싶게 만드는 것은 ‘본성’이란 단어 때문이다. 매 순간 끊임없이 내 안에 존재하는 욕망과 거짓과 추악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 단어가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일 뿐 다른 것은 하등 문제되지 않는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이 단어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궁금하다.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비판철학을 확립시킨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가 가장 확고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이성’도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하며 그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을 썼는데, 하물며 ‘본성’을 따르며 살라니~. 이것이 과연 말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칸트가 말하는 ‘이성 비판’이란 바로 이것이다. 인류 역사를 돌아볼 때, 인간이 이성을 잣대로 두고 일궈왔던 모든 역사들이 사실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우매하고 광기에 빠져있던 일밖에는 하지 않았다는 것. 독일 유대인 학살 사건도 그렇고, 미국의 9.11 테러에 대한 보복 전쟁도 그렇고, 기타 등등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건들이 실은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지만, 그 이면에 ‘이성’이란 욕망과 권력의 포로가 되어 있을 뿐이란 것이다. 그나마 머리로 판단하는 ‘이성’이란 놈이 그러할진대 감정으로 좌지우지되는 ‘본성’이란 놈을 믿을 수가 있을 것인가. 우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규칙이고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놈이라지만, 그것이 제가 가진 틀로만 세상을 보는 인간이 비교하지 않는 것만으로, 반성하는 것만으로, 똑바로 수확을 보는 것만으로 분별할 수 있을지는 가히 의심스러운 바이다. 아마 이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겠지만,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는 이런 답변만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내용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중국인 저자가 저술한 특성이 그대로 살아있어 읽기에도 쉽고 재미있으며 유익하다. 특히 서양의 『명상록』을 설명할 때, 노자의 사상, 불가의 사상, 다른 중국 문헌들에서 발췌한 이야기 등 여러 생각할 거리, 읽을 거리들로 풍성하고 즐겁게 해준다.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에 맞게 조목조목 열거한 것을 보고 있으면 아우렐리우스나 노자가 하지 못한 어떤 것을 저자가 해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싶다. 적재적소가 맞게 여러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도 능력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꼭 서양의 『이솝우화』처럼 간단히 예화 같은 이야기를, 그것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날라다주니, 가만히 앉아 꼭꼭 씹어 먹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저자가 했던 말처럼, 은은하게 영혼으로 느껴지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