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역사 - 왜 상식은 포퓰리즘을 낳았는가?
소피아 로젠펠드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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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 어떤 방법을 통해 포퓰리즘을 낳았을까? 포퓰리즘이란 대중주의라고도 하며, 인기영합주의·대중영합주의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대중적인 인기, 비현실적인 선심성 정책을 내세워 일반 대중을 호도하여 지지도를 이끌어내고 대중을 동원시켜 권력을 유지하거나 쟁취하려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지속적이고 일관된 어떤 정책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선동하는데 우선순위를 두는 정치에서 설득의 한 형태로 보여진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민주주의가 중우정치가 되어 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용어였는데, 이제는 좌파나 우파 모두에게서 들려오는 소리가 되어 버렸다. 이렇듯 이현령 비현령할 수 있는 이 단어는 사실 상식, 커먼센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상식이란 단어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유했을까?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정치는 일부 지식인의 손에만 달려있는 고급 기술에 속했던 것이다. 그 당시 지식인들은 21세기에 대중들이 정치에 참여할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음이 틀림 없다. 그랬기에 모든 사람들이 식별력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가 동의하고 잘 아는 몇 가지 근본적인 원칙을 공유하고 있다는 현재의 상식에 대한 신뢰를 받아들이기엔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란 용어는 17세기 말 영국의 명예혁명과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사이에 있었던 인민주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출현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었는데 그 시작은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모든 인간은 5가지의 기본적인 감각,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 그 모든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는 공통된 감각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공통감각의 기능은 다섯 가지 감각들이 받아들인 인상들을 서로 비교 통합하여 이성과는 별도로 감각의 대상물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고 주장했다.

 

그런 인식이 11세기 페르시아 철학자 이븐 시나와 스콜라 철학으로 이어져 내려와 결국 17세기의 인민주권과 결부되어 지금에 이르는 상식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식은 그 시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해왔다. 17세기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은 영국에 폭넓게 퍼져가는 회의주의와 무신론에 대해 자신들의 신앙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 상식을 동원했고 반면에 유럽에서는 주로 진보주의자들이 현상 타파를 위해 상식을 내걸었다. 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상식이 전투명령이 되어 미국혁명의 불씨를 제공했고, 그 20년 뒤 프랑스에서는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상식을 내걸고 혁명을 공격했다. 이렇듯 상식은 보수주의자들의 기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급진주의자들의 현재의 정치질서를 뒤엎거나 다시 세우기 위해서 이용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국혁명에 불씨를 제공했던 급진적 사상가인 토마스 페인이 사용했던 상식의 의미는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시작되었던 상식과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양쪽 다 상식을 하나의 보편적인 능력이자 역사의 밖에 위치해서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페인의 상식은 역사를 초월하지도 보편적이지도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페인의 상식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줘서 세상을 다시 시작할 미래 지향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 의해 미국혁명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프랑스 혁명에서 사용했던 상식의 의미는 오히려 혁명 전으로 돌리기 위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이성을 공격하는 상식이 되어 버릴 정도였다. 이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의 의미가 그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상식이 점차 공격을 받아 사라지던 시점, 제2차 세계대전과 원자폭탄 시대에서도 상식은 다시 부활을 맞았으니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의 개념은 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정상적인 일반인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판단력 및 사려분별로 여겨지는 상식의 의미가 또 어느 때에 어떤 의미로 쓰일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용어 하나에 명확한 정의가 내리지 못해 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 항상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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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경제교과서 - 한 권으로 끝내는 대한민국 경제사
손해용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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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외국인이 말했던가. 한국인들은 스스로에게 폄하하려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나도 한국인이지만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자랑스러운 몇몇 분야에 대해 생각만 해도 스스로를 너무 치켜 세워주는 것 같아 오히려 생각을 안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외국인이 말했던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정말 박하게 주는 것은 맞다고 본다. 이런 사고 방식의 바탕에 깔려있는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민족주의자들이기 때문인 듯 싶다. 외국인들은 자신들을 조국과 개별적인 존재로 보는데, 우리나라는 무슨 행동이나 사건을 민족의 개념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어떤 개인이 자랑스러운 것도 우리 민족이 자랑스러운 것이고, 한 개인이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면 나라 전체가 망신살이 뻗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일제강점기를 겪고 나서 우리 스스로를 개별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고 민족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지난 60년간의 대한민국 경제사를 돌아보면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도 많이 세웠지만 우리 스스로는 독재 정치라는 이유로 그런 역사적 족적들에 대해 제대로 된 대접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독재 정권으로 표현되는 박정희 대통령 때는 우리 나라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다양한 방면으로 마련해두었을 때이지만, 그것이 긍정적으로만 평가되지 않아 안타깝다. 우리 나라와 같이 큰 전쟁을 겪고 몇 십년 만에 이런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도 없을 뿐더러, 후발 주자로 시작한 나라로서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성장이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란 불가능하다는 통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근 200년이란 시간을 민주주의를 꽃피우는데 노력했던 미국만 해도 현재 경제가 엉망인데, 우리 같이 전쟁 후에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다면 이만큼도 살지 못했고, 민주주의도 그다지 달성하지 못했을 것을 이젠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과거를 돌아보아 경제의 기반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를 파악해보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쓸어버리지 않아 나중에는 그들의 후손이 잘 되는 부작용을 낳는 등 사회 위화감만 조성한 대통령으로만 생각했으나 한국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의 휴전에 반대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국의 경제지원을 이끌어내 한국을 지켜낸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민주주의의 절대 악이란 이미지가 강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로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던 경제 대통령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광주민주화항쟁 때 민간인을 짓밟았던 한국 사상 가장 악랄하다고 평가받고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 급 성장 후 물가 안정에 올인해서 고속 성장의 후유증을 덜 앓았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비리의 온상으로 여겨지던 노태우 대통령은 세계적인 냉전 속에서도 북방외교를 펼쳐 중국과 러시아와 수교를 맺었다. 후에 중국이 한국의 제1교역국이자 제1수출국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기업 입장에서는 보다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자리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외환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 정책 중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실명제를 밀어부쳐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막고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할 수 있게 했다. 금융실명제를 국회에 상정하는 것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긴급조치를 발동해 초스피드로 실현시켰다. 김대중 대통령은 카드 대란의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외환위기를 극복하게 했고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북한의 위협으로 우리 나라 상품과 기업이 제값을 못 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노벨평화상을 안겨줬으니 그 내막을 알지는 못했기에 놀라웠다. 부동산 정책에 실패해 우리 어머니가 제일 미워하시는 노무현 대통령은 디지털 정보기술 즉 IT기술과 지식정보화 강국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한 · 미 FTA 체결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와 FTA를 추진해 경제영토를 확장한 공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 강 논란도 그렇고 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등 개발독재자란 오명을 뒤집어 쓸 정도로 복지와 환경을 생각하기 보다는 경제 영역에만 치우친 정책을 펼쳤지만 전 세계를 강타한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에서 한국이 가장 먼저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적절한 처방 때문이었다.

 

이렇듯 전직 대통령의 혁혁한 경제 성과는 여타 다른 영역의 문제로 인해 그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문제이고 다른 영역에서 잘한 것은 제대로 평가해주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과거 독재 정치였다고만 생각했던 때에 대단한 불굴의 의지로 한국의 기술을 끌어올린 개개인의 역량이었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과 삼성의 이병철 회장의 면면을 새로 알게 된 것도 좋았다. 안되면 되게 하는 과거 여러 인물들을 노력 덕분에 우리가 현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해야 하겠다. 실제로 지금은 헝그리 정신이 퇴색해 많은 인재들이 소위 철통 밥통만을 노리는 사회 현상이 두드러져 앞으로의 경제 성장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하지 않는가. 국가를 위해 노벨상을 포기하고 와서 카이스트를 세운 1세대 과학자들부터 각 기업의 경영자들, 이름도, 빛도 없이 온몸을 바쳐 다리를 세우고 조선을 만든 기술자와 노동자들, 중동에 가서 더위와 싸우며 수도를 건설해내고 건물을 세운 이들, 외환 위기 때 집에 모셔둔 금붙이를 모두 나라에 헌납해 외환위기를 이겨낸 아줌마, 노인 할 거 없는 모든 국민들... 이런 모든 이들이 모여 우리 경제를 뒤받침해냈다. 아마도 이 책을 쓴 저자는 과거의 경제를 되돌아보아 우리 경제의 일등 공신은 우리가 스스로 구해내려고 했던 의지였음을 분명히 하고 싶었나 보다. 물론 역대 대통령들의 혜안도 한 몫했겠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우리를 구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래서 지금의 청년들에게 묻는다. 너희들은 무얼 하느냐고. 저출산 시대에 더 이상 아이디어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청년을 대표하지 않는 이 때에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떤 경제를 물려줄 것이냐고. 앞으로 우리가 누렸던 경제 호황을 우리 후손에게도 물려주려면 우리도 안정된 직장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을 점쳐봐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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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나 - 사랑의 여신
무라트 툰젤 지음, 오은경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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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본 터키 문학이라곤 아지즈 네신의 풍자 소설들 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을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도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로마의 비너스의 근간이 되는 사랑의 여신 이난나를 모티브로 하는 소설이니 얼마나 아름다울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의 첫장을 넘긴 순간 맞닥뜨린 현실은 조금 달랐다. 처음부터 배경이나 상황을 알지 못하고 낯선 환경에 외따로이 떨어져 그 현실을 이해해야 하는 과정이 조금은 힘겹게 느껴졌기에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한 문화를 접하고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보통 그에 대한 책을 읽을 것이 추천되는데 그 때 추천되는 책의 종류는 인문이나 문화 영역의 책보다는 소설을 읽는 것이 훨씬 쉽게 그 문화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란 말에 동의도 했지만 이난나의 첫 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종교가 다른 이민족과 혼인을 할 수가 없는데 유력한 호족의 아들인 제밀이 큰 무대에 가서 유학하고 돌아오고 나서 이미 결정된 술타나와 별 감흥 없이 결혼한 후에 이방 민족의 딸 쉬메이라를 만나 폭풍 같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아버지에게서 먼 곳으로 떠나라는 형벌을 받고 술타나와 쉬메이라와 함께 다른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호족들의 성에서 겨울을 나며 제밀이 이난나의 여신으로 부르는 아시아를 만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예니체리라는 기독교 아이들을 납치해서 무슬림으로 개종시킨 후 술탄의 노예가 되는 오스만 제국의 핵심 부대도 등장하는데 그런 인물 중 하나인 발랄의 이야기도 교차되어 전개된다. 처음에는 이름도, 상황도 등장하지 않아 제밀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라는 것만 알고 진행하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다.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지금, 여행을 떠난다면 동서양이 공존하는 터키로 가고 싶다. 그 이유 중에는 서양사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인 오스만 제국이란 문화가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인류의 사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즉 수메르 문명에 속하는데다가 거대 로마 제국의 한 부분이었다가 서로마가 멸망한 후에 동로마로 1000년을 더 존속하면서 서양과는 다른 기후,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문화를 만들어낸 그네들의 나라가 색다른 재미를 줄 것만은 확실할 것이기에 가고 싶었다. 바울의 전도여행의 장소였다는 사실도 역사 여행을 떠나고픈 이유 중의 하나였는데, 역시나 소설로 만난 오스만 문화는 전혀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문화였다. 기독교인 아이들을 데려다가 강제로 무슬림으로 개종해서 군사로 훈련되어 노예가 된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문화여서 그런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부다처제란 설정도 황당해서 그런지, 박학다식하고 심성이 고운 제밀이 만나는 여자마다 사랑에 빠지는 현상이 어이없다. 그런 것을 받아들이는 아내들도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는다. 여성들의 현명함과 배려심이 어쩌면 남자들을 막돼먹은 아이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질투가 났지만 술타나로 키워진 첫째 부인이 둘째 부인을 인내하며 받아들이고, 세번 째로 사랑에 빠진 여자를 데려오는 것을 주저하는 남편에게 오히려 먼저 이해할 수 있다고 다른 부인과도 이야기를 다 끝냈다고 알아서 해주는데 남자들에게 참 편한 상황이란 생각만 들었다. 후계자인 아들을 멀리, 혹한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멀리 보낼 것이 아니라 다른 여자와의 결혼, 혹 이방인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이렇듯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부일처제이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에겐 이해하긴 쉽지 않는 이야기만 담겨 있다.

 

여러 여성들을 거느리고 싶은 것이 과연 사랑일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의 여신'이라고 붙이고 있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가고 사랑을 느낄 수가 있는가. 과연 그런 감정을 이성에 대한 값싼 관심 이상으로 볼 수 있는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술타나와 결혼 후에 만난 쉬메이라와의 사랑은 부모가 결정해준 여성에 대해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없어서 일어난 비극적인 일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 이후에 만난 아시아와의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새로운 사랑이 생긴 후에도 다른 여성들이 싫어지지 않았단 것도 희한할 뿐이다. 하렘이 생기게 된 연유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에서 다 어려운 일을 막아줘서 그저 숨만 쉬고 밥만 먹고 잠만 자는 제밀이란 인물은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인물이다. 먹고 사는데 있어서 그 어떤 노동이라도 하는지 모르겠다.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역할을 하지도 않으니 그냥 여자만 보고 육체적 욕망만 느끼기만 하면 되니 어쩜 이렇게나 편할까. 그가 보여준 행동은 햄릿 저리 가라 이다. 딱히 어떤 것을 하겠다는 욕심도 없이 주변에서 주어진 상황대로 휩쓸려 가는데 그가 개인과 부족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 유유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에게 삶에 대해 절박함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늘의 한 끼 식사를 위해 죽을 만큼 처절하게 고생해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고민만 줄창 하고 있을 뿐으로 보인다. 자식을 책임지기 위해 오늘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할 처지라면, 그렇게 두 손 놓고 머리만 굴리는 어리석음을 보이진 않을 것 같다. 오스만 문화를 조금 엿볼 수는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저 육체적 욕망을 사랑으로 혼동하는 유유부단한 한 남자가 등장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가진 것 없고 명예도, 신분도 훨씬 못한 빌랄이 훨씬 더 참다운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인다.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과 제 목숨을 위해 온몸을 던져본 사람만이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서평은 도서출판 아시아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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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생물 콘서트 - 사진으로 보는 생태다큐멘터리
한영식 지음 / 동아시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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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에 살고 있는 생물들을 과연 몇 종이나 알고 있을까. 우리 땅 생물을 떠올리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호랑이가 생각난다. 이 자그마한 땅에 어떻게 그런 맹수가 살 수 있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기도 하지만 옛부터 우리에게 친숙하게 많은 설화에 등장했던 호랑이를 지금은 찾아볼 수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 너무 친숙해서 그랬을까, 우리 손으로 그들을 내쫓아버렸던 것은 어떤 말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현재까지 한국에서 멸종된 생물도 꽤 많다. 예전에는 생물 하나 멸종되는 것이 무어 그리 나쁠까 생각하기도 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어버리는 것도 있기 마련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내 등이 따시고 내 배가 부르니, 이 땅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생물에 대해 그리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조금씩 들다보니, 그리고 이 책을 보니 생물학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한 예로 소나무를 들 수 있다. 소나무는 우리 인간에게는 반가워할 만한 물질을 내뿜는다. 이를 통틀어 피톤치드라 부르는데, 테르펜은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데에 탁월하고 항균 작용, 면역 기능 향상, 중추신경 안정 및 탈취 효과 등의 효과가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소나무으로 인공 조림을 조성하는데 이 소나무의 피톤치드를 싫어하는 병원균, 해충, 곰팡이 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나 풀, 심지어 곤충들까지도 소나무 근처에는 오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소나무만 심어진 산에 자연 재해가 닥쳐 소나무만 모조리 죽었다면 다른 생물이 살 수 없었던 그 곳에는 민둥산만이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솔잎혹파리와 같은 해충을 죽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물들이 복작거리며 살아야 건강할 수 있는데 단일 생물만 있으면 해충에 취약해진다. 또한 야생동물의 서식지도 없애고 있고, 소나무 자체가 다른 활엽수에 비해 물을 머금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홍수와 산사태에 무방비해질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또한 산불이라도 난다면 휘발성 기름 정유가 흘러나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급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하여 생물학적 다양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도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아가듯이, 생물들도 다양한 종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토양도, 불의의 사고도 대비할 수 있다. 다행히 소나무가 생존 전략으로 내뿜는 피톤치드에 별로 민감하지 않은 참나무류의 나무들이 있어 소나무만으로 삭막했던 산에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되었다. 넓적한 잎을 무성하게 만들어내는 참나무는 그늘진 계곡에 모여 살게 되고, 그늘을 싫어하는 소나무는 척박한 양지바른 산마루에 자리를 잡게 되어 산이 새로워졌다. 그에 따라 소나무만 있었을 때는 얼씬도 하지 못했던 다른 생물들이 더불어 존재할 수 있게 되니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계에서는 문제가 점차 사라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호랑이 같은 맹수가 사라지니 그 밑의 초식동물들이 크게 번성한 것도 사실 문제이다. 고라니는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북동부에만 서식하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동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말썽꾸러기가 되어 버렸다. 상급 포식자가 없어짐에 따라 개체 수가 많아진 것은 다행스런 일이겠지만 점차적으로 먹이 경쟁이 치열해질 수 밖에 없었다. 산에 쉽게 먹이를 구하지 못하자 고라니가 선택한 곳은 인간들이 경작하는 농작물이었다. 농작물 연간 피해액이 216억 원이라고 하니, 그 경제적 손실이 엄청나지 않은가. 산야에서 쉽게 먹이를 구하지 못하게 개발했던 인간에게 1차적인 책임은 분명 있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농가들의 파산이 줄줄이 생길 것을 우려해 정부에 유해야생동물 포획을 건의하기도 했단다. 사람의 생존도 분명히 존중받아야 할 것처럼 이들의 원래 터전이었던 곳에서 농작물에 손을 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다른 대책을 마련해줘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다양한 생물들이 모여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훨씬 건강한 삶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우리가 너무나 싫어하는 모기일지라도 그 한 생물이 없어지면 그 윗 포식자들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에 더불어 살아갈 건강한 대책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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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 : 포도원 품꾼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시리즈 3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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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다양한 비유가 나온다. 솔직히 성경을 보더라도 그 의미를 다 알고 이해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싶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참 간단해보이면서도 뜻풀이가 간단하지 않고 심지어는 앞뒤가 반대되는 것처럼 보여 곤욕을 겪기 마련이다. 그런데 류모세 목사님께서 책으로 엮어내신 <열린다 비유>를 보면 간단해 보이던 하나의 비유가 실은 단행본 한 권의 분량으로 엮어져 나올 만큼 그 내용이 방대했다는 사실이 우리가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단 것을 알려준다. 사실상 유대인들의 문화나 풍습,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생겨난 민족들의 사고방식을 우리가 알게 무엇이랴. 게다가 기후도 다르고 역사도 다른데 같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내가 생각되여지는 그대로 진실이라고 믿을 때가 많다. 나도 이 <열린다 비유> 시리즈를 두 번째 보는 것인데, 사고 방식 그 근본을 바꾸고 토대를 다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의심스러우면 다시 들여다보며 성경을 묵상해야 할 줄로 믿는다. 그런데 이렇게 <열린다 비유> 시리즈에 중독되어 가면 걱정스러운 문제가 하나 생긴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수님의 비유에는 아주 짧지만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은데 그것은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어져 나올 만한 것들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류모세 목사님께서 여러 개의 짧은 비유를 묶어서 한 권으로 모아 책을 내실 생각이라고 하셨다. 이 내용이 세 번째 출간되는 <포도원 품꾼 이야기> 비유의 서문에 등장하니, 읽다가 내심 걱정이었던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미리 편안하게 해주신 듯 하다. 아무래도 비유 시리즈는 분량의 문제가 많이 걸려서 나도 이 다음에 나올 만한 비유가 뭐가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걱정 없이 마음껏 보고 싶은 비유를 다 찾아볼 수 있게 될 것 같아 아주 만족스럽다.

사실 굵직굵직한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돌아온 탕자 이야기>, 그리고 바로 이번에 출간된 <포도원 품꾼 이야기>로 다 마무리되었다. 사실 이런 비유 이야기는 유명하긴 하나 성경에서 바로 찾아보진 않아서 이것보다는 성경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비유가 풀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새 부대와 새 포도주 비유를 그냥 넘겨다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럴 때는 아주 굵직한 우리의 세 비유에 대한 책보단 짧은 소책자라도 이 작은 비유의 풀이가 더 다급할 것이다. 바로 내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막혔던 비유는 어떤 것인지 잊었지만, 앞서 인용한 마가복음의 새 부대와 새 포도주 비유는 동생이 물어봐서 기억해두었던 비유였다. 그 부분은 평소엔 나도 잘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 그나마 <열린다 비유> 시리즈를 두 권이나 봤다고 동생이 물어봤을 때는 앞뒤 상황을 연결해서 알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것이 동생도 수긍했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꼭 많은 비유 시리즈가 나와야 하겠다. 저번 책에서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의 탕자보다도 불의한 첫째 형을 들어 바리새인들을 비유한 것임을 제대로 알았지만 그보다도 나는 그 안의 장자에 대한 의무가 더 새롭게 다가왔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빨리 죽어달라는 의미의 유산 상속을 청했을 때 가만히 있었던 것은 장자로서, 그러니까 아버지가 없으면 대신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하는 대리 아버지로서 직무유기했다는 점은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자는 동생이 분할 상속해달라고 요구했던 불효막심한 행동을 방임함으로써 자신도 유산 상속이라는 이득을 챙기고 겉으로만 경건한 척 하며 동생이 방탕하다고 몰아붙였던 것이다. 이런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말씀하셨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 안에 있다고 경건한 척하며 불신자들을 몰아붙이는 가증을 떠는 신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가장 더러운 탕자는 차남이 아니라 장자였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번 책에서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보다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부분에 더 강하게 깨달음이 있었다. 원래 비유에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고난에 같이 참여하기 위해 복잡하고도 여러 관습이 뒤섞여서 얼핏 보면 불의해 보이는 포도원 주인을 통해 전달해주신 비유였다면 나는 마태복음 20장 15절 말씀에 등장하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의 ‘악하게’란 부분을 설명할 때 등장했던 ‘질투’와 ‘시기’란 개념이 아주 새로웠다. 이 책을 보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계속 이 부분을 설명하고 다닐 정도로 새로웠던 유대인들의 ‘질투’란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기’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우리에겐 같은 의미를 가진 부정적인 뜻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질투’는 자기의 소유물을 지키는 의로운 행위이고 ‘시기’는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할 때 그가 죽어서 그의 소유물이 자기 것으로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탐하는 아주 악독한, 살인에 가까운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까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표현의 정당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생겨나는 저차원적인 감정이 아닌 원래 자기의 소유였던 것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정당한 행위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질투하는”이란 표현을 쓰셨던 것이다. 가장 풀리지 않았던 어휘 하나가 이 책을 통해 풀려서 너무 감사했다. 이런 지식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풀리지 않는 어휘 하나를 해독하여 좀 더 하나님을 잘 이해하는 것을 필요한 일이니, 이번의 책은 진짜 내게 필요했던 내용이었다. 어딜 가서 ‘질투’란 단어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더 볼 생각도 안했을 것 아니겠나. 앞으로도 계속 출간해주길 바라는 책 중의 단연 으뜸인 책이겠다.

 

(이 서평은 두란노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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