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로 적힌 일기장 때문에 공항에 억류된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뒤 해외로 나가는 내게 친구는 자신의 일기장을 내밀었다. 아기자기한 그림도 그려넣고 스티커도 붙이고 나를 비롯한 친구들 사진도 여러장 붙어 있었지만 그 일기장의 메인은 그 친구가 자신만의 기호로 만든 암호 일기였다. 같이 미팅나갔던 것이며 자기가 사귀던 남자애들 이야기도 있으니 가면서 비행기에서 읽으라고 심심하지 않을거라고 따뜻한 우정에서 건낸 일기장이었다. 하지만 어떤 기호가 어떤 글자를 만들어 내는 건지는 친구가 알려주지 않았다. 비행기 옆자리에서 자기가 사정이 있으니 일행이라고 해 달라 한 아저씨가 화근이었던 것 같다. 그 아저씨는 알고보니 수상한 사람이었고 그런 수상한 사람과 일행이라니 나도 내 가방도 수상하게 여겨져 일기장까지 검문받게 된 것이다. 공항측 입장에서는 일기장 속 암호가 마치 테러리스트의 암호 같았을 것이다. 나도 아직 해석을 못했는데 무슨 뜻이냐고 몇 시간을 추궁당했다.
P.13 "그것은 일종의 편지 노트 같은 것이었습니다. 글씨체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의 필적으로 쓰여 있었는데, 자크의 필적으로 된 편지 끝에는 J자가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누구 것인지 모르겠는데, 서명은 대문자로 D라고 되어 있었습니다."그는 좀 쉬었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편지의 문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유감스럽게도 그 우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파리와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좀 더 어린 자크와 중학생인 다니엘이 주고 받은 회색의 편지노트를 학교 선생님이 발견해 읽게된다. 분노한 자크는 절친 다니엘과 함께 집을 나가고 학교는 발칵 뒤집힌다. 자크의 아버지와 선생님은 회색 노트에 적힌 내용만으로 두 아이를 판단하고 결론내린다. 반면 다니엘의 엄마는 아이에 대한 신뢰와 직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데,그런 과정에서 벌어지는 주변 이야기와 자크,다니엘의 상황을 담은 내용이다. 활활 타오르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애정에 혼돈의 시간을 보내는 자크와 역시 넘치는 감성을 지녔지만 아버지의 외도로 너무 일찍 어른스러워져 버린 다니엘은 서로에게 깊은 우정을 느낀다.
P.82 내 마음은 너무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아! 나는 이 끓어 넘치는 파도를 이 종이 위에다 쏟을 수 있는 한 쏟아 볼 생각이야. 나는 고민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기 위해 태어났고, 또한 희망하고 사랑하고 고민하고 있어! 내 일생의 이야기는 단 두 줄로 요약될 수 있어. 나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은 사랑. 그리고 나에게는 단 하나의 사랑이 있을 뿐인데, 그건 너야!
아이들의 터질 것 같은 에너지와 혼란은 어른들에게 수수께끼이며 그들의 언어에 담긴 진심과 감정은 암호처럼 모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징으로 불안하게 느껴져 해석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미성년>에서 보듯이 미성숙한 인격은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부모의 미성숙한 모습은 어떤 아이에게는 더욱 극대화 되어 표출되고 또 어떤 아이에게는 부모의 미성숙함이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해 이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른이 되게 만든다. 하지만 자신이 반영된 그 거울을 제대로 인식하는 경우는 안타깝게도 드물다. 기이한 상징과 기호로. 고쳐야 할 문제로 여겨질 뿐이다. 그 거울을 바로 마주보는 것,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인생의 고단한 숙제다.
P.148 "난 시만큼 좋은 게 없어."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다 버릴 수 있어. 퐁타냉(다니엘)은 나한테 책을 빌려 줘. 이런 이야긴 아무한테도 하지 마,응? 내가 라프라드니, 쉴리프뤼돔이니, 라마르틴이니,위고니,뮈세등을 읽을 수 있게 해 준건 그 애야.......
입체적으로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에 웃고 울다보면 아쉬운 161페이지에 가 닿는다. 본래 8권으로 이루어진 <티보가의 사람들>중 일부의이야기가 이<회색 노트>담겼다. <티보가의 사람들>을 집필하는 과정에 작가인 로제 마르탱 뒤 가르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려는 것.
난 그것을 살아 보려 했을 뿐이다.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 ㅡ데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