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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닝 - 모든 것의 시작
야자와 사이언스 오피스 지음, 장석봉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진짜 재미난 책이다.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어 겨우 과학책인 줄 알았던 이 책은 표지는 절대 그래 보이지 않지만 과학책이 맞다. 표지를 보아하니 다양한 그림과 자그마한 영단어로 표시해놓고서 이것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미리 언질을 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아주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이 책의 주제인 줄 전혀 알지 못한다. 나만 해도 표지를 얼핏 보고 나서 이 책이 자기계발서인 줄 알았으니까. 솔직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비기닝』이란 제목이 과학책과 어울리나 묻고 싶다. 어쩌면 어울리는 듯도 싶지만, 이런 표지에 이런 제목은 조금 안타까울 따름이다.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 표지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았다면 바다출판사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지를 만들지 말았어야했다. 지금 막 떠오른 생각인데, 검정이나 어두운 파란 색으로 바탕을 깔고 거기에다가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것으로 신비하게 『비기닝』이란 제목을 박아 넣고(굳이 이 제목을 넣고 싶다면) 배경도 우주를 표현한다면 훨씬 이 책의 가치가 높아질 거라 확언할 수 있다. 『비기닝』이란 제목도 어떤 표지와 같이 나오느냐에 따라 그것이 자기계발서가 될 수도 있고, 과학서적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전체적인 책의 주제가 우주에 관련되어 있다. 우주가 언제 시작되었느냐, 행성이 언제 시작되었느냐, 인간이 혹은 생물이 언제 시작되었느냐에 대한 내용을 묶은 책이기 때문에 표지에다가 신비롭지만 미지의 세계인 우주를 형상화하는 것이 훨씬 사람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소장하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책이 있어도 그 책의 표지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마음 속으로만 좋아하기로 마음먹는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표지에 대해 열변을 토할 수 밖에 없다.
솔직히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감을 잡고 책을 읽길 원한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는 좋은 책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고 싶어 안달한다. 그래서 안타깝다. 처음에 표지만 보고 감을 잡지 못했던 것이, 그리고 표지가 영 어울리지 않아 다른 사람들의 간택을 못 받을까 우려되는 점이. 그러니 바다출판사 관계자님들은 부디 다음 판을 찍을 때는 내 의견을 적극 반영해주길 부탁드린다. 일본 소설 중 오기와라 히로시의 『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란 책도 그런 아름다운 밤하늘을 형상화한 것이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그것보다 더 환상적인 색감이 나오길 기대하지만...
이 책의 특이한 점은 한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 일본에 세워진 과학정보 연구자들의 모임에서 나온 책이라는 것이다. 일본을 포함한 여러 국적의 과학자들이 모여 30년 가까이 자연과학, 의학, 생물학, 대체에너지, 과학철학, 국제경제, 미래 문명 등에 대해 연구하고 학술교류 및 집필활동을 하는데 이 책도 그 중 하나란다. 역시나 처음에 저자 이름을 얼핏 봤을 때는 그냥 일본인 과학자이려니 하고 말았는데, 자세히 보니 ‘야자와 사이언스 오피스’라고 씌여 있어 독특하고 신기했다. 하긴 책의 내용을 보면 한 과학자가 연구할 수 있을 만큼의 분량은 아니긴 하니까. 무언가의 시초라는 것이 워낙 증명할 수 없는 내용이다 보니 방대하기도 어마어마하고, 모호하기도 마찬가지라 혼자서 책을 내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문에 보면 나가노 게이 교수와 네 명의 과학 저널리스트가 썼다는데 워낙에 복잡하고 난해한 내용이라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단다. 확실히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을 보면 그들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겠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무언가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주, 은하, 태양계, 시간, 생명, 종, 인류까지 총 일곱 가지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하나같이 만만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호기심은 잔뜩 불러일으키는 주제라 누구나 관심이 생길 만할 책이다. 게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삽화나 사진이 잔뜩 들어가있어서 이해하기에도 쉬우면서도 확실한 근거를 들어줘 내용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도록 해준다. 역시 과학서적에는 사진이 제일이다. 일단 2차원적인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4차원적인 내용은 그림으로 표현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런 노력에 힘입어 이 책은 아주 금방 읽어내려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주가 시작되는 것이나 은하가, 혹은 태양계가 시작되는 것을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아무리 많은 학설과 가설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끝내 시작의 과정을 밝혀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빅뱅이론으로 대표되는 우주의 시작설만 해도 사실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다. 어디까지나 물리학에서 등장할 수 있는 수학적인 계산식과 가설이 만나 이러쿵 저러쿵 말을 만들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렇다. 이러저러한 가설들을 쭈욱 나열한 다음 마지막에는 확실히 모른다고 마무리를 짓는 방식으로 서술되니, 나중에는 내가 왜 이것을 읽고 있나 멍한 생각까지 들었다. 인간인 이상 우주의 깊이와 근원은 알 수가 없고, 우리가 여러 가설을 세워도 누구 하나 확답을 지어줄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왜 과학자들은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면서 탐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은 사물의 기원과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 지성적인 생물이라고. 우리가 어떤 답을 얻게 될지, 혹은 과연 답을 얻을 수는 있을지조차 확답이 없는 상태에서라도 우리는 끝까지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존재라고. 그것이 우리가 인간인 이유이고, 다른 생명체와 차별되는 이유라고 말이다. 결론난 것은 하나도 없고, 내 머릿속에 남은 지식도 하나도 없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이 만들어지든 - 진화이든 창조이든 - 우리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큼 완벽한 환경이 조성되기란 어마어마하게 적은 확률이고, 그 중에서 우리는 어마어마하게 작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 인간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조금 보이는 것도 같다. 이렇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누구이든간에 한 번 준 생명을 절대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라는 것, 절대적으로 겸손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주는 광활하고 태양계도 어마어마한 규모이니 인간은 찍 소리조차 내지 말아야겠다는 것, 그것을 알았다. 내 환경, 내 처지를 불평만 하면서 살았던 과거의 나에서 조금은 벗어나 좀 더 큰 세상을 봐야겠다. 우주만큼 큰 세상을 말이다. 그러면 내 입에 붙어살았던 불평이란 놈이 어디론가 사라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