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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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자리가 없어서 카페로 옴.
목표만큼 읽고 갈 수 있을까...


프루스트는 대상에 대한 욕망이 채워질 수 없는 불가능으로서의아브젝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사랑의 대상이란 고백할 수 없고 주체와 아주 닮은, 그러나 불가능한 동일성과 결합하므로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부적당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의 욕망은 이 불가능한 동일성에 대한 안쪽 주름처럼 느껴진다. 

그 때문에 동성에게 매혹당해서 동성 속에서만 타자를 찾도록 선고받은 고통스러운 변조 · 대상 • 나르시시즘의 사건처럼 체험되는 것이다. 마치 동성애, 《소돔과 고모라》를통해서만 성욕의 아브젝트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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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경멸한다. 그녀의 경우가까이 살고 있기 때문에 경멸의 내용이 더 구체적이라는 것뿐, 사실나는 세상에 이름 석 자를 팔고 있는 대부분의 여류들이 늘 못마땅하다. 그녀들은 모두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다.  - P12

소장은 이 세상이 너무나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어서 밥 먹을 시간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실은 많은 사람이 그녀 때문에 밥맛을 잃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인간 실현을 위한 여성 문제 상담소. - P13

나는 현재 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른바 학생이다. 나는 대학 때의 전공과는 다른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번엔 심리학을 선택했다.
살아가는 데 있어 지식은 아주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나는 심리학 다음으로 철학, 정치학, 인류학 등을 차례차례 섭렵할 계획이다.
물론 학위나 학벌 따위에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서 몇 번이라도 대학원에 등록하여 연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데 나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다.
어쨌거나 첫 번째의 선택은 옳았다. 여성 심리, 특히 고통에 대응하는 여성 특유의 폐쇄적인 정신 분석을 논문의 주제로 삼고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나는 드물게 그 일에 몰두하고 집착하게 되었다. 나중에 서서히 이야기하겠지만, 차후의 지적 순례까지 모두 포기하게 될 만큼 나는 이 일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 P15

웃음을 거부하는 체질인 데 반해 슬픔이나 분노를 수용하는 정신은 또 남다른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이 세상이 아직 웃음의 차례가 아니라고 믿는다. 웃을 수 있는 고등동물이 인간이라지만 과연 그런가. 나는 인간의 웃음을 믿지 않는다. - P17

 사람들은 이렇게 원하지도 않는친절을 베풀고는 돌려받은 보답의 양이 적다고 불평들을 해댄다. - P17

잠자리에 들게 되는 새벽 2시까지 내가 하는 일은 거의 일정하다. 샤워를 하고 그날의 일을 기록하는 일기를 쓴다. 오늘처럼 수입이 있는 날은 장부 정리도 해야 한다. 나는 기록하고 계획하는일에 몹시 철저해서 피곤하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그 일을 빠뜨리고 지나가는 법은 없다.
일기는 별것이 아니다. 나는 사적인 감정을 노트에 털어놓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내 일기는 하루의 궤적을 남기는 데 필요할 뿐이다. 처음엔 내 시간들이 어디로 공중분해 되었는지 알고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무미건조한 나열이지만 나중에 기억이 사라졌을 때 읽어보면 그 시간이손에 잡힐 듯이 떠오른다. - P28

그렇다. 나는 요즘 무언가에 골몰해 있다. 분석하고 조절하고다시 계산을 거듭해 보기를 벌써 몇 달째인지 모른다. 침대에 누워서도 그에 대한 흥분이 가시지 않아 뒤척이다가 몇 번이나 수면제를 복용하곤 했다. 잠이 제시간에 찾아오지 않는 것조차 못 견딜만큼 나는 무질서를 혐오한다. - P29

 마치 희랍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그는 먼발치에서도 환상적인 외모를 확인할 수 있는 남자였다.
나는 평소 그가 자신의 외모를 십분 이용하고 있는 것을 역겹게생각하던 터였다. 그는 어떤 여자라도 자기가 손만 내밀면 자석 앞의 못처럼 거역하지 못하고 딸려온다고 믿는 인간이었다. 내가 왜그의 닳고 닳은 그물에 걸려들겠는가. 가소로운 일이었다. - P35

두 사람은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이어보면 금방 알수 있을 것이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 시작된 여행이 다시 길이 시작된 곳에 이르러 끝나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애초 길은 없었다는 것.
애초 길은 없었다. - P39

이 명제에 충실하기 위해 나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은 계획이나 목적 없이 훌쩍 떠나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바보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얼마나 우스운 소리인가. 무계획이나 무목적 속에서 자유가나온다는 발상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 자들의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길을 향해 떠나기 전에 미래를 모두 계획한다. 그것이 길 위에 서서 뒤늦게 미래를 생각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이다. - P40

나는 평범의 미덕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나는 보통의 삶보다는 강렬하고 눈부신 특별함에 압도적으로 경도된다. - P42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에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내가선택한 이 운명 말고, 다른 운명의 남자가 어딘가 꼭 있을 것으로생각하는 여자들의 우매함은 정말 질색이다. 남자는 한 종(種)이다 전혀 다른 남자란 종족은 이 지구상에 없다. - P46

나는 인기인들의 처세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에진실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모두 추악한 진실일 뿐이다. 사람들은겉으로 나타난 아름다움은 잘 보지만 그 이면의 추악함에는 의외로 어둡다. 나는 백승하가 뒤집어쓰고 있는 환상의 너울을 벗겨내고 싶은 욕망에 몸이 떨릴 지경이다. 그의 처세술이 완벽하면 할수록 나의 욕망은 더욱 강해진다. - P47

나는 어떤 일이든 강한 집념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한번 마음먹은 일이라면 그것으로 파국을 맞을망정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성격은 의외로 드물다.
모두 다음에 닥칠 기회를 행여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망설인다. 매사에 흐리터분하고, 간단한 일조차 결단을 못 내리고, 늘 주저주저하며 뒤를 돌아보는 소심한 기회주의자들이 나는 싫다. 그 우유부단함을 보고 있자면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 P50

남기와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은 없다. 더욱이 남기를 데리고 내아파트로 돌아가서 내가 지은 저녁을 먹일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않았다. 남기 같은 인간을 다루는 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의첫 번째는 일정한 거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다. 인간은 간사한동물이어서 처음에는 감지덕지하며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그 이상을 바라게 되는 법이다. 원숭이는 원숭이일뿐이다. 원숭이에게 사람 대접을 해서는 사람에게도, 원숭이에게도 모두 좋지 않은 결과만 낳는다. - P62

희생이라니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이 미덕이라는주장은 기득권을 쥔 자들의 염치없는 요구일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정신의 진보를 억압한다. 억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억압에 대해서 말하라면세상의 반절인 여자들이 당한 수난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가해자는 세상의 또 다른 반절인 남자들이다. 바로 한 세기 전만 해도 여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난로와 책상 같은 물건에 불과했다.
여성해방의 선진국처럼 인식되는 미국에서도 여자의 선거권이 인정된 때는 겨우 1920년이었으니 더 무엇을 말하랴. - P72

그 많은 불행한 여자들이 모두 희생이나 인내를 진실로 미덕이라고 믿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녀들은 단지 힘이 없었을뿐이다. 생각해 보라.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 희생과 인내를 감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그 두꺼운 역사책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없다. 약자가 택할 길은 희생이나 인내밖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인것이다.
그래서 나는 넋두리에 후렴구처럼 달려오는 ‘죽지 못해 살지요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는 그녀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들은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힘, 어떤 거대한 능력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넋두리의 암호를해독해 나갔다. - P73

그랬다. 나는 그녀들이 간절히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나는 비로소 내가 초월자라는 것을 응징의대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전화 속의 고뇌에 찬 음성들이 새롭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요?  - P74

안온한 일상을 마치고 나면, 새롭고 긴장된 밤이 오는 것이다.
얼마나 훌륭한 하루인가. 그렇고 그런 일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나른한 몸으로 귀가하여 역시 그렇고 그런 밤을 보내는 벌레 같은삶을 나는 경멸한다. 미지를 향한 끝없는 발돋움, 삶이란 그 한없는 떨림의 공명판이 아니던가. - P83

당신들은 자신의 인생이 왜 빗나갔는지 그 이유조차 모릅니다.
그래요. 대안이 없을 때는 맹목적으로 자신 속으로 파고드는 심정을 나는 이해합니다.자, 하지만 이제부터는 귀를 열고 눈을 뜨고입을 여세요.  - P83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말에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것이 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영 비위가 상한다. 단언하건대, 사회를 어지럽히는 인사는 있을지언정 사회를 지도하는 인사는 없다. 대단찮은 학식이나, 상업주의 언론에 이름을팔은 속된 명성으로 자신을 지도층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가장 혐오한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 P86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 P86

나는언어의 표피를 만지는 것보다 그것의 본질을 만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쓸데없는 말의 낭비는 딱 질색인 것이다. - P98

 나는 내 기억의 저장 창고를 아주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이니까. 사람이 평생을 살며 저장해야 할 기억은 무수히 많은 법이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선별하고 취사선택해서 회상의 목록을 만든다. 나의 무의식은 이런 일에 아주 까다롭다. 즐겁고 아릿한 것만 추억하고 살기에도 짧은 삶이 아니던가 - P114

거짓말일수록 당당하게 해야 한다. 나는 조금도 꿀릴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 술술 이야기를 이어간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라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나는 어떤 일이든 그 순간에는 빠져들고 마는 성격이다. 이런 연극도 유치하긴 하지만 재미없지는 않다. - P136

희고 말간 것은 싫다. 탱탱하고 반들거리는 피부도 싫다. 한 번도 깨져 보지 않아 굳은살이 배기지 않은 삶은 정상적인 삶의 행로라고 볼 수 없다. 그런 삶은 가짜다. 역사가 없는 것이다. - P144

"일마즈 귀니 감독의 영화들을 구해줄 수 있겠소? 당신도 터키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일마즈 귀니에 대해서 알고 있으리라 믿소.
「욜』이나 양떼들』, 『벽』을 구할 수 있다면 더 행운이겠지만."
그는 벽에 등을 대고 일마즈 귀니 감독이 만든 영화 제목들을주욱 외웠다. 총알도 나를 못 뚫는다. 굶은 이리들, 도망자들, 고통, 적, 친구, 내일은 최후의 날, 불안, 희망·······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화 제목들은 거의 동시에 내 마음속에도 하나씩 새겨졌다. 총알도 나를 못 뚫는다, 적, 친구, 불안, 희망………. - P151

아무도 하지 않은 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나는 그런 미지의언어를 원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이 세상에 새로움‘
이란 없다‘는 식의 단언이다.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나의 출발점은 그 낡음을 뒤집은 자리에 있다. 장애물이 나와도 나는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세상은 나의 운동장이다. 절대 그늘에 앉아 시간이나 갉아먹으며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 P155

나는 말이 간직한주술의 힘을 믿는 편이라서 ‘발설‘이란 단어의 재수 없음을 상당히경계한다. 천기를 누설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재앙이 있나니... - P167

남기처럼 우직한 인간에게는 순수와 용맹은 한 이름의다른 얼굴일 뿐이다. 순수하기에 용감한 것이고 용감할 수 있기에순수한 것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르거나, 추하고 아름답다는 식의이분법적 논리가 발붙일 자리가 없다. 그 단순 명료함, 이것이 우직한 삶이 지닌 미덕이다. - P175

나는 이런 사람이다. 베푸는 것은 철저하게 베푸고 또한 괴로히는 것도 철저하게 괴롭힌다. 나는 어중간한 것은 정말 싫어하니까. - P179

그리고 나는 그의 첫 발언이 자신이 갇혀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알려달라는 질문일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날아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 P189

지금부터는 부드럽고 인간적인 강민주의 모습을 보여줄 차례였다. 이런 순서는 내가 계획한 바가 아니었다. 역사가 깊은 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억압과 회유의 반복이라는 양날의 통치 기술이 아주 성공적으로 쓰여 왔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이 기술이 전폭적으로 사용되었다. 내가상담소에서 채집한 가정폭력의 거의 일백 프로가 모두 이 악순환을 밟고 있다. 하루는 실컷 아내를 두들겨 팬 남편이 다음날에는상처를 치료할 약과 아내에게 바칠 선물을 사들고 와서 눈물겹도록 지극한 정성으로 아내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다.  - P197

이쯤에서 나는 잠시 침묵을 준다. 이런 공백은 말보다 백배 효과가 있는 법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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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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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하려면 어디로 가는지보다 

어디서 가는지를 알아야 한다.' - 차파예프와 공허 (영화 '6번칸')




나는 덜어내고 싶은 사람인데 잘 덜어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불필요한 것들이 많은데 원하는 만큼 덜어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편하고 못마땅하지만 결국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일지도. 바란다고 생각하는 혹은 착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래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나와 대조적인 캐릭터를 좋아한다. 소설 속 강민주는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는 삶을 산다. 하루키의 1Q84 속 아오마메도 잠시 떠올랐다.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강민주는 상담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는 데다 지적이며 싱글이고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는다. '잠이 제시간에 찾아오지 않는 것조차 못 견딜 만큼 무질서를 혐오'하는 그녀가 굳이 매일같이 남의 하소연을 참아내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남편의 폭음, 만취 상태에서의 구타, 시집 식구들의 은밀한 종용, 운명이니 체념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무책임한 설득. 그리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구하러 오는이 하나 없는 으슥한 산길로 끌려가 죽을 만큼 맞으며 당했는데, 그랬는데도 강간당했다고 이혼까지 당해야 합니까? 내가 무슨 페스트 환자예요? 왜 나만 보면 모두들 슬슬 피하고 체념하라고 합니까?




법적인 조언으로 통화를 마치면 민주는 해당 사례를 기록하고 마지막에 간략하게 의견을 남긴다. 그녀는 어떤 목적을 위해 하루하루 여성들의 불행을 채집하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은 각자의 불행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순간적인 분노로 그칠 뿐 근본적인 해결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저 상담을 통해 마음껏 답답함을 토로하고 작은 위로를 얻은 것으로 만족했다. 민주는 근본적으로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상징적인 전쟁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여성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백승하라는 배우를 납치하는 것이다.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남기는 민주의 일을 돕기 위해 조용히 맡은 일들을 처리해나간다. 




여자들은 당신을 통해 환상을 보게 되고, 현실을 극복할 힘을 잃게 되지요. 그게 당신 죄입니다. 나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정말 참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그리고 이런 질문은 자신의 힘으로 해답을 얻어야 자신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 스스로 해답을 얻을 기회를 빼앗을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234





나는 어떤 일이든 강한 집념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한번 마음먹은 일이라면 그것으로 파국을 맞을망정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성격은 의외로 드물다. 모두 다음에 닥칠 기회를 행여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망설인다. 매사에 흐리터분하고, 간단한 일조차 결단을 못 내리고, 늘 주저주저하며 뒤를 돌아보는 소심한 기회주의자들이 나는 싫다. 그 우유부단함을 보고 있자면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50




그녀는 백승하를 납치하고 경찰에게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긴다. 심리학을 전공한데다 뛰어난 머리로 몇 수 앞을 내다볼 줄 알기에 언론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강민주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결말일까? 금지되었으나 그녀가 넘으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지 윈스턴을 들으며 드라이브를 즐기던 것처럼 그 여정을 충분히 만끽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에게는 소설의 결말보다도 과정이 흥미로웠다. 양귀자의 글을 읽으며 정언명령, 아포리즘적 성격이 짙다고 느꼈다. 이런 큰언니가 내게 있었더라면 조금은 더 원하는 삶에 다가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언니라도 강민주는 동생에게 살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흐트러지고 안이한 감정에 빠져들 때 새벽의 찬 공기 같은 생기를 불어넣어 줬을 것 같다. 털고 일어나 날아야 하는 건 내 몫이지만 내가 날아야 하는 이유를 잊지 않도록 들려줬을 것 같다.









코너 앞에선 여성들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금지된 선을 넘을 것인지 그냥 그대로 머무를 것인지. 양귀자는 소설로 김지은은 현실에서 코너를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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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15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글이 너무 좋네요 미미 님. 저 이십년도 더 전에 그러니까 대학 시절에 이 책 읽었는데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읽는다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일 것 같아요.

청아 2024-01-15 20:5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은 이 소설을 이십년도 전에 읽어보셨군요!! 통쾌하기도 하고 혼나는 기분도 들었어요. 대체로 많이 웃었는데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도 다시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김서형 배우를 주인공으로 떠올리며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4-01-15 21:24   좋아요 1 | URL
아놔 20년 전 대핫생 이런 말 하지 마! ㅋㅋㅋㅋㅋㅋㅋㅋ

청아 2024-01-15 21:3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아 그러고 보니 세월 참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1-15 21:50   좋아요 1 | URL
맞네. 내가 그 말만 안했어도 남들이 다 이십대라 짐작할텐데.. 쩝…

새파랑 2024-01-15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너무너무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런 내용이었군요~!! 소설을 보는 이유중 하나가 현실에 만나기 힘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인거 같아요~!!

청아 2024-01-15 20:57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따라서<모순>을 읽어보려다가 대출 초과라 이 책을 빌려 읽었어요! 양귀자 작가님 글을 너무 선명하고 재미나게 잘 쓰시더라고요. 맞아요! 만나기 힘든 캐릭터를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도 듣고요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01-15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서재에 다시 등장할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미미님 글을 읽으며 완전 잊었던 내용을 어렴풋이 떠올려 봅니다.
제목이 넘 멋있죠!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그러나 결코 실천하지 못하는 저 입니다.

청아 2024-01-15 23:00   좋아요 1 | URL
그러셨나요? >.< 제목이 강렬해서 궁금했었어요.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소설인데 이제야 만났네요. 페페님도 읽어보셨군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 읽는 동안 대리만족, 통쾌함이 컸던 것 같습니다.

물감 2024-01-17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슴미다. 이건 본문과 상관없는 얘긴데요,
제 서재의 하얀 배경과 미미 님의 검은 배경이 확 대조됨을 느껴서요.
어쩌면 미미 님도 저랑 같은 상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됩니다.
아오마메를 얘기하셔서 더 잘 알것같은...

청아 2024-01-17 10:00   좋아요 1 | URL
그럴지도요. 하얀 배경으로 바꾸려다가 이걸로 골랐어요. 요즘 블랙이 마음에 끌리고 편안하네요. 서재에서 제 이미지와는 달리 저는 아오마메처럼 살고 싶어요. 물감님, 본문과 상관없는 얘기 좋은데요? ^^

자목련 2024-01-17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귀자 소설, 최진실이 주연한 영화도 생각나네요. 내용은 기억이 안 나고..

청아 2024-01-17 10:41   좋아요 0 | URL
소설을 읽고 찾아봤었는데 최진실은 너무 순둥이 같은 이미지라고 느꼈어요.ㅎㅎ 영화가 다시 만들어진다면 김서형 배우가 강민주 역을 잘 소화할것 같아요.

Yeagene 2024-01-18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엄청 재밌게 읽었던 작품인데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습니다.미미님 독후감은 저랑 비교도 안되게 고급지네요 ㅎㅎ

청아 2024-01-18 14:01   좋아요 1 | URL
발췌문들 때문에 착시현상일거예요ㅎㅎ
예진님도 재밌게 읽으셨군요. 대출해서 읽다가 반해버려서 다른 책이랑 구매했어요.
예진님, 요즘 왜 이리 뜸하신 거예요? 다시 서재에서 함께 해주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