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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 : 돌아온 탕자 이야기 ㅣ 예수님의 비유 시리즈 2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1년 5월
평점 :
「열린다 비유」시리즈를 처음 읽었다. 알고 있었던 것은 「열린다 성경」시리즈였는데 그 시리즈는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하고 비유 먼저 보게 되었다. 읽었던 사람들마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터라 호기심과 관심이 싹트고 있었던 차에 교회에서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신 적이 있기 때문에 더 호기심이 갔다. 사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은 이미 설교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무지의 반응】을, 이미 들었다고 생각해서 【무시의 반응】을, 움직이지 않는【무관심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세대의 복음에 대한 반응이라고 따끔하게 설교를 하신 적이 있어 특히나 유명한 설교 말씀을 들을 때는 더 주의깊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설교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고,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고,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잔치를 벌이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셨고,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마지막 비유의 제목이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두 아들이야기’라고 바꿔야 한다고도 하셨다.
이 설교 말씀이 있었던 때는 복음 축제를 앞두고 하신 말씀이셨는데, 우리 더러,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꽤나 경건해보이는 우리 신자들더러 하신 말씀이셨던 것이다. 돌아온 탕자만이 잃어버린 아들이 아니라 집에서 종처럼 일을 하던 첫째 아들도 잃어버린 아들이란 말씀이셨다. 복음 축제는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목적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 있으면서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하셨다. 진정한 복음 축제는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고. 사실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른 채 이 비유를 들었었다. 과거에 돌아온 탕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탕자 같지 않은 탕자인 첫째 아들의 교만이 더 나쁘다고 들었던 설교를 기억하기에, 그 당시 상당한 충격을 받으며 깨달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오히려 이 때 들었던 말씀은 무심히 들었던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무지의 반응이나 무시의 반응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경향이 있었던 듯 싶다. 주일 성수를 한다고 외적으로만 열심히 치장했던 내가 돌아와야 아버지께서 잔치를 배설하실 정도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그 땐 몰랐다. 지금도 완벽히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 당시에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설교 말씀 속에서는 전후 상황이나 유대인들의 풍습은 알려주지 않아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다른 부분을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세 가지 비유 말씀은 세리와 창기들과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수근수근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겨냥해 비판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주인공이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이 아니라 착실해보이기만 하는 첫째 아들을 향해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이야기의 중점은 결단코 변하지 않는, 마음이 굳어버려서 분노를 풀지 않는 첫째 아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결론이 어떻게 되었는가. 결론이 없다! 첫째 아들이 분을 풀고 잔치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셨다. 비유가 끝나고 등장한 침묵 속에서 바리새인들은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 비유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더욱 예수님을 쳐죽이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열린 질문으로 비유를 마무리하지 않으셨을까 싶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바리새인들이 변하고자 하지 않는데 그가 돌아왔다고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둘째를 탕자로 여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에서는 항목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해주는데 한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신명기에 보면, 부모에게 패역을 부리는 아들은 지도자에게 데려가 돌로 쳐죽일 수 있다는 율법이 등장한다. 보이는 아버지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식이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율법인데, 그렇기에 둘째 아들이 재산을 요구했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을 벌할 수 있었다. 특히나 그 요구가 “아버지, 빨리 돌아가세요. 저는 아버지에겐 관심이 없고 아버지의 재산에만 관심이 있어요.”라는 의미일 때는 더더욱 그럴 수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뒤로 쏙 빠진 채 그 가문의 어르신들이 호적을 파야 한다느니, 가문을 패가망신을 시켰다느니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는 재산을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각각에게 물려주셨다.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하는 아버지는 볼 수가 없단다. 권위적인 아버지이고, 율법에도 죽기 전까지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을 표현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패역한 아들이다, 둘째는.
그렇다고 해서 첫째 아들은 멀쩡한가. 아니다. 그도 둘째 아들과 맞먹을 정도의 패륜아이다. 유대인들에게서 장자는 아버지의 권리를 대신하는 자였다. 그래서 둘째 아들처럼 배은망덕한 요구를 할 때는 장자가 나서서 그것을 중재해야 한다. 그러니까 둘째에게 가서 용서를 빌라고 나서야 하는데, 비유 속에는 그런 말씀은 전혀 없고, 아버지가 유산을 둘째에게 물려주실 때 자신도 냉큼 그것을 챙겼던 것을 봐서 그는 파렴치한 장자였다. 형제 간의 정도 없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도 없이 그저 종처럼 일만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언젠가는 둘째처럼 자유롭게 친구들이랑 잔치나 벌이면서 놀고 싶다는 속내가 있었던 아들이었다. 그러니 첫째도 어마어마하게 타락한 탕자였던 것이다. 둘째가 회개하고 돌아와 품꾼의 하나가 되더라도 좋다고 여길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며 기뻐하여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심정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공개적으로 아버지께 분노하고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아들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 같지 않은가. 세리와 창기가 더럽다며 그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스스로 구별된 자로 크나큰 자부심을 누리며 살아왔던 이들... 바로 내가 아니였나 싶다. 불신자들을 향해 어리석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는 그래도 교회를 다닌다고 자부심을 느꼈다면 바로 그렇다. 전에 목사님께서 설교시간에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 특권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의아하게 느꼈었는데,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내가 믿게 된 것은 나 스스로의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은 내가 잘나서, 내가 대단해서 믿을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의 타락과 향락에 물들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칭찬했던 것이다. 그것조차도 은혜인데도 말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불신자나 신자라고 하는 자들이나 매한가지 죄인인데 뭐 그리 잘난다고 나대는지. 내가 그랬다. 나댄 것. 은혜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 알게 될 거라고 하셨던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복음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저 단순한 것만도 아니고(이는 내가 단순하게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 받았다고 마음을 놓고 있으면 그 순간 또 죄악이 나를 덮어버리니 추적해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과 탐심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할 일이다. 그것도 주님의 은혜로 말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엄청 기분이 나빴을 것은 분명하다. 나도 그리 썩 좋지는 않으니. 하지만 여기서 기분만 나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나아갈 길이 있다. 회개... 이 마지막 때에 가장 필요하고도 중요한 생명과 같은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