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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평점 :
옛 그림을 한 폭씩 넘겨다보며 옛 생각에 잠겨보는 것만큼 여유를 즐기는 방법 중 가장 운치있는 방법은 드물 것이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다채롭진 않지만 은근한 맛을 지닌 옛 그림에 빠져보는 것도 바쁜 요즘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손철주 미술 컬럼니스트가 이번에는 우리 옛 그림을 들고 찾아왔다. 읽어보진 않았어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란 스테디셀러를 내신 분이다. 나도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그 책 제목에 무척이나 공감하며 읽었던 것으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다르다. 일단 우리 옛 그림에 대해서 조명했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별로 글밥이 없기에 그다지 읽는데 오래 걸리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붙은 부제가 「하루 한 점만 보아도, 하루 한 편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쉬지 않고 줄줄 읽어내려갈 책이 아니라 하루에 한 점, 한 편 정도만 읽고 온종일 그 정취를 음미해보라는 속내일 테니. 그 정도로 우리네 삶이 여유가 있고 운치가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번에도 저자의 바람을 무시하고 줄줄 읽어내려갔다. 다 읽고 드는 생각은 내가 알고 있는 그림이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그림이 많이 안 나왔다는 것이다. 이 시리즈로 계속 나와서 이 땅의 모든 우리 옛 그림이 다 조명되길 기대해보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허나 우리 눈에 익은 거장들의 그림도 많이 나왔으면 아쉬움이 있다. 일단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그림이 아니던가.
옛날 선비들은 시, 서, 화 모두 능했던 사람을 ‘삼절’이라 불렀다 하는데 내가 아는 삼절도 한 분 계신다. 비록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율곡의 어머니로 더 유명한 신사임당이 바로 그 분이시다. 여기에 등장하는 삼절도 꽤 알만 한 사람들이다. 「자화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린 강세황, 옹골찬 노인의 시원한 피서를 그린 「탁족」의 조영석, 「매미」에서 섬세하다 할 만큼 투명한 매미의 날개를 그려낸 정선, 「양귀비와 벌 나비」에서 요염한 양귀비꽃을 그려낸의 심사정, 병든 국화를 섬세하게 표현한 이인상, 쓸모 없는 것이 오래 간다는 진리를 알려준 지운영 그리고 삼절로 불린 것은 아니지만 시와 글과 그림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신 정조 대왕이 그들이다. 정조의 그림은 이번에 본 것이 처음이었으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그림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걸작으로 보였다. 짙은 먹과 옅은 먹으로 농담을 조절해서 줄기와 잎을 꽃과 구별해서 그린 국화는 더 이상의 극찬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세기의 수수께끼라 할 수 있는 정조 대왕의 능력이 더욱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대단한 의식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의 서찰이 발견되는 요즘에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모술수가 기가 막힌 지략가로 그 영향을 떨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국화를 그리는 품새를 보아하니, 그의 안에는 자연을 놓고 감사히 즐길 줄 아는 서정성도 같이 곁들여진 것 아닌가. 도대체 정조 대왕의 너름새는 어찌 다 알 수 있을지 요원할 따름이다.
수묵으로 된 그림이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원근감이나 색채의 인상에 따라 달라지는 기법을 활용할 수 없는 우리 그림에는 그 시대의 사상이나 기원이 되는 여러 요소들이 등장한다. 잉어를 그리면 등용문의 고사처럼 장원급제를 바라는 그림이 되고, 잉어 두 마리를 그리면 성적인 환희를 의미하고, 게가 갈대를 잡고 있는 그림은 과거 급제하여 임금을 알현한다는 의미이고, ‘어부지리’나 ‘자로부미’와 같이 고사성어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하니 오히려 색채가 없어진 대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기가 쉬울 지 모르겠다. 봉황을 그리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나 학이 소나무에 올라간 그림을 그리는 것은 동양인이 가진 사상을 그림으로 옮겨놓은 것이니, 그 당시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그림이기보다는 숨겨진 의미가 더 많은 그림일지도 모르겠다. 선비의 절개나 자신의 다짐을 그림으로 옮겨놓아도 누가 뭐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은둔하는 선비들에게는 그림 그리는 능력은 필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속 시원하게 제 뜻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림 뿐일 테니 말이다. 화려하게 치장된 서양화가 아무리 우리의 눈을 현혹시킨다 하더라도 그림 앞에서 마음이 편해지고 푸근해지는 것은 아마 우리 옛 그림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