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읽었던 이리가레의 주장(아래)과 오늘 ㄷㄹㅂ님의 글https://blog.aladin.co.kr/fallen77/13626156 ,읽고 있는 '짐을 끄는 짐승들'의 일부 내용들을 떠올리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행동양식에 종속되어 있는 듯하다. 다윈식의 모델과 파블로프식의 모델.
1.생명과 관계되는 한 우리는 한편으로는 외부 환경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생물체들과 항상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적보다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2.문화의 차원에서 우리는 반복학습으로 훈련받고, 사회 체제에 적응하도록 우리 자신의 결정적인 혁신이나 발견 없이 '이와 같이'되도록 (의식적이든 아니든) 길러진다.
과연 우리는 이 두 거대한 구조와 변수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 존재의 차원에서 볼 때 경쟁적인 이 투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문화적 차원에서는 거의 치명적인 반복으로부터? p.39
육식은 위에 나온 두 행동양식을 모두 따르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육식을 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위 두 양식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복적으로 육식을 이어간다. 외부 환경과 싸워야 한다는 관념, 짐승들을 대량으로 도축하고 무수히 소비하면서 도축 과정으로부터 일반 대중을 멀리 떨어뜨려 도덕적 책임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 이런 집단적 기만의 반복은 과연 어떤 결과를 우리에게 주었고 계속해서 주고 있을까? 폭력은 행하는 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미디어는 폭력의 겉모습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피해자의 피해를 위주로 다룬다. 하지만 사실상 가해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으며 변화된다. 육식이라고 부르는, 동물에 대한 죄의식없는 착취를 우리는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까? 이 기만의 파장은 연구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다양한 폭력과 공격적 성향의 원인이 여기서 기인할 수 있겠구나 생각해본다. 물론 모든 폭력의 원인을 육식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겠지만 매일같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집단적 기만행위가 상징하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윤리 없이 정신적이고 천상적인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p.27
동물에 대한 착취를 배제하고 윤리와 정의를 논한다는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