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마지막 공부 - 운명을 넘어선다는 것
김승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공자는 주역을 읽고 수명의 짦음을 한탄했는가?"

주역64괘에 대한 정밀한 풀이와 공자의 해석이 담긴 X파일을 지금 공개한다

표지 中

[논어]를 읽은 적이 있다. 동양고전에 대한 낯설음과 공자라는 명성에 대한 걱정에 비해 옛이야기처럼 편안하게 읽혀서 의외로 좋았던 책이었다. 이후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명리학에 대한 호기심과 공자에 대한 기대감이 '주역'을 다룬 이 책을 읽어보고 싶게 했다.

주역은 인류 최대의 학문으로서 먼 옛날부터 성인의 학문이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이는 주역이 위대하고 난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는 50세에 주역을 접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이후 이를 평생 연구하고도 모자라 수명의 짧음을 한탄한 바 있었다. (p. 8)

자칭 한국 최고의 주역학자라는 저자에게 주역은 최고의 학문일 것이다. 공자가 주역이라는 학문에 대해 그렇게 경탄했다고 하니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공자의 한탄이 담긴 출처는 어디일까?

미래는 정해져 있으나 알 수는 없다. 이는 참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피해 갈 방법이 있다. 미래를 알기 위해 그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역의 방법이다. (p. 28)

간단히 결론을 얘기해 보자. 미래란 정해져 있으니 운명이 있다고 말해도 된다. 그러나 그것을 알려고 하면 심한 요동이 발생하여 다시 알 수 없게 된다. 이는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주역은 사물의 요동을 피해 먼 거리에서 미래를 측량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운명의 범주에 들어 있는 것이다. (p. 29)

정리하자면 주역은 미래를 점치는 학문이다. 이루어질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 아니고 운명의 범주안에 속한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이다. 미래의 기운을 읽어내기는 하나 미래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오묘한 학문 같다.

우리는 얼핏 공자가 50세에 세상에 주역이라는 게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공자 생전에 주역은 점을 치는 도구였고 점은 아주 일반적이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주역은 당시 오늘날처럼 생소한 것이 아니라 상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항상 점을 접했고 심지어는 생활이 거의 점치는 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빈번히 제사를 지냈고 또한 점을 치며 살았다. 관청에는 점을 치는 직책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자 또한 점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역은 오늘늘 [토정비결]보다 흔한 책이었다. 공자는 당시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여 온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었다. 이러할진대 주역은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 내용이 심오하다는 것을 어느날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이리라. 이때가 바로 공자가 50세 무렵이었던 거라고 생각된다. (p. 33)

저자가 풀어낸 주역의 배경과 공자와의 연결점은 저자의 해석이다. 저자가 어떤 문헌을 바탕으로 어떻게 연구해서 도출해낸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저자의 해석이라는 점은 이 책을 읽으며 유념해두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고대사회에서 왕은 곧 제사장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층은 제의를 진행하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다양한 방법으로 점을 쳤다. 문화의 차이일뿐 미개하다거나 비과학적이라고 여기면 안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의 설명을 할때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자료가 필수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8개로 분류되었고 이것이 합쳐져서 64개의 현상으로 발전한다. 이로써 세상의 모든 사물을 표현할 수 있다.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없다. 공자는 주역의 이러한 절대적 논리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주역을 조금 공부해보면 알게 되지만 세상은 정말로 8괘로 다 분류가 된다. 또한 세상의 모든 현상이 이 8괘의 조합으로 설명된다. (p. 39)

학자들은 모두 세상의 원리를 설명해보고자 노력해 왔다. 철학도 과학도 역사도 그외 대부분의 학문들도 대부분 방식의 차이일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해내려는 시도들이었다. 주역의 8괘의 조합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낼 수 있다니, 정말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엄청나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문왕이 최초로 기록을 남기고 깊은 연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왕 이후에는 주공이 깊이 연구했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를 공자가 이어받았다. 이렇게 주역은 문왕과 주공, 공자 등 세 명의 성인에 의해 가꾸어졌다. (p. 45)

공자도 기원전 인물인데 공자가 칭송하는 태평성대 시절은 더 먼 옛날 의 어떤 시대였다. 항상 현재는 과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가 보다. 현재가 불만스러울수록 과거는 태평성대로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소급해서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진정한 태평성대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가 갑자가 의문스러워진다.

복희씨에 관한 다른 전설도 전한다. 이는 전설이라기 보다는 역사에 가까운데 단군의 역사를 기록한 [한단고기]에 등장한다. 여기서 복희씨는 단군이었고 혼자 연구하여 8괘를 저작하였다고 하낟. 7,000년 전 얘기다. 중국 신화와 내용이 다르지만 [한단고기]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p. 53)

[한단고기] 는 역사서가 아니다. 환단고기 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위서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역사적 출처와 문헌이 불분명하고 논리적 오류가 많은 이 위서에 대해 저자가 하는 표현은 이 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나아가 출판사의 편집진들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생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지구 문명의 우주 도래설은 무작정 비웃을 것이 아니다. 좀 더 진지하게 사실 여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주역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니 이것을 우주에서 외계인이 가져왔느냐가 핵심 질문이다. 이는 주역 자체를 살펴봄으로써 단서가 나올 것이다. 주역이란 무엇인가? 그것에 우주 문명이 개입한 흔적이 있는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 증거가 확실히 있다. (p. 57)

나는 수만 년 전 외계인이 지구를 다녀가면서 남긴 유산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것은 오로지 주역에 담겨 있는 내용 때문이다. 재미있으려고 막연히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주역에는 위에 열겨한 내용 외에도 무수히 많은 문명의 흔적이 존재하는 것이다. (p. 61)

주역이라는 학문의 위대성을 말하며 너무나 위대한 이 학문에 고대 미개했던 인류가 생각했을 수 있을리가 없으므로 외계인들이 전해준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해석에는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어 보인다. 저자는 몇 페이지의 서술로 충분히 우주 도래설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는것 같은데 전혀 수긍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주역이라는 학문에 대한 현실성 없는 주장을 끝으로 저자는 64괘의 본격적 풀이의 본문을 시작한다. 차라리 앞 내용들이 없었더라면 저자가 저자만의 해석을 주장한 서론이 없었더라면 이 책의 본문에 대해 읽어봄직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앞서 주장한 내용들과 아무 상관 없어보이는 64괘의 풀이들은 저자의 주장들로 인해 더 모호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주역이라는 학문은 사서삼경의 하나로 동양고전의 대표저서들 중 하나라고 알고 있던 나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앞 내용들은 차치하고 64괘의 간략한 풀이들은, 예측불허의 앞날에 대한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찾고 싶을때 나무막대기에 8괘를 그려넣고 상자에 넣어 흔들어 꺼냈을때의 해석용으로 대해 참고해볼까 싶다.가벼우면서도 가볍지만도 않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럽을 성찰하다 - 중산층 붕괴,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유럽중심주의 몰락 이후의 세계
다니엘 코엔 지음, 김진식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8혁명으로 세상을 바꿨다고 믿었던 우리는 이제 다시

세상은 변했다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를 옥죄고 있는 환상들에서 벗어나!

표지 中

저자는 오늘날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경제학 교수라고 한다. 사회를 통찰하는 지성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인지 저자는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려주고자 한다. 저자는 현대를 68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누던 구분법이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주장하며, 68혁명 직후의 시대와 5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판이하게 달라졌는지를 저자 나름대로 철학적·경제학적 고찰을 펼쳐내고 있다.

68혁명의 청년들은 그들의 부모가 소비사회의 지겨운 안락함에 빠져 역사의 비극을 망각했다며 비난했고, 오늘날의 청년들은 연장자들을 향해 정반대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부모 세대의 과소비 결과로 자신들은 물질적 안정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68혁명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저주받는 원인은 바로 68혁명이라고 비난한다. 절대적 자유를 주장한 68혁명이 개인주의를 만연시킨 결과 자유주의 경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p. 19)

68혁명의 시민들은 무엇을 탐하고 나선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산업사회의 붕괴에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이 사회의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의미 소멸로 잠식된 전대미문의 시대가 열리는 중이었는데, 이런 의미 소멸 때문에 이 시대가 펼쳐지는 데 50년이 걸렸다. (p. 25)

68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는지 본문의 글줄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지금 청년세대가 68혁명이라는 단어를 과연 알까? 저자가 속해있는 프랑스 사회에서는 청년세대에게도 익숙한 단어이려나? 하지만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기에 68혁명에 대한 이해는 독자의 몫이다.

단 하나의 진영으로 돼 있지 않던 68년 5월 혁명은 '최소한' 두 가지 감수성으로 나뉘어 있었다. 뤼크 볼탕스키와 에브 쉬아펠로가 제안한 분류를 따라서 우리는 이 혁명에서 '예술가적 비판'과 '사회학자적 비판'을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적 비판은 소비사회를 고발하고 사회학자적 비판은 생산 영역을 고발하고 있다. 예술가적 비판은 부르주아 사회의 특히 성적인 것에 대한 위선적 관습에 저항하고 있고, 사회학자적 비판은 작업 현장의 상황과 노동자 착취를 고발하고 있다. (p. 36)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산업사회로 인한 비인간화가 노동자의 빈곤화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테일러주의 같은 산업사회의 표준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적 비판과 사회학자적 비판은 일치했다. (p. 39)

유럽이 68혁명의 들불에 휩싸이던 시기에 우리나라는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산업을 일으키며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시절이었다. 68혁명의 바람은 커녕 혁명의 ㅎ 자만 말해도 빨갱이로 잡혀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이후 민주화과정도 유럽의 68혁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니 연결지어야 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유럽이 50년간 겪어온 격변은 우리나라에서 몇년만에 스윽 지나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새로운 시대가 올것이라 꿈꾸었으나 그러한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하다.

고르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은 다른 합리적인 대안의 발전을 준비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진정한' 욕망에 대해 숙고하거나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논의하면서 더 나은 삶의 선택지를 찾아보려는 능력 자체를 단념했다. 고르스는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 시스템은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각 개인의 삶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최소화하고 자율적인 활동은 최대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동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혁명을 기다리지 않고 진정한 사회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이 느꼈던 환멸은 스스로의 꿈을 실현하려고 공장으로 들어갔던 학생들이 느꼈던 환멸보다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p. 56)

산업혁명이후 발달해오던 사회에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지나치게 개인이 부품화된 것에 반기를 일으켰던 사람들은 자유를 주창했다. 공동체의 위기는 지금도 여전히 위기이고 그렇게 얻은 자유는 개인을 더 개인화시켜버렸다. 68혁명 세대가 원했던 자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획득되었던가? 지금 세대는 정말 자유를 얻은 세대라고 볼 수 있을까? 자유와 무책임은 분명 다른 의미인데 말이다.

레이건의 강점은 하나의 정책으로 월가의 엘리트와 백인 서민층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레이건은, 빈곤층이 빈곤한 원인은 빈곤층에 대한 원조때문이라며 비난한다. '가난한 사람'은 '곧 '흑인'을 의미한다는 것을 미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p. 77)

정반대되는 생각들이 유행한 1960년대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대에 전혀 다른 보수 사상이 되살아난 것은 보수주의자들로서도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의 흐름이 이처럼 진동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p. 83)

높은 경제성장기에 해방의 욕구가 표현되던 1960년대의 정신적 분위기와, 불경기에 전통과 기존 질서에 대한 보호 요구가 나타나던 1980년대의 정신적 분위기를 구분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성장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현재 작동되고 있는 주기는 아주 손상된 주기다. 좌우를 움직이던 진자가 지금은 오른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져 있다. (p. 87)

유럽과 북미는 대서양으로 갈라진 서로다른 대륙이 아니라 그냥 한 덩어리로 보는 것이 맞을 만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럽 이야기를 하려면 미국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고 따라서 미국 정치권의 변동에 유럽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레이건의 정책과 현재의 트럼프가 너무도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따지고보면 혁명은 항상 반혁명세력에 의해 안정되곤 했다. 왕정을 몰아낸 시민군은 다시 왕을 옹립했고 독재를 몰아낸 시민 세력은 투표로 다시 독재자에게 대통령자리를 선사했다. 역사는 왼쪽을 많이 기록한 것처럼 보이지만 늘상 주류는 오른쪽이었다. 혁명이 있었다고 말하기 무색할만큼 시대는 점점 더 우편향 되고 있다. 왜일까.

유럽 포퓰리즘은 그들이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두 계층, 즉 위로는 사회 엘리트와 아래로는 이민자 집단에 대한 증오를 응집시킨다. (p. 106)

2016년은 지금도 극심해지고 있는 포퓰리즘의 최고 절정기였다. 2016년은 영국의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처럼 정치계에도 포퓰리즘이 침투했음을 말해준다. 브렉시트에 대한 설문조사는 유럽을 벗어나는 데 찬성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페미니즘, 다문화주이, 생태학'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와 '인터넷'이라는 단어도 싫어했다. (p. 109) 포퓰리즘 부상이 빚은 두 번째로 끔찍한 사건은 2016년 10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 3분의 2가 트럼프를 지지한 '작은 백인들'(미국 어휘집에 따르면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도 똑같은 원한을 드러냈다. (p. 110)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사회적인 존중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유권자들의 욕구의 발로였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무엇이 될 수 있거나 되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기를 그들은 원했던 것이다. (p. 115)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삶과 더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말해주고 알려주는 변화에 호불호를 표현하지 않던 사람들이 지금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며 인정을 원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거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옳건 그르건 다 필요없다고 그냥 자신들의 모습 그대로 살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세상이 어떻건저떻건 그냥 살던대로 살고 싶다고 변화따위 싫다고.

"개인은 진정으로 그 자신이 아니다. 개인은 사회와 연결될 때에만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실현한다. 개인이 삶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의 원천인 인정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에만 강한 사회적 결속력이 형성된다" 오늘날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경제 불안은 사회 결속력 해체의 중요한 원인이다. "소득의 불안정성이 사회 통합 위기의 핵심요인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가족 간이나 친구 사이나 다른 모든 사회적 관계가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p. 126)

불평등은 늘 문제였다. 문제거리가 안될 수가 없는 문제다. 먹고살기 힘들면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악순환이 시작된다. 불평등은 점점 더 심화된다. 이때 정치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불만을 한데 모을 수 있는 대상이다. 그 불만이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렇게 불평등은 숨겨진채 더더더 심화된다.

이민자들을 공격할 때, 포퓰리스트들은 혐오의 실제 대상을 가린다.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자국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응집력이 붕괴된 사회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거울을 내민 것이 그들의 실수다. 이민자는 그저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르네 지라르가 말했듯이 위기에 처한 사회의 희생양인 이민자는 오늘날 폭력을 한 몸에 받는 동네북이 되어 있다. (p. 135)

유럽과 미국사회에서 이민자 문제는 가장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분야이다. 이민에 대해 한발짝 떨어져있는 편인 동양의 경우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성이 아직은 없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에 서구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어느 한쪽에 쏠리기 보다는 양쪽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우리사회가 될수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여하튼 저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야 하겠는가? 일단 적응해야 할 것이 디지털 세상이다.

컴퓨터는 규모의 혜택을 받지 않는 모든 거래 유형도 온라인으로 구조 조정하도록 해준다. 여기서 소비자 부담으로 전가시키는 경향도 생겨났다. 소비자는 물건도 자신이 직접 수리해야 하고 영화관 입장권도 온라인으로 직접 예약하게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혼자서 스스로를 돌봐야 할지도 모른다. 임금노동자가 하던 일을 오늘날의 소프트웨어는 소비자가 직접 수행하게 한다! (p. 180)

일자리 양극화에 큰 관심을 기울인 미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오토에 따르면, 과거의 논쟁은 항상 인간과 기계 사이의 완벽한 대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의 보완은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규칙적인 것에 더 가까웠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p. 186)

온라인으로 이런저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그저 편리하다고만 생각했었다. 뉴스에서 보던 사라지는 직업들과 그러한 서비스들을 직접적으로 연결짓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대는 벌써 어느새 그렇게 이미 변했다. 변해버렸다. 그리고 학자들은 인간의 직업이 기계들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고 늘상 얘기한다. 그런데 왜 체감되지 않는 것일까...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이겠지만...

아이폰 세대와 정치의 관계는 이상하다. 무관심과 극단적 참여라는 정치적 양극화를 오가는 것 같다.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사람의 사진을 수백만 번이나 돌아다니게 하고 또 날카로운 증오의 표현도 너무나 쉽게 전파시키고 있다. (p. 198) 소셜 네트워크 세상에서 태어난 신세대의 역설은 인간이 이만큼 스스로를 많이 드러낸 적도 없지만 이만큼 가면을 사용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p. 207) 우리는 사회적으로 디지털 사회의 명분이 되는 가치를 단념하지 않은 채, 고립된 개인에게 사회적인 공간과 풍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디지털 사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까? (p. 226)

68혁명에서 시작하여 굵직한 텀으로 정치경제사를 훑으면서 신세대들의 문화로 넘어오긴 했는데 저자또한 핵심적인 질문에 답을 구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포퓰리즘과 극우주의 등 극단적 문화 속에서 어떻게 글로벌한 합리성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팬데믹과 포스트휴먼의 혼동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휴머니즘을 찾아낼 것인가> 라는 표지의 문구에서 던지 질문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았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책임에 상응하는 통합적이고 글로벌한 합리성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 기술과 기술에 들어 있는 권력 네트워크가가 아무런 중재도 없이 우리 삶의 형태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기술과 시장의 연결을 통합하는 동시에 기술 외부에 자신을 배치할 줄 아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점점 더 필요한데, 이 균형점을 통해서 우리는 공동선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을 공들여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다음 반세기 동안 우리가 행해야 할 멋진 과업일 것이다. (p. 226)

유럽을 성찰한다기보다는 프랑스사회를 성찰한 저자의 책은 우리 사회에 어떤 지향점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한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멋진 과업으로 받아안기에는 사회적 역량도 나의 역량도 터무니없이 모자라게 느껴지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다만, 불만감이 작용하여 하는 선택과 만족감이 작용하여 하는 선택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점은 인상깊게 남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괜찮다는 거짓말 - 우울증을 가리는 완벽주의 깨뜨리기
마거릿 로빈슨 러더퍼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북하우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울증을 가리는 완벽주의 깨뜨리기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걸까?

'내가 우울하다고? 난 그저 바쁜 것뿐...'

저자가 완벽주의와 우울증의 관계를 연구하는 동안, 겉으로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이들에게서 자신들은 어린 시절부터 갖게 된 완벽주의라는 생존전략이 자신들을 보호해주었지만 동시에 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25년간 심리학자로 살아오면서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의 치료제는 진정한 자기수용, 즉 나의 강함이나 취약함 중 하나만이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그 깨달음을 전해주려 한다.

집 안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쓰레기통은 말끔히 비워져 있었다. 냄비와 접시는 조리대 위에서 건조 중이었고 행주는 아직 축축했다. 아이들 장난감은 소파 옆 정리함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침실 역시 침대만 제외하면 흠 하나 없이 정돈된 상태였다. 널브러진 옷가지나 신발도 없었다. 구석에 있는 책상 역시 종이 한장 없이 깨끗했다. 완벽하게 깔끔한 자살이 될 뻔했던 것이다. 내가 우울증에 대한 통상적인 기준에 의문을 품게 된 것, 그땐 깨닫지 못했지만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날이다. (p. 18)

어느날 저자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상담자의 남편이었는데 아내와 통화시 느낌이 이상했다며 집에 가달라는 부탁을 한다. 원칙적으로는 상담자의 집에 가는 것이 규정상 어긋나지만 바로 옆집인데다 남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라 혹시나 하는 걱정스런 마음에 저자는 상담자의 집에 가본다. 저자는 911을 불러야 했다.

이 상담자는 직업상 큰 성공을 거두었고 유명했으며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타입이었다. 모든 일에 성실하기 그지없이 임했고, 아이들에게는 세심하고도 열성적인 어머니였다. 아이들의 학교에서도 지역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했다. 그녀는 우울하다기보다는 불안하고 바짝 긴장해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상담초기 저자가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과거의 상처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는 부모, 특히 자신이 무엇을 해도 흡족해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얽매여 있었다.

주어진 일을 완수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그러한 삶에 지치고 힘들어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완벽한 사람이 정작 스스로에게는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들 중에는 이 사례처럼 '숨겨진 우울'을 갖고 있을 수 있다. 완벽주의는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마다 더 깊은 우울의 우물을 파게 만든다.

저자는 상담가로서 다양한 사례들을 활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내담자들의 치유의 과정이자 자신의 치유의 과정이 녹아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블로그에 올렸는데 글이 입소문을 타고 책으로 나오게 되면서 긍정의 기운을 듬뿍 얻은 저자는 자신의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도 긍정의 에너지를 치유의 힘을 북돋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의 목적은 심리치료사의 도움이 있건 없건 당신이 내면의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완벽한 페르소나라는 감옥에서 한 발짝 나온 당신은 자기수용, 그리고 취약함 속의 힘이라는 평화를 찾게 될 것이다. (p. 25)

쉬운 일처럼 포장할 생각은 없다. 이 과정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타인에게 베푸는 것과 타인으로부터 받는 것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수치심이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감각을 방해하고, 취약함이 흠결이라고 여겨질 때, 바로 그때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을 생각해야 하는 순간이다. (p. 26)

이 책은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야 하는 책이다. 저자는 단계적으로 자신이 제시하는 성찰과제들을 수행해가며 이 책을 읽어나갈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조금씩조금씩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글로 적어보고 사례들을 읽다보면 저자의 조언이 조금씩조금씩 마음에 스며들어 올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 '괜찮아요?' 라고 물었을 때 '괜찮아요' 라고 했던 대답이 거짓말이었음을 인정하는 것만 되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 해나가야 할 작업은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또 다른 숙제가 아니다. 완벽한 해답도 완벽한 해결책도 없다' 라고 강조한다. 저자의 제안들을 다 수행하지 않아도 괜찮다. 수행하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기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것이다.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 의미를 두며. 삶이 죽음이라는 목표를 향해가는 시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생'이라는 과정을 충분히 느끼는 과정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을 겪는 사람들은 통상적 우울증 환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슬퍼 보일 것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에너지가 없을 것이다. 무기력하고 불안해하면서 매일 잠만 잘 것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당신은 자신이 우울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당신은 울적하거나 막막하다는 감정을 털어놓았을 때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 두렵다. 당신은 정신질환이라는 낙인이 두렵다. 당신은 수많은 압박감과 상실감을 견뎌냈다. 무엇보다도 우울을 인정하는 건 흠결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완벽주이자인 당신에게 흠결이란 숨겨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자살을 할지도 모르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p. 38, 39)

자신이 말하는 고통과 자신에게 허용한 감정 표현 사이의 정서적 단절감을 보이며 감정을 표현하기 보다는 설명하는 경향이 있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때 그 책임을 항상 떠맡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하며,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려 하지 않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걸로 보이는 사람은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구조에 빠지게 된다. 걱정은 통제욕구를 부르고, 통제욕구는 다시 더 큰 책임감을 부르며, 결과적으로 지쳐버리고 그러면 숨겨진 분노나 억울함이 생긴다. 그런데 이런 마음상태를 아무도 모르게 한다. 그렇게 갑자기 자살을 택한 가족을 둔 사람들은 저자의 글을 읽고서야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숨겨진 우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주는 것은 편해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전혀 상반된 두 그룹의 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서로를 모르는 두 그룹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아는 모습으로만 이해할 테니 결국 우울한 완벽주의자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채 진정한 자신을 모르게 된다. 친구들도 자기자신도 아무도 자신을 모른다. 지독히 외롭고 지치게 된다. 완벽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일상을 꼼꼼이 살아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많은 부분에 공감이 갈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의사는 아니다. 따라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은 의사를 찾아가도록 자주 언급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은 진단명이 아니다. 정신장애도 아니다.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이란 우울증을 가릴 수 있는 (일련의 행동인) 증후군을 가리키려 만들어낸 용어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다. (p. 81)

병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치유가 필요한 심리상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저자는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모든 치유의 시작은 정확히 아는 것부터 시작되므로.

저자가 종종 언급하듯이 심각할땐 병원에 가야 한다. 치유차원에서 해결이 안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 책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는 사람에게 유용할 수 있는 책이다.

통상적 우울증 치유이 주목적은 한 사람을 외부 세계와 재연결시키는 것이다. 즉 가족, 친구, 목적과 다시 관계를 맺고, 자기 안으로의 침잠과 자기파괴를 그만두고, 자신과 자신의 삶을 혐오하는 악몽을 누그러뜨리고자 한다.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 치유의 일반 목적은 한 사람을 자신의 내면세계, 즉 확고한 신념과 숨겨진 감정이 존재하는 세계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통상적 우울증이 활력결핍상태라면,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은 자기수용이 결핍된 상태다.

당신이 알고 있는 강점과 능력에서 불안과 취약함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자신감과 성취에서 후회와 회한에 이르기까지, 당신이라는 사람의 다양한 면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연습하는 자기수용-이것이 바로 완벽하게 숨겨진 우울의 치료제다. (p. 95~97 발췌 )

저자는 우울증과 다른 정신의학적 병들로부터 범위를 줄이고 줄여 '숨겨진 우울' 에 집중한다. 이 증후군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돕고나서 단계적인 치유를 시작한다. 하지만 완벽주의 덕분에 현재 자신의 모습이 된 사람들이 변하려는 마음을 먹는건 쉽지 않다. 완벽하게 잘 해왔는데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상담소를 찾고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사람이라면 그런 용기를 이미 시작한 것임을 저자는 상기시킨다.

이 장에서 당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교훈도 비슷하다. 우리는 강점뿐 아니라 약점까지 내보일 때 평온해지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제 감정을 절제하지도 숨기지도 않게 된 당신은 불편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다시 진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질투심, 억울함, 화, 두려움, 슬픔, 수치심, 심지어 완벽해 보이고 싶은 욕망까지 이제는 인정할 수 있고 이런 감정들의 존재에 연민을 느낄 수 있다. (p. 208)

취약함을 받아들이고 나면 도전하기가 더 쉬워진다. 실패하거나 힘겨워한다 해도, 성공처럼 실패나 힘겨움도 당신이라는 사람을 정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실패로부터 배운다. 실패를 숨길 필요가 없다. 취약함을 받아들일 때 자유가 함께 온다. (p. 246)

심리치유 관련 책을 읽으면 '마음챙김' 수련이 항상 나온다. 이 책에서 또한 그렇다. 동양의 명상 혹은 불교적 성찰과 비슷한 마음챙김은 '지금 여기' 에 집중하고 '나' 에 집중하며 자신을 가둔 틀에서 벗어나 좀더 평안하고 자유로운 자신이 되도록 도움을 준다. 무감하지만 완벽하게 사는 것과 불완전하지만 희노애락을 느끼며 사는 것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어떤 일의 단점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긍정적인 장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불평한들, 뭐 어때? 우리 모두 가끔은 조금씩 불평해도 괜찮다. (p. 270)

상대의 부정적인 반응을 마주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세운 경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반응이 무엇이건 간에 상대와 나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는 것이 중요하다. (p. 322)

이분법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참 쉽다. 이쪽저쪽 다 생각해보고 이쪽저쪽 다 그럴수 있다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는 커녕 불평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럴수도 있지 뭐! 함부로 감정이입하지 않고 건강한 경계를 유지하는 것 그런 훈련을 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여기면 된다.

당신은 그들을 당신의 여정에 데려갈 필요가 없다. 당신이 할 일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일이니까. 능력이라는 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능력이 없는 것은 주기를 거부하는 것과 다르다. 철물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상대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없을 수도 있다. (p. 325)

혼자 완벽하게 살기보다 함께 공감하며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저자는 치유의 단계에서 주변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에 대해서 건강한 경계를 잘 세운다는 것은 상대가 나와 같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상대방과 충분한 협조적 관계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 상황을 잘 이해하고 넘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이 한번에 단숨에 될리 없다. 재발할 수도 있고 사례중에서도 상담을 중단한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당신은 불완전함과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존재가 아니라, 바로 그 불완전함과 취약함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다. 당신은 당신의 능력때문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로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당신은 통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감정과 연결되어 감정을 받아들이고 감정이 당신을 이끌도록 허락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강하다. (p. 329)

앞서 저자가 말했듯이 우울증 관련 책들에서는 대부분 스스로의 늪에 빠진 사람을 외부로 다시 끌어내고자 조언해주곤 한다. 다시 일어서라고 힘을 내라고 응원하곤 한다. 하지만 활발하고 에너지 넘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마음에 늪이 있다는 것을 이토록 정확하게 짚어내고 조언해준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우울증이 흔한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울증에 대한 인상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하지만 감기바이러스가 변종되고 다양하듯이 마음의 감기도 복잡하고 다양할 수 있음을 저자는 명료하게 풀어내주고 있어 의미깊게 다가온 책이었다. 열심히 잘 살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피곤하고 힘들다는 내색을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무엇을 선택하건 완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p. 330)

그래도 괜찮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비로 산다는 것 -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요동치는 정국에 자신을 맡기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쟁취하기도 했던 왕비들의 파란만장한 삶

'조선시대 최고 전문가 신병주 교수, 왕과 참모에 이어 이제는 왕비다!" 라는 홍보문구 옆에 저자의 사진이 박혀있다. 티비를 잘 안보는 편임에도 즐겨 애청하는 티비프로에서 낯을 익힌 저자의 책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극적인 삶을 살다간 왕비 한명에 초점을 두고 소설처럼 야사처럼 풀어낸 책들은 봐왔어도 조선왕조 전체 왕비를 다루고 있는 책은 처음이라는 설레임 속에 책을 펼쳤다.

필자가 보기에 조선시대의 왕비는 결코 동화나 사극 속 왕비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제약이 많았다. 어쩌면 조선의 왕비는 엄격한 궁중에서 자유가 제한된 채 비슷한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힘든 직업을 가진 존재였다. (p. 5)

세자빈이 되었어도 왕비에 오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는 세자빈, 왕비, 그리고 아들 숙종이 오아이 되면서 대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세자빈에서 왕비로 그리고 대비까지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이다. (p. 6)

조선왕조오백년이라지만 그 긴 세월동안 이어진 왕조는 사실 적통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적통이 오히려 드물었다. 그렇게 왕들도 살아남기 힘든 왕실에서 왕비는 오죽했겠는가. 역사에서 화려한 왕의 그림자속엔 왕비가 있곤 했다. 왕비는 그림자처럼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존재였다. 사실 여성이라는 자체가 늘 힘든 직업이었음은 어느 시대 역사라도 조금만 펼쳐보면 바로 확인이 될 것이다. 동화속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지 몰라도 구중궁궐 속 왕비는 잠시잠깐도 행복하기 힘들었다.

책은 각각의 주제로 묶여있는 듯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연대순이라 좋았다. 안그래도 헤깔리는 왕조의 계보가 순서마저 뒤섞여 있다면 그야말로 잡학적 흥미거리일 뿐 역사로 읽어내기가 힘들기 마련인데 순서대로 차근차근 나열되니 정리해가며 읽기에 좋았다. 이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충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왕이었으나 존재감이 없던 왕, 그런 왕과의 사이에 자식마저 없던 왕비는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후궁의 소실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지해주었다는(혹은 지지해주어야만 했을) 그런 왕비들을 만날때마다 역사가 주는 씁쓸함이 배가 되곤 했다. 가끔 야심만만한 왕비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항상 끝이 안좋았다.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왕비들에 비해 처음인듯 생소하게 다가오는 왕비들의 이야기에는 더 마음이 쏠리기도 했는데, 조선초기 야심만만한 아우덕에 갑작스레 왕이 된 정종과 40년 가까이 해로했지만 자식이 없던 정안왕후, 남편을 왕으로 만든 최고의 정치적 동지였으나 정작 남편이 왕이 된 후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친정 가문까지 철저하게 탄압받다 말년에 존재감없이 살다간 원경왕후, 단종과 사별후 옷감에 물을 들이며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82세의 천수를 누린 정순왕후,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는 수렴청정을 했던 정희왕후등 조선 초기의 왕비들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왕비들의 삶이 헤깔리는 이유 중 하나는 호칭 때문이었다. 불리는 명칭이 너무 다양했다;;; 예를들어 소혜왕후 한씨는 성종의 어머니인데 인수왕비(=인수대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혜경궁 홍씨로 유명한 왕비도 정식 명칭은 헌경왕후 였다. 왕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신분에 따라 왕비의 존칭도 달라지곤 했으니 헤깔린다 헤깔려;;; 가계도를 정리해서 참고자료로 붙여주셨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왕조 관련 책은 가계도가 꼭 있어줘야 하는데 말이다...

가끔 사진 자료가 참고내용이 있곤 했는데, 그중 가장 놀라웠던 내용이 효령대군 이야기였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은 동생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자 불교에 심취했고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큰 사건들을 거치면서 91세까지 장수했다는!! 불교에 귀의도 아니고 심취했기 때문에 자식도 두었고 왕족이니 나름 윤택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의 삶이 몹시 궁금해진다.

중종의 부인인 장경왕후를 간호했던 의녀가 드라마 대장금으로 유명한 장금이었다는 내용도 새삼 흥미로웠다.(드라마를 봤었는데 어느 왕때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장경왕후가 출산에 따른 후유증으로 출산 7일만에 승하하면서 의녀였던 장금에 대한 처벌 논의가 많았다는데 중종은 장금의 처벌을 면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보며 드라마적 상상의 나래가 잠시 펼쳐지기도 했다.

역사서임에도 아니 역사서라서인지 저자의 견해가 많이 들어간 책은 아니었지만 가끔 발견되는 저자의 견해를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성종 시대부터 유교국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왕비 이전에 여성으로서 지켜야 할 법도가 본격적으로 강조되었다. 여성이 여성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고 특히 왕비는 더욱 모범이 되는 여성상을 지켜나가야 했던 시대였다. 또한 폐비 윤씨의 사사는 조선 전기 대세가 되었던 원경왕후나 정희왕후와 같은 여걸형 왕비의 몰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p. 129)

수원에 있는 심온 선생의 사당 사진을 보자 가봤던 곳이라 왠지 반가웠던 한편으론 역모에 의해 처형된 집안의 사당이 그렇게 크고 귀티나게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세종이 부인을 위해 사후관리를 해주었을 수도 있지만 왕비의 가문이 이렇게 지금까지 잘 관리되어진 곳이 또 있던가... 여하튼, 왕비가 먼저 떠나고 계비를 들이라는 신하들의 건의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은 세종의 의리를 후대의 왕들도 본받았으면 좋았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새삼 들게 하는 유적지였다. 세종의 며느리잔혹사는 다시봐도 참 안타까운 역사의 '만약에' 순간이었다. 하지만 가장 아쉬웠던 '만약에 이랬더라면' 싶었던 생각이 들게 하는 존재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였다.

중국을 통일한 후 거침없이 뻗어가던 청나라는 군사대국일 뿐 아니라 문화대국으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아담 샬과 같은 선교사를 통해 천주교와 더불어 화포, 망원경과 같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에도 이러한 서구의 과학 문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p. 258)

소현세가 왕이 됐더라면 정조보다 더 큰 업적을 남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근대문화를 일찍 맞이한 조선이 일본에게 망하는 굴욕을 경험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일본을 압도하는 대국으로 성장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에 '만약에'는 의미가 없다...

사실 조선의 왕 27명 중 적장자 출신이 7명이니, 일단 3단계 과정을 모두 거칠 수 있는 왕비의 숫자는 7명으로 제한된다. 여기에 적장자 출신의 왕 중 문종의 왕비는 세자빈의 신분에서 사망했고, 단종의 왕비와 연산군의 왕비는 폐출되었다. 인종의 왕비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숙종의 후계도 소생의 아들로 이어졌다. 마지막 적장자인 순종의 왕비는 후사없이 승하했다. 조선의 왕비 중에서도 정통성의 측면에서는 최고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명성왕후는 누구인가? (p. 273)

현종이 후궁이 없었던 이유로는 현종의 건강 상태와 더불어 명성왕후의 강한 성격이 언급되기도 한다. 그녀의 강한 성격은 아들인 숙종이 왕이 된 후에 일정 부분 드러나게 된다. (p. 276)

명성황후와 앞에 명칭이 같은 명성왕후에 대해 전혀 몰랐다(왕비의 이름들이 같은 이름으로 붙은 경우가 없던데 명성황후는 왜 명성왕후와 같은 호칭을 받은 것일까? 궁금하다궁금해.. 하지만 책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이유를 알수가 없어 슬펐다 ㅜㅜ).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남편이 왕이 되어 왕비가 되고 아들이 왕이 되어 왕대비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왕비라는 명성왕후 김씨, 그녀의 남편은 역사에 그닥 존재감 없는 현종 이다. 예송논쟁으로 혼탁한 정국과 스스로 병약하여 국정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현종은 왕으로서의 존재감은 약했을지 몰라도 조선의 왕 중 후궁이 한 명도 없었던 왕이라는 점에서 강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 이유가 좀 아쉽긴 하지만 ^^;;; 하지만 강한성격이라는 명성왕후는 숙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다. 했다면.. 문정왕후보다 더강했을까? ㅎㅎ 수렴청정 하면 문정왕후가 떠오르지만 사실 기억해야 할 왕비는 따로 있는 듯 하다.

정순왕후는 여군 또는 여주로 자처하면서 3년반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정조가 구축해놓은 탕평정치의 기반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단순히 사학으로만 규정되던 서학(천주교)을 금기시하여 서학을 믿던 사람들을 국가반역자 집단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으니 이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다. 그녀는 정조의 개혁정치를 지원하던 세력들을 대거 제거하면서 경색 정국을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었다. (p. 338)

정순왕후는 66세의 영조가 계비로 맞이한 15세의 신부였다. 그리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의 관련자였다. 정조에게 부담스러운 어린할머니였던 정순왕후는 정조사후 정조가 이룬 거의 모든 것을 망쳐놓은 셈이다. 하지만 순조는 그녀의 묘비에 송나라의 선인태후에 비교하는 문구를 바쳤다. 선인태후는 송 영종의 비이자 철종의 모후로 수렴청정하며 여자 중의 요순으로 칭송받은 인물이라고 한다. 하긴 왕후 한명이 하면 뭘 얼마나 어쨌겠는가.. 왕후를 내세운 가문이 권력을 휘두른 것이었을 테지만 역사는 이름을 기억한다. 왕비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대부분 안좋은 기록들이다. 그렇다면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왕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10세의 나이 때부터 세손빈과 왕비 그리고 대비를 거치며 무려 60년 가까이 궁궐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효의왕후에 대한 기억이 적은 까닭은 뭘까? 영조,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정조, 정순왕후 등 그녀 주변의 인물들이 너무나 강한 개성을 지녔기 때문은 아닐까? (p. 366)

라고 저자는 정조의 아내 효의왕후에 대한 생각을 밝히지만 글쎄... 저자가 책의 서문에서 극한직업이라고 표현한 왕비라는 삶에 가장 가까운 생애을 살았던 왕비가 효의왕후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려졌으나 사라지진 않았던 왕비에 대해 한참 생각이 머물렀다. 60년이라...

경복궁 중건은 흔히 흥선대원군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원래 착수했던 사업이었고 신정왕후가 남편의 유업을 계승한 사업이기도 했다. (p. 383)

흥선대원군에 대해서 역사책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어린 아들 고종을 앞세워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었던 뒷배경로 신원왕후가 있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의 자리에 올라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은 못보았지만 아들이 헌종으로 등극하는 것을 본 신정왕후는 시어머니인 순원왕후 사후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내보일 수 있었고 그동안의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막을 내리게 한 사람이었다. 신정왕후가 동의하고 지지해주었기에 흥선대원군이 활개를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위승계문제가 불거질때만 존재감 있었던 왕비들은 늘 역사에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왕위계승문제 뿐만아니라 정치에 개입한 왕비라고 해서 역사에 명성을 남겨놓은 것도 아니다. 왕비의 삶은 이러나저러나 극한직업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책은 전반적으로 조선의 왕비들에 대한 얼개를 갖추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어미였으며 어느 릉에 묻혔다로 서술되는 왕비들의 요약된 기록에서 정작 그녀들이 살아낸 생은 잘 알 수 없었다. 대부분 '이런 왕비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로 시작해서 변경되는 호칭들의 나열과 최소한의 생의 기록에 비하면 비교적 상세한 왕릉에 대한 기록은 이 책의 기본틀이 왕릉의 연대기인건가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무엇보다 본문으로 뚝 하고 끝나버리는 책의 마무리가 아쉬었다. 나는 서문 보다 후기에 의미를 두는 편이라 본문으로 전개된 내용에 대한 정리가 있으면 참 좋던데...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책은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봄직한 책이었다. 전문가인 저자가 알려주는 내용들은 자료적 측면에서 신뢰도가 높았고 이런 기초자료가 있을때 호기심도 생기고 다른 확장된 내용도 찾아보기 쉽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나중에 시간이 여유로울때 왕비들도 함께 나열된 조선왕조 계보도를 그려볼까 싶은 욕심이 들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빈약하게 서술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조선왕조의 왕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왕비로 산다는 것' 이 어떤 삶인지 느끼게 해주는 책인 것 같다. 다 읽은 책들은 대부분 밖으로 처리하게 하는 크지 않은 나의 책장에 꽂혀있는 조선왕들의 책 옆에 이 한권의 책도 함께할 자리를 마련해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프 미스터리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15
정명섭 외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실현되지 않은 미래 기술을 보여주는 SF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Mystery

서로 다른 두 장르가 만나 새로운 장르, 스프 미스터리가 탄생했다!

그래비티북스의 GF시리즈 중 몇 권을 인상좋게 읽었었더랬다. SF 도 미스터리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몹시 관심가는 시리즈다. 이번책은 4명의 작가가 서로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단편 4작품을 모은 단편집이다.

멀지않은 미래의 어느날 영종도 근처 인공 섬에 만들어진 자유무역도시인 헤븐에서 한 남자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헤븐에서는 공식적으로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헤븐에 사는 세 종류의 거주민 즉, 타워에 거주하는 부유층과 센트럴 지역 및 지하구역에 사는 센트럴 거주민 그리고 관광객들 중 누구라도 아주 작은 범법행위라도 하는 즉시 추방되기 때문에 누구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의문의 폭발로 죽은 한 남자의 사건은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망자는 센트럴에서 시험운행 중인 기아-벤츠사의 전기 버스 운전기사였어요. 기아-벤츠사의 노조는 헤븐의 무인 운행 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는 민주 통합 운송 노조 소속이죠"

"여긴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p. 12)

"난 유전자 분자 배열 방식에 따른 성장 염색체 추출법을 연구하는 중이었어. 그러려면 건강한 육체는 기본이었지"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해야 한다. 이말이군,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많은데 왜 하필 헤븐이지?"

"타워 거주자들의 유전자가 제일 우수하니까" (p. 25)

"크륍테이아? 무슨 뜻이에요?"

"스파르타 청년들의 비밀결사로 헤일로타이라고 부르는 노예 중 뛰어난 자들을 암살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헤일로타이들의 반란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근데 이건 왜요?"

"헤븐을 조종한다고 알려진 조직의 이름이 올림포스야" (p. 50, 51)

< 헤븐 中 >

폭발로 죽은 남자에 대한 조사를 하던 도중 밝혀지는 사건의 실체는 유전자조작약과 관련이 있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영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독재가 현실화되는 설정은 SF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들 중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연결짓는 것도 새롭진 않다. 하지만 SF가 지금의 현실비판 요소를 반영하는 방식이 새로워서 좋았다.

"미안하지만 헤븐에는 전과자나 지명수배자들은 못 들어옵니다"

"그런 잔챙이들 말고, 여기 전직 대통령이 몇 명이나 살고 있는지 알아요? 전직 장관이나 파산한 재벌그룹 총수로 내려가면 수백 명으로 늘어납니다"

"지상에 천국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잖습니까?"

"껍데기만 천국이지. 사실은 가진 자들의 왕국이잖아요"  (p. 52, 53)

< 헤븐 中 >

이렇게 보면 사실 겉모습이 바뀐 미래가 지금과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본 뒤 현재를 보면 마찬가지이듯이.

화성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이므로 가장 궁금한 곳이지만 엄청나게 발전한 것 같은 지금의 과학기술도 아직 화성에 유인우주선을 보낼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다. 화성인에 대한 상상은 늘 SF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화성인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화성인이 지금은 없더라도 과거에 문명이 있진 않았을까? 여하튼, 화성에 지구에서 부족한 광물자원이 넘쳐난다는 설정아래 지구에서 출발한 유인우주선이 화성에 도착한다. 그리고 화성에서 금을 캐던 지구인 광부가 실종된다.

컬쳐호에서 얻어낸 데이터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광부가 도착한 곳은 계곡이었다. 그들은 계곡 주변을 돌아보다가 아래로 내려갔고, 그곳에 있는 오래된 동굴입구를 발견했다. (p. 93)

"컬쳐호가 화성에 도착한 건 6년 전이에요. 6년이요. 정말 6년 동안 홀로 화성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사람이 아니라면 왜 사람 흉내를 내는데?"

"그걸 조사하고 싶습니다" (p. 97)

2차대공황 이전에 다국적 기업이 많은 군인과 광부와 과학자와 비해사를 화성에 보냈지만 제대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소문또한 돌았고, 사람들도 화성이 위험한 곳이라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구연합정부는 사람 대신 광물을 캐오도록 프로그램한 로봇을 보냈다. (p. 104)

< 화성의 폐허 中 >

이 로봇들은 앤트라 불렸고 현지상황에 따라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자체수리할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형 로봇이었다. 지구에서 광물요청이 많아질수록 앤트들의 수는 늘어갔고 현지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하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진 지구에서 가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모습이 화성에서도 관측됐지만 앤트들은 누가 명령을 보냈던 명령이 오면 그저 열심히 광물을 캘 뿐이었다. 화성은 점점 앤트들이 건설한 시설들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검은비가 내리고 모래폭풍이 쉼없이 발생했다.

타겟은 최대한 많은 금속을 채굴하면서 동시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지만, 계속 실패했다. 헤파이스토스를 통해 연합정부에 도움을 요청해도 명확한 대답이 오지 않았다. 13호가 막 지표면으로 나왔을 때, 하늘에서 타겟이 파괴되어 불타다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광경을 보았다. 하늘에서 핵폭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이를 피해서 움직이는 앤트가 없었다. 그것이 인간이 내린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p. 110)

"이걸 꼭 구해오라고 그렇게 괴롭히더군요" 황금 해골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시겠지만, 3차 세계대전 때문에 지구는 인간이 살기 골치 아픈 곳이 됐습니다. 가까운 화성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선발대를 보내 화성인이 있는지 살피고, 있으면 반드시 제거하라고 했죠. 그게 제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대신 저는 인간을 죽였습니다. 왜냐고요? 인간이 어찌나 말이 많던지 시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p. 126, 127)

< 화성의 폐허 中 >

인간의 명령을 이행한 앤트들의 사회가 무너진 화성에서 살아남은?! 로봇13호는 사실 인간의 명령을 거부한 살인로봇이었다. 그리고 13호는 화성인을 만났다. 거대한 동굴에서 끊임없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최후의 화성인을.

마지막 로봇과 마지막 화성인은 진화일까? 멸종일까?

곧은 자세로 강단에 서 있던 은회색 머리의 여자가 바로 기획자, 가이아의 데메테르였다. (p. 155)

첫해 가을, 시월의 첫 보름달을 맞아 기획자는 여자들을 벌판에 불러 모았다. 기획자가 작성한 맹약의 문구를 함께 암송한 그들은 보름달 아래 머리를 풀어 헤치고 상의를 벗어 던졌다. 화톳불이 퍼뜨리는 불빛 속에서, 그들 각자는 완전무결한 개체였다. 또한,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결집체이기도 했다. 가이아의 여자들은 그날 밤새도록 발을 굴리며 노래를 불렀다. 격렬한 애무와 함께 춤을 추며 입맞춤을 나누기도 했다. (p. 157)

< 불면의 밤은 끝나고 中 >

여자들만 사는 공동체 가이아를 세우고 여자들만의 비의를 치루는 표현은 그리스신화적 분위기를 풍겼지만 어설프게 다가왔다. 과학기술이 첨단으로 발달한 미래배경도 아니고 원인불명의 병이 퍼졌다고 해서 미스터리라고 보기에도 좀 그렇고...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SF적 미스터리한 설정이라고 여긴 것일까...

"변이라고요?"

"네, 그 여자들이 그랬어요.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이할 거라고"

"그 여자들이라면..."

"코라를 숭배하는 사람들"

코라, 혹은 페르세포네. 데메테르 여신의 딸. 데메테르는 기획자에게 붙여진 별명이기도 했다. 이 이름들 간에는 우연 외에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을까, 극심한 어지럼증 속에서도 해인은 답을 구하고 싶었다. (p. 180)

< 불면의 밤은 끝나고 中 >

남자들은 걸리면 죽고 여자들은 걸리면 잠에 빠진다는 그 병의 실체는 알 수 없다. 과연 그 긴 겨울잠에서 여자들이 깨어날 수 있을 것인지도...

곧 만날 아들에 대한 설레임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과학교사가 만삭의 아내와 산책하던 어느날 희한한 라디오가 발견된다.

나도 이런 상황을 원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곧 태어날 우리 아들만 생각해야 한다. 12년 후에 죽을 운명인 우리 아들을 살리려면 바로 오늘, 저 여자애를 죽여야만 한다. (p. 190)

나는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타자기나 전화기, 턴테이블 같은 옛날 전자제품을 모으는 걸 좋아한다. 이 라디오는 아내를 위해 밤잠을 희생하는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니 당연히 내 차지가 되어야 한다.

"갖고 싶으면 하나 사"

"살 수 있으면 진즉에 샀지. 이 모델은 단종 돼서 구하기 힘든 거란 말이야" (p. 192, 193)

< 미래 뉴스 中 >

미래를 먼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고물라디오에서 나오는 채널은 단 한곳, 그런데 라디오를 껐다 켤때마다 방송은 점점 더 미래소식을 들려준다. 처음엔 무서웠다가 다음엔 환희에 차올랐다. 주가상승에 대한 소식이 나올때마다 메모를 하고 주식을 미리 사두었다. 사둔 주식은 대박을 쳤고 부부는 점점 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다 한 사건의 뉴스를 듣는다.

뉴스 속보입니다. 지난 18일 발생한 초등학생 은 모군 살해 사건의 범인이 검거됐습니다. 열두살 은 모군을 납치, 학교 인근 공원의 화장실에서 수차례 칼로 찔러 살해한 범인은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밝혀졌습니다.

피의자의 어떤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조 모씨... 저 목소리는... 조...화영? 나는 뛰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p. 219)

< 미래뉴스 中 >

권선징악...인과응보 는 미래에서도 유지되어야 할 인간사회의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처럼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수습한다고 하는 현재의 행동은 결국 미래가 현재가 됐을때 더 큰 파장을 몰고 와 버린다.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날에.

짧은 단편들이니만큼 스윽 읽히는 책이었지만 좀 아쉬운 기분으로 마지막장을 덮었다.

크륍테이아, 헤파이스토스, 데메테르 등 신화적 이름들을 어설프게 가져다 쓴 것도 미래소식을 들려주는 라디오도 참신한 SF미스터리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 장편보다 단편이해에 약한 개인적인 취향도 한몫 거들면서 4편의 작품 중 그 어느 작품으로도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삼체 라던가 XX 라는 장편소설들이 떠오르면서 역사적 설정과 현재를 반영한 미래의 모습에 공감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호흡이 긴 장편이 나은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GF 시리즈에서 국내 SF소설의 가능성을 확인한 나로서는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서 만날 젊은 SF작가들의 멋진 작품들을 기다려보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