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내 이웃들처럼 정원사 복장을 했다. 그러나 나는 고장난 잔디깎는 기계를 잔디밭 위에서 끌고 가는 대신, 제멋대로 자라난 화단의 잡초를 뽑는 대신, 위스키가 담긴 커다란 잔 하나를 앞에놓고 손에는 책 한 권을 든 채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여섯 시에서 여덟 시 사이에 내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고,
그때 폴이 불쑥 찾아왔다. 내가 죄인이고 무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두 감정은 강도 면에서 거의 비슷했다.
- P20

"많이 따분하세요?"
내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존재 자체라 할 수 있는 이 기묘한 잡동사니 속에서 사람이 자신이 많이 따분한지 조금 따분한지, 아니면 잘 모르겠는지 알 수 있는 걸까? 
- P28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삼 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미지의 청년때문에 처음엔 나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지고, 그 다음엔 무용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 어리석은 직업이 매달 모았다가 매달 써버리는 몇 푼의 달러가 아닌 그 어느 곳으로 날 데려간단 말인가?
그러나 LSD를 복용하는 무능력한 부랑아에 때문에 이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분명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약물에 절대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듯 사람들이자신의 기호를 뭔가를 경멸하는, 뿐만 아니라 그 기호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경멸하는, 하나의 철학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탐탁해하지 않았다
- P29

나는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s, 1908~1989: 미국의 여배우. 다감하고지성적인 연기로 인정받았다. 〈청춘의 항의〉, 〈소문난 여자〉, 〈이브의 모든 것)등에 출연했다. 옮긴이) 같은 냉소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 P30

 내가 이 녀석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이녀석은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걸까?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광기라고 부르지만, 내게는 언제나 그것이 사랑의 유일한 분별 있는 형태로 여겨졌다. 이 녀석을 재규어 자동차의 바퀴 아래로 떠민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약물 때문이었을까? 혹은 절망 때문에? - P31

나는 그의 침대 발치에 앉아 있었다. 창을 통해 저녁 공기가흘러들어왔다. 바다 냄새가 실린 공기, 내가 처음 들이마셨던 사십오 년 전부터 지금까지 잔인하다 할 정도로 변함없는, 너무나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그 공기가. 나는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이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실까? 지나간 해들, 입맞춤들, 남자들의 더운 몸에 대한 향수가 엄습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 P32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삶은 때로 내게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냉혹한 것으로 여겨졌고, 어떤 사랑들은 실제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마흔다섯 살이 되어 여기에, 내 정원안에,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앉아 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채로. - P36

"말하자면 프랭크는 우쭐해지고 기분이 좋았던 거지. 그리고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나를 떠났어. 그래서 난 마리 다구(Marie d‘Agoult, 1805 ~ 1876: 프랑스의 문필가, 1848년 혁명 이야기』, 『단테와 괴테』, 『넬리다』 등의 저작을 남겼으며, 프란츠 리스트와의 사이에 세 명의 아이를 두었다. 옮긴이) 처럼 절대로 돌이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거야. 무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말이야. 놀랍니?"
- P39

"당신은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절대 당신을 떠날 수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눈을 감고 희미한 목소리로 시집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그의 마음에 들 만한 시집을 찾으러 서재로 갔다. 그것은 우리가 치르는 의식(儀式) 중 하나였다. 

나는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혹은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월트 휘트먼에 관한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1898~1936: 스페인의 시인 겸 극작가, 시집 『노래의 책』, 『집시 가집』으로 유명하며, 극작가로서 연극의 보급, 고전극 부활에도 힘썼다. 옮긴이)의 시를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낭송했다.

"하늘에는 인생이 피할 곳이 있고,
육체들은 새벽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 P41

나는 생각했다. 프랭크는 어떤 종류의 용기도 없는 사람이었다. 매력이라면 전부 갖추고 있었지만, 용기라고는 약에 쓰려고해도 없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자살을 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할 일이 자살밖에 없지만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 많은 사람을생각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 P43

"당신 힘들겠어요."
그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난 그를 오랫동안 사랑했으니까."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당신을 떠났어요. 그래서 벌 받은 거죠. 인생은 그런 거나는 반론을 제기했다.
"너 유치하구나. 하지만 고맙게도 인생은 너처럼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
"인생은 유치할 수 있어요."
- P50

"당신은 당신 생활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설명해요?"
그의 목소리에 경멸의 억양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몹시화가 났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루이스? 나에겐 내 삶이 있고,
친구들이 있어. 그리고 또……… 또 내게 수작을 거는 남자들도있어."
마지막 한마디를 하면서 나는 모욕감이 절정에 달한 나머지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흔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
- P57

스크린 속의 그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크린 속의 그에게는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강렬하고 냉혹한, 극도로 사람의마음을 끄는 어떤 것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그것은나를 불편하게 했다. 스크린 속의 그는 거침없고 놀라운 존재인동시에 낯선 사람이었다. 스크린 속의 그가 일어나고, 벽에 몸을기대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하품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 마치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 있는 것처럼,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과연 카메라를 보기는 한 것인지 궁금해질 만큼. - P61

오직 폴 브레트만 스튜디오의 바에서 갑자기 함께 하게 된 점심 식사 자리에서 루이스를어떻게 할 셈이냐고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조금 야위어 있었고, 그런 모습이 그에게 잘 어울렸다. 그는 이 고장의 사십대남자들이 곧잘 짓는 조금 슬픈 표정을 했고, 그런 그를 보자 세상엔 남자들이 존재하며 연애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명랑하게 대답했다.  - P64

나는 목덜미와 등줄기에 작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남자의 손이 목에 닿은 일이 야기할 수 있는 육체적 흥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 흥분이라면 내가 잘 알고 있지만 그것과는 분명성질이 달랐다.
- P71

이런 감미로운 상황이 삼 주 가까이 지속되었다. 아! 사람이삶을 사랑할 때 삶이 발산하는 매력을 나는 결코 제대로 묘사할수 없을 것이다. 낮의 아름다움, 밤의 혼란, 알코올과 쾌락이 선사하는 현기증,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 일이 가져다주는 흥분,
그리고 건강, 또한 잠이 베개 위에, 죽음의 자세 속에 우리를 다시 묶어두기 전에 각자의 앞에 놓인,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든거대한 낮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생생하게 일깨우는 믿을 수 없는 그 행복을, 나는 하늘에, 신에게, 혹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해준 내 어머니에게 충분히 감사할 수 없으리라. 모든 것이 내것이었다.  - P74

내 안에는불안해하는 어떤 것이 분명 존재했고, 나는 미지의, 병적이지만결정적으로 ‘사실‘ 인 어떤 것을 향해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나는 몸을 흔들며 웃었고, ‘안녕, 루이스." 하고 말했다. 그도 나에게 답례로 미소를 지었다.  - P75

나는 후회가 가득한 마음으로 잠자리에누웠고, 자정쯤에 다시 일어나 그에게 감사와 사과의 편지를 썼다. 몇몇 표현은 너무 달콤해서 지워야 했다. 나는 편지를 그의베개 밑에 넣어둔 뒤 그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깨어 있었다. 그러나 새벽 네 시가 되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안도와 슬픔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에게 마침내 정부가 생긴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 P79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엄연히 네 권리야. 난 그냥 롤스로이스 때문에 기뻤다.
는 것, 그런데 너무 놀란 나머지 너에게 그걸 이해시키지 못했다.
는 걸 말하고 싶었어. 그뿐이야. 아무튼 미안해."
그가 말했다.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절대로요."

(로멘틱해!ㅋㅋㅋ) - P84

1925년형 롤스로이스를 일요일 아침에 세차해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커다란 기쁨 중하나를 모르는 셈이다.  - P86

그러나 제기랄, 나는 때때로 삶과 그 연쇄적인 순환의 고리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그건 우스꽝스러웠다. 내가 그래왔듯이, 모든 형태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밑바닥에서부터 삶을 증오할 필요가 있었다.
- P87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에 나오는, 고독한 알코올 중독 여주인공과 비슷해 보였으리라.  - P89

그가 내 의자에 몸을 기댔고,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밀었던손을 그의 머리칼 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머리를 뒤로 젖혀 내무릎 위에 얹었다. 급작스럽고도 강렬한 몸짓이었다. 그는 눈을감고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고, 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그의 머리칼에서 손을 다시 거두었다.  - P93

장례식은 화려했다. 두 달 동안 제리 볼튼을 합쳐 할리우드의유명인사 두 명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존자가 보내온 헤아릴 수 없는 조화가 그녀의 무덤을 뒤덮었다. 나는 폴 그리고 루이스와 함께 거기에 갔다. 세 번째 장례식이었다. 바로 직전은 볼튼의 장례식이었고, 그 전에는 프랭크의 장례식이었다. 나는 세심하게 손질한 묘지의 산책로를 한 번더 걸었다. 나는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연약하고, 잔혹하고, 탐욕스럽고, 삶에 환멸을 느꼈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를 가진 그들 세 사람을 그곳에 묻었다. 
- P97

"당신과 함께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그 살아 있는 대답이니까. 신 그 자신과 함께 신의 존재에 대해 토론할 수 없는 것처럼."
폴이 말했다.
- P99

"당신은 …… 당신은 알아야 해요…….. 당신은 선량해요. 사람들은 대개 전혀 선량하지 않죠………. 그래서……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조차 선량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 P100

"루이스, 내 사랑...."
그러자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 품에 와락 안겼다. 그는 기묘한 오열과 동요에 몸을 떨었다. 그는 반쯤 질식 상태였고, 그런모습을 보자 나는 겁이 났다.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내가 들고 있던 커피가 양탄자를 적셨다.  - P108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 얼굴 역시 붉어졌을 것이다. 나는 J.,
H. 체이스(James Hadley Chase: 영국의 소설가. 미스 블랜디시』, 『새들에게말하라』, 『이브』 등 냉혹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추리소설을 썼다. 옮긴이)의 분위기와 델리(Delly: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큰 인기를 끈 로맨스 소설 작가- 옮긴이)의 분위기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상했다.
- P117

"당신 날 원망해요?"
루이스가 상냥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를 기쁘게 해주려고 사람 세명을 죽인 누군가를 ‘원망‘ 조차 할 수 있겠는가? 그런 표현은내게는 조금 유치하게 느껴졌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는 척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텅 비어 있었으니까.
- P118

갑자기 끔찍이도 외롭고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는 비밀이, 치명적인 비밀이 있었다. 나는 성격상 절대 비밀 같은 것을 몰래 간직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새벽까지 그렇게 깨어 있었다.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감상적인 내 살인자가 자신의 조그만 침대에서 꽃과 새들의 꿈을 꾸면서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을 동안.
- P129

나는 그 달콤한 살인자가 아주 좋은 가문 출신이고, 학교 성적도 우수했으며, 그를 고용했던 사람들이 그를 매우좋아했다는 것, 다만 방랑벽과 변화를 좋아하는 기질 때문에 화려한 경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입을 헤벌린 채 두 남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이 청년은 최고의 팜므 파탈인 도로시 시모어의 품안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완벽한 시민이었다. - P159

내가 총애하는 살인자와 함께 느긋한 마음으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러나 이런 손쉬운 행복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 행복은 사람을 속박한다. 행복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상심에서 빠져나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최악의 근심거리 한가운데에서 헤엄치고, 몸부림치고, 스스로를 변호하고,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돌연 행복이 조약돌처럼 혹은반짝이는 햇빛처럼 우리의 이마를 친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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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3 0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3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성은 자기희생이라는 십자가형에 처해 있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명확히 문화적인 탁월함과 개성이 부정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미치게 되는 것이다. 여성들의 광기는 그런 방식으로 또 다른 형태의 자기희생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와 같은 광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이 성적· 문화적으로 거세되는 강렬한 경험이며 힘을 향한 암울한 탐색이다. - P148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정신과의사와 소설가가 연출한 광기의 초상은 주로 여성이었다.  - P150

 이제 여성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오래 살게 되었고 남성들보다 긴 수명을 누리지만 점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여성을 필요로 하는 곳은 점점줄어들고 있으며 여성을 위한 공간은 없고 그들이 유일하게 소속되는 공간은 가정뿐이다. 최근에 이렇게 쓸모없어진 많은 여성들이 우울증, 불안, 공포증 또는 식이장애의 증상을 보이며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P151

정신병원의 가부장적인 속성은 미셸 푸코, 토머스 서즈(Thomas Szasz), 어빙 고프먼(Erving Golfman), 토머스 셰프(ThomassScheff) 등에 의해 기록되었다. 4 언론인, 사회학자, 소설가들은 환자는 초만원에다 돌봐줄 직원은 턱없이 부족한, 야만적인 공공정신병원과 감옥, 병원이 미국에 널려 있음을 개탄하면서 기록하고 분석해왔다.  - P151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만행은 계산된 것이든 우연한 것이든 간에 모두 ‘바깥‘ 사회의 야만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정기적으로언론매체에 등장하는 그러한 시설에 관한 ‘추문‘은 모든 잔혹한 행위가 그렇듯 일상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일들이다. 

🌟🌟🌟🌟🌟 - P152

‘여성적‘ 역할에 적응하는 것은 여성의 정신건강과 정신질환 치료의 경과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 P153

금욕은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에 지켜야 하는 공식 명령이다. 환자들은 이곳에서 영원히 사춘기를 살도록 되어 있다. 정신병원에서 성욕과 공격성은 가족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조롱과 처벌의 대상이다. 전통적으로 정신병원 병동은 성별 격리적 (sex-segregated)이다. 동성애, 여성 동성애, 수음은 비하되었다. 하지만 여성이나 연약한 남성 환자에 대한 병원 관계자또는 다른 환자들의 성적 학대가 만연했고, 자유롭게 선택된 성관계는 여전히 거부되었다.
- P156

여성 환자를 감시하는 이들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병원 내 위계구조상 비교적 힘이 없으며, 그들의 (제멋대로인) 딸들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감시와 감독은 여자아이 같은 여성환자를 강간과 매춘과 임신, 그로 인한 비난으로부터 보호해주지 못한다. 이것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어머니와 같은‘ 감시, 감독이 ‘현실‘ 세계에서 ‘여자아이로서의‘ 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정신병원 내 의료진 및 종사자, 그리고 남성 입원 환자들에 의해 여성 환자들이 강간당하고 임신하고 매춘하는 실태를 무수히 많은 언론이 수년에 걸쳐보도해왔다. 그때마다 나는 이러한 다수의 여성들을 위해 증언에 나섰다.
- P157

상당수의 남성도 심각하게 불안정하다.
하지만 많은 남성이 불안 증세를 보인다고 해서 신경증적이라고 간주되거나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치료받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모든 남성, 그중에서도 특히 백인이고 부유하며 나이 든 남성은 여성보다 훨씬 더 매우 불안한(혹은 불안하지 않은) 충동을 보이기 쉽다. 전반적으로 남성은 허용되는 행동의범위가 여성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정신질환으로 입원하게나 또는 그런 꼬리표가 붙는 것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행동으로 인정되는 것과 관련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여성에게는 남성에 비해 훨씬 적은 행동이 허용되고, 그들의 역할 영역에 더 엄격하게 국한돼 적용되기 때문에 여성이 병적이거나받아들일 수 없다고 간주되는 행동을 더 많이 저지르는 것처럼보이는 것이다.

🌟🌟🌟🌟🌟 - P158

구금에 가까운 정신병원 치료와 대다수 의사들의 반여성적인 편견을 생각했을 때 도움을 청하는 여성이나 증상을 가진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조건반사적인 자기파괴적 행동에대해 사실상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 P159

여성들은 아마도 또 다른집단에 의해 노예화된 최초의 인간 집단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여성의 일‘이나 여성의 심리적인 정체성은 노예제의 조짐과증상‘을 드러내는 데 있다.  - P161

전통적으로 우울증은 ‘이상적인‘ 자아의 상실, 애증의 대상의 상실이나 자기 인생의 ‘의미‘의 상실에 대한 반응(상실에 대한 표현)으로 인식되었다.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서, 외부로 향했어야 하거나 외부로 향할 수 있었던 적개심이 자신의 내부로방향을 돌리게 되어 우울증이 생긴다는 것이다.‘공격성 보다는 우울증이 실망이나 상실에 대한 여성적 반응이다. 

그런데 연구조사의 임상적 증거를 놓고 봤을 때 이러한 견해는 전체든 일부든 간에 논쟁의 소지가 다분하다. 우선 대부분의 여성이 어머니를 ‘상실했다‘ ㅡ또는 한번도 진정으로 ‘가진 적이 없었다ㅡ는 점에 주목하자. 여성에게 어머니의 상실은 남편이나 연인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단단한 ‘이상적‘ 자아를 발전시키는 여성은 거의 없다. 삶의 의미에 관심을쏟는 일에 격려는 말할 것도 없고 허용조차 받지 못하는 여성이대다수다(물론 많은 남성들도 그렇겠지만, 확실히 여성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그렇다). 

여성은 삶의 의미를 지탱하고 있는 실존적인 기반을 상실한다기보다 ‘여성‘이라는 직업을 잃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은 그들이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을 상실할 수 없다. 또한 10장에서 논의하겠지만, 여성은 ‘이기기 위해 "지도록‘ 조건화되어 있다.

🌟🌟🌟🌟🌟🌟🌟🌟🌟🌟 - P163

대부분의 임상의들은 여성의 성적 자기규정에 필요한 사회정치적 (심리적) 조건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남성들이생산과 재생산의 수단을 통제하고 있는 한 여성들은 결코 성적으로 자신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성(또는성적 쾌락을 위한 그들의 능력)을 경제적인 생존 및 모성과 맞바꾸어 왔다. 익히 알다시피 여성의 불감증은 그와 같은 맞교환이 없어져야만 없어질 것이다. 매춘, 강간, 가부장적인 결혼이혼외 임신, 강요된 모성, 비모성적인 부성, 나이 든 여성의 성적박탈과 같은 개념(관행)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는 한, 여성들은
‘성적‘일 수가 없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의 불감증은, 여자아이들이 불감증을 겪지 않고 있는 여자 어른에게돌봄을 받고, 그런 어른들을 보고 자랄 때 없어지게 될 것이다.

🐷🐷🐷🐷🐷 - P168

남성의 성욕과 탐욕이 전 세계적으로 여자아이들과 여성에대한 끔찍한 인신매매를 조장해오고 있다. 1970년대 초 방글라데시에서 강간은 - 공공연한 장소에서 자행되어 비디오에 녹화된 윤간을 포함해 - 전쟁의 무기가 되었다. 1990년대 보스니아와 알제리에서, 가장 최근에는 르완다와 수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생식기를 훼손당하고, 질이 꿰매어졌다. 이는 곧 윤간이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물리적고문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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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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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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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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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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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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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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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5: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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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6: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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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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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6: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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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1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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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12-31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오늘은 2021년 마지막 날입니다.
좋은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희망 가득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미 2021-12-31 23:58   좋아요 2 | URL
네ㅎㅎ 항상감사해요♡ 서니데이님도 좋은 밤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는 공중화장실이나 공용 음수대를 이용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의 소다수 병에 입을 대고 먹지 말라고, 감기에 걸리거나 낯선사람과 놀거나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공중전화로 이야기를 하거나 노점에서 음식을 사지 말라고, 비누와 물로 손을 꼼꼼하게 씻기 전에는 뭘 먹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우리는 모든과일과 야채를 씻어 먹어야 했고, 병들어 보이거나 폴리오의 분명한 증상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호소하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어야 했다.
- P14

이 자로 잰 듯 윤곽을 그리고 있는 얼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뜻밖에도 높았지만, 그것 때문에 외모가 풍기는 위력이 약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쇠로 만들어져 언제까지나 닳지 않을듯한 눈에 띄게 또렷한 얼굴,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강인한청년의 얼굴이었다.
(왠지 김종국느낌이다) - P20

"이게 무슨 뜻이지?" 캔터 선생님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의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으며, 가슴에 단단히 팔짱을 끼고 있는모습은 부동不動의 화신처럼 보였다.  - P22

이렇게 승리를 거두고 나자 할아버지는 안경을 낀 열 살짜리를 버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별명에 고집과 거세고 기운차고 의지가 강한 불굴의 정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 P31

그는 뉴어크 거리에서 반유대주의 갱들과 싸우다 여러 번 코가 깨지면서 두려움을 극복했다. 슬럼에서 보낸 소년 시절에 이 도시에서 흔하게볼 수 있었던 유대인에 대한 폭력적 공격은 그의 인생관을, 또뒤이어 그의 손자의 인생관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손자에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옹호하고 한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옹호하라고, 또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삶이라는 불안한전투에서 "대가를 치러야 할 때는 치르라" 고 가르쳤다.  - P31

그는 이 학생들에게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가르친 것을 가르치고 싶었다. 강인함과 결단력, 신체적으로 용감하고 신체적으로 건강해지는 것, 남들에게 휘둘리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것, 그들이 두뇌를 사용할 줄 안다는 이유로 허약한 유대인이나계집애 같은 유대인이라는 비방을 당하지 않는 것.
- P34

"오직 옳은 일, 옳은 일, 옳은 일, 옳은 일만 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사려 깊은 사람, 합리적인 사람, 남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 인생 어디에서 양식 良識을 찾아야 하는 거요?"
- P53

처음 보는고등학생 두 명이 여름의 애창곡 가운데 하나인 (Ill Be SeeingYou>가 나오는 주크박스 옆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샤가 라디오에서 듣고 싶어하는 노래이기도 했는데, 남편이나남자친구가 전쟁터로 떠나 홀로 남겨진 수많은 아내들과 여자친구들 때문에 그렇게 인기가 좋은 것이었다. 그는 마샤가 인디언 - P59

그의 할머니는 백일해 환자가 완장을 차야만 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백신이 개발되기 전에 도시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병은 디프테리아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초기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던 때도 기억했다. 주사를 맞은 자리가 심하게 감염되어 지금도 오른팔 위쪽에크고 울퉁불퉁한 원형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실내복의 반소매를 밀어올리고 팔을 뻗어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 P95

큰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히스테리에 사로잡히고, 질병이라는 불의와 마주치면 누군가를 몰아세우려고 하지. - P106

"두려움이 덜할수록 좋아. 두려움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어, 두려움은 우리를 타락시켜, 두려움을 줄이는 것, 그게 자네의 일이고 내 일이야."
- P110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만들지 말라고요."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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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켜본남성 집단의 문화는, 각 구성원이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기 어렵게 만든다. 거꾸로 서로에게무감각하게 하는 것으로 구성원 간의 결속을 강화한다.
인간의 삶은 모두 같지 않다. 성별이 같고 나이가 비슷한사람이라도 제각기 다른 삶을 살며, 모두가 개별적이고구체적인 형태로 자기 삶을 경험한다. 그것은 대충 뭉뚱그릴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배웠다. 남성문화가 각 구성원의 개별적 자아를 허락하지않는 이유는, 그것이 집단의 존속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때문이다. 
- P35

우리가 모두성(性)에 대해서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무지한 상태라는것. 이는 인류 역사상 담론생산자의 90% 이상이남성이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인류의 삶이 절반이라는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이 무지는 조직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 P37

메두사는 원래 포세이돈의 연인인 아름다운소녀였으나 아테나 여신의 저주를 받아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뱀이 되는 무서운 형상으로 변하였다. 문학에서메두사의 이미지는 남성의 시선을 받는 여성 또는 남성의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여성이자 동시에, 남성을바라보는 여성의 시각, 스스로 욕망의 주체가 되는 여성의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파괴와 재생의 상징성을 가진메두사가 베르사체의 로고로 사용되는 것이나 페미니즘적인의미를 갖게 된 것은 흥미롭다.
메두사의 눈은 희망없이 세상을 바라다보는 현명한거울, ‘삶의 이면에 배어 있는 고뇌와 상처를 읽어내는버림받은 자의 거울‘이 된다. 배제와 처벌의 대상이 되어온타자로서의 여성성.
- P40

마녀사냥은 15세기 초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어 16세기말부터 17세기 들어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단심문 활동에는 각국의 세속권력이 관계되어 있었다. 질서를 어지럽히는이단자를 처벌하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였지만실제로는 이단자의 몰수재산을 목표로 교회와 국가가이단적발을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멀쩡한 이들도 이단으로몰리면 개인이나 단체의 재산을 빼앗길 수 있었다.

이를 중세의 억압된 성도덕의 풍선 효과적 표출이라고보는 학자도 있다. 즉 육신과 세속의 기쁨을 지옥과 사탄에연결하여 설명했던 중세의 억압된 욕망이, 교회에서여자를 발가벗기고, 여자의 몸에 난 털은 모조리 다 깎고,
이곳저곳을 바늘로 찔러보는 집단적 가학성사디즘을불러일으켰으리라는 것이다. 마녀재판은 그 시대가 겪었던종교적 금욕의 억압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던 동시에 자신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마녀사냥은 그 극적이고교훈적인 효과 덕분에 삽시간에 번졌고, 마녀로 몰린 자들을광장에서 화형에 처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열광적인광기의 상태로 현혹시켰다.
- P46

마녀사냥은 대표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그것은개인적, 집단적으로 분열되고 개인들의 관계가 파국에이르렀을 때 나타나곤 했다. 종교전쟁, 악화되는 경제상황, 기근, 가축들의 전염병이 당대 농촌사회를 휩쓸었던불행의 목록이다. 사람들은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설명을 찾았고, 마침내 불순한 사람들의 마법과 저주마녀의 불길한 행동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심판관은 공동체의희생양으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해 개인 간의 분쟁을 악마적마법의 결과로 해석하고 자백을 끌어냈다. 자백하지않는 자에게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심문과 혹독한 고문이가해졌다. 마법사를 인정하는 방법 한 가지를 보자. 용의자는강이나 늪, 운하에 던져졌다. 만일 물위에 떠오르면 "역시마녀야. 악마는 자기를 경배하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지않아" 라며 즉시 처형했다. 

물론 빠져 죽은 자는 결백한 자로간주되었다. 마녀사냥의 주된 공격대상은 여성이었는데,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이란 원죄로 각인되어 있는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성을 악마의 심부름꾼이라생각했다. 여성의 육체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낸 것이다.
- P47

그렇다면 성매매란 무엇일까? 성매매 여성은 이러한남성들이 투사한 왜곡된 여성 이미지의 끝판왕이라 할 수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매매에서 자발, 비자발 따위의 말은먹히지 않는다. 여성이 원하는 것에 대한 대화와 평등과는가장 거리가 먼 것이며, 철저히 일방적인, 그래서 폭력이쉬이 자라나는 것이 바로 성매매다.
- P48

피해자들만입을 열어야 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정작 말해야하는 쪽은 그보다 훨씬 다수인 가해자들이다. 가해를 저지른일본 남성들은 입을 다문 채로 두고 우리는 어째서 피해여성에게만 그 일에 대해 묻는 걸까. 이것은 이상하다.
- P55

이처럼 성폭력 문제에 둔감한 일본 사회에서 남성들은여성의 입장을 제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더구나 일본사회에서는 포르노를 너무나 많이, 그리고 쉽게 접할 수있다. 포르노가 홍수처럼 넘치는 사회에서 나를 비롯한 일본남성들은 마치 물에 빠지듯 포르노가 그려내는 ‘남녀 관계‘,‘섹슈얼리티‘를 받아들이며 성장해왔다.
- P57

남성은 자신의 욕망을 대면하기보다 타인 여성을통해서 대리 욕망을 꿈꾼다. 타인의 만족을 자신의 만족으로치환하는 것이다. 아마 문제는 타인의 욕망을 꿈꾸면서도욕망에 이르는 방식은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그 이중성에있지 않을까?  - P63

대부분의 야동은 남성의 폭력적이고공격적인 성적 지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집니다.
이에 대한 정치적 공정함에 대한 판단이 결여되어 있음은물론 그것이 새로운 공정함을 위한 역설적 은유로도 쓰이지못하기 때문에 포르노라고 불립니다. 다만 전제가 말이 안 되는만큼, ‘그렇다 치고‘ 라는 선언으로부터 구성된 내부에서조차리얼리티가 확보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구차해집니다.

🌟🌟🌟🌟🌟 - P84

처지도 목적도 생각도 전혀 다른두 사람이 서로 다른 내용을 떠든다고 해서 그것을 대화라고부르지 않는 것처럼, 나는 성매매가 연인과의 섹스와는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P113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가지지 않은 인간은 누구나 노동을팔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노동이 인간의 기본권을심각하게 침해한다면? 성(性)이 성(聖)스러운 것이어서가아니다. 돈으로 누군가의 장기를 사는 행위가 용인되지않듯, 성매매를 포함하여 타인의 인격이나 신체의 자유를억압하는 모든 노동은 용인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서비스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는 판매 노동자들에 대한인권침해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인격은 누구도 사거나 팔수 없기 때문이다.

🌟🌟🌟🌟🌟 - P114

그는 또한 신발 산업 내의 노예 노동을 예로 들며성매매와 인신매매는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신발산업과 달리 성매매는 인신매매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 판매가 그렇게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인신매매는 왜존재하는가? 인신매매로 인해 강제로 성을 파는 여성들이존재하는데도 ‘좋아서 하는 여성도 있을 것‘ 이라고 자위하는것은 합리적인 태도인가? 그가 줄곧 주장하는 것처럼우리는 성매매 문제에 대해서 이성과 합리로 접근할 필요가있다. 그러나 이성과 합리는 성급한 일반화와 부적절한비유 따위가 아니라 정확한 실태 조사와 사례 연구, 그리고성매매의 존재가 역설하는 젠더 불평등과 인간 착취에 대한이해다.

ㅡ체스터 브라운의 책 ‘유료 서비스‘에 대한 비판 - P118

"섹스는 무엇인가? 그리고 성매매는 무엇인가?"
"돈을 받고 성을 파는 절대다수는 어째서 여성인가?"
- P118

성매매 집결지에 필요한 것은 해답이나 결론이 아니라 질문이다

🌟🌟🌟🌟🌟 - P123

 노르딕모델

스웨덴을 중심으로 노르딕 국가 중 일부가 채택하고 있는 성매매관련 법, 제도, 정책을 지칭하는 말이다. 현재, 노르딕 모델을 채택한국가는 강요나 강압에 의한 성매매가 아니더라도 성매매를 했을 시,
‘성 구매자에게 최대 1년까지의 구금 혹은 벌금형을 부과하고, 성매매여성이 미성년자이거나 강압에 의해 성매매를 했을 시에 성 구매자를가중처벌한다. 또 성매매 알선, 중재자의 경우 최대 5년형까지 처벌 받을수 있고, 인신매매범의 경우 최대 10년~12년형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성매매, 여긴 돈 낸 사람만 처벌 받는다. <오마이뉴스>, 2014.09.26.
11:18 수정, 2018.03.30. 22:40 접속,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6019) - P143

"성매매는 남성 문제다."
- P153

성매매를 성매매 여성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여성을 위하는 것이기보다 더욱 고립시키는 방식일 수도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매매 현장의 바깥에 있는사람들도 성매매 문제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방관자도 될 수 있고 목격자도 될 수 있지요. 많은 폭력이나차별의 문제 해결 과정이 그렇듯이 이들의 역할은 매우중요합니다.

🌟🌟🌟🌟🌟🌟🌟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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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2-21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미, 책 정말 많이 읽소!ㅋㅋ

미미 2021-12-21 16:45   좋아요 1 | URL
지난번 읽은건데 이제야 밑줄 올렸어요ㅋㅋㅋㅋ저는 늘 배고파요 스텔라님!😆

stella.K 2021-12-21 16:59   좋아요 1 | URL
아, 이 밑줄긋기 직접 써요?
뭐 스맛폰으로 찍으면 변환된다던데 한 번도 안 해 본지라...

미미 2021-12-21 17:05   좋아요 0 | URL
사진 찍어서 올리죠ㅋㅋㅋ이 기능 너무 좋아요!!

2021-12-21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1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1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1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1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1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회에서 할머니는 하느님께 왜 이렇게 불공평한지 물었다. 어째서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인생에서 겪어 볼 만한 고통인 사랑을알지 못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집안일을 한 뒤 밭에 나가 일하고, 그 따분하기 짝이 없는 수예 교실에 나가고, 머리에 물동이를이고 샘까지 가서 마실 물을 길어 오고, 열흘에 한 번씩 빵을 만드느라 밤을 꼬박 지새우고, 우물에서 두레박을 끌어올리고, 닭에게 모이를 줘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하느님이 사랑한 번 해 볼 기회도 주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죽이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머니의 고해성사를 들은 신부님은 이런 생각들이아주 큰 죄이고 세상에는 다른 일도 많다고 말했지만, 할머니에게 사랑 외에 중요한 일은 없었다.
- P11

칼리아리 사람들은 그 어떤 일에도 노여워하지 않고 폐 끼치는 행동도 하지않았다. 바닷바람이 사람들을 더 자유롭게 만든 듯했다. - P17

세상일에 관심 없는 할머니 말고는 다들 라디오 런던을 들었다. 1944년 봄 이탈리아 북부에서 600만 명이 파업을 하고 로마에서 독일인 32명이 살해됐으며, 독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이탈리아인 320명을 색출해 총살했다. 제8군(Eighth Army, 1941년제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된 영국의 아전군, 1945년 전쟁 종결과 함께 해체되었다. 옮긴이)은 또 다른 도발에 대비하는 중이었고, 6월 6일 첫새벽에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 P18

남편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라 러시아를 응원했다. 러시아군은1945년 1월 17일 바르샤바를 정복하고 28일은 베를린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연합군은 3월 초에 쾰른을 짐령했다. 처칠은 이제 연합군의 진격과 독일군의 퇴각은 그리 큰문제가 아니라고 장담했다. 3월 말 패튼과 몽고메리 장군이 패주하는 독일군을 뒤쫓으며 라인강을 넘었다.
- P21

할머니는 도시 사람들답지 않게 매사에 심각해하지 않는 이웃들이 좋았다. 술리스 이웃들은 일이 잘 안 풀려도 "뭐 됐어!" 하며 넘어가고, 무척 가난한 살림살이에 접시를 깨뜨려도 어깨나한번 들썩이며 깨진 조각을 주웠다.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운을 만들어 부를 쌓기보다 차라리 가난한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이었다. 칼리아리 같은 도시는 검은 돈을 챙기거나 전쟁으로집을 잃은 불쌍한 사람들이 그나마 쓸 만한 물건이 있나 찾으러오기 전에 폐허를 뒤져서 도둑질하는 사람이 많았다. 술리스 이웃들은 굳이 말 안 해도 알지!‘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할머니는바다와 파란 하늘 그리고 기센 바람이 부는 바스티오니 성벽에서바라다보이는 거대한 풍경이 보잘것없는 작은 삶일지라도 멈출수 없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 P22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시적인 속내를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내뱉으면 할머니더러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대신 붉은 테두리를 두른 조그만 검은색노트에 모든 생각을 적어서 식비‘ 약값‘ ‘임대료‘라고 적힌 돈봉투들과 함께 비밀스런 물건을 넣어두는 서랍에 숨겨 놓았다.
- P23

할머니는사랑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스스로 원하지않으면 잠자리를 함께 하거나 친절하게 대하고 착한 행동을 해도찾아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이 다가오게 만들도리가 없다는 것도 이상했다.
- P26

방에 들어서자 창문 아래 책상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노발대발 화를 내더라도 다시 역으로가서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 순전히 그 책상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책상이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었고 탁자에 앉아서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언제나 남몰래 무릎에 노트를 놓고 쓰다가 누가 오는 기척을 느끼면 얼른 감추곤 했다.

책상에는 호텔 이름을 새긴 종이가 가득 든 가죽 파일과 잉크병, 펜촉을 끼운 펜 그리고 압지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책상의 가죽 파일에 넣은 것이었다. 혹시 누가 갑자기 들어와 노트에 적은걸 보기라도 할까 봐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나서야 커다란 더블침대에 앉아 저녁 먹을 시간을 기다렸다.
- P28

그 재향군인은 허름한 가방을 들었지만 차림새는 매우 세련되었으며 한쪽 다리를 목발에 의지했어도 아주 잘생긴 사내였다.
할머니는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재향군인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호텔에서 더 이상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훤칠한 키에 짙고 깊은 눈동자, 부드러운 피부, 가느다란 목, 강하고 긴 팔, 크지만 어린아이처럼 순박해 보이는 손, 약간 곱슬거리는 짧은 수염, 선명하고 도톰한 입그리고 살짝 구부러진 코.
그날 이후 할머니는 식당이나 베란다에서 그를 훔쳐보았다. 남자는 필터 없는 나지오날레 담배를 피우거나 책을 읽고, 할머니는 식탁용 매트에 지루해 죽을 때까지 수를 놓으러 베란다에 나가곤 했다. 할머니는 남자 조금 뒤쪽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남자의 이맛살과 날렵한 코, 무방비 상태로 튀어나온 목젖, 흰 머리가나기 시작한 곱슬머리, 소매를 걷어 올린 풀 먹인 새하얀 셔츠 안의 바싹 마른 몸, 힘센 팔, 고운 손, 바지 속에 감춰진 탄탄한 다리한쪽, 낡았지만 완벽하게 광을 낸 구두까지, 무엇인가에 홀린 듯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장애가 있는데도여전히 강하고 아름다운 몸에서 풍기는 위엄 때문에 눈물이 날것 같았다. - P30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 너머 언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할머니를 향해 투명한미소를 지어 보이면, 할머니는 너무 좋아서 가슴앓이를 하며 온종일 흥분에 휩싸였다.
- P30

어릴 때부터 에밀리오 살가리의 모험소설을 읽다가 해군에 자원했는데, 원래 바다와 독서를 좋아했다. 아주 힘든 시기에 위안이 된 시들을 특히 좋아했다. 전쟁이 끝난 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전 제노바에서 밀라노로 이사해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는데 어떻게든 제자들이 지루해하지 않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지금은 과거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온통 하얗게 칠한 방 두 개짜리 반지하 연립에서 살았다. 1939년에 결혼하여 초등학교 1학년짜리 딸도 있었다.
- P31

부모님은 어떤 식으로든 딸을 계속 공부시켜야 한다는 의무를 지는 게 두려워 집에 붙잡아 두었다. 선생님에게는 자기들 사정을 모르니 다시는찾아오지 말라고 못 박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읽고 쓰는 법은 배워서 평생 동안 남몰래 글을 썼다. 할머니의 글은 시였다. 아마도할머니의 생각이 담겼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살짝 꾸며서 적은 시들이었다. 할머니는 글 쓴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면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까 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재향군인에게는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털어놓았다.
그만큼 믿음이 갔던 것이다.
- P32

할머니도 그에게 손을 가져갔다. 며칠 동안 베란다에 앉아 관찰한 그 남자의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목덜미, 셔츠의 천, 탄탄한두 필과 어린아이처럼 고운 손, 방금 닦아 윤기 나는 구두 속에 들어 있는 한쪽 다리와 나무 의족을 위대한 예술가의 조각품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 P35

"우리의 미소에 입 맞출까요.?"
그가 할머니에게 제안했고, 두 사람은 촉촉한 키스를 끝없이나누었다. 잠시 후 재향군인이 이 미소 입맞춤은 단테가 《신곡》의 〈지옥편) 5곡에서 서로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를 위해 생각해 낸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 P36

할머니는 새로 짓는 집은 정말 아름다울 거라 믿었다. 집 안에 볕이 가득 들어오고,
방마다 창밖으로 배가 떠다니는 바다 풍경과 함께 오렌지색과 보라색 석양, 아프리카로 떠나는 제비 떼가 보일 것이다. 아래층에는 파티룸과 오랑주리 (orangery, 유럽 북부 한랭지에서 오렌지 등의 과수를재배하는 건물-옮긴이)가 있으며, 계단에는 붉은 카펫을 깔고, 베란다에는 물을 뿜는 분수까지 만들 것이다.
- P37

이제 할머니의 공허함은 만노거리의 집과 피아노가 채워 줄 것이다. 재향군인은 할머니를 품에 안고 귓가에 콘트라베이스와 트럼펫, 바이올린, 플루트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는 모든 오케스트라 소리를 낼 줄 알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시간 눈밭 행군을 할 때나 수용소 들판에서 독일군들을 즐겁게해 주느라 개들과 음식 쟁탈전을 벌일 때, 머릿속의 오케스트라악기 소리와 시로 버틸 수 있었다.
- P40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조용히 아빠를 사랑했다. 아빠의 모든것을 좋아했다. 심지어 싸늘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도좋았다. 아빠는 언제나 스웨터를 뒤집어 입고 나타났으며 계절이바뀌는 것도 몰라서 기관지염이 올 때까지 여름 티셔츠를 입고다녔다. 다들 정신 나갔다고 아빠를 손가락질했다. 그렇게 미남인데도 이런 모습 때문에 여자들이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빠의 음악에 대한 광기가 유행에 맞지 않았는데, 아빠가 천재성을 보인 고전 음악도 여자들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빠가 기절하도록 좋았다.
- P44

내가 태어난날 아빠는 뉴욕에서 라벨의 〈콘체르토 인 솔〉을 연주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흥분해서 연주를 망칠까 봐 아빠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조금 자랐다 싶자 엄마는 박스와 보행기, 카시트, 유아용 그릇을 하나씩 더 사서이곳 만노거리에 갖다 두었다. 그 후 아기 용품을 급하게 챙길 필요 없이 할머니에게 나를 맡긴 뒤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아빠에게 날아갈 수 있었다.
- P44

 할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나아져서 할머니가 쇼팽이나 드뷔시, 베토벤의 음악에 흠뻑 빠져오페라를 듣고, 나비부인》과 《라 트라비아타 때문에 훌쩍이거나, 전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포에토 해변에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돌로레타 부인, 판니 부인과 커피를 마시는 모양이라고 넘겨짚었다.
- P48

피아노가 집으로 오는 날 할머니는 너무 행복해서 메렐로거리에서 만노거리까지 트럭을 앞질러 뛰어왔다. 머릿속으로는 재향군인이 할머니를 위해 쓴 시의 앞부분을 점점 빨리,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단숨에 읊었다.

"당신이 스쳐 가는 인생에 가느다란 신호를 남겼다면, 당신이스쳐 가는 인생에 가느다란 신호를 남겼다면, 당신이 스쳐가는인생에 가느다란 신호를 남겼다면,
- P49

빈 화분에 들어가서 머리에 나뭇가지를 붙이고 숨은 적도 있었다. 그다음 날도 똑같은 소동을 벌였다. 인형이나 장난감을 집에 가져가려 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더 커서는 책도 가져가지 않았다. 공부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할머니 집에 있어야 하는데, 특히 사전을 들고 다니기가 불편하다는 핑계를 댔다. 친구들을 초대할 때도 할머니 집이 테라스가 있어서 더 좋았다. 무엇이든 다 할머니 집이 좋았다.
- P51

지지부진한 농업 개혁이 농부들을 파산시켜 삶터를떠나게 만들었다. 여자들은 남편이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하녀 일을 다니고, 남자들은 인간으로서 존중받지도 못하며 보호 장비조차 없이 유독성 산업 물질을 마셔야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사르데냐 출신임을 보여 주는 ‘우(u)‘ 발음이 들어가는 성을 부끄러워했다.
- P72

이주자들이 사는 아파트가 벌집처럼 모여 있는데, 전에 살던 옥상방과달리 화장실과 주방도 있고 에스컬레이터도 있었다. 그리고 이주민도 밀라노 주민으로 받아들여져 이주민을 두고 수군대지 않았다. 이제 남북 간의 싸움은 뒷전이 되고 산바빌라성당을 둘러싼적색분자(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흑색분자(네오파시스트)의 분쟁이화두가 되면서 남부 사람들을 ‘테룬‘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 P73

사촌들은 아빠가 정치에 무심한 것과 부자를 미워하지 않는 것, 파시스트를 때려 본 적도 맞아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못했다. 사촌들은 아직 어린데도 카파나(Capanna, 도시 빈민의 인권 보호를 주장하는 학생 운동 - 옮긴이) 집회를 따라다녔다. 1969년 5월에는 밀라노에서 시가 행렬에 참가하고, 1971년에는 국도 점령 시위에동참했다. 몇 번 다투긴 했지만 아빠와 사촌들은 서로 좋아하고매번 화해했다. 심지어 그 유명한 1963년 11월, 부모님 몰래 창문으로 빠져 나와 지붕을 돌아다니며 놀던 시절 다락방에서 의형제까지 맺었다.  - P74

할머니는 전화를 끊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사랑을 쫓아 버리는 광기 같은 걸 물려준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 것이었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아무에게도, 그 어디에서도 초대받지 못해 항상 혼자였으며, 어쩌다 시도한 애정 표현도 유치하고 서툴러서 그 누구도 함께 하려 하지 않았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조금 나아졌지만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세상엔 다른 일도 많다는 것을 알려 주려 했고 할아버지도 설득해 봤지만,
아빠는 그저 웃고 말 뿐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1969년 7월21일 밤 암스트롱이 달에 상륙했을 때도 아들이 졸업 연주회 때문에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35-1>을 끝없이연주하던 모습을 잊지 못했다.
- P75

같은 단어의 중복 사용 같은 실수를 찾아낼 때마다 할머니 엉덩이를 한 대씩 살짝 때리거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나중에 다시 쓰라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아."
재향군인이 제노바와 밀라노 억양으로 지적해도 할머니는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 즐거웠다.  - P82

재향군인이나 그의 친구 조르지오 카프로니 혹은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가여운 시인 디노 캄파나의 묘사를 보면, 칼리아리도제노바처럼 어둡고 미로 같고 신비롭고 습하다가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하게 눈부신 지중해의 빛이 쏟아지는 길이 나타나는 곳이다. 그런 곳에 이르면 바쁘게 지나다가도 낮은 담이나 철제 난간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그토록 ‘풍요로운‘ 하늘과 바다, 태양을 즐기지 않을 수 없다.  - P82

할머니는 칼리아리와 바다 그리고 나무와 벽난로, 말똥, 비누,
밀, 토마토, 따끈한 빵 냄새가 뒤섞인 고향을 참 좋아했다.
하지만 그 남자, 재향군인을 좋아하는 만큼은 아니었다. 세상그 무엇보다 그 남자가 좋았다.
- P84

그에게는 아무것도, 심지어 결석을 배출하느라 함께 소변을 보는 일도 부끄럽지 않았다. 평생 달나라에 사는 여자 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드디어 같은 달나라 남자를 만난 것 같았다. 그것이할머니가 오래전부터 그리워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 P84

아버지의 돌 사진에는 할머니가 없다. 사람들이 "생일축하합니다."를 외치며 축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감정이 북받친나머지 방으로 도망쳐 울고 말았던 것이다.  - P86

엄마 말에 의하면 한 집안에서 누군가는 혼란을 짊어져야 한단다. 인생이란 원래 둘 사이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상이 굳어지고 언젠가는 멈춰 버린단다. 밤에 악몽 없이 편안하게 잠들고, 엄마 아빠의 결혼생활이 별다른 충돌 없이 유지되고, 내가 첫 남자 친구와 결혼하고, 우리 가족에게 큰 위기가 닥치지 않고, 우리 중 자살을 기도하거나 쓰레기통에 뛰어들거나 몸에 자해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할머니가 그값을 치러 준 덕분이었다. 모든 가정에는 희생을 치르는 사람이있기 마련이다. 그래야 질서와 무질서의 균형이 지켜지고 세상도멈추지 않는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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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2-21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나 많은 밑줄!

미미 2021-12-21 16:28   좋아요 2 | URL
다 읽고 울었어요ㅠㅇㅠ

건수하 2021-12-21 1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밑줄긋지 않았던 문장들이 있어 다시 보니 좋네요.
이래서 같은 책을 읽고 공유하는게 좋아요 :)

미미 2021-12-21 19:33   좋아요 2 | URL
맞아요!ㅋㅋㅋ 저 밑줄 너무 많이해서 ‘내가 왜이러고 있나‘ 했어요. 다 마음에 와닿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