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선 과학 - 생생한 판례들로 본 살아 있는 정의와 진리의 모험
실라 재서너프 지음, 박상준 옮김 / 동아시아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만 지나면 새로운 과학 기술이 하나씩 생겨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변화가 심하다. 웬만한 과학 기술의 명칭을 알지 못하고서는 대화에도 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게 삶의 모든 요소에 과학적인 기술이 들어가는 요즘 시기에, 그 해석에 있어 논란이 되는 것도 무척이나 많을 수 밖에 없다. 사람이 사는 데는 분쟁이 따라오는 법. 우리가 분쟁을 조정하는데 활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도구인 재판을 통해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과학적 지식이라고 모든 것을 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어느 정도선까지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이면 안 되는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모호하게 해석된 과학 지식이야말로 사람 잡는 선무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유죄를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기에 항상 과학 지식은 판사나 검사, 그리고 미국의 경우 배심원들에게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전달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혹 이런 내용만 들으면 상당히 간단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떤 과학적 증거가 타당하다고 증명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히려 과학적인 지식에 완전히 반(反)하는 재판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 그 결과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찰리 채플린의 친자 양육비 지불 소송의 경우, 혈액성 상으로는 절대 친자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이지만 배심원들은 그에게 양육비를 보내라는 판결을 냈던 것을 보면 법정에서는 과학적 지식의 정당성만 가지고는 승소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배심원들의 인정과 공감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법정에서 채플린이 어떤 태도를 보였기에 정확한 과학적 지식에 반(反)하는 판정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법정에서의 일이 이렇게 되어간다면 우리는 과학을 법정에 세울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일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바로 쉴라 재너서프 박사이다. 그녀는 과학기술학과 비교정치학, 법과 사회연구, 정치와 법인류학, 정책분석을 아우르는 영역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25년 전부터 전혀 상관없을 것만 같은 법과 과학의 접점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정말 선견지명적인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현대사회에 과학의 영역이 점점 커질 것이란 예측을 어떻게 하셨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그녀의 내공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와 미국의 그것은 배심원제와 같이 형태나 비중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과학에 관련된 무수히 많이 축척된 미국의 판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법정이 과학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결정짓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판결은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건별로 그리고 피해가 생긴 뒤에야 소급해 다루듯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소송이란 방법을 밥 먹듯이 행사하는 미국의 판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담배를 펴서 폐암에 걸리더라도 담배회사를 고소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테지만, 미국의 국민들은 다르지 않은가. 어쩌면 이런 연구가 미국에서 먼저 만들어진 이유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법을 이용하고 법에 호소하는 자질을 가진 미국인들의 민족성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지금에는 상식으로 알고 있는 화학 살충제인 DDT의 위험성을 알게 된 것도 이런 법정 싸움 덕분이다. 효율이 뛰어나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DDT는 자연환경 속에서 남아 축척되는 가운데 갑각류, 연체동물, 어류의 생체 조직에 해를 끼치고 어류를 먹이로 하는 새들의 생식 주기도 망가뜨린다. 실험 결과, DDT는 인간에게 암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밝혀졌고 미국에서는 신속하게 DDT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농작물해충과 같이 한 생물체에게 유해한 것은 다른 생물체에게도 유해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하면서 독성 화학물질에 대해서 다시금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

 

또한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법정 싸움을 통해 그 논의되어야 할 항목이 점차적으로 넓혀질 수 있었다. 특히 정신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장애인이나 치매에 걸린 환자인 경우에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회생가능성이 미약하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병으로 식물인간이 된 20대 중반 여자가 있었다. 이 경우에 산소호흡기를 떼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그를 안락사시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상태에 대해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기회를 얻었고 기계를 떼어내면 죽을 것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살아있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더 논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육신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멀쩡한 경우에 죽기를 요구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여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많은 논란이 되었다. 판단조차 내리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걸리고, 정상적인 판단은 내리나 육신이 부자유스러운 경우에는 살인죄로 볼 여지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안락사에 대한 문제까지도 논의해볼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책은 각각의 판례를 살펴보면서 그 판결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금 정리해주는 친절을 발휘한다. 하지만 처음 이 책을 접할 때면 쉽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여러 명의 서문을 지나오고 개념이 정리된 제일 첫 장만 무사히 넘어가면 그 이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책 내용 자체가 미국의 판례를 든 것이라서 사건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내용 파악하는데 심각한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허나 미국의 사건을 잘 몰라도 책에 한 줄씩 설명되는 내용을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보다 분명하게 알고 싶다면 아무래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온다면, 특히 센세이션이 된 실제 사건들로 구성된 책이 나온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