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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임재 연습 - 날마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비밀
앤드류 머레이 지음, 서하나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임재 안에 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이 글의 비유를 빌리자면, 화려한 성 안에 초대받기는 했지만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입구 앞에서 맴돌기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나 또한 그런 그리스도인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은 받았고 구원의 확신은 있지만 예수님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혹은 그것을 소망하지도 않았던 내 지난 날을 돌아본다면 정말로 아까울 뿐이다. 정녕 구원은 받았단 말인가. 그 때는 내가 왜 예수님 임재 안에 거하기는커녕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가 족쇄처럼 느껴졌을까. 지금 돌아보더라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때는 사는 것이 어렵고 그냥 힘들다고만 생각되면서 말씀 보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그래서 필자가 말했던 것처럼, 몇몇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길 주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 오히려 쉼을 방해한다는 말의 뜻이 어떤 것인지는 알겠다. 한때 나도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통탄했던 앤드류 머레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도 그 말을 읽을 때는 뭐라고 딱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불편함을 느꼈다. 주 안에 거하게 할 수 있는 말씀과 기도나 묵상이 오히려 우리의 쉼을 방해한다니~ 아마도 그는 자신의 힘으로만 하려고 하지는 않았었는가 하고 곰곰히 상상해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완전히 주의 임재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하지만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안타까워하는 앤드류 머레이의 기분이 조금은 전이되면서 나한테 해주는 말 같아서 좋았다. 나를 안쓰럽게 여겨 그 옛날, 거의 한 세기 전의 사람이 미리 이 책을 적어놨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제 교회에서 가졌던 NK중보기도모임 중에서 돌아가면서 올해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상태나 감사할 것이나 기도 제목을 나누는 자리에서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단기선교 마지막날에 하나님께 드린 질문이 있었는데 그것을 한국으로 돌아와서 응답받았다고.‘나는 하나님께 사랑을 흠뻑 받지 못했다고, 그런 사랑의 기억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 특히 선교가서의 다른 나라 사람들을 사랑해줄 수 있지 않겠냐’ 그것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나를 무신론을 굳게 믿는 중국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이 아니라 가난해서 지금의 내 나이까지 살지도 못하는 제3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이곳, 행복하고 나름 치안이 잘 되어 있는,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한국에서 태어나게 해주신 것, 그 자체가 사랑이었음을 말이다. 얼마나 무지했던지 그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내 오만을 여지없이 깨뜨려주시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더 좋은 것은 이 책을 만나 이전에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었던 이전의 나를 벗어나서 이제는 예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 기회, 천우신조와 같은 그 기회를 더이상 버리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청년의 때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적다고. 대학 졸업하면 부단히 취업할 준비하고, 취업하면 부단히 결혼할 준비하고, 결혼하면 부단히 아이 잘 키울 준비를 해야 하니 정말 시간이 없다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이제 내 나이 서른 하나, 내년이면 서른 둘이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냥 흘려보냈던 내 이십대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 시기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거하고 놀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정말 청년의 때에 부지런을 더 떨어야 할 듯 싶다.
이 책은 처음부터 엄중한 경고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임재에 거하고자 하면서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말씀을 묵상을 하건 기도를 하건 예수님과 대화를 하건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야 진정한 임재를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루 24시간을 나는 거의 잠으로 보내고 있다. 스스로도 무척이나 부끄러워하는 일인데, 진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어서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주님과의 데이트 시간을 잠으로 허비해버리면 지나간 내 이십대만 더 아까울 뿐이니, 정신차리고 예수님과의 시간을 만들 생각이다. 우선 오늘부터. 또한 성경 연구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프리셉터 성경책을 벼르고 별러서 샀는데 너무 정리할 것이 많은 것을 보고 쓸 엄두가 안나서 상자 속에 얌전히 모셔두고 있기만 하다. 비싸기도 엄청 비싸서 후회도 되었다. 딱 보는 순간에 하루 다섯 시간은 투자를 해야 이 모든 정리를 다 끝낼 수 있겠다 싶었기에 지레 겁을 먹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깡패였으나 회심한 그 해 성경 100독했다는 김일도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저런 열심을 내야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절감했다. 그래서 이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놓고 지금 읽고 있는 성경을 다 읽은 후에 내년 1월부터 프리셉터 성경으로 성경 연구를 해볼 참이다.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만난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누구한테라도 물어볼 수도 없어서 한동안 그 뜻도 모른 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단기 선교에 가서 그 뜻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머리(지성), 가슴(마음), 행동(의지) 이 세 가지 요소 모두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지성이 작동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면, 그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느끼게 되고, 그 이후에 더욱 더 행동하는 믿음을 보이게 되는데, 그 행동이 다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성을 자극해서 계속 이것이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나는 다른 무엇보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음은 냉랭한 채 머리로만 알고 있다고 회피하기만 했으니까.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족쇄로만 생각한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내가 예전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연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아마도 추측컨대 그 비밀은 사랑이 아닌가 싶다. 나는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은 게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서 혹은 같이 믿은 사람들에게서라도 내침을 받고 외톨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가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그렇게 비참해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더 불쌍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피조물일 뿐인 내가 구원해달라고 매달리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다음에야 그 분이 영화롭게 되시는데 큰 값어치를 치른 한 영혼이 스스로 삽질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의 가치도 알아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혹여 이 서평을 읽는 사람 중에 과거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꼭 돌아오길 바란다. 그 방법이 말씀이든, 기도이든, Q.T.이든, 찬양이든, 사람이든 어떤 방법으로간에 절대 당신을 포기하시지는 않으시는, 아니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 책에 등장한 포도나무 비유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두고 싶다. 진짜로 생각지도 못했던 값진 선물을 받았기에 참을 수가 없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고 가지는 우리란 것은 다들 아실 것이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분이시라면 지겹도록 들어서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을 만한 비유일 것이다.(내가 평소에 그랬다, 무슨 뜻이 팍 이해가 안 가는 비유였다) 하지만 이 비유에는 놀랄 만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지만 그도 그 자체로만 성장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신 농부가 와서 그를 가꾸어야 한다. 농부의 보살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포도나무는 가지를 통해 열매를 맺게 된다. 이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것은 포도나무로서도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가지는 자신이 가지임을 인식하지 말고 그저 포도나무(예수님)임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어준다면 제 힘이 아니라 농부의 보살핌(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성장하는 포도나무의 영향으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된다. 그런데 가지가 없다면? 포도나무는 열매를 어디로 맺을까? 맞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만큼(가지가 포도나무에게서 떨어지면? 바로 죽는다) 예수님도 가지인 우리가 필요하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로움을 얻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으니까 말이다. 아하! 난 정말 값진 존재이구나!! 이전에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 나 같이 보잘것없는 인간은 굳이 만들지 않으셔도 상관없다고 나를 비하했었다. (나 같은 것은 없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나? 괜히 날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살기 힘들게 하는 거야! 성격도 못됐고, 능력도 없고,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데! 이런 건 안 태어나도 되는데~!) 그것도 단기 선교 가기 바로 직전까지! 지금도 내가 단기 선교를 갔다가 왔단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나로선 할 수 없는 일을 그분께서는 하셨음을 믿는다. 아니,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분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시고, 또 사랑이시고, 계속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