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송이들이 끝없는 장막처럼 지상을 향해 펼쳐지며 펄럭거렸다. 이 눈의 장막이 세상의 형상을 지우고 사물마다 얼음 거품을 덮어씌웠다. 겨울에 감싸여 가라앉은 이 도시의 광활한 적막 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나부대는 소리, 어떤 것이라고 표현할 말이 없는 그 희미한 바스락거림이 전부였다. p.18
모파상은 에밀졸라와 함께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이 책에 담긴<비곗덩어리>는 <보바리 부인>으로 잘 알려진 스승 플로베르에게 '걸작'이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세 개의 단편중 <비곗덩어리>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줄거리는 보불전쟁의 프랑스가 처한 상황으로 시작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승합마차를 타고 피난길에 오른다. 먼 여정을 시작하고 얼마안가 모두 몹시 배가 고파진다. 허기를 잊으려 가져온 술을 마시고 복선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승객들.
"그래도 좋네요, 몸을 데워 주고 허기도 잊을 수 있으니." 술기운이 돌자 기분이 나아진 루아조가 농담이랍시고 노랫말 속의 작은 배에서처럼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노랫말은 승객 가운데 제일 살찐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내용이었다. 돌려서 한 말이긴 하지만, '비곗덩어리'를 암시하는 그 농담은 교양 있는 양반네들을 질색하게 했다. p.29
'비곗덩어리'는 아름답고 통통한 승객인 엘리자베트를 의미했다 유일하게 음식을 싸온 사람은 매춘부인 엘리자베트 뿐이었다. 그녀의 신분 때문에 깔보고 눈총을 보내던 사람들은 엘리자베트가 준비해온 푸짐한 음식을 나누어먹자 태도가 돌변, 상냥해진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침략자인 프로이센군을 비판한다. 곧이어 도착한 첫번째 숙소에서 적군인 프로이센 장교가 엘리자베트와 하룻밤을 함께 하고 싶어하고 그녀가 거절하자 승합차가 떠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 남자하고나 자는 게 저 여자의 직업인데, 누구는 받고 다른 누구는 마다하는 건 대체 무슨 이유랍니까?"p.64
적군을 함께 비난하고 음식을 나누어 준 엘리자베트를 칭찬하던 사람들은 이제는 그녀를 비난한다. 하루하루 날이 지날수록 볼모로 잡힌것에 볼멘소리를 하며 엘리자베트의 희생을 요구한다. 나중에는 일행 중 수녀까지 적군의 장교에게 숭고하게 자신을 희생시키는 애국자가 될 것을 엘리자베트에게 요구한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가 인용되고, 이어서 아무 맥락 없는 루크레티아와 섹스투스가 거론되더니, 클레오파트라까지 적의 장군들 모두와 잠자리를 해서 그들을 노예처럼 복종하게 했다는 설명이 붙어 끌려 나왔다.p.65
군중심리와 집단적 이기주의를 떠올렸다. 약한 소수에게 다수는 때로 그 힘을 이용해 매우 냉정하고 냉혹한 모습을 보이기도한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약자의 희생은 불가피한것처럼 몰아가기도 한다. 약자를 배려하고 소수의견을 존중할 때 진정 인간성이 빛을 발하는 것 아닐까? 개인 사이가 그렇듯이 모두가 평화롭고 만족스러울때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을 것같다. 하지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다수의 희생과 소수의 희생이 저울의 양쪽에 올라 있을 때, 판단은 결코 쉽지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