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근대사의 심리학으로 볼 수 있다. 역사가 인간과 후대 문화의 상호작용을 나타낸다면, 신화는 인간과 후대 문화의 상호작용을 나타낸다.(...) 여성의 광기는 신화적인 맥락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p.139


필리스 체슬러는 이 책의 서두에서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그녀의 겁탈당한 딸 페르세포네 신화를 다룬다. 모든 여성은 의식 중 혹은 무의식중에 남성 위주의 문화 속에서 이 신화를 반복, 재현하고 있다. 힘과 지식, 행동과 승리는 남성들의 것이고 순진함과 무력함, 반발하는 희생자는 여성의 몫이다. 남성은 공적, 정치적,현실적 영역을 장악하고 있고 여성은 사적,비현실적, 비정치적 위치에서 남성들의 노예가 된다.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만행은 계산된 것이든 우연한 것이든 간에 모두 바깥사회의 야만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P.152


순응적으로 이러한 역할(여성에게는 결혼,모성,가사노동등)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할 경우 같은 상황의 남성들에 비해 훨씬 많은 빈도로 여성들은 광기라는 족쇄를 차고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매춘의 압도적인 성별성과 역시 여성이 대다수인 성범죄 비율,정신이상으로 낙인찍혀 '감금'된 여성의 비율이 말해주는 것은 권력의 핵심이 남성에게 있다는 사실과 정상의 기준이 남성이라는 현실이다. 매춘,성범죄,정신병원의 감금은 비인간성의 지표이며 여성의 취약함에 대한 착취,폭력의 극단상황이다.




마루 위 초록색 고무 매트리스 위에 벤이 누워 있었다. 그 아이는 의식이 없었다. 벌거벗은 채로 구속복 속에 있었다. 창백하고 누런 혀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 애의 살은 시체처럼 희고 푸르스름했다. 모든 것이, 벽과 마루와 벤이 똥으로 짓이겨져 있었다. 흠뻑 젖은 짚방석으로부터 고여 있던 칙칙하고 누런 오줌이 스며나왔다.p.111.다섯째 아이.도리스레싱



마녀와 정신병을 앓는 환자는 사실상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의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p.243


비교적 강한 여성 캐릭터로 묘사되는 영화 '킬빌'의 주인공 '키도'가 수많은 남자들을 거뜬히 무찌르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의식을 잃은 상황에서 병원의 남자간호사에 의해 수없이 강간당해왔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모습은 여성의 기본적인 무기력과 생물학적 취약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실제로도 정신병원에서 병원 의료진과 관리직원들에 의해 여성들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사건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당사자의 의사는 중요치 않다.장애여성은 스스로를 돌보고 지킬 능력이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장애여성이 겪는 폭력은 일상적이며 제도적이다. 그동안 묵인돼온 차별과 불펼등한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p 85 한겨레21.2021송년호


2세대 페미니즘의 문을 연 필리스 체슬러는 페미니스트이자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다. 그녀는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수련 과정을 거치고 박사학위를 따기까지ㅡ교육받고 임상경험을 쌓고 자료를 검토한 과정에서ㅡ수많은 여성들이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음에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16세기와 17세기 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지금까지)아내에게 불만을 품은 남편이나 외도를 하는 남편,폭력적인 남편, 재산을 독차지 하고자 하는 경우등 여러 목적으로 여성들을 가두었다.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적 방법은 그와 같은 '치료'를 할 수 없다. 특히 주요한 사회제도가 전혀 '치유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더더욱 치료될 수 없다. p.237


때로는 결혼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결혼하지 않고 임신했다는 이유로, 불감증이 있다는 이유로 우울하다는 이유로 갇히기도 했다. 가부장제 문화와 마찬가지로 정신의학 전문가들도 남성중심의 사고방식과 이해에 따라 여성들을 정신이상으로 분류, 분석하고 치료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여 너무나도 쉽게 남편 혹은 가족들과 정신과의사의 협조하에 그곳에 갇혔다. 그 안에서의 전기충격과 약물치료, 격리와 감금상태는 정상적인 사람도 급격한 무기력에 빠지고 실제로 미치게 만들었다.



뇌절제술이나 인슐린 혼수치료(과거에 인슐린 투여로 고의적인 혼수를 일으켜 정신병을 치료하는 방법)는 정신병원의 사악한 관행을 보여준다. 정신병원의 구속복이나 도수치료, 격리등 다양한 방식이 마녀사냥꾼들의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여성의 몸은 빈민가나 제3세계만큼이나 식민화 되어 있다.'p.448



여성들의 이른바 비정상성은 끊임없이 남성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남성들의 비정상성은 거의 연구되지 않고 있다. 예를들면 편집적이고 가정에서 주도적인 아내는 연구대상이지만 여성을 자살로 이르게 하고 극단적일 경우 살해하는 가정폭력을 가하는 남편은 거의 연구되지 않는다. 사법제도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해에 비하면 아직도 그 변화는 더디고 사회적 지원이나 제도는 충분하지 않다. 



남성에게 치우친 집단적 정치현실은 여성들이 나이들었을 때 보다 분명하게 비교된다. 여성은 나이들수록 대부분의 직업 환경에서 이른바 '퇴물'?로 전락하고 열악한 근무환경에 처하거나 소외된다. 남성은 나이들수록 부와 권력이 증가한다. 권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치권력의 현장에서 권력의 정점(대통령,총리)에 이르르는 나이를 보라. 물론 전쟁상황에서 젊은 남성들도 이용당하고 살해당한다. 하지만 현대에 분쟁,전쟁에서도 여성의 상황은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살해당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훨씬 유리한 입장에 위치한다. 


남성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대체로 부와 지혜와 권력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일부 남성과 모든 여성에 대한 억압에 기초한 남성의 권력이란 나이 든 남성에게 속한다. p.523


카스트로 마오쩌둥,종신집권형태의 권력을 쥔 시진핑과 푸틴은 모두 남자다.(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박근혜나 영국의 여왕, 미국의 오바마는 여성의 대표성도 흑인의 대표성도 가지지 못했다. 박근혜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대통령이 된 것이고 이들의 집권기간동안 여성의 권리증진이나 뚜렷한 흑인의 인권증진에 기여한 바가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보다 명료하다. 오바마 재임기간 경찰에 의한 흑인 과잉진압은 오히려 늘었다는 의견도 있다.)


여성의 심리적인 정체성은 자신의 생존과 자기인식에 대한 관심사로부터 구축된다. (...)여성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여성들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연민을 느껴야 한다. 여성은 세계를 '구하기'에 앞서, 남편과 아들을 '구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과 딸을 '구하기'에 나서야 한다. 여성은 오로지 배우자나 생물학적 자녀를 갈망하고, 보호하고, 보살피는 외골수의 무자비함을 자기보존과 자기계발에 집중하는 '무자비함'으로 바꾸어야 한다. p.528


필리스 체슬러의 핵심적인 질문들, 시적인 영감들은 여러번 뤼스 이리가레를 떠올리게 했다. 여성들의 자기방어에 관한 필요성에 대해서는 얼마전 주짓수, 태권도 같은 기본적인 운동이 여성에게 필요하다는 내 글과 의견이 일치해서 반가웠다. 그 외에 체슬러가 강조한 것들을 종합해 여성들을 위해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개인적으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1.여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자기방어기술 습득


2.여성들의 정치권력으로의 진입,영역 확장


3.언론에서 청년층의 민주적 토론문화 확보 , 정치적 발언의 획득


4.여성들의 연대와 조직화


스스로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 나의 현실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체슬러에 의하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만큼 여성들에게는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과정이다. 외면하지 않고 정확하게 직시하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성들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모호한 상태로 각자가 가정이라는 권력안에 고립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경제,정치적으로 힘을 갖기 못하고 배제된채 서로 연대하지 못하므로 조직화가 더욱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작은 규모라도 조직을 만들어가고 서로 연대하며 여성의 현실을 공부해 나갈때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몸소 그런 삶을 실천한 필리스 체슬러의 자취가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






책에 나오는 관심이 가는 몇 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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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1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1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01-01 18: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2022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올 한해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시고,
가정과 하시는 일에 좋은 일들 함께 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미 2022-01-01 18:28   좋아요 4 | URL
서니데이님도 올해 더 행복하시길 바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책읽는나무 2022-01-01 2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정말 미미님은 깊이 있는 독서를 하셨네요!!!!! 같은 책을 읽어도???ㅋㅋㅋ
그래서 미미님도 언니!!!!
이곳에 언니들이 너무 많아요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미미 2022-01-01 20:31   좋아요 2 | URL
아이참ㅋㅋㅋ저는 무럭무럭 자라고픈 꼬꼬마인데요😅 급하게 쓰느라 좀 정신없는것 같은데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올해도 함께 읽고 쓰는 즐거움을 누려요~♡^^♡

mini74 2022-01-01 20: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처음 만나는 자유 보면서 꽤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가정이란 권력안에 고립되어 있다는 말 고개 끄덕이기 됩니다 미미님 좋은 글 통해 배우고갑니다 *^^*

미미 2022-01-01 20:36   좋아요 3 | URL
미니님 이 영화 보셨군요~♡♡ 저는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봤는데요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이 상당부분 담겨있어 놀라고 신기했어요! 졸리도 위노나 라이더도 멋졌고요ㅎㅎ역시 이런 책들은 깊이있는 영화감상에도 도움이 되나봐요. 특히 ‘여성신화‘는 슬프고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다시 강조중ㅋㅋㅋㅋ)😉

mini74 2022-01-01 20:37   좋아요 3 | URL
오고있습니다 저도 미미님처럼 밑줄 그으면서 얼릉 읽고싶어요 ㅎㅎ

새파랑 2022-01-01 2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행동하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1월 1일부터 멋진 글을 쓰는 미미님은 👍 입니다 ^^

미미 2022-01-01 20:38   좋아요 2 | URL
일출을 못봐서 아쉬운 하루였습니다ㅋㅋㅋㅋ그 시간에 깼는데 왜그랬을까요ㅋ밑줄칠 내용이 너무 많은 훌륭한 책이었어요!! 😄👍

블랙겟타 2022-01-01 2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이 책 극 초반을 읽고 있어서 전체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요 미미님의 글을 읽고 책을 읽으면 더 이해가 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미미님, 새해복 많이 받으셔요 🥰

미미 2022-01-01 20:49   좋아요 2 | URL
완독까지 파이팅입니다👍읽는 내내 가슴뛰고 좋았어요!!그리고 뭔가 행동하고 싶어지게 하는 힘이 있었어요.ㅎㅎ 블랙겟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락방 2022-01-01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은 특히 인상깊은 책이었어요. 여자들아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 하고 말해주는 필리스 체슬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아서 가슴 벅찬 독서였지요. 스스로 강해지고 스스로를 챙기자고 하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데 말입니다.
미미님에게 좋은 독서였다는 게 느껴지는 글입니다.
미미님, 우리 2022년에도 계혹 함께해요. 계속 이렇게 진중하게 읽고 멋진 글 써주세요!

미미 2022-01-01 21:29   좋아요 1 | URL
훌륭한 책들을 선정해주시고 항상 독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그저 다락방님 믿으며 읽고 쓰면 되니 넘넘 든든해요! 다들 비슷한 얘기하시지만 저도 북플 가입해서 다락방님과 함께 읽고 쓰며 여성으로서 깨우치고 성장하게 되서 큰 행운인것 같아요! 필리스 체슬러의 말들 너무 좋고 가슴깊이 인상적이었어요. 2022년도 잘 따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