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임재 연습 - 날마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비밀
앤드류 머레이 지음, 서하나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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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임재 안에 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이 글의 비유를 빌리자면, 화려한 성 안에 초대받기는 했지만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입구 앞에서 맴돌기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나 또한 그런 그리스도인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은 받았고 구원의 확신은 있지만 예수님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혹은 그것을 소망하지도 않았던 내 지난 날을 돌아본다면 정말로 아까울 뿐이다. 정녕 구원은 받았단 말인가. 그 때는 내가 왜 예수님 임재 안에 거하기는커녕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가 족쇄처럼 느껴졌을까. 지금 돌아보더라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때는 사는 것이 어렵고 그냥 힘들다고만 생각되면서 말씀 보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그래서 필자가 말했던 것처럼, 몇몇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길 주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 오히려 쉼을 방해한다는 말의 뜻이 어떤 것인지는 알겠다. 한때 나도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통탄했던 앤드류 머레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도 그 말을 읽을 때는 뭐라고 딱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불편함을 느꼈다. 주 안에 거하게 할 수 있는 말씀과 기도나 묵상이 오히려 우리의 쉼을 방해한다니~ 아마도 그는 자신의 힘으로만 하려고 하지는 않았었는가 하고 곰곰히 상상해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완전히 주의 임재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하지만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안타까워하는 앤드류 머레이의 기분이 조금은 전이되면서 나한테 해주는 말 같아서 좋았다. 나를 안쓰럽게 여겨 그 옛날, 거의 한 세기 전의 사람이 미리 이 책을 적어놨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제 교회에서 가졌던 NK중보기도모임 중에서 돌아가면서 올해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상태나 감사할 것이나 기도 제목을 나누는 자리에서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단기선교 마지막날에 하나님께 드린 질문이 있었는데 그것을 한국으로 돌아와서 응답받았다고.나는 하나님께 사랑을 흠뻑 받지 못했다고,  그런 사랑의 기억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 특히 선교가서의 다른 나라 사람들을 사랑해줄 수 있지 않겠냐’ 그것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나를 무신론을 굳게 믿는 중국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이 아니라 가난해서 지금의 내 나이까지 살지도 못하는 제3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이곳, 행복하고 나름 치안이 잘 되어 있는,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한국에서 태어나게 해주신 것, 그 자체가 사랑이었음을 말이다. 얼마나 무지했던지 그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내 오만을 여지없이 깨뜨려주시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더 좋은 것은 이 책을 만나 이전에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었던 이전의 나를 벗어나서 이제는 예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 기회, 천우신조와 같은 그 기회를 더이상 버리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청년의 때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적다고. 대학 졸업하면 부단히 취업할 준비하고, 취업하면 부단히 결혼할 준비하고, 결혼하면 부단히 아이 잘 키울 준비를 해야 하니 정말 시간이 없다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이제 내 나이 서른 하나, 내년이면 서른 둘이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냥 흘려보냈던 내 이십대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 시기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거하고 놀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정말 청년의 때에 부지런을 더 떨어야 할 듯 싶다.

 

이 책은 처음부터 엄중한 경고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임재에 거하고자 하면서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말씀을 묵상을 하건 기도를 하건 예수님과 대화를 하건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야 진정한 임재를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루 24시간을 나는 거의 잠으로 보내고 있다. 스스로도 무척이나 부끄러워하는 일인데, 진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어서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주님과의 데이트 시간을 잠으로 허비해버리면 지나간 내 이십대만 더 아까울 뿐이니, 정신차리고 예수님과의 시간을 만들 생각이다. 우선 오늘부터. 또한 성경 연구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프리셉터 성경책을 벼르고 별러서 샀는데 너무 정리할 것이 많은 것을 보고 쓸 엄두가 안나서 상자 속에 얌전히 모셔두고 있기만 하다. 비싸기도 엄청 비싸서 후회도 되었다. 딱 보는 순간에 하루 다섯 시간은 투자를 해야 이 모든 정리를 다 끝낼 수 있겠다 싶었기에 지레 겁을 먹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깡패였으나 회심한 그 해 성경 100독했다는 김일도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저런 열심을 내야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절감했다. 그래서 이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놓고 지금 읽고 있는 성경을 다 읽은 후에 내년 1월부터 프리셉터 성경으로 성경 연구를 해볼 참이다.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만난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누구한테라도 물어볼 수도 없어서 한동안 그 뜻도 모른 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단기 선교에 가서 그 뜻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머리(지성), 가슴(마음), 행동(의지) 이 세 가지 요소 모두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지성이 작동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면, 그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느끼게 되고, 그 이후에 더욱 더 행동하는 믿음을 보이게 되는데, 그 행동이 다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성을 자극해서 계속 이것이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나는 다른 무엇보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음은 냉랭한 채 머리로만 알고 있다고 회피하기만 했으니까.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족쇄로만 생각한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내가 예전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연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아마도 추측컨대 그 비밀은 사랑이 아닌가 싶다. 나는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은 게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서 혹은 같이 믿은 사람들에게서라도 내침을 받고 외톨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가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그렇게 비참해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더 불쌍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피조물일 뿐인 내가 구원해달라고 매달리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다음에야 그 분이 영화롭게 되시는데 큰 값어치를 치른 한 영혼이 스스로 삽질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의 가치도 알아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혹여 이 서평을 읽는 사람 중에 과거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꼭 돌아오길 바란다. 그 방법이 말씀이든, 기도이든, Q.T.이든, 찬양이든, 사람이든 어떤 방법으로간에 절대 당신을 포기하시지는 않으시는, 아니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 책에 등장한 포도나무 비유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두고 싶다. 진짜로 생각지도 못했던 값진 선물을 받았기에 참을 수가 없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고 가지는 우리란 것은 다들 아실 것이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분이시라면 지겹도록 들어서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을 만한 비유일 것이다.(내가 평소에 그랬다, 무슨 뜻이 팍 이해가 안 가는 비유였다) 하지만 이 비유에는 놀랄 만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지만 그도 그 자체로만 성장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신 농부가 와서 그를 가꾸어야 한다. 농부의 보살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포도나무는 가지를 통해 열매를 맺게 된다. 이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것은 포도나무로서도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가지는 자신이 가지임을 인식하지 말고 그저 포도나무(예수님)임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어준다면 제 힘이 아니라 농부의 보살핌(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성장하는 포도나무의 영향으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된다. 그런데 가지가 없다면? 포도나무는 열매를 어디로 맺을까? 맞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만큼(가지가 포도나무에게서 떨어지면? 바로 죽는다) 예수님도 가지인 우리가 필요하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로움을 얻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으니까 말이다. 아하! 난 정말 값진 존재이구나!! 이전에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 나 같이 보잘것없는 인간은 굳이 만들지 않으셔도 상관없다고 나를 비하했었다. (나 같은 것은 없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나? 괜히 날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살기 힘들게 하는 거야! 성격도 못됐고, 능력도 없고,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데! 이런 건 안 태어나도 되는데~!) 그것도 단기 선교 가기 바로 직전까지! 지금도 내가 단기 선교를 갔다가 왔단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나로선 할 수 없는 일을 그분께서는 하셨음을 믿는다. 아니,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분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시고, 또 사랑이시고, 계속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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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부처님도 기뻐하는 과학
강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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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학적인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었던 혹은 성경 구절이나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화두인 통섭을 충족시켜주는 것 같은 모양이다. 젊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흔치 않은 종교적인 성찰이라 더 주목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불경이나 성경이나 좋은 말씀(종교적 가르침 중 나쁜 것을 권하는 가르침은 없으니까)을 읽고 사는 데에 참고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그러한 생각 때문에 기독교도인 내 생각과는 일견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잠언으로 성경이나 불경을 참고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닐 테지만, 성경적인 말씀으로 인생 전체를 바꾸어 가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런 식의 짜깁기 글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이 책의 앞 표지에는 작은 글씨로 ‘이 책을 목사님, 신부님, 스님께 전해주세요’라고 되어 있는데, 이미 이 분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다. 그 분들이 어떠한 분이신가! 제가 생각하는 진리를 향해 제 인생 전체를 바치겠다고 서원하신 분들이 아니신가 말이다. 우리가 매양 알고 있었던 일들을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과학기술 혹은 현상으로 설명해주어서 참신하긴 하지만 그분들께 드릴 만큼의 수준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는 불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가르침이 어찌나 비슷한지 놀랍다고 한다. 나도 놀라웠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기에 정확히 안다. 대학교 수업 때 불교에 완전히 심취하신 교수님께서 불교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설파하시면서 반대로 기독교는 왜 그 모양이냐고 비판하셨었다. 그 때는 내가 소심하기도 하고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아서 어떤 말씀도 드리지 못했는데, 그 불교 말씀이 성경에도 있다고 마음 속으로는 한창 반박하기 바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죄악을 저지른 우리를 위해 제 아까운 독생자 아들 예수를 대신 속죄물로 드려 살리셨다는 그 진리만큼은 빼놓고 거의 대부분이 흡사할 것이다. 거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말이다. 이런 중요한 진리 외에는 다 똑같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런 중요한 부분에서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이 갈리는 것일 뿐. 그런데 기독교도 중에서도 아직 많은 것을 인생으로 깨닫지 못해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나도 매번 저지르는 잘못이고 교만이고 죄악이기에, 그리고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기에,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솔직히 인간으로서 그런 잘못 하나 지르지 않을 수 있나. 그러니 용서해줘야 한다. 특히나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서 용서하셨으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인들이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과 죄를 그냥 보아넘기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양 떠들기에 바쁘니까 말이다. 그럴 때 보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구나, 그래서 실망했기에 저렇게나 비판하고 떠들어대는구나 생각한다. 그리고 저들이 우리로 인해서 상처받았으니 우리가 더욱 자중하고 회개하고 겸손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이 책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보면 너무나 아이디어도 참신하고 내용도 그런데로 좋은데, 너무 곡해해서 한 부분만 뽑아서 설명한 것 같은 부분이 있어 말하고 싶다. 고기를 먹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삽겹살을 먹거나 소화가 안 되신다고 레어나 미디엄으로 구워먹었다는 기록이 없지는 않느냐며 반박하는데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이다. 나도 현재의 급속도로 진행되는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마음의 어느 한곳을 불편하게 만들고, 법정 스님의 『먹어서 죽는다』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는 백번 동의하는 바이지만, 성경에서 육식을 먹으라는 말이 없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 이렇게 몇 자 적는다.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피조물들끼리 서로 죽이고 고통을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성경을 보라, 예수님께서 고기를 즐겨먹었다는 구절이 나오는가?(p.62)

이렇게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한데 실제 구약 성경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죄일에 부여해주셨던 제사의례를 보면 죄다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드린다. 여러 사람들이 같이 먹어야 하는 화목제물의 경우에도 소나 양, 염소를 잡을 수 있게 하셨기에 육식을 먹으라는 구절이 없다고 해서 육식을 금하셨을 거라고 추측을 하는 것은 억지 의견일 뿐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으로 5천명을 먹이실 때, 물고기는 육식이니까 안 받는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부활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조찬을 준비해주실 때도 물고기는 등장했다. 뭐, 물고기는 육식이 아니라는 말씀은마라. 되도록이면 채식 위주의 생활을 하는 것이 정신 건강이나 육신의 건강에도 좋겠지만 그것을 말도 안되게 성경 핑계 되지않았으면 좋겠다.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할 때도 메추리 떼로 육식을 공급해주신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하지만 이 책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교양 서적의 하나로 여러 과학 현상을 알아가는 것도 좋겠다. 이미 알고 있었던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구조에 따른 차이나 산화 되는 것 등에서 다시금 정확한 과학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재미있었다. 흥미롭게 과학이라는 화두를 던져 성경 구절이나 법구경의 구절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참신했던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흥미로운 과학 사실을 알고 싶다면 읽어보는 게 좋겠다. 채식을 하자고 하면서 설명했던 새로운 정보가 있어서 한 번 인용해본다. 역시 이 세계 지으신 하나님은 놀라우시다니까! 


쇠고기가 단백질을 19%, 콩이 40% 함유하고 있는데 반해, 스피루리나는 60~70%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는 ‘고단백 식품’이다. 굳이 고기를 먹지 않아도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는 요소들이 이 자연에는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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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 - 보아 엄마의 인생과 교육 이야기
성영자 지음 / 비오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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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 엄마로 더욱 유명한 성영자 씨가 책을 냈다. 세계적인 가수를 딸로 두고, 뮤직비디오 감독과 서울대 피아니스트이자 현재 교수가 된 아들을 뒀기에 어느 정도 주목을 받고 있었던 그녀이다. 그녀가 자식 농사를 잘 지은 것은 궁금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공인의 엄마가 되어 많은 시선을 받게 되었던 이야기나 그녀의 인생역정 이야기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나 같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 대해서 알아도 그녀의 인생 중 보아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만. 하지만 나로선 내가 관심을 가지는 몇 안되는 가수 중에서 유일하게 어리지만 당차게 스캔들 하나 없이 제 꿈을 이루어나가는 사람이 그녀였기에 그녀의 엄마가 내신 책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방식과 태도로 아이를 키웠기에 초등학생 때 어려운 연습생 시절을 감수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꿈을 지켜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장 어린 나이에 데뷔를 했어도 웬만한 어른들보다 어려움을 당차게 견뎌내는 것을 보면 부러움을 떠나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그녀의 교육 방법을 소개한 책이라기보다는 그녀의 꿈과 인생 이야기에 더 가깝다. 어린 시절 얼마나 당차게 살았고 공부에 욕심이 많았는지부터 그녀가 서울로 올라와서 남편을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다 등장하기에 어찌보면 지루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교육이란 말이 아니라 행동이기에 그녀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보아에게 어떤 가르침과 행동을 보여줬는지 추측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내가 모를 뿐이지, 여러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고, 수녀님들은 친구로 가깝게 지내고 있으며 시심이 깊은 그녀는 꽤나 유명한 사람일 수 있겠다고 느꼈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 서울대에 아들을 보낸 사람으로서 어떻게 안 유명할 수가 있을까마는.

 

유복하게, 남부럽지 않게 세 자녀를 키울 수 있었던 그녀의 가정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기울어졌는지,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는지를 읽고 있으면 정말 ‘인생지사 새옹지마’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그들의 굳건한 인내심에 무한한 존경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혹여라도 한순간 마음이 약해졌더라면 삶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굳건하게 견디고 인내하는 다섯 식구들의 모습을 통해 어떠한 삶이라도 이겨낼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 때 삶을 포기했더라면 그 이후에 있었을 첫째 아들의 서울대 입학과 셋째 딸 보아의 데뷔 무대라는 인생의 선물을 얻지 못했을 것을 생각해보면 한순간 아찔하기까지 하다. 인생이란 항상 뜻대로 만들어갈 수는 없어도 항상 박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진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해서 혹여 사기를 당할 수도 있을지라도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선하고 아름답다 여기며 살아온 한 평생이 아름다운 그런 삶이었다. 그녀의 삶은. 그랬기에 그런 모습을 은연중에 배운 세 아이들이 그렇게 자기 인생 속에서 반듯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닐런지.

 

아이들 학업 과정 관련 몇몇 에피소드 속에 등장한 성 여사는 정말 독특하다. 나라면 저런 행동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낄 만큼. 서울대를 목표로 선화예고에서 학업과 연주를 병행했던 첫째 아들이 여자 친구를 사귀고서 예전보다 열심히 하지 않았을 때, 그녀가 선택했던 것은 아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세 가지 선택지를 주고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되 그 책임은 본인이 질 수 있도록 했던 것을 보면 정말 대법한 엄마가 맞다. 그런 위기 상황을 아주 지혜롭게 해결했기에 그렇게 아이들에게 제 일은 제 힘으로 해결하고 처리하도록 유도해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그렇게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면 꼭 봤으면 좋겠다. 하나의 방편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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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 - 조선 선비들이 찾은 우리나라 산 이야기
나종면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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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따라 산을 오른다고 하니까, 전혀 고전에 관심이 없었던 나로서도 상당히 솔깃했다. 과거 선비들이 산을 유람했던 기록이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의 명산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꽤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거와는 달리 산 근처까지 차로 이동하고 그 이후에 산에 오르는 것을 등산이라고 하지만 그 때는 집에서 나서는 것부터가 등산의 한 일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교통수단이 없는 때이니 한 번 산을 오르는 것이 오죽이나 힘들었을까. 짐을 들어주는 동자 한 명을 앞세우고 몇날 며칠을 걸려 다녀오는 길이어야 하니, 정말 선비쯤은 되는 사람들이나 다녀올 수 있는 것이었을 게다. 또한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일정이니 한 번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유람을 금방 다녀올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 책은 그 당시 우리가 알만하건 알지 못하건간에 여러 선비들이 쓴 글이 등장한다. 번암 체제공,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면암 최익현 같은 이름난 선비들뿐만 아니라 수당 이남규, 삼연 김창흡, 해좌 정범조, 미수 허목, 아계 이산해, 여헌 장헌광, 읍취헌 박은, 담헌 이하곤, 지산 조호익 같은 나는 모르는 수많은 선비들이 산을 유람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선비들이 글을 남긴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글이 있기에 지금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때에, 우리 선비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내용을 보면 간혹 각 산의 높이가 밝혀져있는데 지금으로선 그다지 산이라고 부를 수 없는 높이의 산(도고산 - 482m)을 가리켜 군사적 요새로 사용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지금으로선 산이라고 취급해주지도 않을 만큼 야트막한 산도 그 당시 선비들은 산의 운치와 정취를 제대로 음미했을 것을 생각해보면 현대인들은 등산에도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 어머니께서 등산에 취미를 붙이셔서 등산용품을 사들이시는데 그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등산용 겉옷은 물론이고 땀을 흘리고도 금방 배출이 되어 춥지 않게 해주는 등산용 내의는 가장 낮은 것이 5만원 정도이다. 그것도 상의만. 상황이 이러하니 겉으로 봤을 때, 등산용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은 민망해서 등산을 하러 갈 수나 있을까 싶다. 내가 산에 오른 경험이라곤 까마득한 옛날에 그런 장비도 없이 수학여행나 어디 모임에서 몇 번 오른 게 등산 경험의 전부인지라 별다른 걱정은 되지 않지만, 가끔 기분 전환 삼아 가고 싶을 땐 정말 난감할 것 같다. 장비 때문에 사람이 소외되는 현상이 일어나다니... 어쨌든 과거에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게다. 산은 산이여서 그저 산을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그런 어머니 같은 품을 가졌을테니. 게다가 선비들은 산을 오르는 것을 그저 단순한 기분 전환의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산은 속세와 단절된 장소, 그러니까 이계나 도원경과 같은 선비들이 추구해야 할 공간이었기에 산이 보여주는 정취도 단지 좋은 경치 그 이상이었다. 도를 얻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고 나 자신의 갈 길을 추구할 수 있는 인격 수양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오대산기」, 「운주사기」, 「유설악기」, 「두타산기」 등 옛 선비들이 남긴 산행기들을 보면 이런 글이 남아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새로운 것이 많이 있었다. 일단 모르는 산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 새로웠고, 그들이 이런 목적으로 글을 남겼던 것이 새로웠고, 게다가 산행이 인격 수양의 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새로웠다. 내가 가본 산은 이 책에 등장한 산 중 유일하게도 설악산뿐인데, 그 당시에는 금강산에 밀려 설악산의 아름다움이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글귀를 보고서도 상당히 놀라웠다. 금강산에 갈 수만 있었다면, 지금도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거라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괜히 내 마음을 끄는 산으로는 도고산이 있는데,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에 있는 높이 482m의 낮은 산이지만 상당히 운치가 있다. 아계 이산해가 쓴 「운주사기」를 보면 다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다는 운주사도 궁금하고, 도고산도 한번쯤 가보고 싶은 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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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더하기 - 버리기를 통한 더하기의 기적
스티븐 아터번 지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흔히 생각한다. 내가 조금만 더 잘하면, 내가 조금만 더 참으면,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하면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나도 그랬다. 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게을렀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물론 그것은 내 욕심 때문에, 내 게으름 때문에 벌어진 문제가 맞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 모든 일을 ‘내’ 힘으로만 행하려고 했던, 바로 그것을 말이다. 이 책은 말한다.‘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오만을 내려놓으라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려고 했던 것, 혹은 하나님 없이 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으면 삶이 편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이 책대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책망하고 비판하고 자기비하했던 것,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내가 하려고 마음 먹었던 그 모든 것을 다 하지는 못했다. 내 상상 속의 나는 훨씬 멋지고, 훨씬 만능이여서 이제까지 밀렸던 일들을 말끔히 마무리하고 주님과의 새날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오늘도 역시나 일찍 일어나지도 못했고 일찍 일처리를 마무리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생각한다. 이제껏 만능으로, 완벽하게 하루가 시작되지 않으면 지레 짜증을 부리면서 그 날 하루를 망쳐버리는 일은 이제 하지 않겠다고. 어떤 사람에게는 24시간을 48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만능을 주셨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잠 때문에 묻혀버려 작은 분량의 하루의 일과밖에는 남지 않아 그에 맞는 능력을 주셨을 거라고 말이다. 내 처지를 있는 그대로로 받아들이곤 그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모양밖에는 능력이 되지 않지만 그것도 주님이 주셨고 주님의 힘을 의지한다면 앞으로 내 지경이 점점 넓어져가는 기적이 있지 않겠냐고. 이전에는 나 자신만 보고 지레 포기했다면, 이젠 그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놓아 그를 의지하면서 내 가능성과 내가 앞으로 변할 기대감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목차만 봐도 그 내용이 너무나 마음에 와닿는다. 정말 이 책을 봐야 할 것 같다고, 이 책을 보면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첫 파트가 <항복>이란 항목이었는데, 딱 내가 봐야 했던 부분이었다. 통제의 짐, 혼자서 하겠단 생각, 비현실적인 기대까지 내 안에 있었던 나를 묶어놨던 족쇄들을 끄집어내어 보는 기분이었다. 나 스스로는 전혀 완벽하지 못하면서, 아니 못하기 때문에 완벽하길 기대했고, 왠지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만을 쓰실 것 같았고, 완벽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지도 칭찬을 받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부단히 마음이 힘들었었다. 그래서 흐트러져있는 겉모습 이면에 내겐 완벽주의자 성향으로 가득했었다. 일할 때는 열정도 있었기에 정말 더 잘하고 싶고, 더 잘하는 것이 재미있었을 때가 있었으니 일처리도 그다지 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시간, 그러니까 하나님과 교류해야 하는 시간에 있어서는 항상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계속 무너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왜 그러냐고 내게 아무리 다그쳐봐야 눈만 꿈벅꿈벅 들 뿐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내가 나도 싫은데, 어쩌라고~. 나중에는 배째라는 심정으로, 모 아니면 도란 심정으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했던 내 지난 날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여차여차한 여러 방법과 여러 좋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수렁에서 건져주셨지만 그 당시에는 나는 나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럴 때 이 책은 어떨까. 마음 속에 감흥이 없을 때 아무리 좋은 책을 들쳐봐야 깨달음이 없었다는 것은 나도 경험해봤기에 잘 알지만, 그렇기에 이 책은 평소에 틈틈히 내 자신을 점검하고 주변에 아파하는 혹은 무너지는 동역자들을 권면하는데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읽고 좋았던 말씀 한 구절, 문장 한 구절씩 적어서 주거나 문자로 날려보내주는 센스는 아마 이럴 때 발휘해야 하겠지. 아마 그래서 이 책이 지금 이순간 내게 와주었나보다. 내 과거의 모습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또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처음부터 그렇게 설레이게 하는 마음으로 나를 만나주었던 이 책은 생긴 것도 정말 예쁘게 만들어진 책이다. 표지의 소소한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많이 봤는데 가볍기도 엄청 가볍고 특히나 재생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마음씀씀이도 너무나 예쁜 책이다. 가치창조란 출판사에서 모든 책을 이런 종이로 만드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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