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읊다, 서사시 대백제 1881 함께 읽는 교양 13
강수 지음, 오순제 감수.해제 / 함께읽는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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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는 학창시절에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장르의 문학인데, 이렇게 백제 역사를 통해 서사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반가울 따름이다. 어째서 우리는 학교를 다닐 때 서사시를 배워본 적이 없을까. 지금 바뀐 국어 교과 과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제 새삼스레 서사시 장르가 교과 과정에 들어갔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세계적인 서사시로 손꼽히는 「오디세이」같은 서양의 작품만 서사시의 전형적인 표본이라고 배우기만 하는 것이 상당히 안타깝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은 솔직히 우리 고유의 문화를 발굴하고 현대까지도 즐기고 향유하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든다. 단지 학교에서 배우는 '우리 문화의 맛과 멋'이라고 쓰인 단원명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에서 그런 우리 문화의 맛과 멋이 살아숨쉬었으면 좋겠다. 또한 정부에서도 그런 문화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뒷받침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꼭 개량 한복을 입어야 한다거나 창소리만 즐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저 청바지와 같이 우리 날염 기술로 만든 티셔츠도 입고, 김치와 같이 피자를 먹는 등의 개방성을 가지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숨겨진 문화가 많이 발굴되고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강수가 지은 『역사를 읊다, 서사시 대백제』는 참으로 의미가 깊다. 나는 한 번도 읽어본 적 없고, 즐겨본 적이 없는 서사시에 대해 강수 시인이 본격적으로 접근한 것은 2002년 무렵 결성한 〈서사시 연구회〉의 모습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현대시가 앞으로 가야할 길과 많은 사람들이 같이 즐길 수 있는 장르를 생각해봤을 때 '리듬이 있는 이야기'인 '서사시'라는 장르가 떠올랐고, 우리에게는 서사시로 바꾸어 표현될 수 있는 수많은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역사와 서사시를 결합한 장르인 '펙트 포엠'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2008년에 〈문학과 창작〉에서 「서사시 흑치상지」로 '바움작품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숱한 노력은 타 장르와의 융합을 시도하게 해서 '포토포엠'이나 '오페라 리브레토' 등으로도 성과를 냈다. 이런 다양한 시도 끝에 우리는 대백제의 역사를 서사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한 권의 역사서사시는 백제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온조왕, 근초고왕, 의자왕, 흑치상지의 네 명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나라보다 드러난 사료가 휠씬 적은 백제라 숨겨진 역사를 많이 이야기로 채워넣어야 했지만 대백제의 면면을 아는 데는 그리 무리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역사적인 상상력을 동원했기에 딱딱한 역사만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서사시'라는 낯선 장르라고 해서 외면했다면 이렇게 재미나고 웅장한 대백제의 이야기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안고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앞 부분에는 20페이지 가량 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이자 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이신 오순제 소장님의 해제가 삽입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를 참고해서 서사시를 읽으면 대백제의 역사가 한 눈에 그려지는 듯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해제 부분에 요동 반도를 중심으로 설명한 부분(p. 25)에서 지도가 한 바닥 크게 삽입되어 있었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뻔 했다. 물론 그 뒤에 29페이지에 지도가 하나 나오긴 하지만 그 지도를 보고 다시 앞으로 넘기기는 조금 힘들기에 다소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있다. 


이 책에서 인상에 남는 부분은 온조왕 부분이었다. 흑치상지는 아예 몰랐던 인물이고, 삼천궁녀로 표현되는 향락에 빠졌다고 생각해온 의자왕이 원래는 자주성이 강했던 왕이었으나 의붓어머니의 세력과 아내의 세력을 이기지 못해 제 뜻을 펼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신선하기는 했지만 그 스스로가 주색에 빠진 것은 맞으니까 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고, 근초고왕은 워낙에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이라 알고 있는 것이 많았는데, 온조왕은 백제의 시조인데다가 그 부분은 좀 다르게 알고 있었던 것이 있어서 새로웠다. 형인 비류왕과 아우인 온조가 나뉘어서 나라의 터를 잡았는데 비류가 세운 나라의 터가 험하고 백성들이 살기에 좋지 못해서 온조 곁으로 와서 스스로 자결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좀 더 현실성있게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비류 백제지역에서 다른 나라에 의해 쫓겨왔고, 미리 소서노가 보내 자리를 잡으라고 했던 온조 백제지역으로 왔다가 자객에 의해 소서노와 비류는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멋졌다. 자리를 잘못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자결했다는 멍청이 왕 이야기보다야 훨씬 신빙성 있고 개연성이 있지 않은가.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라는 말도 있지만, 둘째인 온조가 왕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백성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체면보다는 사랑으로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것이 백성들의 신임을 받았다는 설명에서는 만나보고 싶었을 정도로 멋진 사람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유리왕을 피해 백제를 건국할 때부터 이들을 신임해서 따라온 유민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 아닌가 싶다. 살던 터전을 버리고 새로 경작해서 나라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럴 수 있었는지, 여기에 소서노의 명망과 온조의 인망을 유추해볼 수가 있겠다. 그런 지도자였으니 700년 간이나 지속된 백제라는 나라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일테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한 근고초왕만 해도 그런 인품과 명망으로 백성들을 지도했고, 그런 사랑에 보답해서 백성들도 그를 신임했다. 진정한 권력은 백성들을 지키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실천한 멋진 조상들이 있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백제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고대 역사는 그저 역사적 사실만으로 구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문학적인 장르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훨씬 사실에 가까울 것임에 의심치 않는다. 그들도 피가 흐르고 살이 따뜻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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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에게 복음 전하기 - 성경을 기초로 하는 무슬림 전도 핸드북
존 길크리스트 지음, 김대옥.전병희 옮김 / 대장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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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라고는 그다지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 책을 선뜻 고르게 된 것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부터가 복음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개종하기 힘들다는 무슬림에게 복음을 제대로 증거할 수 있다면 그는 제대로 복음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요즘에는 유대인들이나 무슬림들이 도대체 어떤 존재들인지 관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꾸란은 읽어본 적도 없고, 유대인들이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해서 그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우선 겁부터 먼저 집어먹기 마련이라서 이번 기회에 무슬림들은 무엇을 믿고 있고,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 책이 바로 딱이었다. 다른 어떤 세상적인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성경을 기초로 하는 무슬림 전도 방법이었기에, 급진적인 무슬림이 아니라면, 무슬림 중 누구라도 그들이 알고 있는 꾸란과 우리의 성경을 비교해가면서 예수님이 단지 인간 중의 하나인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이해하게 될 것임을 믿는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어짐을 말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꾸란의 많은 부분이 성경에 기초해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에게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불리는 무함마드가 유대교나 기독교의 성경인 구약성경을 가지고 짜깁기한 것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 부분은 넘어가고 우선 무슬림들이 예수님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먼저 살펴 봐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니까!!


무슬림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부정하는데,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에게 삼위일체 중의 한 분으로서 예수님을 믿지 말라고 하고, 두 번째 알라는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므로 예수님은 또 다른 하나님일 수 없다고 하고, 마지막으로, 알라의 영광은 너무 커서 그가 아들을 가질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의 유일무이함, 특별성을 인정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일단 동정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던 것, 즉 탄생부터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었다는 것과, 예수님께 '메시아'라는 칭호를 붙여주는데 이는 총 11번이나 사용되지만, 다른 선지자들에게는 이런 칭호를 쓴 적이 없다는 것,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는 것 등이다. 이제껏 나타나 이 땅에서 죽었던 다른 선지자들은 한 번도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난 적이 없다는 것을 놓고 볼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도 아닌 존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나타날 일이 없지 않은가. 


또한 '메시아'라는 용어도 붙인 이유가 특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연히 예수님께 '메시아'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이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꾸란에도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슬림들도 재림을 믿는데, 이 때의 재림은 우리와 같이 이 땅에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해서 하늘로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시는 심판주가 아니라 그저 2천 년 동안 하늘에서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가 온 세상의 통치자로서 돌아올 것이며, 그리고는 모든 다른 살아있는 존재처럼 그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목적이 전 세계가 이슬람을 따르도록 이끌기 위해서고, 40년이 지나면 죽어서 메디나에서 무함마드 옆의 무덤에서 장사될 것이라고 본다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부활하셔서 올라가신 것도 아니고 그저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2천 년 동안 그 영광스러운 하늘에 계셨다가 이 땅에서 딱 40년만 있기 위해서 내려오신다는 것이 참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다. 특별히 선택하셔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땅으로 보냄을 받았다면 무언가 중요한 임무를 띠고 왔다는 것일 텐데, 그것이 온 인류의 죄악을 구속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정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일개 선지자라고 짜맞추다 보니까 그렇게 무리한 설정을 밀고 나갔지만 그들 스스로도 그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알라와 하나님이 다른 점은 하나가 있는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알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깨끗케 하신 일에서 증명된다. 그러나 알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내라고만 했고, 무슬림들이 예수님의 신성과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로, 그들의 알라는 하나님처럼 사랑을 베풀어주지는 않는 존재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에 대해 무슬림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은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잊지 않게 일러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감동적인 부분이 많이 등장하는데, 꼭 다들 봤으면 좋겠다. 2장에 하와와 예수님을 비교한 내용이 나오는데 하와가 어떤 시험에서 넘어졌고, 예수님은 어떤 시험에서 승리하셨는지를 면면히 비교해보니, 놀라울 만한 구조가 숨겨져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을 다 보고 나면 이 책에 대해 탄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잘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을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도 참 좋았던 부분이었다. 성경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순수한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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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세계경제원론 04 : 세계화의 두 얼굴 내인생의책 청소년을 위한 세계경제원론 4
데이비드 앤드류스 지음, 김시래.유영채 옮김, 이지만 감수 / 내인생의책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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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세계경제원론> 시리즈는 이번에 나온 [04 세계화의 두 얼굴]이 마지막 권인데, 요즘의 화두가 되는 '세계화'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다. 경제라는 학문은 점차적으로 예측하기도, 방향을 찾으러 가기도 힘들어지고 있는 양상이라서 어쩌면 이런 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계속적인 팽창을 기본으로 해서 발전하는 자본주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가 당면한 경제 상황은 결코 좋아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기는 한다. 그런 입장을 기본으로 한다면, 아마도 '세계화'는 '부익부 빈인빈'을 추구해온 자본주의의 기본 골자가 아닐까 싶은데, 그런 모든 부정적인 예측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해야 할 것이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지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배우고 익히게 해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금전감각을 익혀서 한탕주의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과 같이 허망한 것이 없음도 제대로 깨우치게 한다면 앞으로 어른이 되어도 돈에 대해 잘못 매여서 인생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주 유용하다. 중고등학생이나 초등학생에게 경제적인 상식이나 용어를 쉽게 일러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경제활동을 해왔고, 현재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사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본주의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자본주의를 지키며 살고 있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자본주의의 병폐는 돈에 관한한 인간은 욕심을 절제하지 못한다는 것일 것이다. 있는 사람이 더한다는 말을 하듯이, 가진 자들이 더 많은 재산을 가지려고, 혹은 그 많은 돈으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계속적으로 가난한 자를 착취하게 되는 속성은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은 손'의 원리를 주창할 때,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기만 하면 제대로 모든 것이 굴러갈 줄만 알았던 것은 그 당시에 많은 것이 개발되지 않았던 시기, 즉 자본주의라는 괴물 같은 사조가 이제 막 태동하던 시기에나 가능했던 것이었고, 그 이후에 어느 정도 발전이 되다 보니까 인간은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는 본성이 악한 인간에게서라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먹을 것으로 장난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적발되고 있고, 가짜 가방이나 돈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것이나, 마약류도 개발해서 팔고, 무기도 밀거래를 하는 것, 등 쳐서 배불리는 것 등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다른 어떤 인간이라도 죽어 없어지거나 재산이 날아가고 병이 들어도 상관 없다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이 책에 나오는 세계화도 바로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화를 하면 분명 좋은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좋은 점의 실상을 들여다 보면, 선진국이라고 하는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설 만큼 잘 사는 나라에서나, 혹은 같은 나라에서도 돈이 많거나 지식이 많은 우선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층인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고, 그 외에는 '세계화'란 재앙에 가까운 일뿐이다. 부모 잘 만나 어릴 적부터 자신의 소질을 계발시키고 그 분야에서 벌어먹고 살 수 있으려면 적어도 중산층 정도는 되어야 일찍부터 제 소질을 계발시켜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유익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루 벌고 하루 먹는 집안에 태어났다면, 제 소질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 채 일용직 근로자나 상담원, 계산원, 서빙 등 특별한 기술이 없어 다른 인력으로 대체 가능한 일자리를 갖게 되고 그것으로 벌어 먹는다면, 세계화의 열풍으로 좀 더 싼 임금을 줄 수 있는 후진국에 공장이 이전한다고 했을 때, 세계화는 일자리 도둑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이 책에 등장하는 개발도상국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인 '다국적 기업의 진출'이나 '수입의 증대', '기술의 습득'은 개소리일 뿐이다. 다국적 기업이 등장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분야에 한해 자국의 기업이 발전하기가 어렵다는 소리(그 이후에는 그 다국적 기업이 어떤 분야에 진출할지 예측할 수도 없다)이고, 수입의 증대는 어쩌면 선진국에 대한 환상으로 소비의 증대만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작용이 있으며, 기술의 습득은 후진국들의 기술자들을 너무 많이 양산해내서 모두 똑같이 배워서 기술이 쓸모가 없어질 수도 있다. 만약에 세계화가 없었다면, 각국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나 기술로 그것을 특화해서 문화적 다양성 뿐만 아니라 기술의 자생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안된 개발도상국에게 '세계화'는 재앙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존속은 그 세계화에 있었을지 모른다. 수출 중심의 나라였기에 세계화가 없었다면 땅덩어리가 적어 식량도 많이 나지 않은 나라에, 자원도 없어 원자재 팔 수 없는 나라에, 잘 살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었을 것인데 그나마 남의 기술을 사와서 베껴서 허접하게 만들어 파는 식으로 우리는 그렇게 다른 나라의 기술을 습득해서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능했다고 해서 다른 나라도 다 가능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가 아예 사라지지 않는 이상 동일한 피자판에 자신 몫을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후발주자는 힘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쳐지든지 아니면 들어오지 못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미리 우위를 선점한 선진국이 아니라면 경기 향상은 어렵다.

 

심지어 국제기구인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까지도 선진국의 입김에 크게 영향을 받아 돈을 빌려주면서 경제 개방, 즉 선진국이 파고들어갈 구멍을 내놓으라고 윽박을 지르니, 세계화는 악몽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는 없고, 되도록이면 이상주의식의 멋들어진 환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일단 그런 식으로라도 알아야 세계화의 병페를 확실히 체득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하면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음 세대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사조를 만들어내던가 현재의 자본주의를 좀 더 손을 보아 세상이 균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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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주인이 될 것인가 - 마쓰시타 정경숙 1기 출신 사상가가 밝히는 한·일 미래지침
하야시 히데오미 지음, 정재헌 편역 / 모루와정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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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정경숙'이 사람 이름인 줄 알았던 나로서는 일본의 교육이 얼마나 수준 높은지, 정치 · 경제 분야에 뛰어난 인재들을 어디서 공급받는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확실히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10년이 앞서있는 나라이고, 그런 말들이 절대 허튼 말이 아님을 이 책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역사나 왜곡하고, 제 잘못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남의 땅이나 빼앗으려고 하는 못된 도둑놈의 심보를 지닌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지만 확실히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수준 높은 정치, 경제 분야의 인재를 배출하는 재단이나 교육기관이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지 않은가. 지금 사교육이다 뭐다 가장 중요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까지 교육정책이 뿌리 깊이 흔들리고 있는데 경제, 정치 분야의 인재를 키우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러운 것은 부러운 것이다.

 

내가 그렇게나 부러워하는 정치, 경제의 인재를 배출해내는 산실인 '마쓰시타 정경숙'이란 기업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그의 말년에 차세대 국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70억 엔의 자산을 출연하여 만든 사단법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개인이 억 단위로 기부하는 사례도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을 순순하게 교육에 투자하는 사람은 더더군다나 없다. 몇몇 책에서 보면 한국인들이 기본적으로 다재다능하고 머리가 좋은 인종이라고들 하던데 아마도 개별적으로 다들 머리가 좋으니까 제 밥그릇만 챙기기 바쁘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은 전혀 없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사니깐. 우리나라 최고의 두뇌들만 간다는 서울대생들이 생각과는 다르게 학연을 전혀 따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마쓰시타 정경숙은 부지 6천 평 이상, 숙사만 2천 평 정도에 이르는 규모로, 최대 150명이 기숙할 수 있도록 직원용 가옥, 식당, 고노스케 전용 다실, 일본 정원, 테니스 코트가 구비되어 있는 캠퍼스라고 보면 되겠다.

 

역시 10년이나 차이가 난다는 말은 절대로 헛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일본에 이런 사단법인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다는 것부터가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닌가 한다. 정부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한 개인의 생각이 이렇게 건설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니, 얼마나 발전적이 아닌가 한다. 지금 나라면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조건이 되는데, 아쉽게도 내가 일본어를 못한다. 정말 아쉽다. 조건은 재학 중이거나 취업 중이 아닌 22세 이상 35세 이하의 청년으로, 합격되면 기숙하면서 4년 동안 연수나 실습을 하며 지낼 수 있고, 한 사람당 매달 20만 엔이 지급되고 그것과는 별도로 각자의 활동 계획에 근거해서 활동 자금이 지급되기도 한다니까 공부할 수 있는 천혜의 자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배우는 것으로는 정치학, 경제학, 재정학 등의 전문 분야도 배우지만, 다도, 서예, 좌선 등의 일본 전통 교육과 무도, 아침 조깅, 100km 행군 대회 등의 체력 증진 프로그램도 갖추어져 있어 문무를 겸비할 수 있겠다. 심지어 파라소닉에서 제조학거나 마케팅까지도 경험해볼 수 있다니까 합격만 되면 마음껏 공부할 수 있어 부러웠다. 졸업생의 40% 정도가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이렇게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정치인이 되는 것이라면 정말 팔을 걷어붙이고 선거 유세를 도울 마음도 있다. 나이가 들고 돈도 좀 모이고 나서 명예욕 때문에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 대신에 말이다.

 

이 책을 쓴 저자인 하야시 히데오미도 '마쓰시타 정경숙' 1기생으로, 20대부터 초지일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철학 사상에 대해서 연구할 마음으로 이곳에서 배웠고, 그 이후로부터 계속적으로 '종학'이라는 것을 연구, 강의하고 있다. 이 저자도 어릴 적부터 어떤 영감에 의해 뜻을 품고 그것에 대해 달려온 사람인데, 그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참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강의한 내용을 녹취해서 편집, 번역해서 나온 것이라 개괄적인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부드러운 어투로 대화하듯이 쓰여있는 책을 읽다보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고 심사숙고할 수 있게 해준다. 우선 일본과 한국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해나가야 한다며,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세계의 망가진 모습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라야마 미사오의 800년 문명 주기론을 들어가면서 제시하는 내용은 사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정보는 대략적으로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데, 종학이라는 사상은 생소한 것이었다. 물론 무라야마 미사오의 문명론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무라야마 미사오는 세상의 흥망성쇠를 10년 단위로 연표를 만들어가보면, 일정한 주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동서양이 교차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아주 획기적인 발견으로, 동양이 흥하면 서양이 망하고, 서양이 흥하면 동양이 망하는 식으로 교차되는데 현재 이 시기가 서양이 망할 시기라서 동양 즉 한국과 일본에서 새로운 사상을 제시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종학'인데, 한 마디로 말해서 전체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재에 대해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전체 시간 축 위에서 과거의 모든 것이 집약, 응축되어 있고 다시 모든 것이 새로 열려가는 그 중요한 포인트에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자신을 중히 여기고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의 근원을 파악해서, 그것에서부터 뿌리를 뻗어나가는 방향을 '종'으로, 뻗어나간 '종'을 상호작용하는 것이 '횡'으로 부르는데, 전체란 이 종과 횡에 의해 결합된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바라볼 땐 항상 중심을 파악해서 그것에서부터 뻗어나가는 쪽과 그것들끼리 상호작용하는 쪽을 모조리 파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읽다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라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쉽다고 보면 된다.

 

그가 말하는 한국의 가장 훌륭한 점은, 예의 범절이 바르다는 것이다. 일본은 얼마나 예의가 바르지 않은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 사람들의 예의범절이 그리 높지는 않다고 보니까 참 공감되지 못했다. 어쨌거나 과거에 '동방예의지국'이란 소리로 들어봤으니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 중에서는 우리나라가 가장 예의가 바르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이런 것을 일본에 전해주고 일본에서 좋은 것은 우리도 같이 만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동양 사상을 대표하는 나라는 사실 중국이나 인도도 있지만, 지금 중국은 돈에 눈이 멀어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기에 불가능하고, 인도는 나중 후반기에 큰 성장을 이룰 만한 사상을 만들어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한다. 솔직히 일본이랑 묶이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일단 우리 자신에게 해당하는 일에 먼저 손을 뻗치다 보면 점차적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여겨지기 때문에 시도만큼은 해봐야 할 것 같다. 물론 문화적으로도 일본이 우리보다 많이 앞서기에 벤치마킹이 먼저일 것도 같지만 일단은 같이 하는 것에 의의를 두면 될 것 같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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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은 하버드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 하버드 공부벌레들이 공부 전쟁터에서 만난 하나님 이야기
황지예 외 15인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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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사람의 하나님 이야기라면 조금 신물이 날 정도였다. 만약에 그것이 그저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으 의를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책은 쓰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읽는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하니까. 어쩌면 그것이 그 사람의 의가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였다고 그 누가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처음에는 간증 같은 것은 보기 싫었다. 좋은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말을 하는 자신에게도 간증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는데, 점점 완악해지고 교묘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내게 있다는 것을 안 후로는, 간증은 되도록이면 안 하고 안 듣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주인공이 딱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것과,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있는 하버드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이 솔깃했다. 한 번도 하버드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가 아니라 하버드는 내겐 너무 먼 그대였기 때문이다.

 

간증은 위험하다, 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일까, 처음에 본 간증은 감흥이 별로 일지 않았다. 역시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일까, 생각했다. 구체적인 사례 하나 정도도 들지 않고 뭉뚱그려서 자신의 실패와 좌절감을 밝힌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전달될까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에는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감흥이 일지 않았던 것은 구체적인 실례를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좌절과 실패는 그것을 경험한 그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란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와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내 상황과 처지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내 마음은 완전히 바뀌어버렷다. 내 마음이 아주 닫혀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아카펠라 그룹 '언더 컨스트럭션'의 맴버 16명의 이야기를 한 명씩 들어보면서 그들도 나와 같은 좌절감과 겁이 많은 인간일 뿐이란 것을 알았고, 그들로 인해 나도 하나님께 다가갈 힘을 얻었다.

 

솔직히 하버드에는 암을 극복하고 온 사람이라든가, 박사 학위를 몇 개나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세계 평화나 인류를 위한 봉사 단체에서 몸바쳐 헌신하던 사람까지 같은 인간으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와 달리 기본적인 몸가짐조차 제대로 갖춰있지 않는 아주 어린 정신연령을 가진 학생들도 많았다. 그러니 그 곳에서도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처럼 아주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학생이 된 자유를 만끽하고자 방종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인종이나 외모 때문에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는 세상에게서 하나님을 가진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하나님을 마땅히 섬겨야 할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좌절과 역경이라는 옵션은 항상 따라다닌다는 것도... 그러니 천재들만 모인다는 하버드에서 자신은 아직도 '공사중'이라고 부르며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뤄갈 수 있도록 매달려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여기 심금을 울리는 말이 있어 옮겨본다.

 

  세상은 네가 하는 일 때문에 네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우리를 속이지만,

 사실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일들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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