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미드나이트
릴리 브룩스돌턴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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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이 먼 길을 돌아와 결국 죽게 된다고 해도"

 

 

 

SF소설도 좋고 우주이야기도 좋다. 표지를 감싸는 띠지에 쓰여진 '조지클루니 영화화 확정'도 눈길을 끈다. 그래도 가장 마음이 끌렸던 것은 '별빛' 이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이 작품이 품고있는 별빛이 칼 세이건의 '콘택트'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나는 '콘택트'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이 너무 좋았었다.

장밋빛 광채가 지평선 위로 흘러나오며 푸르스름한 얼음의 동토 지대 속으로 스며들어, 온통 눈뿐인 풍광 위롤 쪽빛 그늘을 드리웠다. 새벽은 굶주린 불길처럼 타고 올라와, 섬세한 분홍빛이 주황색으로, 다시 자홍색으로 깊어지며 두꺼운 구름층을 하나씩 삼켜나가다가, 하늘 전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p. 11)

요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 첫 페이지이 등장하는 이 묘사에서 [일리아스]의 표현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ㅎㅎ 첫페이지부터 서양작가들은 역시 호메로스의 영향을 여전히 많이 받고 있구나를 느꼈다면 오버이려나...

하지만 이곳은 북극 천문대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고 안주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거스틴이 갈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었다. 명성도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였다. (p. 13) 시간의 동틀 녘까지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시작을 잠시라도 엿보고 싶었다. 어거스틴은 길이길이 기억되길 바랐다. 하지만 여기 어거스틴은 일흔 여덟 살에, 북극 제도 어느 산꼭대기, 문명의 바깥 지대에서 전 생애를 바친 과업의 종착역을 앞두고 있으며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무지의 황량한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p. 14)

노천문학자이자 현재 북극천문대에 있는 어거스틴과 젊은우주학자이자 현재 목성탐사중인 우주선에 있는 설리가 교차되며 서술되는 이 작품은 별로 시작해서 별로 끝나는 것 같지만 실은 지구에서 시작해서 지구로 끝나는 소설이다. 다만 그 사이에 아득한 별들이 있다고나 할까...

어거스틴이 머물고 있는 천문대에 전원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모두들 급하게 떠나지만 그들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지만 어거스틴은 홀로 천문대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에겐 딱히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앞에 어린 소녀가 갑자기 나타난다.

그를 미치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것은 그일, 쓸모와 중요성이라는 얇은 막뿐이었다. 익숙한 일과에 맞춰 계속 바쁘게 몸을 움직이려 고군분투했다. 문명이 종말을 맞이했다는 막막함이 어거스틴의 마음을 짓눌렀다. 광대함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된 그의 머리로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전에 고민해본 그 어떤 문제보다도 낯설로 압도적인 사건이었다. 인류의 끝, 전 생애를 바친 작업의 소멸,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재조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대신 어거스틴은 우주에서 계속 밀려들어오는 데이터들에 전념했다. 천문대 밖 세상은 침묵뿐이었지만 우주는 그렇지 않았다. (p. 34~35)

소녀를 보내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다시 연락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누구도 연락되는 이가 없었다. 전화도 인터넷도 무선신호조차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세상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거스틴은 북극천문대에 고립되었다. 이유는 알수 없었다. 다만 어거스틴 혼자 아니 소녀와 단 둘만 남았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등 조절기가 천천히 지구의 동틀 녘을 재현했다. 단계에 따라 완벽하게 구분되는 새벽의 밝기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설비였다. 설리는 매일 아침 그 과정을 꼭 지켜보았다. 하지만 빛은 하얀색뿐이었다. 제작 기술자들이 약간의 분홍색이나 주황색을 더해놓지 않은 건 불만이었다. (p. 42)

목성탐사우주선 에테르호의 첫 장면도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으로 시작한다. ^^ 다만 우주선에서 조명으로 볼 수 있는 색은 그저 환한 빛 일 뿐이었다.

에테르 호의 대원 여섯 명은 지구에서의 삶이라는 사소하고 하찮은 꿈으로부터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개인사에, 사적인 추억들에 얽매일 수 없었다. 그들이 목성에 도착했을 때 의식의 낯선 층 하나가 깨어나 넘쳐흘렀다. 어두웠던 방에 불이 켜진 듯, 선회하는 전구 아래 벌거벗고 앉아 있는 무한의 당당한 실체가 드러난 듯했다. (p. 44) 다들 말없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이 해낸 막중한 경험, 그들이 배우고 앞으로도 계속 밝혀낼 진리들에는 더 큰 규모의 청중이 필요했다. 에테르 호의 대원들은 자기들만을 위해 그 여정을 감내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를 위한 일이었다. 지구에서 그들이 추동했던야망은 이곳 깊은 암흑 속에서는 한갓 허무한 허영에 지나지 않았다. (p. 47)

목성을 우주선안에서 직접 본다는 것은 엄청난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감격도 잠시.. 지구와 통신이 두절되었다. 급작스러웠고 사전징후도 아무것도 없었다. 우주선은 예정에 따라 지구로 귀환하는 중이었고 내내 지구로부터는 아무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목성에 대한 흥분이 지구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영원의 감격이 찰나의 충격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에서 한참 떨어진 그 곳에서 말이다. 설리는 문득 딸의 사진을 한장밖에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 상황에서 일을 계속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컴퓨터로 밀려드는 데이터들에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 모든 새로운 정보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신기원을 이룰 결론들도, 손끝만 까딱하면 되는 세상을 뒤흔들 발견들도 마찬가지였다. 중력 작동 구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중력의 힘이 그녀를 계속 잡아주었으면 했다. (p. 69)

고립된 북극에서 별을 보며 버티고 고립된 우주에서 중력을 느끼며 버티는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어거스틴과 설리는 우주를 건너 서로에게 연결되기 시작한 셈이었다. 비록 그 연결이 돌고돌아 한참후에 이루어진다해도...

늘 그랬듯이 저 별들이 그의 내부에서 차오르는 막막한 감정들을 하찮게 만들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별들은 그저 차갑게, 밝게, 멀리서 무정하게 눈짓할 뿐이었다. (p. 80)

설리는 바 스툴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사람들 틈새를 뚫고 지나가며, 노래 <스페이스 오디티>에 맞춰 밀쳐지고 흔들리고 휘말리면서, 잠시, 이것이 그들 둘만을 위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우리 노래, 데이비드 보위의 목소리가 술집을 가득 채우고 하퍼는 설리를 데리고 댄플로어로, 데비에게로 갔다. (p. 99)

고립된 곳에서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 진정한 고립이 아니게 느껴지도록 해주는 존재, 그건 결국 사람이었다. 가족같은. 어거스틴은 아이리스에게 설리는 동료대원들에게 동거인 이상의 의미를 주고 있었음을 고립되고 나서야 절절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도 스치듯 울려퍼진다. 그리고 또 빠질 수 없는 것, 책과 CQ!

테베스는 <어둠의 왼손> 의 한 귀퉁이를 접고 책을 덮어 탁자 위에 놓았다. (중략) "어떻게 계속 이러고 있을 수가 있어? 어떻게 조각조각 부서지지 않고 멀쩡한 모습일 수가 있지? (p. 104)

그러고 있자니 지하실에서 보내던 날들이 기억났다. 기계를 켜고 처음 불특정 호출 신호인 'CQ' 를 보내던 날, 송신은 단순하고 직설적인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p. 132)

테베스는 고집을 부려 가지고 탄 또 다른 종이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이었다. 테베스가 종이책을 가져가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난리가 났었다. 테베스는 그래 봐야 얼마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고, 테베스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탐사 감독 위원회에서 개입해 반대론자들을 막아주었다. 위원회에서 '심리학적 필요 장비'로 추가해 화물을 승인해 주었다. (p. 138)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과 로봇의 창시인 셈인 아이작 아시모프 또한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소품일 것이다. 더구나 '심리학적 필요 장비' 라는 면에서 사람이 무언가 읽는 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곤 한다. 어거스틴도 작은 소녀 아이리스도 무언가 읽고 또 읽었다. 역시 책은 꼭 필요하다! ㅎㅎ

그리고 CQ... <콘텍트> 에서 어린 소녀가 밤마다 신호를 보내며 시작하던 말 CQ... 그렇게 보내던 신호에 대한 응답이 우주에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상황이 <콘택트> 이야기 였다. 그리고 우주를 건너 만난 외계존재는 뜻밖의 부녀상봉을 선사했더랬다. 읽을 수록 <굿모닝 미드나이트> 라는 이 작품이 <콘택트> 오마주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신화도 비슷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가족을 돌보는 일보다 크고 중요했다. 설리가 아버지에 대해 물을 때마다 진은 대단한 남자였다고 말해주었다. 너무 똑똑하고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족을 위해 마음 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진은 설이에게 아버지의 소명의식을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했다. 가족보다는 세상이 더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설리에게 아버지가 없는 거라고. (p. 254)

어거스틴이 딱 한번 진짜 사랑에 빠졌을때 만난 여자가 '진' 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어거스틴과 설리와의 관계는 작품 초반에 드러난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전혀 모른다. 어쩌면 이 소설이 끝날때까지도. 하지만 둘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아니 너무나 닮아있었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아예 아무것도 발견 못 할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마련한 새로 찾은 행복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을 서둘러 행동에 옮길 이유가 없었다. 처음으로 어거스틴은 무지에 만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목소리를 찾는 일은 어거스틴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p. 289)

그가 북극곰 발자국을 발견한 이야기를 할 때, 설리는 그에 대해 뭔가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완고한 고독이었다. 그는 지금 세상의 끝에 와서조차, 자신이 외롭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어떻게 얻어내야 할지는 모르면서도 관계 맺음에 갈급하며, 발자국 하나를 발견하고, 다른 존쟁 대한 최소한의 증거만 보고도 동반 의식을 느꼈다. 현재의 고립 상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늘 그래왔던 사람이 아닐까, 설리는 짐작했다. 사람으로 가득한 곳에서도, 분주한 도시에서도, 심지어 연인의 품에 안겨서도 혼자였을 사람이었다. 설리도 그랬기에 그의 내면을 알아보았다. 설리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연결이 끊어졌다. 그 준비가 언제 될지는 늘 알수 없었지만 말이다. (p. 328)

사실 가족을 가진다는 것이 가족을 잃는 것보다 더욱 힘들었다. 정말 그랬다. (p. 343) 늘 뭔가 결핍되어 있었고, 지금에서야, 이 모든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멀리 떠나와서야, 설리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온기, 그리고 열림. 한 번도 자라날 기회를 얻지 못했던 무언가의 뿌리들이었다. (p. 344)

전 세계적 아니 전 우주적 발견을 하길 희망했으나 아니 어느 정도는 성취했으나 고립된 순간에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원하는 건 단 한 사람의 인정이면 충분했다. 결국 돌고돌아 서로에게 와야 했다.

복닥이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 지구를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누구나 먼지같은 존재들이다. 먼지같은 존재가 하늘을 바라보면 먼지처럼 흩뿌려져 있는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보이지만 그 별빛들은 결국 허상이다. 손에 닿을 수 없는 먼 우주보다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는 바로 옆을 바라보게 하는 이 작품은 SF라기 보다는 실존적 소설이었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화려함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삶의 가치를 전달받았다면 만족할 수도 있을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 보고싶어졌다. 아니 조만간 꼭 봐야 겠다. 영화는 항상 원작보다 못하기 마련이지만 <콘택트> 영화의 감동을 다시 한번 기대해볼 만한 원작이었기에 오랜만에 영화감상타임을 기대해보련다.

"아이리스, 당신이 와서 기뻐"

"나도 기뻐" (p. 358)

ps. '옮긴이의 말' 에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의 원제인 '굿모닝, 미드나이트'는 낮을 떠나보내고 밤을 맞이하는 인간의 절망적인 기쁨을 노래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20세기 초의 소설가 진 리스가 먼저 자신의 작품 제목으로 차용한 바 있다. 진 리스의 동명 소설은 역사 작가인 헨리 밀러와 이혼한 후 인간관계에 대한 절망과 외로움으로 써내려간 작품인데, 릴리 브룩스돌턴은 그 소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한다. 고립과 관계라는 주제를 묵직하고 솜씨 좋게 파고든 선대의 두 작품을 계승하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 뛰어넘고자 한 의도로 에밀리 디킨슨의 시 제목을 이어받은 다음, 진 리스의 소설에서 이 책의 책머리에 제사를 인용했다고 한다. (p. 371)

나는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어둠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그리고 그 남자가 있었다. - 진 리스

 

어느 책에서 '진 리스' 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버지니아 울프 와는 또다른 여성작가로서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작가였다. 진 리스 와 에밀리 디킨슨 이라... 그러고 보니 <굿모닝 미드나이트> 의 작가가 여성이었나 보다. 작가 사진이 없어서 이름만 보고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시 '굿모닝 미드나이트'(한밤이여 안녕) 를 찾아보았다.

한밤이여, 안녕!

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낮은 내게 싫증이 났다지만,

내가 어찌

낮에게 싫증을 느끼겠어요?

태양빛이 너무나 안온해서

나 거기서 살고 싶었지만,

아침은 나를 원치 않는대요. 지금은.

그러니

낮이여, 잘 자요!

Good morning, Midnight!

I'm coming home,

Day got tired of me –

How could I of him?

Sunshine was a sweet place,

I liked to stay –

But Morn didn't want me – now –

So good night, Day!

그런데... 왜 '한밤이여 안녕' 이라고 했을까... 굿모닝은 아침에 하는 인사 그러니까 시작하는 인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헤어질때 하는 인사처럼 '한밤이여 잘가라' 는 듯이 '한밤이여 안녕' 이라가 보다는 '안녕, 한밤!' 이 맞지 않을까? '반가워 한밤' 이라는 듯이...

여하튼 보통 밤에 자고 낮에 활동하기 마련이지만 그런 낮에 잘자라 인사하고 밤에 굿모닝 인사를 하는 이 역설은 우주를 돌고돌아 이어지는 '관계' 에 대해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어거스틴과 설리에게는 잘 맞는 표현이다. 그리고 지구의 멸망을 배경으로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희망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두 주인공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이었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비록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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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와 소음 - 불확실성 시대, 미래를 포착하는 예측의 비밀, 개정판
네이트 실버 지음, 이경식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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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시대 넘쳐나는 소음들 속에서 제대로 된 신호를 찾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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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와 소음 - 불확실성 시대, 미래를 포착하는 예측의 비밀, 개정판
네이트 실버 지음, 이경식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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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미래를 포착하는 예측의 비밀

 

 

예측이 실패하는 이유는 데이터의 부족이 아니다. 정보가 많다고 해서 예측이 쉬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보가 하나둘 많아지면 오히려 불필요한 소음의 양도 늘어난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신호와 소음]은 넘치는 정보에서 쓸모 있는 정보 가려내기, '신호' 에서 '소음' 을 제거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p. 6) -추천사 中-

빅데이터라고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신호' 와 '소음' 을 구별해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하고 또 얼마나 필요한 능력인가. 중요성은 이미 충분히 그리고 대부분 체감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신호' 에서 '소음' 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길 기대하며 책장을 펼쳤다.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어째서 전문가들의 예측이 그토록 자주 빗나가는지, 아울러 어떻게 하면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예측이 가능할지를 다룬다. 그러나2012년에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뒤로도 전문가들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세상을 바꾸는 대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지만, 이런 예측들이 대체로 무시되거나 잘못 받아들여지는 사례의 수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p. 13) 이 책 전체의 목적은 사회가 더 나은 예측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 아래에서 해야 하는 더 나은 추정은 단순한 추측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어떤 의사결정권자가 현재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정보를 토대로 해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 이런 접근 방식이 그 사람이 신탁의 사제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보다는 더 나은 패러다임이다. (p. 28) -서문 中-

2012년의 초판을 읽은 것은 아니나 이번 개정판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다루고 있는 예시들에서 년도가 2012을 지난 것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최신 예시는 대부분 '트럼프' 관련 한 것들이었다. 아마도 트럼프 낙선 이후 제대로 트럼프 당선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예측' 이 가장 크게 빗나갔던 사례를 다루고자 개정판을 낸 듯 싶다.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은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현대 세상에 언제나 멋들어지게 적응하지는 않는다. 여러 편견을 알아차리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새로 보태지는 정보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편익은 최소한에 머물거나 어쩌면 오히려 줄어들지도 모른다. (p. 62) 신호는 진리다. 소음은 우리가 진리에 다가서지 못하게끔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 이 책은 이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p. 69) -들어가며 中-

이 책이 신호에서 소음을 걸러내는 방법을 간명하게 알려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어마무지한 두께에서 내내 의미들만 설명되어졌다면 읽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이책은 대부분 신호 보다는 소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대충 걸러가며 읽게 되는 책이었다. 첫번째 소음은의 주제는 '금융위기'다.

과거의 데이터는 미국의 주택가격이 일제히 하락할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주택가격 폭락은 표본 외 사건이었고, 신용평가사들이 운용하던 모델들은 이런 조건 아래에서 지급불능의 위험을 산정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p. 114) 그들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는 당신이 쏜 총알이 과녁 한가운데에 적중하지 않았는데도 언제나 대체로 비슷한 지점을 맞혔다는 사실을 들어, 다시 말해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밀하다는 점만 가지고서 자기가 명사수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p. 115)

소수점 둘째자리까지 정밀하게 한 예측지수는 표본 외 사건에 대해 아무런 예측을 해주지 못한 셈이 되었다. 즉 정밀한 수치이긴 했으나 정확하게 표적의 중심을 맞추진 못했다는 말이다. 그동안의 데이터로는 그동안 한번도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해 예측은 커녕 소음만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금융위기'가 터졌다. 금융위기는 정치권자들의 선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고슴도치와 여우는 이사야 벌린이 러시아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에 대해 쓴 에세이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따온 표현이다.(벌린은 이 제목을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가 쓴 '여우는 사소한 것을 많이 알지만 고슴도치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안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톨스토이나 아름다운 문장을 특별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벌린의 에세이를 읽을 이렇다 할 이유는 없다. 벌린의 에세이가 담고 있는 기본 발상은, 작가와 사상가를 크게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p. 126)

미국에서 있었던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저자는 '여우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론매체에는 대부분 한가지 주장을 과하게 열심히 하는 고슴도치적 전문가들이 득세하고 이들을 보다보면 여론은 이들이 주는 쓸데없는 소음을 신호처럼 받아들익 되기 쉽다. 그러니 여우처럼 의심하고 여우처럼 사소한 정보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 여우처럼 자신만의 확률을 계산해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우처럼 저자 본인이 했던 직접적 경험담이 '야구'이야기인 셈이다. 저자는 메이저리그의 야구선수들 성적을 예측하는 프로그램으로 인생역전을 경험했다.

경쟁이 어떤 곳보다 치열한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예측을 가장 잘할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스스로 혁신가가 되어야 한다. (중략)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발상을 하기란 어렵다. 좋은 발상을 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좋은 발상을 했더라도 곧장 다른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걸 베끼기 때문이다. (p. 211) 훌륭한 혁신가는 일반적으로 매우 크게 생각하고 동시에 매우 작게 생각한다. 새로운 발상은 때로 문제의 가장 미세하고 구체적인 데서, 보통 사람들은 귀찮아서 피하려 드는 데서 생겨난다. (p. 212)

일상에서 보통사람들이 좋은 발상에 대해 경험해볼 수 있는 영역은 아마도 '기상예측' 이 아닐까. 폭설, 폭염, 폭우 같은 재난에 가까운 기상을 경험할때마다 우리는 기상청을 마구 힐난한다. 하지만 기상청은 분명 최대한 신호를 잡아내려 하고 있는 중이다.

기상 예측의 과학은 기상이 제기하는 온갖 복잡성이라는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는 성공 스토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겠지만, 예측에서 이 같은 경우들은 규칙들보다는 예외에 속한다. 그럼에도 미국 국립기상청은 종종 폄하될뿐더러 민간업체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경쟁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문제는 이 경쟁이 불공정하게 전개된다는 데 있다. (p. 245)

일기예보가 틀리고 기상청이 욕먹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매한가지인가보다. 하지만 기상청 예보는 성공스토리라고 저자는 말한다. 기상예보는 점점 잘 맞고 있다.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체감할 수 있는 성공스토리이다. 심각한 위험은 기상보다는 오히려 '지진'에 있었다.

통계학에서는 소음을 신호로 잘못 인식하는 행위를 가리켜 '과적합'이라고 부른다. (p. 298) 과적합은 '엎친데 덮치는' 격이다. 과적합 모델은 연구논문에서는 '더 나은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더 나쁜' 성적을 거둔다. 그리고 후자의 특성 때문에 실제 현실에서는 예측하는 데 동원될 경우 호된 대가를 치른다. (p. 304) 지진은 기본적으로 '복잡한' 현상이다. (p. 310) 그 과정은 너무 복잡한 나머지 특정 수준을 넘어서서 예측할 길이 없다. 그런데 복잡한 과정들은 충분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질서와 아름다움을 낳는다. 나는 이 책에서 신호와 소음이라는 표현을 매우 느슨하게 사용하지만, 사실 두 단어는 전자공학에서 나온 용어다. (p. 311)

지진에서 '과적합' 사례를 찾는 것은 역사속에서 엄청난 대지진을 찾아보면 된다. 지진은 예측불가능한 영역같아 보였고 실수들만 차곡차곡 쌓아오는 분야 같았다. 하지만 저자는 '기술은 퇴보하는 일 없이 언제나 발전'한다며 그러한 실패들 속에서도 분명 '신호'를 지진 신호를 찾아낼 날이 올것이라 희망한다. 과적합 실패담이 어디 지진에서 뿐이겠는가 실생활에서 더 심각하게 체감되는 분야는 '경제 예측' 이다.

경제 예측가들은 하치하우스가 그렇듯 세 가지 근본적 문제에 부닥친다. 첫째, 경제 통계안으로 인과관계를 결정하기란 매우어렵다. 둘째, 경제는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지금의 경제 주기에서 유효한 경제 행위가 미래의 경제 주기에서는 전혀 효과가 없을 수 있다. 셋째, 경제 전문가들의 예측이 형편없었던 것 만큼이나 이들이 다루어야 하는 데이터 역시 썩 훌륭하지 않다. (p. 328) 설령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경제 전문가들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는 표적을 맞혀야 하는 문제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경제는 항상 진화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경제변수 사이의 관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 (p. 334)

빅데이터 시대에 소음은 엄청나게 경제분야를 물들인다고 하면서도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적 추론은 이론으로 뒷받침될 때, 또는 적어도 근본 원인에 대한 좀 더 깊은 생각으로 뒷받침될 때 훨씬 더 강력해진다고 말한다. 다만 지나친 자신감은 금물, 예측가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잠복해 있는 온갖 위험을 온전하게 그리고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위축감을 느낄 때 위험은 음험한 모습을 드러낼거라고 저자는 당부한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음험한 위험은 바로 '전염병' 아닐까.

예측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예컨대 예측은 모든 과학에서 가설 검증에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통계학자 조지 박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모델은 빗나간다. 그러나 몇몇 모델은 유용하다" 모든 모델은 우주의 미니어처이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 (p. 395) 좋은 모델은 설령 빗나간 예측을 내놓는다 해도 유용할 수 있다. 오조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예측은 빗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얼마나 빗나갔는지, 빗나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해하고 빗나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예측과 관련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p. 396)

빗나간 예측도 사후수습으로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코로나' 사태로 절절이 체감하는 중이다. 비록 빗나갈 지라도 "예측'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예측은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자는 '베이즈 정리' 를 강조한다.

토머스 베이즈는 1701(또는 1702)년에 태어난 영국의 목사다. 베이즈는 통계학의 전 영역에 이름을 남기고 저 유명한 불멸의 정리에도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지만, 정작 그의 삶은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중략) 베이즈는 불리한 출신 배경과 부족한 저술 경력에도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아마도 왕립학회의 토론회에서 내부 비평가나 조정자 역할을 한 듯싶다. (중략) 베이즈는 신이 진정으로 자비심이 넘치는 존재라면 어떻게 이 세상에 고통과 사악함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을 탐구했다. 그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신의 불완전성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p. 414) 베이즈는 신의 완벽함과 무결성을 믿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은 일정하고 예측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하는 아이작 뉴턴의 저작도 신봉했다. (p. 415) 베이즈주의적 관점은 합리성을 '개연성(확률)'과 관련된 문제로 본다. (중략) 베이즈는 인간이 결점투성이라고 해서 이를 신이 실수한 것이거나 실패한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는 말이다. (p. 416) 확률과 예측, 그리고 과학적 진보의 밀접한 연관성은 이처럼 18세기들어 베이즈와 라플라스 덕분에 온전히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p. 417) 베이즈 정리의 철학적 토대는 놀라우리만큼 풍부한 데 비해 그 수학적 형식은 굉장히 간단하다. (중략) 베이즈 정리는 조건부확률과 관련이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전제 아래 이론이나 가설이 참이나 거짓일 확률을 따진다는 말이다. (p. 418)

'베이즈 정리'에 대해서는 다른 수학책이나 통계관련 책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그때도 이해하지 못한 정리였듯이 이번에도 이해하긴 어려웠다. 다만 베이즈 정리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보니 '미국식' 사고방식을 좀더 뚜렷이 느끼게 되었다. 서양의 추론 방식은 대부분 '연역식' 이다. 주제를 먼저 세우고 입증해나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예측 이라는 방식으로 학문이 발전해온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엔 '종교적 믿음' 이 깔려 있기 쉬웠다. 그래서 '시크릿' 이라는 자기계발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겠구나 하는 그책을 읽은지 몇년만의 깨달음이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베이즈 정리' 의 주관적 확률에 대해 도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모르겠다.

베이즈 정리는 또한 우리 주변 세상에 대해, 특히 사람들이 확률이나 가능성의 문제로 좀처럼 생각지 않는 문제들까지 확률적으로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중략) 기본적으로 베이즈 정리는 '인식론적' 불확실성, 곧 우리 지식의 한계를 다룬다. (p. 426) 피셔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베이즈 정리'자체에 대해서는 별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베이즈 정리'는 그저 단순한 수학적 실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피셔를 비롯한 그들이 두려워한 건 '베이즈 정리'가 적용되는 방식이었다. 특히 그들은 베이즈주의의 사전확률이라는 발상을 문제 삼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사전확률이 지나치게 주관적이었다. '실험 전에 어떤 것이 발생할 가능성을 미리 정해둬야 한다니, 그것도 주관적으로! 이런 설정이 과학의 객관성을 어떻게 훼손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피셔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바라보던 사전확률의 문제였다. (p. 431)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사전확률' 이라고 하지만 사실 확률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예상하는 기대수치인 셈이었다. 그런 주관적 수치를 어떻게 확률 이라고 할 수있는걸까... 그런 주관적 수치로 임의적으로 설정한 사전확률을 바탕으로 계산한 예측이 어떻게 확실하게 맞다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베이즈정리는 여전히 내게 이해가 안가는 확률통계처리 방법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피셔의 통계 철학이었다. 그의 통계방식은 실험의 객관적 순수성을 강조한다. 모든 가설은 데이터만 충분하게 주어진다면 완벽한 결론으로 검증될 수 있다는 게 이 방식의 가정이다. 하지만 이런 순수성을 확보하려면 베이즈주의적 사전확률의 발상이나 뒤죽박죽인 실제 세상의 온갖 맥락에 대한 필요성을 부정해야만 한다. 이 방법론은 우리가 설정한 가설의 타당성에 대해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권장하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p. 436)

데이터들만을 바탕으로 한 통계만 신뢰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AI에게 언어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인터넷세상에서 스스로 학습하도록 시켰더니 올바른 언어보다 욕지거리들만 잔뜩 배워서 인공지능의 언어능력은 스스로학습이 아닌 올바른 언어를 입력해주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데이터들이 많다고 해서 그 많은 데이터들이 맞는 것은 아니다. 진짜보다 가짜가 많으면 통계는 가짜를 진리로 계산해낸다. 따라서 단순한 통계는 오히려 신뢰성이 없다. 나는 통계도 베이즈정리도 다 믿을 수가 없게 되버리고 말았다.

사실 베이즈주의의 한 가지 특성은 우리에게 더 많은 증거와 데이터가 주어지면 우리가 가진 믿음들은 저절로 진리를 향해 수렴한다고 보는 데 있다. (p. 442) 내가 피셔의 통계적 접근법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이 같은 내용은 신기한 게 아니다. (중략) 그런데 최근 들어 존경받는 통계학자들이 빈도주의 통계학을 학부에서 더 이상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중략) 결국 베이즈주의자가 승리할 것으로 예측한다. (p. 444)

결국 '믿음' 의 문제였다. 믿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시크릿' 이라는 책의 확률적 정리가 '베이즈정리'인 셈이다. 답이 없어 보이는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다.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저자는 최신 기법을 예로 들기 시작한다. 첫번째 예시는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체스'경기다. 그 다음은 포커 였다.

컴퓨터 체스 프로그램들은 이런 방식으로 체스를 둔다. 가능한 거의 모든 수를 최소한의 깊이로 검토하다가 가장 유망한 수에 자원을 집중한다. 이 방식은 매우 베이즈주의적이다. (p. 489) 포커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의사결정 과정을 제어하지만 어떤 카드가 내 손에 들어오게 하거나 바닥에 깔리게 제어하지는 못한다. (p. 547) 결과에 초점을 덜 맞출수록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p. 548) 해결책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호와 소음 모두 이 우주에서 뺄 수 없는 요소임을 깨닫고서 이들에 대해 전혀 흔들림 없는 마음의 평정 상태를 유지하며, 각각의 실체를 파악하고 평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p. 548)

예측을 하는 구체적 방법에 있어서 통계를 지나 믿음의 문제로 가버렸다. 구체적 예시들은 또다시 베이즈정리의 주관적 확률을 지지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저자는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좀더 큰 예시들을 제시한다. 바로 '보이지 않는 손' 이다.

사실 자본주의와 베이즈 정리는 같은 지적 전통 속에서 나타났다. 애덤 스미스와 토머스 베이즈는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두 사람 다 스코틀랜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영향을 받았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베이즈주의적 과정이라 생각할 수 있다.(중략) 우리 믿음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면서 점검 개선하고, 사람들 사이에 그 믿음에 이견이 있을 때는 내기를 한다는 점에서 서로 같기 때문이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지혜'의 강점을 취하는 합의 추구 과정이다. 따라서 시장은 이런저런 예측을 하는 데 특히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주식시장이 그렇다. (p. 554) '거품이 왜 생기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장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걸 모든 사람이 바라기 때문입니다' (p. 591) 그런데 분명한 것은 만약 우리가 '시장은 오류 없이 무결점으로 돌아가며 시장의 가격은 언제나 옳다'는 가정을 갖고 있다면 결코 거품을 탐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p. 611)

'보이지 않는 손' 이라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를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의 믿음이 바탕이 된 '베이즈주의' 를 보여줄 수 있는 예시로 '주식시장'은 적절하다. 코로나 사태로 경제가 침체될때 개미들이 주식시장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었는지 생각해보면 정말로 아주 적절한 사례다. 그리고 또한번 절감할 수 있다. 시장의 가격은 항상 옳지는 않았다. '보이즈 않는 손' 이 시장에서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다음 예시는 '지구 온난화' 문제다.

인과관계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있다면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여러 주장을 의심할 근거는 충분하다. (중략) 그러나 예측은 현상 뒤에 숨은 원인을 온전하게 이해할 때 훨씬 더 강력해진다. 우리는 지구온난화의 원인을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원인은 바로 온실효과다. (p. 616) 불확실실은 예측의 본질적 요소로, 타협이 불가능하다. (p. 662) 그러나 불확실성을 조심스럽고도 명시적으로 계량화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과학적 진보에는 특히 베이즈 정리를 전제한다면이것이 필수다. (p. 663) 고장난 정치제도는 미국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p. 670) 내가 아이디어들의 건강한 토너먼트와 철창 속에서 치러지는 정치라는 격투기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빤하다. 특히 내가 올바른 예측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p. 671)

지구온난화 문제는 비교적 정확한 과학적 토대들로 확실한 지향점을 보여주지만 정치적 합의는 불확실성에 미래를 걸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에 건 정치적 합의는 때론 '테러'로 돌아오기도 했다.

진주만 공습과 9.11테러 - 신호는 있었지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p. 675) 테러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테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테러를 정의하기란 매우 까다롭다. 블라드미르 레닌은 '테러의 목적은 공포를 조장하는 데 있다' 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이들은 공포를 극대화해서 대중을 조종하려 한다. 파괴와 살인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p. 694) 테러리스트와 사회 사이에는 일종의 균형이 있을 수 있다. 자유와 보안 사이의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 균형이며, 균형의 무게중심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다. (p. 712) 테러를 사전에 포착하지 못한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상상력의 부족이다. 예측을 할 때는 호기심과 회의론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취할 필요가 있다. (p. 718)

결국 '예측' 은 상상력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따라서 주관적 가설확률을 토대로 한 베이즈정리는 또다시 실용성을 획득한다. 저자는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앎으로써 좀 더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다' 고 책을 마무리 한다. 7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껍고 거대한 책을 통해 얻은 결론은 결국 '신호와 소음'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아냈다기 보다는, '신호와 소음'을 구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는 것이다. 이 결론을 설마 이 두꺼운 책을 읽기 전에 몰랐을까?;;;

정보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유용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다. 다시 말해 소음에 대한 신호의 비율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는 것' 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과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차이' 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도약을 크게 하고 그다음부터는 작은 발걸음을 부지런히 놀려라. '큰 도약' 이란 바로 예측과 확률에 대해 베이즈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p. 721) 베이즈주의 원칙을 가장 쉽게 적용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은 예측을 하는 것이다. (p. 727) 베이즈정리 아래서는 누구든 자기 견해나 믿음을 더 많이 검증하려들 것이고,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위에 열거한 문제점들을 더빠르게 극복하고 실수를 통해 배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p. 729) -나가며 中-

정말이지 두꺼워도 너무 두꺼웠던 이 양장본의 커다랗고 두꺼운 책의 결론은 어쩌면 서문에 이미 다 나와 있는 셈이었다.

나는 [신호와 소음]이라는 이 책의 내용을 자동차에 붙이는 스티커에 들어갈 정도로 압축한다면 무엇이 될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생각하라' 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기에다 스티커 하나를 더 추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스티커의 내용은 이렇다. "속도를 늦추고 의심하라" (p. 38) -서문 中-

결국 '신호' 와 '소음' 을 구별해내는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었다. 각자가 꾸준히 생각하고 의심하고 예측해보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경험치가 상승한다는 것뿐.

- 리뷰어스클럽에서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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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서 - 고전으로 읽는 성서 EBS CLASS ⓔ
김학철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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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전을 서양역사를 읽다보면 기독교 라는 벽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나는 종교가 없으므로 종교에 대한 이해기반이 부족했다. 성서를 역사서로서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두께와 그 어색한 문체가 늘 선택장애를 가져오곤 했다. 신학자들이 쓴 책을 읽어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전도를 위해 믿음을 종용하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미루고만 있던, 비록 개인적이긴 하지만 숙제같았던 부분에 대해 조금은 할 수 있게 한 이 책을 만났다.

기독교 성서를 전공하고 이에 관해 여러 편의 책과 논문을 냈지만 이후 저는 기독교를 교양교육으로 가르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중략) 이 책은 [마태복음서]라는 기독교 성서 중 한 권의 책을 교양인에게 해설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한 총 열 번의 강의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강의 현장감을 살리려 책에 구어체를 유지했습니다. 저는 [마태복음서]를 기독교인만이 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류의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p. 4) 여러 훌륭한 성서 번역본이 있지만 이 책의 [마태복음서] 본문은 제가 그리스어 성서를 번역한 것입니다. (p. 5)

저자는 신학을 전공했고 기독교교양학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는 학자다. 신학을 공부했으나 목회자는 아니고 기독교를 가르치고 있으나 종교가 아닌 교양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자다. 그리고 EBS에서 강의됐던 프로그램이 바탕이 된 책이다. 여러모로 신뢰가 가는 책이었고 무엇보다 얇아서 부담이 없었다. 무엇보다 비록 부분적이긴 하나 원전번역 이라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었다. 기존의 한글성서를 바탕으로 한 책은 결국 중역본일 수 밖에 없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원전에선 조금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종교인이 아니라 '고전으로서' 읽는 첫 성서로 이만한 조건을 갖춘 책은 드물지 않나 싶어 반가웠다.

[마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경에 있는 문서 중 하나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그리스도교'는 로마카톨릭, 프로테스탄트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신교, 그리고 동방정교회를 모두 포함합니다. 앞으로 그리스도교 혹은 기독교라 부르겠습니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경전 문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는 교파를 불문하고 경전에 속합니다. 기독교 경전을 흔히 '성경' 혹은 '성서'라고 합니다. 성경은 전서 입니다. 전서란 어떤 분야에 관련한 사실이나 지식을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엮은 책이지요. (p. 13)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마태복음서]는 고전입니다. (중략) 제가 직접 번역을 해봤는데요, 200자 원고지로 약 400매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분량입니다. A4용지로 하면 50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얇은 책이 서양 세계에서 오랜 시간 동안 고전의 지위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p. 14) [마태복음서]는 이스라엘 바로 위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기원후 80~90년대에 기록되었습니다. (p. 15) [마태복음서]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탄생하기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옹호하거나 강화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지요. (p. 16) [신약성서] 중 제일 앞에 나오고 중요한 것이 바로 [마태복음서]입니다. 세계 인구 중 3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안다는 것, 그들의 삶과 생각을 형성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마태복음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p. 17)

나는 성서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1도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차근차근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니 첫장부터 바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종교서를 읽고 있지만 고전으로서 느끼게 해주는 적당한 거리감과 적절한 요약이 편하고 좋았다. 동시에 적당한 설득력도 갖추고 있어서 읽을수록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이 [마태복음서]를 역사비평적으로 읽으려고 합니다. 역사비평은 문헌이 기록될 당시 저자와 청중을 고려해서 텍스트를 읽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지중해에서 기록된 문헌을 21세기 한국 사람이 쓴 것인양 읽으면 필연적으로 오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대에 살더라도 다른 지역에 있으면 문화가 다릅니다. 같은 지역이라도 시대가 다르면 이해가 다릅니다. 역사비평은 그때 그곳의 사람들에게 [마태복음서]는 어떻게 들렸을까, 저자는 당시 그곳에서 어떤 의도로 글을 썼을까를 물으면서 문헌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p. 29)

딱 좋았다. 내가 찾던 방향의 책이었다. 저자가 성서를 통째로 역사비평적으로 번역해주면 당장 사서보고 싶은 마음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당대의 문화에 맞춰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줄의 명문장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표현된 문장을 직접적으로만 해석하여 지금의 현실에 끼워맞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종교서는 더더욱 위험하다. 그렇기에 종교관련 책들 중 읽을만한 책을 찾기가 어려웠었는데 이렇게 반가울수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 두 문헌은 무의 세계, 무력의 세계입니다. 이른바 사내들의 세계고, 전쟁의 세계고, 명분의 세계입니다. 다른 한편, [마태복음서]의 두번째 단어 '게네세우스'를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들었을까요? 아마도 유대인 경전의 제일 처음에 있는 [창세기]를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유대인에게 [마태복음서]는 새로운 창조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기주장을 하는 책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p. 30)

요약하면, [마태복음서]는 누가 이상적인 통치자인가, 누가 이 세상을 통치해야 하는 사람들인가, 라는 오래된 그리스 철학의 질문에 답을 줍니다.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철학자이자 통치자라는 것이지요. 예수와 제자들은 지혜로 이 세상을 건설해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선언이 [마태복음서]의 주요 내용입니다. (p. 31)

 

열번의 강의로 서술되는 이 책은 첫번째 강의부터 흥미진진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그리고 [마태복음서]의 첫 단어를 비교함으로써 당대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이해를 도우면서, [마태복음서] 가 단순히 종교서를 넘어 왜 고전이 되고 철학이 되고 나아가 혁명서가 될 수 있었는지 호기심도 불러일으켰다.

[마태복음서]는 '읽는' 책이 아니라 '듣는' 책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역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책이었습니다. 누가 들려줬을까요? (중략) [마태복음서]도 한 사람이 낭독하고 그것을 듣는 형식으로 '공연'되었습니다. (p. 35) 첫 장 첫 구절을 '족보' 로 시작합니다. (p. 36) 예수는 누구인가? 그것을 알려면 일단 족보부터 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번여간 [마태복음서] 1장 1절과 달리 다른 번역본에서는 대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나올 겁니다. 순서가 바뀌어 있을 거예요. 그러나 헬라어 원문의 순서는 '다윗과 아브라함'입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다윗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p. 37) '다말', '라합', '롯', 이 셋은 여성 이름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남자 이름이고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족보에는 혈통주의, 정통성, 남성우월주의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중략) 혈통이 중요한 유대인의 족보에서 중요한 건 유대인과 남성인데, 예수가 유대인 왕가의 후손임을 자랑하려는 이 족보에 비유대인 여성이 등장하다니, 어떤 아이러니가 숨어 있을까요. (p. 39) 족보는 혈통주의, 정통주의, 남성우월주의, 도덕주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 마태는 족보의 한 측면에 그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해체해버리지요. 전통과 보존이 있고, 동시에 해체와 전복이 있습니다. (p. 41)

누가누구를낳고 또누가누구를낳고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장부터 읽기힘들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성서였다. 그런데 단순한 나열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디에사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는 습관은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도 로마제국 고전에서도 익숙한 표현 방식이었다. 단순히 같은 이름이 하도 많으니 그렇게 위로 거슬러올라가야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것이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예수의 족보는 길이도 길이지만 남다른 인물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사연많은 여인 셋, 그리고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가 솔로몬을 낳았다' 라는 문장에서 고발한 죄악, 무엇보다 기껏 누가누굴낳고를 주욱 나열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정작 예수는 왕가 혈통인 요셉과 관계가 없어진 마무리. 이 기나긴 족보는 예수라는 인물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하는 전복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라웠다.

태어난 '유대인의 왕'은 '난민'입니다. (p. 55) 아기들을 죽인 사람이 예수는 아니지만 예수 때문에 죽은 건 맞지 않나? 베들레헴의 수많은 어린아이가 죽었잖아. 이게 왕이고 구세주인가? 당시 사람들도, 죽은 아이들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는 바로 이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나 때문에, 내가 태어난 탓에 사람들이 죽었다면 나는 그 죽음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중략) 난민이 되었지만 자신과 관련하여 목숨을 잃은 저 많은 베들레헴의 아이들, 그리고 그 부모의 절규에 예수는 삶으로 응답해야만 하지요. (p. 57)

예언된 아기, 헤롯왕의 아기 학살, 왕의 탄생..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가 평생 짊어졌어야 할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자신의 탄생이 수많은 죽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어찌 고민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찌 열심히 성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예수의 삶이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회개하라는 말부터가 그러합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뭔가 기분이 나쁘지요.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잘못한 것도 별로 없는데 회개하려니 언짢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가 말한 '회개하라'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법적 죄를 돌이키라는 뜻 이상입니다. '삶의 방식 자체를 돌이키라'는 의미이지요. (p. 66) 3장2절은 간략히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방향을 전환합시다. 신의 질서가, 신의 통치가 바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훨씬 더 그러하지만, [신약]에는 사후 세계에 관한 관심이 크지 않습니다. 기독교 문화권의 사후 세계에 관한 이미지는 단테의 [신곡]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p. 67) 신의 통치가 이 땅에 '온다'는 것이지, 죽어서 '가는' 저곳을 바라보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신의 질서가 여기로 옵니다. 그러니 그 새롭고 정의로운 질서에 편입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제에 길들어 살던 우리 삶의 방향이 전환되어야 하겠지요. (p. 68)

왠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회개하라가 모두가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니, 기독교라는 종교가 천당에 가기위한 기도를 드리는 종교가 아니었다니. '예수천당 불신지옥' 은 성서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니.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 성서를 읽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읽었더라도 보고싶은데로 보고 이해하고 싶은데로만 이해한다면 그렇게 됐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하지만 여하튼 나는 이제야 기독교에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오해와 편견을 넘어 굉장히 좋은 논리였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예수는 현실적으로 옷도 제대로 못 입고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민중을 앞에 두고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러한 가르침은 민중을 향해 통치자와 철학자로 스스로 간주하고, 그 윤리를 실행하라는 촉구입니다. 그것이 신의 질서, 신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뜻을 풀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모두 주체가 되어 신의 자녀임을 깨닫고 연대하며 서로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철학자와 통치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신의 질서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p. 93)

에픽테토스와 세네카의 가르침과 연결된다는 예수의 가르침들을 보면서 고대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예수에게는 고전이었을테니까 그렇게 영향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웠겠구나 싶다. 그리스철학이 중세기독교시대로 넘어가면서 끊기거나 사라졌다가 보다는 철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삶에 대한 근본 질문을 던지는 철학은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그대의 오른쪽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 대라'

당시 사회는 오른손잡이 문화였습니다. 공공연하게 공중에서 왼손을 사용하면, 왼손을 사용한 사람에게 모욕적인 눈길을 보내는 사회였지요. 오른손잡이가 다수이기도 하니, 누군가 다른 이의 뺨을 친다면 오른손으로 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내가 오른손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뺨을 치면 그 사람의 어느 쪽 뺨을 치게 됩니까? 왼쪽 뺨이지요. 그런데 왜 '오른쪽 뺨을 치거든' 이라고 했을까요. 오른손의 손등으로 때려서 그렇습니다. 고대 유대인의 한 문헌은 같은 신분의 사람끼리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때렸을 경우에는 벌금이 4전인 반면, 손등으로 때리면 벌금이 100배인 400전을 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손등보다는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이 더 고통을 줄 텐데요.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주인과 종, 장군과 부하, 왕과 신하 등 신분의 격차가 확연할 때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신분인데도 손등으로 상대방을 때리면 그것은 폭력과 모독의 죄를 동시에 범한 것이기에 벌금의 차이가 크게 나는 것입니다. 윗사람에게 손등으로 뺨을 맞은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취하는 태도가 있지요. 사죄하며 고개 숙이고 물러나는 겁니다. 당시 사회는 그렇세 신분이 주는 절망을 학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고 합니다. 일단 예수의 청중들은 모두 웃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비일상적이었거든요. (중략)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p. 99~100) 왼뺨을 대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사람이야, 너와 같아. 때리고 싶으면 때려. 하지만 네가 신분으로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어' (p. 101)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밀어라 하는 말이 그저 비폭력을 나타내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겉옷을 뺏는 예도 '강제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하는 말도 그 직접적 문장의 의미가 다가 아니었다. 역사비평적으로 저자가 알려주는 문장의 의미들은 보다더 깊고 진지한 의미가 들어있었다. 알면 알수록 멋진 철학이었다.

예수가 일으켰다는 기적의 의미와 예수가 했다는 은유적 표현속의 숨은 뜻 그리고 당대를 향한 비판과 전복적 상상력이 모두 새롭게 다가왔다. 번역에서 빠지고 왜곡되고 악용되는 일부 사례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되는 부분들도 좋았다.

우리는 예수가 견고한 상징체계, 그러나 어떤 열매도 굶주린 이들에게 주지 못하는 옛 질서에 도전하고 전복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새 세상을 그려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추구해나갈 때 한계나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고, 또 지헤로웠던 청년 예수, 젊은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p. 183)

종교인으로서 성인으로서 어쩌면 신으로서 접하는 예수라는 이미지보다 고민하는 선구자로서 앞선 생각의 철학자로서 민중의 리더로서 접하는 예수의 모습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역시 종교로 읽는 것보다 역사로 읽었어야 했다. 이런 책이 더 많이 더 넓게 나와줘야 한다.

그리스의 오래된 정치철학 담론, 누가 이상적인 통치자인가 하는 담론의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것이 좋은데, 철학자 왕이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두번째는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기꺼이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과 지혜를 사랑한 삶이 철학자, 통치자의 이상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에수가 바로 그러한 통치자임을 잘 이애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226)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들과 주변 인물들의 심리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특히 부활과 관련해서 [안티고네] 및 당시 로마황제가 죽으면 신격화했던 '아포테오시스' 와의 연결은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항상 소외된 사람들 가까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논리를 펼쳤던 고대의 철학자들과 달리 종교성을 획득하기에 자연스럽기도 했다. 예수의 삶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자리잡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예수는 당대 필요했던 진정한 왕이었다.

그들은 [마태복음서]를 보며 살아갈 힘을 얻지 않았을까요.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요. 많은 사람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폭력과 모욕을 안기며 생채기를 내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생명이 발가벗긴 채 놓여 있는 듯한 이 차가운 현실 앞에, [마태복음서]는 변함없이 유효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절망을 이겨낼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펼쳐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에게 [마태복음서]가 고전이자 교양으로 읽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 228)

좋은 책이었다. 고전으로 읽기에 충분한 깊이가 있는 책이었다. 종교도 어찌보면 삶의 철학이다. 삶은 그렇게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종교에서 혹은 철학에서 혹은 돈에서 혹은 또다른 길에서 답을 찾고자 할 것이다.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은 좀더 분명한 길을 보여주리라 생각한다. 고전으로서 읽는 [마태복음서]는 그런 과정에 의미를 더해준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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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smsqpdht 2021-12-2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 단계
http://www.godnara.co.kr/bbs/board.php?bo_table=03_01&wr_id=119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단계를 배워야 참 하나님을 알게되는데 천국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배워서 참 하나님께 나아 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섯단계을 모두 깨달으신분들은 참 하나님을 알게되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비밀들과 구원의 해를 알게 되실겁니다.
 
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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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기 전과 이 소설을 읽고 난후의 성인지 감수성은 달라지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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