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의 작가. 그는 '눈을 감고 보라'는 잊을 수 없는 명언을 내게 남겼고 동서문화사 책은 읽어도 읽어도 끝이 안나는 것 같다는 미스터리도 남겼다. <율리시스>는 안그래도 14시간 55분 거리의 먼 아일랜드를 더 까마득한 미지의 세계로 각인시킨 것이다. 시인,소설가,영어교사? 그는 수업시간에 과연 어떤 선생님이었을까? 그의 단편이 열린책들35주년 미드나잇에 포함된 걸 보자 나는 두려움이 앞섰다. <애러비>와 <가슴아픈 사건>은 그런 두려움 탓이었는지 제법 집중하고 잘 읽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들>은 초중반 지루해서 읽다가 멈췄고 다른 책을 읽다가 며칠만에 마저 보니 뒷부분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나마 조금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세 작품 모두 뒷부분에 핵심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름은 나의 어리석은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는 소환장 같았다.p.11
<애러비> 숙부님 댁에 얹혀 살다보니 조숙해진 것인지 짝사랑 탓인지 주인공은 또래 무리들과는 떨어져 지낸다. 이어 그에게서 타오르는 맹건 누나에 대한 감정은 그녀가 알려준 바자회인 <애러비>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이어진다. <애러비>에 가지 못하는 맹건 누나를 대신해 무언가 사다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주 사소한 일들이 자신의 허영심과 어리석은 열정을 깨닫게 해 그는 상처받고 분노한다. 주인공의 그런 감정에는 잉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의 적대감이 깃들어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나는데 워낙 아일랜드 역사를 잘 모르니 답답하지만 그 부분은 접어두고. 대신 작품에서 드러난 분위기만 보면 기대했던 것들에 관한 실망과 자신에 관한 갑작스러운 자각이 무기력한 감정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싶다. 어쩌면 자신을 지탱하게 해준것들,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남들보다 고귀한 위치로 올려준 기대가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자각은 내부로 향해 자괴감으로 발현되거나 외부로 향해서 분노로 분출될 수 있다.
<가슴아픈 사건> 제임스 더피는 지역사회와 어울리지 못하는 외래종 같은 인물이다. 지적이고 특이한 아웃사이더와 같던 그에게 외래종을 위한 따뜻한 토양과도 같은 시니코라는 한 여성이 등장한다. 그는 그녀에게서 위안을 얻었지만 그녀는 점차 그에게 감정적으로 끌렸다. 그는 외톨이였지만 질서정연하고 모험은 없으나 평탄한 자신의 삶을 그녀로 인해 바꿀 수 없었다. 다시 아웃사이더로 돌아간 그는 몇년 후 그녀의 죽음을 전해듣는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자신이 외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남자와 남자 사이의 사랑은 불가능하니 이는 성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우정은 불가능하니 이는 성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나게 될까 봐 그는 음악회도 멀리했다. 그동안 그의 아버지가 죽었고 은행의 실무자 한 사람이 은퇴했다. p.31
<죽은 사람들>주인공 게이브리얼은 모임에서의 이런저런 분위기 때문인지. 아내에 대한 욕망이 고조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숙소에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아내에게서 그녀가 잊지 못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는데, 그 소년은 오래전 죽었지만 그녀에게는 마치 살아 있는 듯 기억되는 존재다. 반면에 그는 스스로를 살아 있지만 사라지고 있는 존재로 느낀다.
눈이 부드럽게 살포시 전 우주에, 살포시 부드럽게, 마지막 종말을 향해 하강하듯이, 모든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위에 내려앉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영혼도 천천히 희미해져 갔다.p.115
제임스 조이스는 이 작품들로 한 개인이 어떤 사건들을 계기로 자각으로 가는 여정을 보여줌으로써 아일랜드에 관한 자신의 복잡한 감정. 즉 존재 외부의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해 보여준다. 그래서 모든 작품에서 조국을 떠나 방황하듯 살았던 그의 모습이 느껴져 쓸쓸했다. 역시 조이스는 아직 내게 어렵다. 그래도 덕분에 나의 수준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많이 다른 작품들을 읽고 조이스로 돌아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