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읽을 권리 - 작품이, 당신의 삶에 말을 걸다
한윤정 지음 / 어바웃어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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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의 가장 압권인 장면은 아무래도 서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가 책을 쓰게 이유나 독자에게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서문은 그 책의 인상을 결정짓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책에 대해서는 묵직하게 다가오는 서문이 내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 서문을 읽고 3일 정도 이 책을 안 봤으니까 얼마나 묵직하게 다가왔던 것인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은 작가의 산물이지만 전적으로 작가의 것만은 아니라는, 독자와 사회가 만나 재구성하여 다른 의미를 재생산하는 대화의 창구라는 누구나 알지만 확실히 알지는 못하는 이야기를 버무려 놓았다. 그런데 강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나같이 단순한 인간은 쉽게 이해하지도, 사용하지도 못할 미사여구를 모조리 모아다가 정리해주었기 때문이다. 딱히 시에 쓸 만한 미사여구는 아니지만 시와 같이 음미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쓸 수 없는 듯한 온갖 현학적이고 모던적인 이미지가 뛰어난 수식어들이 나를 좀 무섭게 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 글을 읽는 방법에는 사람의 수대로 다양하게 존재하고 다양한 관점을 읽을 수 있는데, 그 이유를 나타내는 문장, 즉 우리에게는 명작을 읽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란 말만큼은 가슴을 울렸다. 안 그랬으면 배우지도 못한 사람은 단행본 책 하나 읽지도 못하겠다는 자조 섞인 말이나 늘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중간 중간에도 이렇게 시 같지는 않지만 깊이 이미지를 창조해야 이해가 되는 어려운 문장들이 있지만 좀 읽다보면 그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물론 마음 먹고 읽기 시작해야 할 문제이지만, 충분히 도전할 만한 책이다. 명작과 영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평소에 저자가 곱씹으면서 음미했고 감동받았던 텍스트를 모아 한데 엮어놓은 것이라 책을 읽기 시작하거나 이렇게 소설 뒷 이야기를 더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면 대환영이다. 내 경우에는 책을 읽은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명작에 대한 배경지식이 상당히 없는 축에 속한 사람이라 이런 배경지식과 함께 그 명작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주는 책이 참 고맙다.

 

[명작, 또 다른 명작을 낳다], [명작, 텍스트와 이미지로 태어나다], [명작, 이념과 가치관에 고뇌하다] [명작, 시대와 역사를 건너다]의 총 네 파트로 나누어서 정리되어 명작에 접근하는 다양한 관점과 그 방법을 알려준다. 제목만 봐도 어렴풋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 파악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저자의 이력이 적힌 책날개를 분명히 봤지만 어떤 경험을 하면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신문사에서 몸을 담으면서 여러 권의 책을 냈던 것으로 볼 때 여러 습작이 그의 스승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문체나 은근히 풍겨오는 섬세함을 따라하고자 한다면 많은 좌절감을 느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런 명작들을 설명해주는 다른 책도 봤지만 이만큼의 섬세함과 어려움을 동시에 느껴본 적은 없었다고 자신한다. 그만큼 깊이가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부분은 가장 처음에 등장한 [명작, 또 다른 명작을 낳다]였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부분은 가장 처음에 등장한 [명작, 또 다른 명작을 낳다]였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을 만큼 만만치 않게 느껴졌던 것은 그 부분에 등장했던 소설과 영화는 거의 본 적이 없었던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와 정재은 감독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소녀들의 성장기를 담은 것으로 같이 묶어서 생각해보기도 하고, 마이클 커니햄의 소설 <디 아워스>의 동명영화 <디 아워스>와 버지니아 울프의 <댈리웨어 부인>을 통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책 덕분이다. 다양한 텍스트와 영상을 변주해 새로운 방법의 책 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정말로 축복 받은 기분이다. 이래서 우리에겐 명작을 읽을 권리가 있는 것인가 싶다. 다양한 책 읽기를 알려 준 이 책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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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2 : 사랑 편 -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하지만 늘 외롭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주고 싶은 시 90편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2
신현림 엮음 / 걷는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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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나이가 든 탓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시만큼 어려운 글은 없다 여겼는데...그런데 시가 땡기는 것은 아마도 짧은 글 속에 담긴 미학 때문이 아닐런지... 사람이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지만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몇 마디 안 되는 말 속에 담긴 것이 맞는 것 같다. 1편이 먼저 있다고 들었으나, 기회가 되지 못하여 2편을 먼저 보았다. 자고로 시라고 하는 분야는 곱씹고 또 곱씹어봐야 겨우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 은근한 맛에 좋아하지만 알고 있는 시도 별로 없고 딱히 어떤 시집을 사야 할지 몰라서 제대로 된 감상은 하지 못하고 있었던 차였다. 사실 은근한 맛이 매력인 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멍 하니 있을 만한 시간이 조금이라도 확보되어 있어야 하는데, 요즘에는 컴퓨터가 부팅되는 그 짧은 3분, 인터넷 화면이 바뀌는 그 3초를 참지 못하는 세상이 아닌가. 특히 난 잠시 잠깐의 여유, 잠깐의 멍하니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참아내지 못하는 고질병을 앓고 있어서 어쩌면 시와는 영영 멀어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왕 시를 감상하기로 한 것, 마음껏 해보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2편에 소개된 사랑 시들은 하나같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작품들이라서 재미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정말로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딸의 눈높이 맞춰진 작품들이라서 어렵지도 않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내용들로 채워졌다.

 

또한 사랑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배워서 알 수 있는 실천에 속한 영역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가장 인상 깊은 시는 오마르 워싱턴의 <나는 배웠다>라는 다소 긴 시이다. ‘나는 배웠다’로 시작되는 10연의 이 시는 마지막 연이 가장 압권이다. 나는 배웠다 /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을. 용서나 아픔, 시련과 같은 인생의 여러 쓴맛과 단맛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채워져 있는 이 시는 이 한 편만 찬찬히 음미해도 이 책 한 권을 다 감상했다고 해도 될 만큼 사랑에 관해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내가 정당한 일에 분노를 일으킨다고 해도 상대방을 모멸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친구가 울며 도와달라고 요청할 때는 제 삶이 힘들었어도 자신에게 그를 도와줄 힘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되는 인간의 강인함을 알 수 있다. 다소 길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책 선물을 할 때 적어주면 딱 좋을 그런 시다. 갑자기 화가 나고 억울해지더라도 이 시를 읽고 나면 조금은 겸손히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테니까 말이다.

 

또 다른 시가 생각난다. 이보다 더 먼저 등장하는 이 시의 제목은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인데 우리 나라 시인인 심순덕 씨가 쓰신 것이라 우리네 정서가 제목에서부터 풍겨져 나온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모든 일에서 희생을 해야 했던 과거 우리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찬가라고나 할까. 아프고 모질었던 우리네 인생에서 자식 입 속에 조금이라도 먹을 것을 넣어주기 위해서는 제 살을 깍아 먹는 일이라도 서슴지 않았던 우리 엄마를 보는 듯해 아려왔다. 더욱 가슴이 아팠던 것은 그런 희생하는 엄마의 모습만 봐왔던 우리가 엄마를 그렇게 하찮게 대우하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가장 고급스러운 음식과 옷과 소품들은 엄마께 먼저 챙겨야 한다는 그런 다짐, 그런 후회,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껴본다. 시란 가장 적은 수의 글자를 이용해서 가장 큰 울림을 준다는 말이 이해되는 그런 감동의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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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철학 창비청소년문고 2
탁석산 지음 / 창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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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고 뭉뚱그려 알고 있는 사람은 책을 몇 자 읽거나 들은 것이 많아 다양한 상식에 폭넓게 알고 있기만 하다면 충분히 있겠지만 실제로 철학은 무엇이고 어떻게 철학을 할 수 있는지까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특히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비전공자에게 철학적으로 사고하기나 철학이 무엇이냐고 말해보라고 한다면 과연 제대로 대답할 수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을 떠나서 나 자신만 해도 철학에 대한 책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읽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철학하는 방법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할 자신이 전혀 없다. 그것은 책을 읽을 때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에 중점을 두고 읽었지, 실제로 철학을 하게 될 거라는 가정을 하며 철학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굳이 생각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이 반갑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은 아니지만 철학에 문외한이거나 철학을 막연히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철학사상이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제목에도 나와있듯이, 전문철학자가 될 필요가 없이 자신만의 철학을 구축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그들이 비단 청소년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니. 그런 방법 중의 하나로 먼저 철학을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철학이 원체 형이상학적인 학문이기에 그냥 설명하거나 개념을 말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니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저자는 과학과 종교를 가지고 철학을 비교, 대조해주면서 면밀하게 살펴준다. 이제껏 읽은 몇 권의 철학책보다 이번에 읽은 200쪽이 채 안 되는 철학책에서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된 기분이 드니, 제대로 설명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과학과 철학은 세상을 통째로 이해하는 데서 공통점을 가진다. 다들 알고 있는 중력의 법칙만 가지고 설명하자면 뉴턴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원리를 밝히기 위해 연구를 하고 그로부터 중력의 법칙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는 물체가 땅으로 수직 낙하하게 되는 세상의 이치를 밝히기 위한 학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철학도 세상의 이치를 밝히기 위해 세상의 근본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진정한 세계는 이데아 세계이고, 우리가 사는 불완전한 세계는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보면 수긍은 되지만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의자의 본질이 이데아 세계에 있기에 현실 세계의 의자가 팔걸이가 있든지 없는지 소파처럼 푹신하든지 나무의자처럼 딱딱하든지 다 의자임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말은 맞지만 우리 세계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딱 이런 반응만 나오게 하는 것이 철학이지만, 역시나 철학도 과학처럼 세상의 이치를 찾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과학은 수식으로 이치를 표현하고 철학은 논리로 그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수식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서는 안 되고 마찬가지로 철학을 전공하고 싶으면 논리력이 어느 정도 갖춰져야 한다. 종교와 철학은 세상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종교는 신이 개입하여 인간에게 지침을 알려준다면 철학은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겠다고 하는 것이 다르다. 

 

이렇게 철학을 제대로 설명해주어 알기가 한결 쉬워졌다. 이렇게 알게 된 철학의 원리를 가지고 자기 수준에 맞는 철학적 고민을 한다면 유명 철학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자신만의 철학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명 철학자들도 각기 자신에게 맞는 고민을 해서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지 자신과 맞지 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제 눈높이에 맞는 고민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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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고함 - 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제작팀 지음 / 시루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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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10년은 1910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던 국권 침탈의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것을 기념하여 KBS에서는 앞으로의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할지 찾아가기 위해 일본과 한국의 과거 면면들을 조명해보는 아주 특별한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한국과 일본」이었고 그것을 다시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서기 600년대부터 거슬러가는 일본과의 인연은 참으로 끈질기게 우호와 반목을 반복하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며 안 끊어지고 이어져 내려왔다.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4대 공신으로 추대되는 신숙주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 바로 일본과의 화친을 끊지 말라는 말이었을 정도로 우리에겐 ‘왜놈’이라는 말로 하찮게 여길 대상이 아니였던 것이다. 명문을 내세우면서 교묘하게 일본과의 관계에서 실리를 취하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나라보다 발전이 늦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전부 토벌할 정도로 우리나라가 대군은 아니였던 까닭에 두 나라가 손을 잡고 공존을 유지함이 바람직한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대군을 가졌어도 그들을 모조리 몰살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서로의 이익을 챙겨주면 알콩달콩 잘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그 바람은 동아시아의 정세에 따라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101년 전 국권 침탈 문제와 정신대 할머니 문제도 아직 해결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애먼 독도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말도 안 되는 역사를 교과서를 실는 등 적반하장의 입장을 내세우는 일본이 솔직히 얄미울 수 밖에 없다. 본전을 찾자고 저번 쓰나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역사 왜곡을 자행한다면 그 때 기부한 돈을 도로 찾아오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으로 본다면 그들이 우리를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이는 우리가 원한 일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론 우리의 국력이 약해서 벌어진 일이기에 비난해도 솔직히 할 말은 없다. 몽골에서 원나라를 세웠을 때 고려와 왜를 다 정벌하고자 했던 그들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먼저 고려를 쳤다. 바로 병자호란... 아예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가며 고려 왕조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린 일이지만, 내 짧은 소견으로는 생사가 걸린 문제에서 위신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원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제국으로 삼고 그 군사력을 감당해낼 나라가 없었던 제국이 아니였던가. 그들은 언제 자신들을 추격해오는 적들을 대비하기 위해서 지나온 나라들은 모조리 불태우고 끔찍한 학살을 일삼을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적에게 공포심을 주어 대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이 행한 일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런 그들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일본을 칠 때 군사를 제공한 것이 일본에게는 크나큰 두려움의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삼국 시대만 해도 백제와 신라 유민들이 건너가서 불교와 한자 등의 기술을 가르쳐주고 그럭저럭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갔다면 고려 때는 침략군의 이미지로 일본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그 공포가 아직까지도 내면화되어 있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우 두려운 존재’를 가리키는 말을 ‘무쿠리고쿠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무쿠리’는 몽골군이고 ‘고쿠리’는 고려군을 말하는 것이니, 그들의 공포가 가히 상상이 된다. 그러니 그 이후에 조선 때까지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기본적으로 척박한 땅에서 양식을 구하지 못했던 것이 그 이유였겠지만 그들에게는 고려이든 조선이든 한반도는 적이라고 여겼던 것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등공신 신숙주의 유언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필요한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대가로 왜구를 소탕하도록 오우치 영주에게 일임했다. 그 때부터 제포, 염포, 부산포의 세 포구가 개항이 되고 일본인들이 와서 무역을 하거나 장사를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일본인 마을이 생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평화의 시간은 짧았다. 목면을 주는 대가로 구리를 받아들이며 무역을 했던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일본의 정세가 급변하는 탓에 큰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일단 서양에서 받아들인 조총을 연구 개발 및 생산까지 성공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세력이 당시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다케다 가쓰요리의 기마군을 쓰러뜨리고 세력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통일을 하고 나서 한반도를 넘겨보게 된 것이다.

 

막부 시기에 내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로 눈을 돌렸던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임진왜란이었다. 혼란한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 연구했던 조총 실력이 더욱 성장해 외부 침략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조선에서는 조총을 일본을 통해 입수했음에도 크게 생산하지 못했던 것도 큰 문제였다. 성리학이라는 기본 이념이 우주의 본질을 찾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보니, 급변하는 이웃 나라 일본의 정세에 무심했던 것이 큰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도 미국과의 수교를 굴욕적으로 했던 일본이 그들에게 빼앗긴 것을 조선에게 빼앗자는 양육강식의 논리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그 이후는 대다수가 아는 그대로이다. 이런 불평등조약 아래에는 미국과의 강제적인 조약 후 갈고 닦은 선진 기술이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조선에서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이상한 선박이 있으면 모조리 때려부쉈지만, 일본은 이왕 수교하게 된 것 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각 지방 영주들이 학교도 설립하고 병원도 설립하기 시작했다. 그 차이가 지금의 한국과 일본을 만든 것이다. 과거에서 유추해보면, 지금 일본이 이렇게 가만히 있는 한국을 건드리는 것은 자국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업률은 올라가고, 출산율은 내려가고, 최악의 불황을 맞고 있고, 원전은 터졌고, 공교육은 썩었고, 자살률이 최대에, 이지메도 한창이다. 어디서 그들이 희망을 찾겠는가. 아마도 과거를 돌아보아 예전에 했던 대로 우리를 건드리면 되겠지 했나 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자국의 현실이 끔찍해서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는 그네들의 행태에 속만 태우고 앉아 있을 것인가. 아마 여기서 우리가 현명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100년간의 밝은 미래는 보장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신숙주의 유언대로 그네들의 필요를 채워줘야 하는 것이 맞겠다. 우리의 뛰어난 문화로 그네들의 병적인 퇴폐문화를 치유하려면 우리들의 나가요 문화나 술 문화는 좀 고쳐야 하지 않을련지. 너무 얄미워하지도 말고 너무 좋아도 하지 말고 공존과 화합을 키워드로 우리는 우리의 행보를 거듭해야 할 것이다. 좋은 라이벌이 있어야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들이 더욱 큰 성장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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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언어 이야기
파스칼 피크 외 3인 지음, 조민영 옮김 / 알마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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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인류학자인 파스칼 피크, 언어학자인 로랑 사가, 소아과 의사인 기슬렌 드엔이 저널리스트인 세실 레스티엔과 언어에 전방위적인 것에 대해 인터뷰한 과정을 적은 것을 묶은 책이다. 이 책은 인간만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비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 고른 책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내 모든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 1부, 언어의 기원을 찾아서> 편은 안 읽느니만 못했다. 최근 언어학자들만 연구했을 때는 풀지 못했던 많은 언어에 관한 많은 비밀들이 고고인류학자, 신경과학자, 심리학자, 유전학자 등의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통합적으로 연구하여 풀어내고 있는데 이 중에서 고고인류학자들의 도움이 많이 컸다. 구석기 때 인류들이 수렵 생활을 통해 다양화 했던 많은 언어들이 신석기 때 농경 ·정착 생활을 하면서 대다수 사라졌다는 가설은 상당히 의아하고도 생소한 의견이었다. 보통 생각할 때는 수렵 · 이동 생활다 농경 ·정착 생활이 훨씬 발전된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와 상반된 의견이 등장하니 내가 따라잡지 못했다. 그 의견 대한 저널리스트 세실의 의아한 반응에서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을 때는 그 의견을 뒷받침할 근거가 충분히 제시되지 못한 것 같아서 더욱 이해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1부, 언어의 기원을 찾아서>란 여정은 머리만 복잡하고 분량만 방대하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던 부분이다. 언어의 기원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아니 언어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는데 있어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만약 고고학적인 지식이 충분히 있거나 그 부분에 대해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꽤 흥미로울 수도 있다. 인류의 조상이‘루시’라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닌 현재까진 가장 오래된 화석으로 밝혀진 오로린이나 투마이란 새로운 인류가 새로 등장한다. 케냐에서 발견된 오로린은 두개골은 없고 그저 골격만 남아 있어 직립 보행에 유리했을 것이란 정황증거만 있는데 이가 우리 인류의 조상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를 모르겠다. 어쨌든 남자 화석 오로린과 같은 시대인으로 차드에서 발견된 투마이를을 살펴 보면, 두개골이 온전해 얼굴 길이가 짧고 작은 송곳니들이 매우 현대적인 것으로 보아, 이들이 영장류에 가깝다고 여겨진 듯 하다. 이런 직립 보행과 송곳니라는 증거는 친척 관계의 남자들과 여러 명의 여자로 구성된 집단으로 생활했음을 보여주는데 이런 집단 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 언어로 추측되기에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추론, 가정, 추측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난 중고등학교 때 엄청난 세뇌 교육의 일환으로 입안을 맴도게 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란 단어만 봐도 머리가 아프다. 과거 어느 순간엔 고고학에 가슴이 뛰고 울퉁불퉁한 무언가를 연상케 하는 이 단어를 읊조리고 있으면 뭔가 대단한 것을 알아낸 양 어깨를 으쓱거린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화석 어쩌구 하는 것이 참 부질없게 느껴지기에 이 부분은 내겐 최악이었다. 아마도 <3부, 아기가 어떻게 말을 배울까?> 만 있었다면 좀 더 나았을까 싶다.

 

어쨌든 여러 화석과 그로부터 야기된 추론들로 가득한 <1부, 언어의 기원을 찾아서>가 끝나면 이젠 <2부, 언어에 관한 전설>로 들어가게 된다. 이 또한 상당히 흥미로운 가설과 전설로 인식한 것으로 채워져있다. 바로 언어의 분화에 대한 것인데, 성경의 바벨론 이야기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바벨론 이야기에 근거해서 하나의 공통된 모어가 있었을 것으로 가정해서 여러 언어들을 어떤 기준에 근거해서 묶는 작업을 나열해두었는데 그것이 상당히 난해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임을 알 수 있었다. 언어를 하나의 어족으로 분류할 때는 각기 언어들의 유사성을 기준으로 하는데 공통조어에서 유래했는가, 상호 차용했는가, 단순한 우연인가를 두고 나눈다. 여기에서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리는데 언어가 변할 때는 질서있게 변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언어가 마구잡이로 변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은 어떤 발음을 내기 위해서는 같은 기관, 같은 근육, 같은 골격, 같은 신경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라면 동일한 생리적, 기계적 제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변이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란 것이다. 사라진 언어의 발음도, 문법도 모른 상태에서 재구성해내는 것이 얼토당토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언어에는 모두 규칙이 있기에 그런 방법도 다 개발되어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구성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한히 제공되는 시간과 노력 뿐이다. 그만큼 지지부진한 연구이다.

 

그래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3부, 아기아 어떻게 말을 배울까?>이다. 영어를 배워야 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염원인 한국인에게 솔깃할 수도 있는 부분이나 그런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모국어를 습득하는 능력이 비상한 신생아를 연구하면서 충분히 언어나 우리의 언어능력에 대한 속성을 알 수 있어 재미있다. 생후 4개월 밖에 안 되는 아기가 모국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나 엄마와 낯선 여자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좀 더 흥미롭지 않나. 그래서 이 마지막 부분의 분량이 적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모국어와 제 2의 외국어가 주관하는 뇌의 영역은 다르지만 두 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들의 뇌의 영역은 한 곳이란 점도 놀랍고, 모국어를 8살까지 사용했어도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주해 모국어를 접하지 않으면 제 2의 외국어가 완전히 모국어를 대체해 모국어로 그 외국어를 쓰는 사람과 뇌에서 사용하는 영역이 같다는 사실로 놀라울 뿐이다. 어린 시기에 외국어를 접하지 않으면 원어민처럼 쓰긴 어렵지만 아예 한 번도 모국어를 쓰지 않아 완전히 소멸되면 아예 모국어가 되니 우리의 뇌는 정말 놀라울 뿐이다. 기회가 되면 이 부분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지만 분량이 너무 짧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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