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1881 함께 읽는 교양 10
마티아스 루 지음, 박아르마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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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축구에 빗대어 철학하기를 도입한 저자의 시선이 무척이나 새롭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축구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겠지만, 그들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인 듯 보인다. 그런 대상이 우리에게 몇몇 있지 않은가. 축구는 액면가로는 별 가치가 없지만 무궁무진한 잠재 가치를 가진 놀이이자 노동이자 유희일 수 있겠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던 책이라고 고백해야겠다. 철학하기보다는 철학을 보기가, 혹은 암기하기가 더 쉬웠던 주입식 교육의 최대의 수혜자인 나는 아마도 철학하기를 가르쳐준 이 책이 결코 쉬울 수가 없겠다. 그러나 중반을 향해 가니 이 책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떤 유머를 구사하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어서 그나마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얼마나 더디게 책장이 넘겨지는지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 붙들고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려운 책은 읽는데 오래 걸린다.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철학사를 소개하려는 것이 아닌 철학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진 책이다. 글의 구성은 전반전, 하프타임, 후반전, 연장전, 승부차기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 제18회 독일 월드컵 결승전을 그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전반전에는 인식 능력, 자유, 타인, 욕망, 노동, 의식과 주체 등의 주제로 철학하는 법을 알려준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 이것이 맞느냐고 한 번 꼬집어주면서 다시 생각해보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진행되는데 처음에는 엄청 헤메고 다녔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러다 하프타임 바로 직전에 등장한 노동 편에서부터 재미있게 사유할 수 있었던 계기를 얻었다. 그리고 나서 깨달은 것은, 사람은 자신이 공감할 수 있고 관심있어 하는 주제에 대해서만 반응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다. 알고 보니, 내가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이 책을 읽는데 큰 방해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하프타임에서는 언어를 다루고, 후반전에서는 예술, 진실, 시간에 대해서 사유해보는데 시간이라는 화두는 정말 궁금했던 차였다. 시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킨 다음에 구획을 나누어서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지 그런 체계가 없었더라도 항상 시간은 지나가고 그런 체계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고찰해보면서 나는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난 꼭 지각을 할 때면 시계바늘이 단 10분 전으로 가길 소망할 때가 많다. 그럴 때면 그렇게 시간이 거꾸로 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마는데 정말 이차원적인 생각을 한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할지라도 우리가 몇 시간 앞서서 이동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것이며 우리가 되돌리고 싶은 행동까지도 되돌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항상 쉽게만 생각해버리고 만다. 특히 영화를 조절하면서 보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나타나는 증상 중의 하나는 생방송을 보더라도 앞으로 당기거나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뭔가를 조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 스스로가 상당히 이상스러운데 우리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시간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쉽게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와 너무 가까워서 일어나는 일일 수 있겠다.

 

연장전에서는 정의와 법, 도덕과 의무를, 승부차기에서는 종교와 권력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축구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현상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라서 특별히 축구를 결부시켰다고 해서 대단히 이상스럽거나 특출난 것은 아니라 하겠다. 읽다 보면 알겠지만, 그저 나도 모르게 흘러가게 된다. 처음에는 축구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철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형식의 철학이 생소해서 어렵다고 느꼈는데 솔직히 철학하게 만드는 책으로는 으뜸인 듯 싶다. 우리가 유회의 대상으로 여기는 축구로도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 철학이란 존재는 우리의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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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서양고전 - 고전속에서 삶의 길을 찾다
김욱동 지음 / 작은씨앗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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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진짜 귀엽고 앙증맞게 생겼다. 표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양서가 가득히 들어있는 서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설렐 만큼 은근한 장서의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서 말한 누구란 물론 책이 한가득 있을 때 뿌듯한 기쁨을 느끼는 애서가에 한한 지칭일 테지만 책을 읽지는 않아도 모셔두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독특한 부류도 요즘 생겨나고 있는 듯 하여 그것도 포함하겠다. 보는 관점에 따라 나도 애서가로 분류될 수도, 책수집가로 분류될 수도 있어 하는 말이다. 표지가 코팅된 재질로 된 것이 아니라서 양장본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처럼 장맛비가 계속되는 시기에는 들고 다닐 수 없어 휴대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가을 같이 청명하고 맑은 날 벤치에 비스듬히 앉아 한 꼭지 한 꼭지를 읽어가는 여유를 누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여진다.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모셔온 지 꽤 되었는데도 빨리는 읽지 못했지만, 밤에 잠깐씩 읽을 때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상식과 비교하며 교양이 쌓여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시간 순으로 편집되어 있는 책이라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양 관용어구를 찬찬히 살필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했다던 신탁 경구인 “너 자신을 알라”라 같은 이야기를 기대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 경구는 없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유레카! 유레카!” 같이 아주 유명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그 유래와 상황에 따른 용례등을 찬찬히 짚어준다. 사실은 너무나 유명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대충 알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그것을 따로 찾아보기에는 시간이 없고, 그렇다고 누가 물어보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없는 상황에 필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어른들이 읽고 아이들에게 알려주기에 그만인 책이라고 하겠다. 어떤 학부모에게 아이들에게 전래동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아이 아빠가 그리스인여서 잘 때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들려준다고 말이다. 그리스분과 결혼하셨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쪽 동네는 그것이 옛날 이야기라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놀라웠다. 그리스 신화는 박식할 수 밖에 없는 아이에게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도 알려주라고 말하면서 상담을 마쳤는데 그 때의 놀라움은 내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임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의 여러 사람들은 다양한 학식과 상식을 쌓아가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하루라도 그냥 허투루 보내선 안 될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드는 것은 사람은 하루라도 배우지 않고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동양에서는 어르신들께 공경하라는 것이 근본 이념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양한 정치적 이익이 맞물려서 성리학이 조선의 근간이 되었지만 그 안에서도 배울 점은 많다. 최근에 대학생들이 청소부 어른들께 막 대하는 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는데 그것이 화제가 되는 것도 우리 의식 안에는 어른들께 공경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그 아이들에게 예의를 가르쳐준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한편으론 들었다. 아직 생각이 깊지 않은 시기에 부단히 경쟁에만 열을 올리도록 아이들을 가르쳐놓고, 말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나쁘다고, 그런 일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고 은연중에 가르쳐놓고 청소부 어른들을 공경하도록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모순적이다. 나라 자체에서 효도나 어른 공경에 대해 아무것도 한 일은 없는데 그런 것에 당연한 기대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조금 나이가 드니 어른들이 하신 말씀 중 틀린 것이 없다는 말이 와닿는다. 옛 성현들이 말이, 하다못해 속담을 봐도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있는가. 그러니 그런 고전에는 삶의 압축된 지혜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어떤 지혜를 물려주고 있을까 싶었다. 동양의 3분 고전은 이미 봤기에 그런 식의 고전을 상상하기도 했다. 논어나 장자와 같이 짧은 글이지만 은근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경구를 보면서 읊조렸던 기억이 있기에 이 책도 아마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아니였다. 오히려 서양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열쇠구멍 같은 역할이라고 해야 맞을까. 역사적 인물이 한 말을 통해 그 시대를 알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 그런 말을 쓸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내가 생각했던 종류의 고전은 아니였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서양의 진짜 고전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욕구는 내면에 남아 있기도 하다. 아쉽기도 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던 이 책은 청소년들, 제대로 옛말을 알고 싶은 분들, 서양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파악하고 싶은 분들에게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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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달력 - 마야 문명 최대의 수수께끼에 얽힌 진실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지음, 박병화 옮김 / 열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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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이 흉흉한 때에 음모론이나 종말론이 아니 생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2012년의 종말론이 화제가 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도 그런 기회를 포착해 종말에 대한 영화를 속속 내놓기도 하고 마야인들이 말했다는 종말에 대해서도 여러 책들이 우후죽순 쏟아져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모 프로그램에서는 마야의 달력과 과거 유명 예언가의 말 혹은 주가를 추정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예를 들어 2012년의 종말론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것도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종말이 일어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해버리거나 현재가 너무 힘들어서 빨리 종말이 되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라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솔직히 나도 종말이라는 화두가 생소한 것만은 아니여서 종말론을 들었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고, 종말이 오면 오는 거지 하는 나태하고도 안일한 생각을 했다. 내심 그것이 2012년 12월 21일이었으면 바라기도 했던 것이 그 당시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현세의 생이 그리 기쁘거나 즐겁지 않다면 자포자기해버리는 그런 막연한 심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럴 순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한 연유를 말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그것은 넘어가고 이 책, 그 모든 종말론의 시작이 된 마야의 달력을 말하고자 한다.

 

훌륭한 달력을 만들어낸 마야인들도 그렇겠지만, 세상에서는 잘 하는 분야와 못 하는 분야가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깔아두고 싶다. 나는 결단코 미국드라마 「넘버스」에 나오는 천재 수학 교수가 되지는 못할 것임을 안다. 몇 세기가 되었든 마야인들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도 역법 전문가들의 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처럼 말이다. 이는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책에 등장하는 마야의 대단한 달력 체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이 책은 다짜고짜 마야의 달력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력이 어떤 식으로 변천해서 현재에 이르렀는지와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달력의 종류부터 시작한다. 달력을 만들고 시간을 장악하는 것은 그 당시, 특히 로마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생각해왔다는 아주 특별한 관점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만 해도 달력을 다시 바꾸어서 기존의 달력에서 새로운 달력으로 옮기기 위해 10일을 버리고 시작한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7월 8일 오늘이 지나면 7월 19일이 오는 식으로 남는 날짜를 빼버려서 달력을 맞췄던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달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국가 권력의 속셈이 무엇인지 대충 알겠다.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달력이란 것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겨왔던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나는 이런 상황이 무척이나 놀랍다. 이슬람교도들은 전세계적으로 쓰는 그레고리우스력을 쓰기도 하지만, 특별한 종교적 행사를 위해 종교력도 같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종교력이 없는 나라나 민족들은 생소한 개념이지만,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마야인들도 달력이 종교력 촐킨과 태양력 하아브, 두 가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적인 교류를 하기 때문에 달력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교류가 그리 많이 두드러지지 않았을 것인데도 두 가지 달력을 사용한 것이 어찌보면 의아할 만한 일이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달력이 두 가지가 되는 이유는 태양을 근간으로 하는 달력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옛날 우리나라도 태양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음력, 즉 달을 기준으로 삼아 날짜를 계산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농경 사회에서는 태양보다는 달을 기준으로 삼았다. 임신 주기와 농경 주기는 태양보다는 달과 잘 부합되는 데다가 달은 모양도 변하기 때문에 관찰하기에 더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마야인의 종교력 촐킨에서 독특한 것은 1년이 260일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고대 달력을 봐도 260일이 1년인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마야인들이 생각했던 신성한 숫자 260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유추한 결과로는 임신주기가 유력하기도 하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없는 실정이다. 종교력 촐킨의 날짜는 1에서 13까지의 숫자와 20개로 된 날짜의 명칭을 조합해서 표시하는데, 날짜 명칭은 이믹스, 이크, 아크발, 칸, 치칸, 키미, 마니크, 라마트, 물루크, 오크, 추웬, 에브, 벤, 익스, 멘, 킵, 카반, 에츠납, 카와크, 아하우이다. 그리고 태양력 하아브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날짜가 똑같고 각 달은 20일 주기로 총 18개의 달이 있다. 18개의 달 이름은 포프, 우오, 시프, 소츠, 세크, 슐, 약스킨, 몰, 첸, 약스, 사크, 케흐, 마크, 칸킨, 무완, 팍스, 카얍, 쿰쿠인데, 총 360일에 태양력과 맞추기 위해 5일을 덧붙이는 식으로 진행한다. 

 

태양력 하아브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은 기원전 100년 전의 것이고, 종교력 촐킨의 흔적은 기원전 600년의 유물에 남아있다. 모든 달력이 있는 나라에서 천체의 주기가 달력과 맞아떨어지지 않아 무척이나 고심했다. 마야인들에게는 분수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산술적으로 주기가 맞는 날을 찾으려면 최소공배수를 알면 되지만 이것이 어려웠기 때문인데, 이것을 해소하려고 발전해왔던 것이 나중에는 수학의 발전과 특정 천제의 순환 주기나 천문 현상의 배경까지도 연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표지에 흐릿하게 드러나 있는 톱니바퀴 같이 생긴 것이 마야인들의 촐킨과 하아브의 조합 방식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야인들이 관측하다가 말았던 13.0.0.0.0일 즉, 2012년 12월 21일에 모든 것이 끝나냐는 것이다. 왜 그것까지밖에 적어놓지 않았는지가 더욱 궁금한데, 마야인들의 종교관으로 봤을 때 이는 종말의 날짜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물론 마야인들의 세계관에서는 신이 인간을 흙으로, 나무로 만들다가 실패해서 나중에 옥수수로 빚어냈다는 창조신화가 있어서 이번의 세상을 멸망시키고 다른 인간들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황당무계한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런 창조 신화가 또다시 다른 인간들을 증명하는 요소는 될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나 현세적인 마야인들이 종말하는 날짜를 적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숫자를 계산해보면 지금으로부터 2000년은 더 지나야 하는 날짜가 나온다. 그래서 마야인들의 계산법은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단다.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지만. 어쨌든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으로 보려고 했으나 많은 고고학 문서에서 헤매다가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책에서 정말로 아쉬운 것은 사진 한 장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단한 올메크 문화나 테오티우아칸이나 아즈텍 문화 이야기를 설명해줄 땐 생소한 문화 환경이기 때문에 흐릿한 흑백 사진 한 장이라도 등장할 수 알았다. 그러나!!! 전혀 없었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하나의 문화를 설명하는 책은 보다 보다 처음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족속들은 아즈텍이나 마야를 빼놓고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한가득인데, 지도를 그려서 위치를 표현해주고 이슬람이나 이집트의 달력도 그림으로 표현해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여하튼 읽기에 너무나 불편한 책이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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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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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을 한 폭씩 넘겨다보며 옛 생각에 잠겨보는 것만큼 여유를 즐기는 방법 중 가장 운치있는 방법은 드물 것이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다채롭진 않지만 은근한 맛을 지닌 옛 그림에 빠져보는 것도 바쁜 요즘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손철주 미술 컬럼니스트가 이번에는 우리 옛 그림을 들고 찾아왔다. 읽어보진 않았어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란 스테디셀러를 내신 분이다. 나도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그 책 제목에 무척이나 공감하며 읽었던 것으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다르다. 일단 우리 옛 그림에 대해서 조명했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별로 글밥이 없기에 그다지 읽는데 오래 걸리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붙은 부제가 「하루 한 점만 보아도, 하루 한 편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쉬지 않고 줄줄 읽어내려갈 책이 아니라 하루에 한 점, 한 편 정도만 읽고 온종일 그 정취를 음미해보라는 속내일 테니. 그 정도로 우리네 삶이 여유가 있고 운치가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번에도 저자의 바람을 무시하고 줄줄 읽어내려갔다. 다 읽고 드는 생각은 내가 알고 있는 그림이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그림이 많이 안 나왔다는 것이다. 이 시리즈로 계속 나와서 이 땅의 모든 우리 옛 그림이 다 조명되길 기대해보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허나 우리 눈에 익은 거장들의 그림도 많이 나왔으면 아쉬움이 있다. 일단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그림이 아니던가.

 

옛날 선비들은 시, 서, 화 모두 능했던 사람을 ‘삼절’이라 불렀다 하는데 내가 아는 삼절도 한 분 계신다. 비록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율곡의 어머니로 더 유명한 신사임당이 바로 그 분이시다. 여기에 등장하는 삼절도 꽤 알만 한 사람들이다. 「자화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린 강세황, 옹골찬 노인의 시원한 피서를 그린 「탁족」의 조영석, 「매미」에서 섬세하다 할 만큼 투명한 매미의 날개를 그려낸 정선,  「양귀비와 벌 나비」에서 요염한 양귀비꽃을 그려낸심사정, 병든 국화를 섬세하게 표현한 이인상, 쓸모 없는 것이 오래 간다는 진리를 알려준 지운영 그리고 삼절로 불린 것은 아니지만 시와 글과 그림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신 정조 대왕이 그들이다. 정조의 그림은 이번에 본 것이 처음이었으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그림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걸작으로 보였다. 짙은 먹과 옅은 먹으로 농담을 조절해서 줄기와 잎을 꽃과 구별해서 그린 국화는 더 이상의 극찬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세기의 수수께끼라 할 수 있는 정조 대왕의 능력이 더욱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대단한 의식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의 서찰이 발견되는 요즘에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모술수가 기가 막힌 지략가로 그 영향을 떨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국화를 그리는 품새를 보아하니, 그의 안에는 자연을 놓고 감사히 즐길 줄 아는 서정성도 같이 곁들여진 것 아닌가. 도대체 정조 대왕의 너름새는 어찌 다 알 수 있을지 요원할 따름이다.

 

수묵으로 된 그림이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원근감이나 색채의 인상에 따라 달라지는 기법을 활용할 수 없는 우리 그림에는 그 시대의 사상이나 기원이 되는 여러 요소들이 등장한다. 잉어를 그리면 등용문의 고사처럼 장원급제를 바라는 그림이 되고, 잉어 두 마리를 그리면 성적인 환희를 의미하고, 게가 갈대를 잡고 있는 그림은 과거 급제하여 임금을 알현한다는 의미이고, ‘어부지리’나 ‘자로부미’와 같이 고사성어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하니 오히려 색채가 없어진 대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기가 쉬울 지 모르겠다. 봉황을 그리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나 학이 소나무에 올라간 그림을 그리는 것은 동양인이 가진 사상을 그림으로 옮겨놓은 것이니, 그 당시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그림이기보다는 숨겨진 의미가 더 많은 그림일지도 모르겠다. 선비의 절개나 자신의 다짐을 그림으로 옮겨놓아도 누가 뭐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은둔하는 선비들에게는 그림 그리는 능력은 필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속 시원하게 제 뜻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림 뿐일 테니 말이다. 화려하게 치장된 서양화가 아무리 우리의 눈을 현혹시킨다 하더라도 그림 앞에서 마음이 편해지고 푸근해지는 것은 아마 우리 옛 그림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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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김보경 옮김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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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어린왕자』의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조종사라는 것은 그의 다른 소설 『야간비행』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왕자』처럼 아름답거나 서정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다 읽지는 못했고 그저 그가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이었고 후에는 비행기를 조종하다 실종되었다는 사실 정도로만 알게 된 것이 고작이었다. 꼭 『어린왕자』의 그것처럼 신비롭게만 느껴지는 결말이다. 실종되었다는 것은 죽었을 수도 있지만 아예 기억이 상실되어 다른 인간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왠지 『어린왕자』의 작가에 걸맞는 죽음인 듯 싶다. 그런데 앙투안이 『야간비행』이란 소설을 발표하고 세간의 좋은 평가를 얻었던 것과는 달리 동료들에게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가끔 『어린왕자』를 읽을 때면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 ‘어린왕자’의 말이나 행동이 정말 예사롭지 않기 때문인데, 그런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늘 궁금했다. 그런데 어머니께 전하는 편지를 보니 생텍쥐페리는 너무나 감성적이고 문학적인 소년이었고 남자였음이 드러난다. 그가 했던 말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했던 말들이 아주 적재적소에 잘 삽입되어 아름다운 문학을 완성해내는데, 특히 ‘길들인다’는 말의 의미가 확실히 와닿는다. 실제로 사하라 사막에서 근무했던 때에 사막여우 한 마리를 길들이려고 했는데 그가 워낙 사나워서 하루 종일 굉음만 지른다고 했던 장면이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작품을 완성해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마구 설렌다.

 

실제로 난 작가라고 하면 그저 집에서 들어앉아 글만 쓸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어릴 적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했으나 떨어지고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의 청강생이 되는 비운을 겪으면서 내적으로 더욱 성장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편지 중에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찍 돌아가셨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랬기에 그에게는 어머니가 전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편지의 전체적인 주제는 “엄마, 왜 편지해주지 않으세요?”이다. 학생일 때는 필요한 것이 많으니까 용돈이나 전신환을 요청하는 내용이 많지만 그 외에 집안의 지인들과 식사를 했던 이야기, 친구들과의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역시 엄마에게 의존하는 앙투안 본인이다. 엄마의 편지를 볼 수 있었다면 더 자세한 감정의 교류를 알 수 있겠지만, 일방적으로 앙투안의 편지만 보니까 엄마의 사랑을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는 그의 놀라운 표현력만이 인상에 남는다. 평소에 엄마에게 편지를 써 본적도, 써야 할 일도 없지만 - 이래서 문명의 이기는 장단점이 공존하는 듯 싶다 - 그처럼 매달리는 듯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면 엄마가 많이 기뻐하실 것 같기는 하다. 누군가 자신의 사랑을 필요로 해준다는 것 자체만으로 어딘가 모르게 가슴이 따스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편지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보면 마리 드 생텍쥐페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남편이 죽고 나서 대단한 교육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웠다는 말이 있었다. 고정적으로 꼭 해야 했던 것은 음악교육이고 그 외에는 특별한 규칙이나 제재없이 자유롭게 교육을 했다고 했는데, 그런 교육방식이 지금의 위대한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앙투안이 해군사관학교에서 떨어진 이유가 수학은 응시자 중 최고의 성적을 받았으나 문학과목에서 구술시험에 탈락했던 것이라고 하니까 현재 작가로 이름 날리고 있는 것을 시험 감독관이 알면 놀랄 일이겠다. 그러니까 시험에 꼭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의 청강생 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우연히 트라부르의 제2비행연대에 배속되어 지상근무원으로 근무할 기회를 얻었다. 그 이후에 조종훈련을 받아 나중에 모로코의 라바트에 있는 제37비행연대에 배속되어 학생조종사가 되는 시기를 거쳤으나 두개골이 골절되는 첫 비행기 사고 후 제대하여 공군에 들어가지 않고 대기업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 때는 약혼자 집안의 반대를 수용했던 것인데 평생 그를 비행기에서 떼어낼 수는 없었다. 나중에 죽을 때도 전쟁 중 조종하다가 실종되었으니... 그가 살아왔던 일생 중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그것과 결혼이었을 것이다. 그의 실종이 첫번 째였고, 미망인이었던 콘수엘로와의 결혼은 두번 째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개인적인 고민과 고독도 남편과 나누고자 하지 않는 그녀의 폐쇄성과 자유분방함이 앙투안을 힘들게 했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도 그것으로 고통받았으니 말이다. 어떤 어머니가 제 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며느리를 환영하겠는가. 어쩌면 그런 모습에서 앙투안이 끌렸겠지만.

 

이 편지로 보아 세계적인 작가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대상이 꼭 어머니가 아니여도 그런 존재가 하나쯤은 있는 것이 정석이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렇게 여러 사람들과 교류해야 그만큼 성장하고 풍부해질 수 있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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