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미친놈, 신미식 - 나는 좋아하는 일 하면서 먹고 산다
신미식 지음 / 비전과리더십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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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식 사진작가를 내가 알게 된 것은, 역시나 늘 그렇듯이, 사진이 먼저가 아니였다. 사진작가이면 사진으로 나랑 처음 만나야 정상일 테지만 책 말고 다른 어떤 통로로는 정보를 얻지 못하는 내 태생적 한계 때문에 나는 그를 또 책으로만 먼저 만났다. 아마도 여러 분야의 대가를 만나 인터뷰 했던 것을 모아놓은 책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중에 그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가 바로 그인지 확신하지는 못했었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인 사진에 대해 작가의 이름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지않은가. 그런데 한동안 잘 회자되었던 마다가스카르란 나라와 연결된 한 사진작가가 그곳에 갔다가 한 번도 영화를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후원을 받아 영화상영을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얼핏 기억에 남았는데 혹 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은 해보았다. 그런데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그가 바로 그였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상업적인 흐름에 찌들지 않고 순수하게 그저 좋아서 한다는 말이 맞을 만큼 그런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우물만 파는 우직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하루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밤새워 인화 작업을 하면서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지금의 신미식이란 사진작가를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또한 13남매의 막내였기에 엄마의 사랑을 마음껏 받기는커녕 훌쩍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도 어제 어디 갔었냐는 무심한 반응만을 받았던 그라 더 여행사진작가라는 타이틀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여행이라고 하면 모든 것을 다 바리바리 싸들고가 힘들게 갔다가 힘들게 오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나로선 그의 훌쩍 떠났다 돌아오는 여행스타일이, 게다가 비싼 돈을 들여 비행기 타고 유럽까지 갔다가 그 유명한 루브르박물관 한 번 들어가보지 않은 그의 행적이 그리 편히 다가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 편치 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자유로움이 물씬 풍기는 그에게 보내는 약간의 동경과 질투가 섞여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로 알고는 있는 이상- 여행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유롭게 갔다오는 것이란 - 을 도저히 현실에서는 실현 - 본전이 아까워서라도 사진 한 방 더 찍고 유명한 건물 한 번 더 보고 오는 것 - 시킬 수가 없었던 나에 대한 부끄러움의 발로일지도. 하지만 그런 그였기에, 모든 것을 다 싸안고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들의 꿈이 되어주었기에 그의 사진이 그렇게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자신은 엄마에게서 받은 감성으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고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13남매의 입에 넣어주기 위해 삶에 찌들어갔지만 마당에 아름다운 꽃을 가꾸며 즐기고 꽃잎을 창호지 사이에 넣어 문을 바르는 엄마의 감성 또한 분명 큰 도움은 되었겠지만 그보다도 그 자신이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으로 그 모질고 혹독한 시련을 다 견뎌냈던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람은 경험의 동물이라서 아무리 머릿속으로는 상상을 해봐도 제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으면 어떤 감정도 뼛속까지 느낄 순 없다. 그러니 삶의 낭떠러지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다녀온 그였기에 다양한 처지와 상황 속에서 있더라도 아픔과 역경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사진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암, 대기업의 회장님부터 교도소에 갇혀있는 사람까지, 유방암으로 세 번씩이나 수술을 하고도 상황이 힘든 사람들에게까지 그의 감성은 절절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신작가가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사진을 펴내면 그 사진으로 팬들이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이 다시 신작가에게로 돌아오니 아마 신작가에게도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정말로 기적처럼 그가 사진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어디선가 그의 사진에게서 위로를 받았다며 감사 편지가 날아드는데, 정말 절묘하다싶을 정도이다.

 

욥기에 나온 사람이 감당못할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는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자살의 유혹을 이겨냈다던 그의 말처럼 정말로 사람이 살아갈 구멍을 항상 열어놓으시는 것 같다. 많이 살았다면 많이 산 그의 반백년 시간 동안에 그런 역사가 드문드문 등장하는 것을 보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가 죽도록 힘들었을 때 만원의 팁을 주면서 격려를 해준 이름 모를 아저씨처럼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절대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선 안될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베풀어줄 위로와 격려를 생각해서라도, 그 위로와 격려로 몇 사람이나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모두는 잘 살아가야할 당위성이 있다. 아마도 신미식 작가의 사진은 그런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렵지 않게 느끼고 감사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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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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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현대인들의 오만을 꼬집어내는 도발적인 문구로 시작되는 이 책은 정말 놀랍도록 신기한 책이다. 저자의 모든 주장과 논리에 다 동의할 순 없어도 내 흥미를 끝까지 불러일으키는 그의 관점은 누구에게나 심사숙고해볼 무언가를 남긴다. 또한 그가 제시한 실례를 듣고 있으면 그가 가진 딜레마도 또한 알아챌 수가 있었다. 무신론자로서, 믿음이란 명목 하에 맹목적인 추종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 또한 그런 믿음 하에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며 - 이 책을 써야겠다는 절박한 필요성을 가졌을 것이란 생각을. 아마도 그는 그것이 자신이 가진 사명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나로서도 믿음이라는 이유만으로 과연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 많이 등장했으니 그가 가진 절박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신을 믿는 것도, 같은 종교적인 색채를 가진 것도 아니지만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나도, 과히 좋게 보이지 않는 일들이 믿음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보며 경악스러웠으니. 그것도 21세기란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그런 미신이라 치부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무신론자의 눈에는 얼마나 끔찍하게 보였을까 공감된다. 19세기에 이 땅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거의 미개한 수준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봤던 그 때와 같지 않았을까. 화장실에서나 풍겼어야 할 냄새들이 조선땅 전쳬에서 났으니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어도 할 말은 없다. 지금 우리가 덜 개발된 시골만 가도, 덜 발달한 아시아권에 여행을 가도 똑같은 생각을 할 테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또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는 줄 알고 있었다. 우리 한국인들만 해도 고등학교 때 진화론 교과서로밖에 공부하지 않으니 그게 다라고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미국사람들은 또 그게 아니였나 보다. 그것이 청교도들의 세운 나라여서 그런지, 단지 원숭이에서 발전된 존재가 인간이란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사실이 나로선 의외였다. 아직 그쪽 분야에 대해 읽은 것이 거의 없어서 내 판단은 아직 보류해야겠지만 그런 식으로 내 생각을 뛰어넘은 세상의 흐름을 알게 되어 신기했을 따름이다. 어쨌든 그런 미국사람들의 진화론을 믿지 않는 것부터 비판하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아주 쉽게 설명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런 설명 중간에 삽입된 유머는 보너스이다. 나는 내용은 둘째치고 그런 유머를 구사하는 미국식 글을 좋아하는 터라 별을 아주 후하게 주었다. 무엇이든지 유쾌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은 정말 중요하기에. 그런데 이 책은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서술된 것이라 진화론은 당연히 접고 들어가야 한다. 조금 불쾌하더라도 계속 읽어보자. 그러면 인간은 수만 년을 살아오면서 자연선택을 하며 생존과 번식을 거듭해온다. 수많은 유전된 요소들 중에 돌연변이된 한 요소가 번식하는데 유리하면 그것이 선택되어 계속 이어가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천천히 진행되는지 모른다고. 그런데 여기서 독특한 것이 저자는 이런 유전적인 기억이 우리 몸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원시인의 생각이 현대인의 몸에 깃들여있다고 주장하는 그의 근거로는, 유전적인 요소는 생존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신경도 안 쓰기 때문이란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뭔가를 봤을 때 그것이 적이 아니라면 괜찮지만 적일 경우 내가 피하지 않으면 무조건 죽는다. 그렇기에 뭔가 봤다 싶으면 무조건 움직여서 피해야 그는 사는 것이다. 그렇게 원시적인 마음은 생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그것을 극복하기가 어렵다. 가장 큰 이유라면 두려움일 것이다. 시험 날에 머리를 감으면 지식이 다 잊어버릴 것이라는 믿음에서 파생된 징크스는 우리의 대표적인 원시 논리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것이라도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가 연습만 꾸준히 한다면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일에 의심해보는 것인데, 과학에서 항상 사용하는 방법이다. 과학을 최고의 지침으로 여기는 저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나도 미신이나 징크스는 그리 권장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와 나의 근본적인 차이는 신의 존재 유무인데 그것은 좀 마음에 안 든다. 뭐, 대다수의 우상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맞으니 대단한 통찰력이라 생각은 하지만 어쨌든 내 관점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는 참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누구나 현대인의 원시성을 보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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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등척기 -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안재홍 지음, 정민 풀어씀 / 해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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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백두산이라고 하면 현재 한국인, 즉 남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익숙한 산이 아니다. 현재 명산으로 불리는 설악산이 조선 시대 당시에는 금강산에 가려서 그 빛을 못 봤던 것처럼, 남과 북으로 나뉜 현 시점에서는 우리에게 백두산은 멀고도 먼 산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중국을 통해서 백두산에 발을 디딜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과연 대한민국에서 맛보는 백두산의 참맛은 아닐 것이기에 아쉽고 통탄스러울 뿐이다. 그런데 그런 명산을 나는 올해 가봤다. 역시 중국을 통해서 갔던 하루 일정의 백두산 나들이였는데,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바로 전에 벌어졌던 낙석 사고 때문에 차를 타고 올라가게 되었다. 간 때는 한여름이었지만 산 위에 올라가니 겨울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을 한 시간 동안이나 맞으면서 기다린 후에야 겨우 천지를 볼 수가 있었다. 정말 백두산 꼭대기에서 보는 천지는 장엄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지척에 바로 북한이 보여서, 그것도 너무 가깝게 보여서 가슴이 설레이기까지 했다. 지척이면 갈 수 있는 저곳이 바로 우리 동포의 땅이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다. 이념이 무엇이고, 이권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애닯도록 같은 민족이 서로를 그리워하고만 있어야 하는지! 과연 통일은 어느 시기에 올 것인지! 오오, 통재라!!

 

민세 안재홍 선생이 바로 지금의 한국꼴을 보신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지 상상도 안 간다.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민족과 국가를 이렇게나 두동강이 만들어놓다니~! 후손으로서 몸둘 바를 모를 뿐이다. 민세 안재홍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 때로, 지금의 상황보다 훨씬 나빴던 시기였다. 민족의 선각자로, 후세에 길이 남을 지식인으로 제 할 도리를 끝까지 다하셨던 그 분을 본다면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목숨 하나 아깝게 여기지 않았던 선조들을 보면 내 것만을 아둥바둥 챙기려는 내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사실 민세 안재홍 선생의 이름조차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나마 알고 있는 한국사도 겨우 고대사 정도인, 그것도 얄팍하게 알고 있는, 그야말로 역사의식이 결여된 인간으로서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전무하다시피하는데 일제강점기 때에 더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이 책의 출간이 참으로 반갑다. 내가 알지 못했던 위인 한 분을 알아가는 기쁨과 더불어 백두산을 그 당시에도 유람하며 기행문을 남겼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반가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올해 내겐 백두산을 한 번 가봤다는, 물론 안재홍 선생이 갔던 길을 가보진 못했지만, 영광스러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산도 아닌 백두산 등척기라 더욱 반가웠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궁금한 것이 생긴다. 명산이라고 중국에서도 자자한 백두산을 민세 안재홍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왜 오르셨을까.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 말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셨던 그 분께서 아무 이유 없이 오르시진 않으셨을텐데 말이다. 나라가 일본에게 먹히고 있는 와중에서, 기차로 북녘 땅을 이동했을 때 보았던 피폐하고 말라가는 동포들의 모습이 가슴에 한으로 남지는 않았을까. 내가 백두산 정상에 올라 안개 사이로 언뜻 천지 너머의 북한 땅을 보면서 그들의 어려움에 대해 가슴이 아팠던 것처럼. 이번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북한 접경 지대를 다 거쳐왔는데,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 보이던 그들의 모습은 정말 사그러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도 별로 안 보이고 건물이 제대로 서 있기를 하나, 딱 봐도 민둥산이 되어버린 그들의 땅은 정말 안타까울 뿐이었다. 경로는 다르지만 안재홍 선생도 원산을 지나시면서 그들의 안쓰러움을 보고 안타까워하셨다. 나라의 정기가 흐른다는 백두산을 등정하면서 피폐해진 동포들의 모습도 가슴 한 켠에 담아둔 그의 마음씀씀이가 눈물겨웠다. 

 

그랬기에 그의 백두산 등척기는 단지 생태 보고나 산기행기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고자 하는 기원을 담아 다녀오신 걸게다. 그랬기에 나중에 소실될 것을 알지도 못했던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현장 고증도 꼼꼼히 실어두었던 게지. 그 모든 것이 바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마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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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0-12-0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백두산을 가본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생각과 느낌들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2007년 여름에 백두산을 '종주'하고 왔는데, 그토록 멋지고 그토록 아름다운 우리 민족의 영산이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너무 가슴에 아려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종주를 한다고 해도 우리 땅으로는 한 발치도 밟지 못하고, 오히려 남의 나라 하늘과 땅을 거쳐 남의 나라가 된 반쪽으로만 돌아보고 되돌아와야 하는 처지가 참으로 속상했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통일이 되어 되찾은 우리 땅을 통해 당당히 백두산을 다시 오를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안다는 것의 기술
하타무라 요타로 지음, 황소연 옮김 / 가디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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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노랑 바탕에 까만 글자가 제목으로 적힌 이 책은, 딱 보기만 해도 읽고 싶어지게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제목만 봐도 급변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솔깃한 제목일 수밖에 없다. 작은 사이즈의 책이라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하고, 필자가 기계공학자 출신답게 군더더기 없는 설명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 도식까지 곁들어져 있어서 내용을 이해하기에도 부담 없는 책이다. 그러니 정보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이 때에 더할 나위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저 이 제목만 믿고 읽기만 하면 바로 앎의 기술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덤벼들어선 곤란하다. 진정한 앎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식으로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깨닫지 않고서 얻어진 지식을 가지고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무척 힘겨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도 잘 지어졌고 판형이나 디자인도 잘 나왔지만, 이 책을 진정으로 이해해서 앎의 기술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심사숙고하면서 기술의 무한 반복이 필요하다. 옛 말에도 있지 않은가. 공부엔 왕도가 없다고.

 

맞다. 공부엔 왕도가 없다. 암기식 학업을 무한 반복하고 있는 중고등학생들만 봐도 왕도란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요즘이 한창 기말고사 준비기간이다. 평소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아이들도 분위기상 참고서 한 장 정도는 들쳐 볼 때일 텐데,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앎의 기술은 스스로 깨치지 않으면 어렵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가르쳐봐도 잘 알아듣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알려줘도 전혀 생뚱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가 있으니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고 나름 생각을 정리해보기도 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기초 지식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나이의 학생들이라 할지라도 평소에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고 앎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학생들은 특별히 따로 과외나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어휘력이나 이해력면이 월등하게 좋다. 그러나 책과는 담을 쌓고 살고 게임에 조예가 깊거나 친구들과 돌아다니는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학생들은 아무래도 어휘력 부분이 현저하게 낮고, 말귀도 어둡다. 중학생이지만 이해력 수준은 초등학교 5학년에서 딱 멈춰있는 아이를 하나 보고 있는데, 정말 어떻게 하면 저 정도로 낮을 수 있을까 신기할 때가 많다.

 

필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암기식 위주의 학습 방법은 그다지 훌륭한 것은 못되지만,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능력을 쌓는데는 꼭 필요하다고. 새로운 지식을 하나 배우게 되더라도 그와 유사한 두뇌 템플릿(무엇인가를 만들 때 안내 역할을 하는 데 사용되는 형식 혹은 틀, 모형을 의미하는 필자가 만든 조어)을 가지고 있어야만 그가 쉽고 자세히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란다. 중고등학생들이 암기해야 할 지식의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알아야만 사회인이 될 수 있으니까. 중고등시절 때 배우는 모든 것은 어른들에게는 상식, 그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끔 아이들이 내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쉽게 암기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때가 있는데, 그것을 계기로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주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같은 내용을 암기해도 내가 아이들보다 훨씬 빨리 외울 수 있는 이유는 이미 배운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그 아이들보다 내가 배경지식이 훨씬 많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표현대로 이야기하자면, 두뇌 템플릿이 나는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갖춰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연상기법을 사용해도 여기저기 걸리는 요소들이 많으니 암기력 시합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암기식 학습 방법은 진정한 앎의 기술이라곤 할 수 없다. 한번 언급했다시피 지식을 쌓아가는 기술 중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일 뿐 절대 훌륭한 방법은 못 되니까 말이다. 그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사례가 필자에겐 너무나 많은데, 그가 가르쳤던 도쿄대학생들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단다. 소위 명문대 학생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유형의 문제를 만나면 순식간에 해결해버리지만 새로운 유형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유형을 과제 해결형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요즘 시대에는 과제 설정형 인간이 더 각광받기 때문에, 즉 이 시대는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찾아가는 사람이 필요하기에 진정한 앎을 알아가는 데 있어 상당히 어려움에 처할 수가 있다. 그러니 무엇이 문제인지를 스스로 찾아가며 생각하여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을 배양해야 할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대개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해야 할 것들이다. 그저 마음 먹고 한두 번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어려울 수 있겠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 몸이나 소지품의 길이를 이용해서 계단의 높이나 거리를 가늠하거나 상황을 유추해보는 연습, 생각을 링크하거나 역으로 생각해보는 연습 등이 그것이다. 기적의 연산법과 같은 단순 수 놀이도 계속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신이 숫자와 관련없는 직종에 종사하더라도 계속적으로 연마하고 단련해놓는다면 분명히 현상을 보고도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앎이라고 하는 기술은 단기간에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고 하지만 진정한 앎은 자신의 능력을 키워내는 것이기에 그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인스턴트가 판을 치고 꾸준함이 외면받는 시대이긴 하지만 자신을 만들어내는 데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근면과 성실!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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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고전 - 내 인생을 바꾸는 모멘텀 3분 고전 1
박재희 지음 / 작은씨앗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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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많이 하셔서 그런가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숙한 분이셨다. 표지에 등장하는 저 모습은. 그래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나운서인 줄로만 알고 있었더랬다. 허나 그분이 교수님이셨구나.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아마도 내게 고전은 그렇지 않을까. 어디선가 분명 들은 적이 있었던 내용이었는데, 그것의 출처와 연유를 확실하게 알지 못해서 제대로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바로 그런 상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고 어쭙잖은 지식으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해주는 그런 무식한 상태말이다. 항상 얕고 길게 알고 있었던 나로선 이 책을 보면서 많이 놀라웠다. 정말로 들어본 적 있는 내용이 많았기에, 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책에서 나온 이야기인 것을 알았기에 정말 놀랍게 여겨졌다. 그리고 내게 부족한 것은 그런 신실함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책 하나를 읽더라도 휘리릭 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진리를 탐구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파고들어야 함을 말이다. 시간이 부족하고 세상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는 이 때에, 왠 아날로그적인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삶이 바쁠수록 정말 중요한 것은 한 번 숨을 내쉬며 주위를 돌아보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에게 맞게 구성되어 있다. 나도 현대인인지라 그런 도움을 충분히 받았다. 하긴 제목부터가 딱 그렇지 않은가. ‘3분 고전’이란 제목이니 바쁘다고 외치는 현대인들이 스스럼없이 잡아들기에 손색이 없을 게다. 제대로 하는 것은 없지만 나름 현대인인 나도 현대인답게 일단 목차부터 훑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책을 읽을 때,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 과연 어떤 이야기로 나를 일깨워줄지 표지를 보며 설레이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데 이 책은 서문에서부터 그 설렘을 느꼈더랬다. 필자가 얼마나 설레이는 마음으로 라디오 방송의 원고를 준비했으며, 또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설레이게 했기에 결국 책으로까지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조근조근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목차를 보면 이미 알고 있었던 고상성어나 경구를 찾아볼 수 있어 반가웠고, 처음 들어보지만 왠지 끌리는 구절이나 구절은 익히 들어보았지만 그 의미를 미처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도 등장해주어 고마웠다. 이렇게 해서 3분 짜리의 고전으로 300분의 시간과 맞먹는 의미를 깨달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제일 마음이 쏠렸던 구절은 174페이지의 「절차탁마」란 고사성어였다. 이미 어디선가 들은 풍월이 있기에 이 말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긴 썼었는데, 이 구절의 정확한 뜻을 몰랐던 나로선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된 고마운 기회였다. 그게 바로 몇 주 전이다. 그 말을 쓰고 나서 이것의 뜻이 내가 사용하려고 했던 그 뜻이 맞는지 찜찜하게 여기고 있던 차였다. 알고 보니, 절차탁마는 중국의 옥을 가공하는 네 가지 기술에서 유래한 고사성어인데, 자르고 썰고 쪼고 가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무슨 일에든지 절차와 과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이 고사성어는 일단 내가 사용하려고 했던 그 뜻이 맞았다. 아니, 오히려 더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절차탁마하여 제 욕심과 욕구를 깨고 부셔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가고 싶다고 했을 때 썼던 말이었는데, 그런 어마어마한 뜻이 있었다니~! 이제 회심하고 나니까 어느 순간부터인지 내 안에 있는 욕망, 그리스도에게로 가지 못하게 하는 부정한 것, 악인의 꾀를 내고 싶다는 내 안의 충동을 제어하고 고삐를 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대로라면 나는 좋은 옥이 되기 위한 과정처럼 나를 자르고, 나를 썰고, 나를 쪼고, 나를 갈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입에서 그저 되는대로 나와서 내뱉었올 때와는 정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이렇게 정확하게 그 뜻을 알고 나니까 이전보다 훨씬 상황이 분명히 보이고 밝아지는 것 같다. 확실히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이다.

 

이 외에도 『손자병법』에서 나온 말이나 『장자』, 그리고 『노자(혹 도덕경)』에서 유래된 구절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많이 아는 단어보다는 필자에게 의미가 깊은 구절들 위주로 구성하셨다더니, 확실히 볼만 한 내용들이 많다. 항상 곁에 두고 가끔 여유를 찾고 싶을 때, 모르는 고사성어를 찾아볼 때 사용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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