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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 - 한 시골교사의 희망을 읽어내는 불편한 진실
황주환 지음 / 생각의나무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이제 중학교에 들어간 딸 아이가 있다는 황주환 선생님은 시골교사로 10여 년을 지내오셨습니다. 지나온 10년이란 세월이 무상하게도 그 세월이 지나와야 겨우 무언가를 깨달으셨다고 합니다. 그 깨달은 바를 이렇게 탄탄한 내공이 쌓인 글로 풀어놓으셨는데,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과 교육정책 입안자들, 대학당국과 대통령과 이 땅의 모든 학부모들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합니다. 이 책을 읽고 바로 서평을 쓰는 것이 아니라서 황주환 선생님의 날카롭고 울림이 큰 직언을 대변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제 생각과 제 사상과 제 몸과 제 인생을 맴돌고 맴돌아서 나오는 한 말씀이기에 어쩌면 조용한 듯 하지만 더 큰 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황 선생님은 감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에는 교육 문제는 없다고 말이지요. 우리나라에는 교육이 아니라 입시문제만 항상 불거져 나오고 정책이 바뀌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설왕설래하기도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고도 불편한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말하길 꺼린다고도요. 그리고 감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결코 교육문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요.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이란 기득권자들의 수하를 만들어내는 공장에 다름이 아니기에 서민 즉, 피지배층의 생각까지 기득권자들의 논리로 무장시켜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언론에서는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교권이 상실되었다는 뉴스를 계속 내보내는데, 실은 그 조례가 있기 전부터 교권은 이미 상실되었고 학부모의 교사 드잡이는 항상 있어왔던 것이랍니다. 이전부터 있어왔던 교권 상실의 문제를 언론이 왜 문제를 삼느냐면 차후에 비정규직의 신분으로 기득권층의 노예가 될 대다수 청소년들의 생각을 짓누르기 위한 통제가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랍니다. 두발 통제, 교복 통제, 체벌로 인한 신체의 억압 등을 통해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내면화시키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머리 모양도 자유화되고, 신체에 어떤 것으로도 억압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조금씩 꿈틀거릴 때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학원 강사입니다. 황 선생님만큼은 안 되지만 꽤 오랫동안 해왔지요. 그런 제게 황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 한 구절이 제 가슴에 박혀 버렸습니다. 교실은 굴종과 억압의 장소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비싼 돈을 받고 아이들이 지도해야 하는 사설 교육업체의 일원으로써, 받은 만큼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저로서는 아이들에게 얼마간의 자유를 억압하게 됩니다. 효율과 성과라는 기치 아래 아이들은 학원의 규칙에 따라 조용히 해야 하고, 그날의 성과를 보여줘야 하며, 기준치에 미달일 경우 그에 합당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황 선생님과는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풍족함을 누리고 있는 아이들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물질의 부족함 때문에 방황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만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이들은 많습니다. 점심을 못 먹을 정도의 가난은 아니지만 소유의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져서 아이들끼리도 위화감을 많이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학원은 공교육이 아니기에 빈곤이나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가정이 깨어진 아이들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교육 문제의 근간에는 분배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황 선생님의 통찰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 바였습니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학업에 따라오려면 부지런히 노력해야 겨우 따라갈 아이를 보고 있으면 부모의 경제력을 가늠하게 되거든요. 그러니 시골은 얼마나 더 참담하겠습니까.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 논술을 잠깐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숱하게 들었던 말이 현상과 본질이었죠. 모든 현상에는 본질이 따로 숨겨져 있기에 겉에 있는 모습으로만 평가하지 말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함을 항상 강조하셨던 논술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황 선생님의 책을 보면서 그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지배계급의 은밀한 의도대로 세상이 - 영화가, 드라마가, 광고가, 문학이, 뉴스가, 신문이, 방송이, 관련 법규가, 지식인들의 언행이 - 움직이고 있는데 그 밑에서 자신에게 치명적인 것을 모른 채로 멍청하게 주입하고만 있는 피지배계급인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선행을 베푸는 소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나름 자위하며 결국 좋은 곳으로 변해갈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아무도 나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요. 아무도 자기보다 덜 가진 자를 위해 자기 소유를 기꺼이 내주지 않을 것을요. 안 보고 안 듣는다고 해서 그런 보기에 좋지 못한 일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우리의 모든 행위가 - 신문을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방송을 보는 모든 것이 - 전부 정치적이라는 것까지도요.
요즘 사람들은 노동자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 계급이라는 말도 불편해한다고도요. 하지만 싫어한다고, 불편하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기득권자들은 가진 것 없는 우리가 그런 말을 안 하길 바랄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테니까요. 독일 군인들이 유대인들을 인종청소할 때 그들은 ‘학살’이니, ‘제거’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대신 ‘경로 이동’, ‘최종결과’라는 일상적인 말을 쓰길 좋아했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불편한 양심의 가책을 모른 척 하기에 수월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을 반영하는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무한 경쟁’을 강요하지만 실상 ‘완전경쟁’이 가능하지 않는 사회적 모순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병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은 유대인 학살의 전범인 아이히만을 재판하는 모습을 담은 철학 사상책입니다. 거기서 중간관리자였던 아이히만이 하는 말이 참 걸작입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상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거든요. 그의 진술에 대해서 여러 심리학자들이 평가를 해본 결과, 그는 정신적으로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실로 자신을 무죄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사람을 대량 학살해놓고서도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요. 한나 아렌트는 말합니다. 진정한 악은 선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생각 없음’이라고 말이지요. 상관의 명령에 대해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 악까지 행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가난해서 점심을 거르는 상황에 놓여있지 않다고 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에 더 생각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이히만처럼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으니까요.
서북부 유럽에서는 육체노동자의 임금이 정신노동자의 임금과 같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머리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몸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먹고 싶을 때 통닭을 배달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더러운 곳을 청소해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물건을 보내고 싶을 때 운반해주는 기사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임금의 형평성과 모든 교육비의 무료화와 의료비의 무료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서북부 유럽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모든 사람이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들처럼 복지국가가 되기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상위 몇 %에 달하는 기득권자들은 복지국가가 어쩌면 공포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해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 밥그릇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요. 우리 아이들을 현실에 찌들지 않게 할 방법을요. 우리가 우리 소리를 낼 방법을요. 모든 현상은 분명 어떤 본질을 품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거저 주지는 않습니다. 과거 민주화 항쟁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했을 것입니다. 과거 전태일이 분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노동자들은 여전히 16시간씩 일하고도 풀빵 하나 사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고 거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치르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는 눈물로, 핏방울로 치렀던 것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용산 대참사에도, 거대한 괴물 삼성에도, 이 땅의 모든 사립학교에도, 비리의 온상인 교장선임제에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고 의심하며 봐야 할 것입니다. 황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알지 못했던 교사들의 일상이 보입니다. 교장선생님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리가 많이 생길 수 있는 것인지, 왜 교육청에서는 교장선생님을 뽑을 때 교사나 학부모가 선출하게 하지 않는 것인지, 사람을 대체 가능한 자원으로만 보는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도 알 수가 있습니다. 더불어 시골 교사로 10년째 살아온 황 선생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게 되셨는지 그에게 영향을 준 여러 권의 책도 알려주십니다. 한 번 뜬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습니다. 바보 같이 맹종하며 살았던 과거를 벗어버리고 이제는 평생 세상을 감시하며 이 세상을 조종하는 본질을 꿰뚫어내는 참된 시민으로 거듭나는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다 같이 동참합시다. 이 책은 한국시민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겠습니다. 별점은 백만 개를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