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폴란드에 들러 아우슈비츠를 방문했다. 넓다란 벌판에 세워진 그곳은 침울한 공기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그곳의 방문객들은 그런 분위기에 압도된 듯 조용하게 숨죽여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특히 한 곳에서 눈길을 끈 것이 있었다. 박물관처럼 대형 유리관을 각각 채우고 있는 것은 도저히 셀수 없을 만큼의 안경들과 머리카락,신발,아이들의 인형 그리고 장애인들의 소유였던 것으로 보이는 각종 보조기구,의족. 의수였다.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짐 가방들도 한 편에 가득했는데 급박한 피란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물건들과 흔적들은 비참했던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당연한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 끌어오고 희생시켰을까? 왜 머리카락까지 한곳에 모아 두었을까? 물론 그 여행 전후에도 2차 대전에 관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관심있게 찾아봤지만 부족한 나의 수준은 그렇게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작년 말부터 올 초까지 읽은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는 그런 나에게 스탈린의 자국민을 향한 만행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으로 2차대전과 그 전후에 이르기까지 스탈린과 나치 체제의 접점에 있던 이른바 '블러드랜드'에서의 1400만에 이르는 희생과 그들이 처했던 비극적인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스탈린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서부, 우크라이나,벨라루스,발트 연안국들을 일컫는다.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933년 집단농장을 포함한 여러 정책실패 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대기근을 야기시켰다. 그는 강제이주와 1937~1938년의 대숙청, 대공포시대로 블러드랜드에 수많은 피를 뿌렸다. 그 중에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에는 농민들의 종곡까지 빼앗아가 끝도없는 굶주림에 부모가 자식을, 가족들이 며느리의 인육을 먹는 등의 비극까지 만들어냈다. 

스탈린의 집단화와 기근은 당시에도 크게 해외에서 주목받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서구의 이해와 맞물려 베일에 가려진 측면이 상당하다. 

히틀러가 자신의 에덴동산을 위해 타국민을 학살했다면 스탈린은 소련의 경제발전이란 미명하에 자국민들을 죽게 한 것이다. 


히틀러  

독일과 소련간의 물밑협상 뒤 1939년 9월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한다. 이후 기세등등해진 히틀러의 총구는 소련으로 향했다. 하지만 독일의 예상과 달리 상황이 장기전으로 흐르며 전쟁의 양상도 바뀌었다. 패전이 짙어지며 전쟁포로 등을 대상으로 했던 가스를 활용한 나치의 학살은 유대인에 보다 집중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악행이 이어졌는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나치의 잔학함은 소련과 달리 자신들의 악덕을 만천하에 드러내는것과 유대인을 학살하는 과정, 시체를 처리하는 것까지 그들 중 일부에게 맡기고 일이 끝난후에는 역시 이들도 처형했다는데 있었다.   



이 후 스탈린과 연합국의 반격으로 독일이 밀려나기 시작하며 소련군들은 빠른 속도로 독일까지 진격한다. 그리고 무서운 폭력으로 동독을 유린하며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독일 여성들을 강간했다.

그들은 독일 남성들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이기도 했다. 소련 병사들에 의해 여성들은 그렇게 두 번 죽어야 했다. 그런식으로 2차 대전 종식 후에도 블러드랜드에 살고 있는 민간인들의 희생은 이어졌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독재체제 속에서 자신들의 이상과 열망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민간인들과 전쟁포로들을 희생시켰다. 두 지도자의 이상을 위해 민간인들은 이름과 개성은 물론 피와 살이 제거된 채 블러드랜드란 판 위에서 마치 체스의 말처럼 활용된 것이다. 혹자는 역사와 전쟁에 대한 시각이 감정적이 되어선 안된다며 냉정한 시각을 가지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무감각해 지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했다.

스탈린과 히틀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자신들만의 가치를 위한 집념과 믿음으로 타인의 존엄을 끔찍하게 먼 곳에서 바라본 것이 아닐까?


P.703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정의상으로 희생자란 죽은 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든 저항할 수가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 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P.704 악은 선에 의존한다는 간디의 말이 있다. 모여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적이며 그 일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헌신과 믿음이 있다고 당시의 독일인들을 선량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임을 알려줄 근거는 된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들은 윤리적인 사고를 했다. 비록 무시무시한 착오를 저질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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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29 19: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부터 누름 첫번째 댓글 자리 는 찜 해놓음(◞♥ꈍ∇ꈍ)◞♥

미미 2021-04-29 18:41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스콧님은 감동메이커예요🙆‍♀️♡

scott 2021-04-29 20:06   좋아요 4 | URL
올해 영화 미스터 존스를 보고 난후 미미님이 블러드랜드 책을 읽기 시작해서 따라 읽기 시작함 (나는야 따라쟁이 ㅎㅎ) 그동안 이와 관련된 영화 책은 많이 봤지만 한시대에 이토록 많은이들이 희생 당했던 20세기를 잊지 말아야 할것 같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적이며 그 일이 옳다고 믿고 있으니까!!‘
어제 소개 해주신 ‘카틴 숲‘ 영화 본후 감독 인터뷰까지 봤네요. ㅠ.ㅠ

미미님이 츠바이크 스톼일로 분석하신 페이퍼도 인상 깊었습니다.

٩(^ᴗ^)۶

미미 2021-04-29 20:19   좋아요 1 | URL
언제나 제가 더 스콧님 따라쟁이죠ㅋㅋ❤❤
스콧님의 추진력에 또 감동! 리뷰 썼으니 저도 이제 맘편히 관련다큐랑 다 찾아볼래요!팔로팔로 점점 한번에 하나밖에 못하는 중임요.😆

새파랑 2021-04-29 19:1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블러드 랜드를 체스판으로 둔 히틀러와 스탈린의 잔인한 대결 비유는 정말 좋네요. 깜짝 놀랄만한 비유~!! 체스이야기가 연결되는거 같은~~ 역시 아는만큼 표현할 수 있는거 같아요. 무감각 해지면 안된다는 말도 인상적이네요^^

미미 2021-04-29 19:21   좋아요 4 | URL
ㅋㅋ감사해요!!😊 <수용소군도>의 솔제니친이 그 책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며 비슷하게 비유했었어요! 게다가 제 안에 츠바이크가 항상 있어서 이렇게라도 연결하고 싶었어요.

페넬로페 2021-04-29 20:0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읽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의 결과가 이 글에 담겨 있네요^^
전쟁이나 침략의 형태는 왜이리 같은지요~~폭력과 유린과 죽음들^^
다른 나라에 의한 침략도 아닌 자국민들에 자행된 폭력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것 같아 씁쓸해지는 저녁입니다~~

미미 2021-04-29 20:10   좋아요 4 | URL
감사해요!! 맞아요! 그런 그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는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 정서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아버지로 불리우고 전설로 기억되는 측면이 씁쓸했어요😔

붕붕툐툐 2021-04-29 20: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너무 슬픈 역사네요. 블러드랜드라는 지역이 있을 정도로 욕심에 눈 먼 인간들 때문에 평범한 시민들이 희생당하고..ㅠㅠ
미미님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볼 수 있는 따뜻한 페이퍼~🙆

미미 2021-04-29 20:14   좋아요 3 | URL
그렇죠? ㅠ 여기 기록된 내용도 끔찍한데 실상은 어땠을지..그렇다고 가해자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답이 없다는 스나이더의 후반 결론이 반전이었고 여러모로 의미심장했어요. 감사해요! 🙆‍♀️

바람돌이 2021-04-30 0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다 읽으셨군요. 완독 축하 축하!!!
아우슈비츠 사진들이 비감하네요. 저는 이 책의 저자가 역설적으로 아우슈비츠는 생존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알려질 수 있었다고, 다른 절멸수용소들은 생존자가 아예 없어 얘기를 전할 사람도 없어 묻혀졌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자꾸 세계 어디선가에는 반복되는 것이 뭔가 싶어요.

미미 2021-04-30 00:24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 그러게 말이예요~예전에는 아우슈비츠가 가장 끔찍한 줄 알았는데 극히 일부분이라니.. 게다가 미얀마처럼 권력때문에 시민들이 희생당하는 일이 반복이고 심지어 유엔이 있지만 넋놓고 바라만 보는 것도 당시처럼 반복이니 참 무섭네요.

mini74 2021-04-30 2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 저 지금 20쪽 정도 읽었는데 온통 밑줄입니다 ㅠㅠ 미미님 글 읽으니 뭉클. 도움도 많이 됩니다. 한 줄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읽고 싶은 책이에요 *^^*

미미 2021-04-30 21:28   좋아요 3 | URL
오오 미니님! 시작하셨군요~♡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난해하거나 지루한적이 없었어요. 오히려 읽는 내내 저 당시 상황 궁금해 폭풍구글링..ㅠㅜ초반 저도 테이프 마구마구 붙였어요👍 완독 응원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