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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2
마크 레비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천체물리학자 아드리안과 고고학자 키이라의 새벽과 밤의 기원을 찾으러 떠나는 모험은 『낮』에서 황허강에 키이라가 떠내려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이후에 이 책의 완결편이 나오길 기다렸는데 이제서야 나왔다. 사실 읽은 것은 책을 봤자마자 밤을 새워가며 읽었는데 감동을 받자마자 써야 하는데 요즘 정신이 없어 이렇게 새벽에서야 서평을 쓸 준비가 되었다. 참고로 고백하자면, 나는 소설의 서평을 못쓴다. 그저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만 적당히 쓰려고 하는데 그 적당히라는 수준이 어딘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주 안으로는 써야 읽고 난 뒤의 감동을 잊지 않고 쓸 수 있을까 하여 이렇게 무리를 해본다. 그런데 많이 기다렸다가 봐서 그런지, 기다리는 동안 내 인생의 목적이나 방향성이 달라져서 그런지는 확실치 않지만, 『낮』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 감동이 이번 『밤』을 읽을 때 연결되지는 않아서 많이 아쉬웠다. 대략적인 줄거리만 머릿속에 들어가있는 상황에서 그 때와 똑같은 감동을 받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 책을 보고 많이 실망했다. 음모론이나 밝혀지지 않은 고대의 신비, 수수께끼 같은 분야를 워낙에 좋아했던 전력이 있던 사람인지라 『낮』을 처음 접했을 때는 완전히 광분했다. 그때도 밤을 새워 읽었는데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려서, 그리고 시시때때로 소설 속의 수수께끼가 나를 매혹시켜 설레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기에 더 실망이 컸던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내가 좀 참을 수만 있었더라면, 『낮』을 다시 읽고 『밤』을 읽으면 좀 나았을려나 싶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을게다. 내가 전과는 다른 인물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마크 레비의 책은 이번 『낮』『밤』 시리즈만 읽었는데, 두번 볼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프랑스 작가 중 기욤 뮈소를 좋아하는데 그의 소설이 영상미 가득하지만 한번 더 보고 곰곰히 생각하는 소설은 아닌 것처럼, 마크 레비도 그렇다. 그래서 속전속결로 읽어냈는데 엄청난 검은 조직의 배후를 알아내고 나니까 그것이 별로 대단치 않아서 더 싱거웠던 기분이 들었다. 하긴 그 조직의 비밀은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다 읽고 일었던 궁금증 중의 두 가지는 “왜 사람들은 진화론을 철썩같이 믿을까?”와 “왜 지구의 나이를 그렇게나 오래 전으로 설정해놓아야 좋아할까?”였다. 생각해보면, 이 두 질문은 결국 한 가지 즉 진화론으로 귀결될 수 있겠지만 나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소설을 읽었는데 감동은 없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대론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 창조론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절대로 과학은 될 수 없다. 증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를 들어서 진화론도 과학은 될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은 보통 가설을 세우고 그에 맞는 결과가 나오도록 수많은 실험을 한다. 그래서 그 결과를 종합해볼 때, 80~90%의 정황증거를 가지고 그것을 사실로 이해하게 된다. 확률상 70%만 넘어도 대단한 수치이기 때문에 이렇게 나온 정황증거는 거의 사실로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진화론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문외한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 우리가 진화론을 이야기할 때는 화석이나 원소동위율 등등의 수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실제 존재는 했지만 화석으로 존재하지 않은 수많은 경우의 수는 어쩔 것이며, 현재의 대기 상태와 과거의 지구의 초창기 때 - 정말로 산소가 하나도 없었던 원시 지구의 모습이라면 - 와 대기가 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텐데 반감기가 그런 상태에서도 지금과 똑같은 결과를 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적설계론 즉 창조론이 과학이 아닌 것처럼 진화론도 어디까지나 믿음을 바탕을 둔 가설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라 진화론을 근간으로 한 소설을 볼 때는 한없이 아쉽다. 어딘가 모르게 객관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다.
특히나 주인공 아드리안과 키이라는 둘다 무신론자로 나오는데, 왜 신을 믿는 믿음이 어리석은 것처럼 나오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나왔던 모든 소설 중에는 신을 믿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특별히 그런 소설만 고르는 재주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나 된다는 요즘 한국에서 기독교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은 신기하다. 작가 중에는 기독교인이 없었던 것일까. 여하튼 소설 자체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겠고 소설의 곁가지에만 많은 궁금증만 안겨준 소설이라 하겠다. 아드리안과 키이라를 죽이려는 조직에 대해서도 어딘가 어설픈 면이 있어서, 마지막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영 어색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들을 대신해서 죽었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니, 어쩐지 허무했다. 모든 일의 배후에 있던 애슈턴 경이란 사람이 마지막에 한 말이 참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내게 안겨주었는데, 그것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그래요, 언젠가는 밝혀질 수 있겠지요 .....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이릅니다. 아직 더 많은 발전을 이뤄야 하니까요.” (p. 319)
그들의 생각, 그러니까 작가의 생각이 참... 희한했다. 자신은 지금 돌아가는 이 세상이 허구(말하자면, 진짜 매트릭스 뭐 이런 것이 아니라)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의 신적인 존재라도 된 양 지금은 덮어두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아니 작가는 우리 인간의 삶은 원래 아무 의미도 없고 이것을 자신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내가 길을 걸어갈 때 지나가는 개미를 밟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내가 지금 이 개미를 밟아도 그들은 모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생은 끝나는 것인데 생이란 참으로 무의미하다는 것. 그들에게는 인생을 사유하거나 철학하거나 삶의 보람을 느끼지도 자아를 실현하지도 않는데 종족 번식을 못하고 죽으면 그 생은 참으로 허무하다는 것.. 뭐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똑같이 생각해보면 우리네 인생이 그렇다는 말이 아닌가. 믿음도 없고 신도 없다면, 인간이 죽어서 아무런 데도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던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는가 말이다. 우리의 탄생에 어떠한 목적도 없다면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아둥바둥 살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더 웃긴 것은, 주인공들이다. 아드리안과 키이라는 대학 때 운명 같은 - 우리 삶에 목적이 없다면 운명도 없겠지만 - 사랑을 나눴으나 사는 곳도 직업도 달라 안타깝게 헤어지고 이번 일로 운명처럼 만났다. 사건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동안 그들의 속내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살며시 드러나는데 80 평생 살아가는 인생이 무의미한데, 아무런 목적이 없는데, 그 둘은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서 혹시 상처받을까봐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진짜 중요한 것을 앞에 두고(진화론인가? 창조론인가? 즉, 인간은 점점 변화하며 발전하는 존재인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상처 받기 싫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쩐지 웃기지 않는가. 또, 사람에게 인생의 목적이 없다면 사랑은 무슨 소용일까 궁금하다. 신이 없다면 인간이 서로 만나 사랑하는 것이, 인류를 위해 숭고한 업적을 달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말이다. 무신론자들에게 오히려 묻고 싶다.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살아가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의지박약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심약한 자라는 꼬리표를 붙여주는 것 같은데, 신이 없다고 믿으면서 무슨 이유로 살아가는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만약 그저 자신의 욕망 - 성공하고 싶다는, 좀 더 유명해지고 싶다는,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남을 돕고 싶다는 기타 등등 - 을 채우기 위해 산다고 한다면, 그 욕망을 채우고 난 뒤에 다가올 끔찍한 공허가 무섭지도 않냐고 반문도 하고 싶다.
아직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이제껏 살아온 경험으로 보건대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무언가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 행동을 할 수 없다. 그것이 나라를 위한다는, 인류를 위한다는 숭고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를 위해 해준 것이 뭐가 있어! 그러니 이젠 나도 이런 것을 누려볼 거야! ”와 같은 생떼를 쓰는 것과 같을지라도 의미는 인간에게 필요하다. 하다 못해 몸에 안 좋지만 맛은 있는 음식을 먹을 때처럼 아주 사소하게라도 “오늘은 너무 수고했어.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 다이어트할 거야.”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했던 환경에서 살아왔던 나는 신이 없는 세상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을 순간적으로 잊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놓고 계시지 않는다라는 아주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세상이 내겐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세뇌 교육의 일환이라고 말을 할 것이다. 무지의 결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믿음은 믿는 것이다. 증명을 하는 것이나 논리적은 근거를 대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무신론적인 사고 방식으로 가득찬 소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낮』을 보곤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나로서도 무척이나 당혹스런 결과이다. 그가 잘못 썼든지 내가 변해든지 하나이겠지만, 이번의 소설은 어딘가 아쉬울 뿐이다. 어쩐지 읽고 있으면 모순적인 느낌이 들더라고.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아드리안과 키이라에게 한 행동들이나 신이 없다고 말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아드리안과 키이라가. 물론 인간이니까 모순된 것이 당연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