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2
마크 레비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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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물리학자 아드리안과 고고학자 키이라의 새벽과 밤의 기원을 찾으러 떠나는 모험은 『낮』에서 황허강에 키이라가 떠내려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이후에 이 책의 완결편이 나오길 기다렸는데 이제서야 나왔다. 사실 읽은 것은 책을 봤자마자 밤을 새워가며 읽었는데 감동을 받자마자 써야 하는데 요즘 정신이 없어 이렇게 새벽에서야 서평을 쓸 준비가 되었다. 참고로 고백하자면, 나는 소설의 서평을 못쓴다. 그저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만 적당히 쓰려고 하는데 그 적당히라는 수준이 어딘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주 안으로는 써야 읽고 난 뒤의 감동을 잊지 않고 쓸 수 있을까 하여 이렇게 무리를 해본다. 그런데 많이 기다렸다가 봐서 그런지, 기다리는 동안 내 인생의 목적이나 방향성이 달라져서 그런지는 확실치 않지만, 『낮』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 감동이 이번 『밤』을 읽을 때 연결되지는 않아서 많이 아쉬웠다. 대략적인 줄거리만 머릿속에 들어가있는 상황에서 그 때와 똑같은 감동을 받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 책을 보고 많이 실망했다. 음모론이나 밝혀지지 않은 고대의 신비, 수수께끼 같은 분야를 워낙에 좋아했던 전력이 있던 사람인지라 『낮』을 처음 접했을 때는 완전히 광분했다. 그때도 밤을 새워 읽었는데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려서, 그리고 시시때때로 소설 속의 수수께끼가 나를 매혹시켜 설레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기에 더 실망이 컸던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내가 좀 참을 수만 있었더라면, 『낮』을 다시 읽고 『밤』을 읽으면 좀 나았을려나 싶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을게다. 내가 전과는 다른 인물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마크 레비의 책은 이번 『낮』『밤』 시리즈만 읽었는데, 두번 볼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프랑스 작가 중 기욤 뮈소를 좋아하는데 그의 소설이 영상미 가득하지만 한번 더 보고 곰곰히 생각하는 소설은 아닌 것처럼, 마크 레비도 그렇다. 그래서 속전속결로 읽어냈는데 엄청난 검은 조직의 배후를 알아내고 나니까 그것이 별로 대단치 않아서 더 싱거웠던 기분이 들었다. 하긴 그 조직의 비밀은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다 읽고 일었던 궁금증 중의 두 가지는 “왜 사람들은 진화론을 철썩같이 믿을까?”와 “왜 지구의 나이를 그렇게나 오래 전으로 설정해놓아야 좋아할까?”였다. 생각해보면, 이 두 질문은 결국 한 가지 즉 진화론으로 귀결될 수 있겠지만 나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소설을 읽었는데 감동은 없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대론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 창조론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절대로 과학은 될 수 없다. 증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를 들어서 진화론도 과학은 될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은 보통 가설을 세우고 그에 맞는 결과가 나오도록 수많은 실험을 한다. 그래서 그 결과를 종합해볼 때, 80~90%의 정황증거를 가지고 그것을 사실로 이해하게 된다. 확률상 70%만 넘어도 대단한 수치이기 때문에 이렇게 나온 정황증거는 거의 사실로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진화론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문외한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 우리가 진화론을 이야기할 때는 화석이나 원소동위율 등등의 수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실제 존재는 했지만 화석으로 존재하지 않은 수많은 경우의 수는 어쩔 것이며, 현재의 대기 상태와 과거의 지구의 초창기 때 - 정말로 산소가 하나도 없었던 원시 지구의 모습이라면 - 와 대기가 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텐데 반감기가 그런 상태에서도 지금과 똑같은 결과를 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적설계론 즉 창조론이 과학이 아닌 것처럼 진화론도 어디까지나 믿음을 바탕을 둔 가설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라 진화론을 근간으로 한 소설을 볼 때는 한없이 아쉽다. 어딘가 모르게 객관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다.

 

특히나 주인공 아드리안과 키이라는 둘다 무신론자로 나오는데, 왜 신을 믿는 믿음이 어리석은 것처럼 나오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나왔던 모든 소설 중에는 신을 믿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특별히 그런 소설만 고르는 재주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나 된다는 요즘 한국에서 기독교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은 신기하다. 작가 중에는 기독교인이 없었던 것일까. 여하튼 소설 자체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겠고 소설의 곁가지에만 많은 궁금증만 안겨준 소설이라 하겠다. 아드리안과 키이라를 죽이려는 조직에 대해서도 어딘가 어설픈 면이 있어서, 마지막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영 어색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들을 대신해서 죽었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니, 어쩐지 허무했다. 모든 일의 배후에 있던 애슈턴 경이란 사람이 마지막에 한 말이 참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내게 안겨주었는데, 그것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그래요, 언젠가는 밝혀질 수 있겠지요 .....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이릅니다. 아직 더 많은 발전을 이뤄야 하니까요.” (p. 319)

 

그들의 생각, 그러니까 작가의 생각이 참... 희한했다. 자신은 지금 돌아가는 이 세상이 허구(말하자면, 진짜 매트릭스 뭐 이런 것이 아니라)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의 신적인 존재라도 된 양 지금은 덮어두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아니 작가는 우리 인간의 삶은 원래 아무 의미도 없고 이것을 자신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내가 길을 걸어갈 때 지나가는 개미를 밟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내가 지금 이 개미를 밟아도 그들은 모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생은 끝나는 것인데 생이란 참으로 무의미하다는 것. 그들에게는 인생을 사유하거나 철학하거나 삶의 보람을 느끼지도 자아를 실현하지도 않는데 종족 번식을 못하고 죽으면 그 생은 참으로 허무하다는 것.. 뭐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똑같이 생각해보면 우리네 인생이 그렇다는 말이 아닌가. 믿음도 없고 신도 없다면, 인간이 죽어서 아무런 데도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던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는가 말이다. 우리의 탄생에 어떠한 목적도 없다면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아둥바둥 살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더 웃긴 것은, 주인공들이다. 아드리안과 키이라는 대학 때 운명 같은 - 우리 삶에 목적이 없다면 운명도 없겠지만 - 사랑을 나눴으나 사는 곳도 직업도 달라 안타깝게 헤어지고 이번 일로 운명처럼 만났다. 사건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동안 그들의 속내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살며시 드러나는데 80 평생 살아가는 인생이 무의미한데, 아무런 목적이 없는데, 그 둘은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서 혹시 상처받을까봐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진짜 중요한 것을 앞에 두고(진화론인가? 창조론인가? 즉, 인간은 점점 변화하며 발전하는 존재인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상처 받기 싫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쩐지 웃기지 않는가. 또, 사람에게 인생의 목적이 없다면 사랑은 무슨 소용일까 궁금하다. 신이 없다면 인간이 서로 만나 사랑하는 것이, 인류를 위해 숭고한 업적을 달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말이다. 무신론자들에게 오히려 묻고 싶다.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살아가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의지박약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심약한 자라는 꼬리표를 붙여주는 것 같은데, 신이 없다고 믿으면서 무슨 이유로 살아가는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만약 그저 자신의 욕망 - 성공하고 싶다는, 좀 더 유명해지고 싶다는,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남을 돕고 싶다는 기타 등등 - 을 채우기 위해 산다고 한다면, 그 욕망을 채우고 난 뒤에 다가올 끔찍한 공허가 무섭지도 않냐고 반문도 하고 싶다.

 

아직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이제껏 살아온 경험으로 보건대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무언가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 행동을 할 수 없다. 그것이 나라를 위한다는, 인류를 위한다는 숭고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를 위해 해준 것이 뭐가 있어! 그러니 이젠 나도 이런 것을 누려볼 거야! ”와 같은 생떼를 쓰는 것과 같을지라도 의미는 인간에게 필요하다. 하다 못해 몸에 안 좋지만 맛은 있는 음식을 먹을 때처럼 아주 사소하게라도 “오늘은 너무 수고했어.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 다이어트할 거야.”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했던 환경에서 살아왔던 나는 신이 없는 세상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을 순간적으로 잊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놓고 계시지 않는다라는 아주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세상이 내겐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세뇌 교육의 일환이라고 말을 할 것이다. 무지의 결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믿음은 믿는 것이다. 증명을 하는 것이나 논리적은 근거를 대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무신론적인 사고 방식으로 가득찬 소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낮』을 보곤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나로서도 무척이나 당혹스런 결과이다. 그가 잘못 썼든지 내가 변해든지 하나이겠지만, 이번의 소설은 어딘가 아쉬울 뿐이다. 어쩐지 읽고 있으면 모순적인 느낌이 들더라고.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아드리안과 키이라에게 한 행동들이나 신이 없다고 말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아드리안과 키이라가. 물론 인간이니까 모순된 것이 당연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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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 영국의 스토리를 마시다 - 창조적 여행자를 위한 깊이 있는 문화 기행 Creative Travel 1
조용준 지음 / 컬처그라퍼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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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의 맥주를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Pub 펍은 우리나라의 선술집과 같은 장소이지만 단순히 그런 술집으로 여기면 곤란하다. 펍의 정싱 명칭은 Public House으로, 말 그대로 공공장소로의 기능을 담당했던 역사가 오래 된 하나의 문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민주주의를 논의하고 축구팀을 응원하고 반란을 꾀하고 『반지의 제왕』과 같은 작품이 탄생했기에 펍의 가치를 논의해보는 것이 이 영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사실 유럽이라고 하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독일 같은 대륙에 붙어있는 나라가 떠오르지, 영국 같이 동떨어진 섬나라가 얼른 떠오르지는 않는다. 내 유럽 여행 위시리스트에서도 영국은 꼽힌 적이 없을 정도로 내겐 존재감이 전무했다. 이 책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런던을 가고 싶어한다고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파리나 음악의 나라 오스트리아 빈, 르네상스의 황금기 이탈리아의 로마 등과 같은 나라와 도시가 주는 강렬한 이미지가 영국의 런던에는 없다. 그저 휴 그랜트가 로맨틱하게 등장했던 <노팅 힐>, <러브 액츄얼리>와 같은 영화의 배경일 뿐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맥주만 알고 있던 내게 영국의 펍이란 장소를 알게 되니, 호기심이 일었다. 옛부터 술이 있는 곳에 사람이 끼기 마련이라 펍에도 어떤 역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자연히 내 관심이 그리로 쏠렸다. 술을 하지 않는 내가 영국을 가게 되더라도 펍에 갈 일이 있을까마는, 이 책을 보니 펍엔 웨이터가 없어 한 시간이고 자리에 앉아있어도 아무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여행을 다니다가 자리를 잡고 사람 구경을 하기엔 딱일 것 같다. 영국에도 독일 못지 않게 맥주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아침에 한 잔 들고 30분씩 떠들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일 장소로 이용된 우체국 등이 많이 없어진 지금에서는 펍이 유일한 공공장소로 사람들과의 소통의 장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객이 처음 영국에 들러서 펍을 찾기에는 쉽지 않다. 펍이라고 적힌 간판도 없을 뿐더러 100년 이상된 건물에 있다보니, 눈에 뜨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펍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간판을 알아두고 가야 하는데 그 간판의 종류와 의미가 각양각색이다. 처음에는 글을 모르는 서민들을 상대하는 장소이다보니, 글씨 대신 그림이 먼저 생겼다. 맥주를 저을 때 사용했던 막대기가 밖에 있거나 술통, 포도넝쿨이 있는 것으로 펍을 표시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리처드 2세가 세금을 더 쉽게 걷기 위해 맥주 말뚝을 세워야 한다는 칙령이 공포했고 이후부터는 간판을 매달고 있는 막대기 하나를 펍 옆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맥주를 상징하는 기호인 포도넝쿨, 담쟁이 넝쿨에서부터 술통이나 각양 각색의 직업들이 등장했고, 기독교의 영향으로 양도 등장했다. 교황의 힘이 세면, 교황이 왕이 힘이 세면 왕의 모습이 등장하기고 했다. 특히 장미 전쟁으로 대표되는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상징인 빨간 장미와 흰 장미도 많이 등장했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나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다이애나 비와 같이 인기가 많았던 왕이나 여왕, 비도 단골 메뉴였다. 이렇게 왕가의 브랜드 역할을 했던 것이 펍의 간판이었다. 게다가 해적질로 자국의 선박을 보호하고 돈도 벌 수 있었던 과거의 상황으로 볼 때, 해적을 상징하는 것도 펍의 간판이 되었다. 영국에는 캡틴 키드라는 아주 유명한 해적이 보물을 어딘가 숨겨두고 교수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실은 영국 정부가 그를 배신하고 잡은 것이라는 슬픈 역사가 있다. 그런 이야기가 펍의 간판으로 아주 잘 보존이 되어있는데 와핑의 ‘캡틴 키드’가 바로 그 곳이다. 입구 정면에 교수형을 당한 캡틴 키드를 상징이라도 하듯 교수대와 포승줄이 달려있다. 이 사진을 보니까 일본 만화 <원피스>의 전설적인 해적이 생각난다. 그 이름이 캡틴 키드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그 나라의 역사를 아예 그림으로 표현한 펍의 문화가 진기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떠난 배의 이름인 메이플라워도 펍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이는 로서하이트란 곳에 있는데 실제로 메이플라워호의 갑판에 올랐던 잔교가 이 펍에 붙어있었던 것이니 그 펍의 이름을 메이플라워로 바꿔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외에도 유명인물이나 사건을 따서 이름 붙인 펍도 많다. 영국에게 최강 해군을 안겨준 인물인 넬슨 제독이나 유명한 해전인 트라팔가르 해전을 이름 붙인 곳만 해도 전국에 113곳+20곳이나 된다니, 가히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만하다. 또한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진정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든 웰링턴 장군의 이름을 단 펍은 그 당시 400곳 가까이 달했고 현재는 136곳 정도나 된다. 문학 쪽에서는 셜록 홈즈와 셰익스피어와 관련된 펍이 있으니 찾아가볼만 하다. 이렇게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펍의 간판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 그 나라의 역사 문화가 사람들의 생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아닐까. 가장 오래된 것은 1000년, 가장 짧아도 100년은 되어야 펍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매일 새롭게 옷을 입는 서울만 비교해놓고 봤을 때 정말 한국은 문화적 콘텐츠가 없는 나라 같다. 이렇게 술집 하나만 가지고 그 나라를 역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정신이 뭔가 다른 것 같다. 새것만 좋게 여기는 한국이 조금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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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 : 돌아온 탕자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시리즈 2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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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시리즈를 처음 읽었다. 알고 있었던 것은 열린다 성경」시리즈였는데 그 시리즈는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하고 비유 먼저 보게 되었다. 읽었던 사람들마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터라 호기심과 관심이 싹트고 있었던 차에 교회에서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신 적이 있기 때문에 더 호기심이 갔다. 사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은 이미 설교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무지의 반응】을, 이미 들었다고 생각해서 【무시의 반응】을, 움직이지 않는【무관심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세대의 복음에 대한 반응이라고 따끔하게 설교를 하신 적이 있어 특히나 유명한 설교 말씀을 들을 때는 더 주의깊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설교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고,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고,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잔치를 벌이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셨고,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마지막 비유의 제목이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두 아들이야기’라고 바꿔야 한다고도 하셨다.
 
이 설교 말씀이 있었던 때는 복음 축제를 앞두고 하신 말씀이셨는데, 우리 더러,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꽤나 경건해보이는 우리 신자들더러 하신 말씀이셨던 것이다. 돌아온 탕자만이 잃어버린 아들이 아니라 집에서 종처럼 일을 하던 첫째 아들도 잃어버린 아들이란 말씀이셨다. 복음 축제는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목적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 있으면서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하셨다. 진정한 복음 축제는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고. 사실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른 채 이 비유를 들었었다. 과거에 돌아온 탕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탕자 같지 않은 탕자인 첫째 아들의 교만이 더 나쁘다고 들었던 설교를 기억하기에, 그 당시 상당한 충격을 받으며 깨달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오히려 이 때 들었던 말씀은 무심히 들었던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무지의 반응이나 무시의 반응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경향이 있었던 듯 싶다. 주일 성수를 한다고 외적으로만 열심히 치장했던 내가 돌아와야 아버지께서 잔치를 배설하실 정도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그 땐 몰랐다. 지금도 완벽히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 당시에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설교 말씀 속에서는 전후 상황이나 유대인들의 풍습은 알려주지 않아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다른 부분을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세 가지 비유 말씀은 세리와 창기들과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수근수근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겨냥해 비판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주인공이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이 아니라 착실해보이기만 하는 첫째 아들을 향해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이야기의 중점은 결단코 변하지 않는, 마음이 굳어버려서 분노를 풀지 않는 첫째 아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결론이 어떻게 되었는가. 결론이 없다! 첫째 아들이 분을 풀고 잔치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셨다. 비유가 끝나고 등장한 침묵 속에서 바리새인들은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 비유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더욱 예수님을 쳐죽이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열린 질문으로 비유를 마무리하지 않으셨을까 싶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바리새인들이 변하고자 하지 않는데 그가 돌아왔다고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둘째를 탕자로 여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에서는 항목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해주는데 한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신명기에 보면, 부모에게 패역을 부리는 아들은 지도자에게 데려가 돌로 쳐죽일 수 있다는 율법이 등장한다. 보이는 아버지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식이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율법인데, 그렇기에 둘째 아들이 재산을 요구했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을 벌할 수 있었다. 특히나 그 요구가 “아버지, 빨리 돌아가세요. 저는 아버지에겐 관심이 없고 아버지의 재산에만 관심이 있어요.”라는 의미일 때는 더더욱 그럴 수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뒤로 쏙 빠진 채 그 가문의 어르신들이 호적을 파야 한다느니, 가문을 패가망신을 시켰다느니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는 재산을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각각에게 물려주셨다.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하는 아버지는 볼 수가 없단다. 권위적인 아버지이고, 율법에도 죽기 전까지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을 표현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패역한 아들이다, 둘째는.
 
그렇다고 해서 첫째 아들은 멀쩡한가. 아니다. 그도 둘째 아들과 맞먹을 정도의 패륜아이다. 유대인들에게서 장자는 아버지의 권리를 대신하는 자였다. 그래서 둘째 아들처럼 배은망덕한 요구를 할 때는 장자가 나서서 그것을 중재해야 한다. 그러니까 둘째에게 가서 용서를 빌라고 나서야 하는데, 비유 속에는 그런 말씀은 전혀 없고, 아버지가 유산을 둘째에게 물려주실 때 자신도 냉큼 그것을 챙겼던 것을 봐서 그는 파렴치한 장자였다. 형제 간의 정도 없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도 없이 그저 종처럼 일만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언젠가는 둘째처럼 자유롭게 친구들이랑 잔치나 벌이면서 놀고 싶다는 속내가 있었던 아들이었다. 그러니 첫째도 어마어마하게 타락한 탕자였던 것이다. 둘째가 회개하고 돌아와 품꾼의 하나가 되더라도 좋다고 여길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며 기뻐하여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심정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공개적으로 아버지께 분노하고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아들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 같지 않은가. 세리와 창기가 더럽다며 그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스스로 구별된 자로 크나큰 자부심을 누리며 살아왔던 이들... 바로 내가 아니였나 싶다. 불신자들을 향해 어리석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는 그래도 교회를 다닌다고 자부심을 느꼈다면 바로 그렇다. 전에 목사님께서 설교시간에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 특권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의아하게 느꼈었는데,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내가 믿게 된 것은 나 스스로의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은 내가 잘나서, 내가 대단해서 믿을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의 타락과 향락에 물들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칭찬했던 것이다. 그것조차도 은혜인데도 말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불신자나 신자라고 하는 자들이나 매한가지 죄인인데 뭐 그리 잘난다고 나대는지. 내가 그랬다. 나댄 것. 은혜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 알게 될 거라고 하셨던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복음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저 단순한 것만도 아니고(이는 내가 단순하게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 받았다고 마음을 놓고 있으면 그 순간 또 죄악이 나를 덮어버리니 추적해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과 탐심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할 일이다. 그것도 주님의 은혜로 말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엄청 기분이 나빴을 것은 분명하다. 나도 그리 썩 좋지는 않으니. 하지만 여기서 기분만 나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나아갈 길이 있다. 회개... 이 마지막 때에 가장 필요하고도 중요한 생명과 같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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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료코 지음, 장은선 옮김 / 다반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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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 자체가 르와르, 액션, 스릴러, 범죄 등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영역의 소설인 남자가 있다. 재일 한국인인 현수성이 바로 그 인물이다. 스스로도 많은 범죄를 저질렀고, 그도 많은 범죄현장에서 피해자로 살아왔던 그는 일본의 가장 범죄율이 높은 환락가 가부키쵸에 뜸금없이 「신주쿠 구호센터」를 차린다. 제 몸을 팔아서라도, 미수금이 있던 수도 가게의 여주인에게 몸을 팔게 해서라도 악착같이 돈을 위해 살았던 인물로, 잘 나가는 사업도 하고 있었을 때였다. 하고 있던 사업도 모두 양도하거나 처분하고 가부키쵸에서 구호활동을 하다니,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다. 이 책은 그의 구호센터에서 기부금 모금을 위한 웹매거진의 편집 및 집필을 담당하고 있는 사사 료코가 자원봉사를 하면서 알게 된 현수성의 모습에 흥미를 느껴 그를 이해해보려고 시작한 일의 묶음으로 나온 책이다. 솔직히 악마였던 사람이 천사가 되었다고 하면 누구나 그의 진의를 의심부터 하게 된다. 아마도 이 사람이 처음 구호센터를 차렸을 때도 다들 그런 생각이 들었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이는 그가 돈을 버는 데는 귀신 같은 놈이라 구호센터를 차릴 때도 옆에 있었다가 이 단체가 순수하게 비영리기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내뺐다고 하니까, 처음부터 그의 진심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을 것 같다. 이제 8년 째 같은 자리에서 꾸준히 구호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조금씩 그의 의도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아마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이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그에겐 약점이 하나도 없어서 알만한 조폭들조차 ‘익혀도 구워도 못 먹을 사내 같으니’이라고 부르니, 거의 불사신에 가깝다. 죽고 나서의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이생에서 가족이 있나, 부모가 있나, 그가 소중히 여기는 대상이 하나도 없으니 그에게 배신을 하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을 것이 분명하고 그에게 복수를 하려해도 당사자를 죽이지 않는 한 특별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왠지 만화책의 한 주인공 같지 않은가. 남성용 만화는 그다지 보지 않아서 잘은 몰라도 그처럼 탐욕에 불타올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으는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 『제니게바』도 일본에는 있다고 한다. 완전히 돈만 빨아대는 수전노였던 현수성이, 구호센터를 하면서 그런 돈에 대한 욕심을 딱 끊은 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그 만화책을 보고 나서 현수성이 한다는 말이, “그래봤자 만화책은 상상 속의 인물이지. 작가도 그 다음을 상상할 수 없었던 거야. 실제는 더욱 지독했어. 상상도 할 수 없는 탐욕이 나를 몰아댔어.” 그러고서 들려준 현수성의 수전노였던 시절의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법하다. 그만큼 우여곡절과 화려한 모습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어릴 적부터 학대를 당하며 살아오면서 부모의 정을 느끼지 못했기에, 왕따를 그렇게 당해도 자신의 몸 하나는 잘 건사하려고 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미친 놈처럼 굴어서 상대방이 느끼는 공포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 떼로 덤비면 당할 수가 없으니까 나중에 아이들의 집으로 찾아가서 공격하는 방법으로 아이들의 기선을 제압했고, 절대로 급소를 피하면서 맞을 수 있는 연습을 했단다. 자신이 다치면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을 것이기에 치명상을 입으면 바로 죽는 것이란 것을 벌써 10살쯤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일하는 것은 귀신같이 외우고 잘해냈다. 그것이 그에게는 살 길이었기에 신문배달을 해도 초밥을 만들어도 목수일을 해도 하루에 다 외우고야 만다. 쫓겨나면 놀이터에서 자고, 아버지가 기분이 나쁘면 발로 뻥 차여서 방 한구석으로 날라가고.. 이런 삶을 살다가 일을 하기 시작한다. 한 번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어서 훔치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나는 이런 그에게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배 고파서 훔치는 아이에게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어른이 된 이후에 저질렀던 악행을 다 변호해줄 순 없지만 말이다. 초밥집에서 몇 개월 배우고 나서 이직하고 몇 년이나 경력이 쌓인 척하고 돈을 배로 받고, 목수 일을 조금 배워서 하다가 책임자가 사라지는 일이 생겨서 그것을 눈대중으로 마무리해서 돈을 벌고, 사고가 났던 것을 뻥을 쳐서 수술을 받아 보상금을 챙기고, 그 돈으로 인부 파견업체를 차려서 배로 불리는 등 그는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스스로도 똥을 먹으라고 해도 먹을 수 있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그 시기가 일본에서 가장 어려웠을 시기였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 시기에 학벌 없고, 인맥 없고, 차별을 당했던 조선인이란 신분으로 일어선다는 것은 정말 보통일이 아닐 것이다. 인부 파견업체만 해도 일당을 만들지 못하면 칼부림이 날 수 있는 시기였기에 그는 목숨 걸고 사람을 부렸고, 타고난 눈썰미로 사람을 판별해냈다. 현장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사람, 혼자 두면 농땡이칠 사람 등 여러 부류로 나누어서 잘 파견하는 그의 실력은 대단했다. 돈을 번 만큼 번 이후에는 그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새로운 인맥을 만들어나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는 다른 부류의 동네를 구경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 정치인, 연예계, 사업가, 조폭, 변호사, 도박꾼, 게이 등을 알게 된 것이 지금 구호활동을 하는 데는 적지 않은 도움을 받는다. 그렇게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자가 왜 구호활동을 할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는 자신의 어릴 적에 누군가 이렇게 끌어주는 사람이 있길 원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뭐, 아니면 말고. 하지만 정말 법의 손이 미치지 않는 사람들이 도움 청하기엔 딱인 사람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불법체류자로 몸을 팔면서 돈도 뜯기고 학대를 당하는 여성이 있다고 치자. 일본 경찰이 그를 도와주겠는가. 강체 소환이나 당할 테니 그들은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럴 때는 현수성을 찾아가는 것이 깔끔하다. 조폭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이기에 십만 엔이나 받고 여성이 원하는 대로 한적한 곳에서 돈을 벌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그런 곳이 없길 바라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법이 유명무실한 세계에서는 더 많은 구호센터가 필요하다. 그런데 조폭과 게이, 도박이 횡횡하는 이런 곳에서 누가 구호센터를 열 수 있을까. 유일무이하게도 현수성이란 복잡다단한 사람만이 이런 구호센터를 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좋다 나쁘다라고 어떤 평가도 내릴 순 없지만, 지금은 가부키쵸에 그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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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주는 위안
피에르 슐츠 지음, 허봉금 옮김 / 초록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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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2년 인생동안 한 번도 반려동물과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이런 책을 읽으면 상당히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어진다. 사실상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반려동물과의 친근한 관계를 잘 상상되지가 않기 때문이다. 내 발치에서 맴돌며 내가 가자고 하는 장소로 기꺼이 따라가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데다가 항상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존재란 아직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존재가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바로 여기서 도시인들이 개에게서 어떤 위안을 얻는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겠다. 사람은 사람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보람도 느끼며 일평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사람과 그런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때 반려견을 생각해본다. 내게 돈이 있든 없든, 내 외모가 어떠하든, 말주변이 좀 없거나 인기가 없어도 개는 그런 것을 따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함의가 우리에겐 있기에 마음놓고 개에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개를 키울 때 위험한 일이란 개가 먼저 이 세상을 뜬다거나 혹은 내가 먼저 이 세상을 뜨게 되어 남겨질 개에 대한 걱정일 뿐이니,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충직함을 보여준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인간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사랑이란 감정은 어찌나 양날의 칼과도 같은지 너무 과해도 독이 되고 너무 없어도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 더욱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으면서도 어떤 이유로든지간에 이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웬수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을 칼로 자르는 것처럼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게까지 서로에게 상처를 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입장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어불성설이지만, 인간에게 있어 가장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 배우자의 죽음이고, 그에 못지않게 이혼이란 결과를 놓고 보면 결혼 문제는 항상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할 때 ‘안 되면 이혼하지, 뭐~’란 생각을 가지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끝을 놓고 시작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그 결혼이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이제 결혼을 해야 할 시점에서 이런 생각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무슨 일이 있든 절대 이혼만은 없다라는.
 
세상이 쉬워진 것인지, 사람들이 변해버린 것인지, 과거에 중요하게 여겨져 왔던 가치들 중 대다수는 지키면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물질이 풍요해진 반면 사람이 귀한지 모르게 된 요즘에, 아마도 사람들은 그 공허함을 반려동물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어진 것 같다. 어느 누구도 그런 풍조가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 없어진 듯 싶어 안타깝다. 개는 인간보다 영리하지 못하고, 할 줄 아는 것도 거의 없다. 개를 하나 키우려면 예방접종을 비롯하여 각종 의료기술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료값만 해도 한 달에 꽤 나간다. 그럼에도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유지비용도 적잖이 들어가는 이런 개에게서 인간은 어떤 위안을 갖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개의 매력 중에는 열등함, 관심 집중, 신비감, 현명함, 단순함 등 서로상반되어 보이는 항목이 자연스럽게 나열된다. 인간보다 열등해서,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오히려 위안을 받기도 하고 현재에만 관심을 두는 현명함도 가지고 있다. 특히 나는 개들이 말을 못한다는 점이 가장 우월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말을 못할 경우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한가. 하지만 개들은 그의 풍부한 표정과 다양한 표현을 하는 활기로 인해 말을 못한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해준다는 것,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나만 바라보고 나만 좋아해주는 것... 바로 현대인들의 가장 취약한 점을 개가 해소해주는 것이다.
 
이제는 개들을 인간 취급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개 팔자가 상 팔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편의시설 못지 않게 개의 편의시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개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개도 싫어할 것이라는 감정적인 동화와 달리 외적인 부분까지도 인간 취급을 해서 개 호텔, 개 병원, 개 장례식장, 개 납골당 등 개를 위한 시설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개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개가 돈이 된다는 점에 착안해 만든 여러 시설은 내게 그리 곱게 보여지지는 않는다. 일개 동물에게 그런 화려한 시설들이 별로 맞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 뿐만 아니라, 듣기만 해도 비용이 비쌀 것 같은 그런 시설을 자신의 형편도 안 되면서 이용할 것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개와 감정적인 교류를 통해 인생의 질을 높이는 것은 물론 찬성이지만, 그렇게 요란하게 개를 사랑한다는 증표를 보이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변덕스런 감정이 드러난 것 같단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다면 이렇게 개를 사랑하는 요즘 시대에 유기견 또한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말이다. 그저 하나의 일회용품처럼 취하고 버리는 일이 생명체인 개에게까지 확대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무엇을 하든 개가 생명체라는 사실만 정확하게 인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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