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미스터리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15
정명섭 외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실현되지 않은 미래 기술을 보여주는 SF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Mystery

서로 다른 두 장르가 만나 새로운 장르, 스프 미스터리가 탄생했다!

그래비티북스의 GF시리즈 중 몇 권을 인상좋게 읽었었더랬다. SF 도 미스터리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몹시 관심가는 시리즈다. 이번책은 4명의 작가가 서로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단편 4작품을 모은 단편집이다.

멀지않은 미래의 어느날 영종도 근처 인공 섬에 만들어진 자유무역도시인 헤븐에서 한 남자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헤븐에서는 공식적으로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헤븐에 사는 세 종류의 거주민 즉, 타워에 거주하는 부유층과 센트럴 지역 및 지하구역에 사는 센트럴 거주민 그리고 관광객들 중 누구라도 아주 작은 범법행위라도 하는 즉시 추방되기 때문에 누구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의문의 폭발로 죽은 한 남자의 사건은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망자는 센트럴에서 시험운행 중인 기아-벤츠사의 전기 버스 운전기사였어요. 기아-벤츠사의 노조는 헤븐의 무인 운행 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는 민주 통합 운송 노조 소속이죠"

"여긴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p. 12)

"난 유전자 분자 배열 방식에 따른 성장 염색체 추출법을 연구하는 중이었어. 그러려면 건강한 육체는 기본이었지"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해야 한다. 이말이군,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많은데 왜 하필 헤븐이지?"

"타워 거주자들의 유전자가 제일 우수하니까" (p. 25)

"크륍테이아? 무슨 뜻이에요?"

"스파르타 청년들의 비밀결사로 헤일로타이라고 부르는 노예 중 뛰어난 자들을 암살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헤일로타이들의 반란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근데 이건 왜요?"

"헤븐을 조종한다고 알려진 조직의 이름이 올림포스야" (p. 50, 51)

< 헤븐 中 >

폭발로 죽은 남자에 대한 조사를 하던 도중 밝혀지는 사건의 실체는 유전자조작약과 관련이 있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영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독재가 현실화되는 설정은 SF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들 중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연결짓는 것도 새롭진 않다. 하지만 SF가 지금의 현실비판 요소를 반영하는 방식이 새로워서 좋았다.

"미안하지만 헤븐에는 전과자나 지명수배자들은 못 들어옵니다"

"그런 잔챙이들 말고, 여기 전직 대통령이 몇 명이나 살고 있는지 알아요? 전직 장관이나 파산한 재벌그룹 총수로 내려가면 수백 명으로 늘어납니다"

"지상에 천국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잖습니까?"

"껍데기만 천국이지. 사실은 가진 자들의 왕국이잖아요"  (p. 52, 53)

< 헤븐 中 >

이렇게 보면 사실 겉모습이 바뀐 미래가 지금과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본 뒤 현재를 보면 마찬가지이듯이.

화성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이므로 가장 궁금한 곳이지만 엄청나게 발전한 것 같은 지금의 과학기술도 아직 화성에 유인우주선을 보낼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다. 화성인에 대한 상상은 늘 SF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화성인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화성인이 지금은 없더라도 과거에 문명이 있진 않았을까? 여하튼, 화성에 지구에서 부족한 광물자원이 넘쳐난다는 설정아래 지구에서 출발한 유인우주선이 화성에 도착한다. 그리고 화성에서 금을 캐던 지구인 광부가 실종된다.

컬쳐호에서 얻어낸 데이터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광부가 도착한 곳은 계곡이었다. 그들은 계곡 주변을 돌아보다가 아래로 내려갔고, 그곳에 있는 오래된 동굴입구를 발견했다. (p. 93)

"컬쳐호가 화성에 도착한 건 6년 전이에요. 6년이요. 정말 6년 동안 홀로 화성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사람이 아니라면 왜 사람 흉내를 내는데?"

"그걸 조사하고 싶습니다" (p. 97)

2차대공황 이전에 다국적 기업이 많은 군인과 광부와 과학자와 비해사를 화성에 보냈지만 제대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소문또한 돌았고, 사람들도 화성이 위험한 곳이라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구연합정부는 사람 대신 광물을 캐오도록 프로그램한 로봇을 보냈다. (p. 104)

< 화성의 폐허 中 >

이 로봇들은 앤트라 불렸고 현지상황에 따라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자체수리할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형 로봇이었다. 지구에서 광물요청이 많아질수록 앤트들의 수는 늘어갔고 현지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하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진 지구에서 가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모습이 화성에서도 관측됐지만 앤트들은 누가 명령을 보냈던 명령이 오면 그저 열심히 광물을 캘 뿐이었다. 화성은 점점 앤트들이 건설한 시설들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검은비가 내리고 모래폭풍이 쉼없이 발생했다.

타겟은 최대한 많은 금속을 채굴하면서 동시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지만, 계속 실패했다. 헤파이스토스를 통해 연합정부에 도움을 요청해도 명확한 대답이 오지 않았다. 13호가 막 지표면으로 나왔을 때, 하늘에서 타겟이 파괴되어 불타다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광경을 보았다. 하늘에서 핵폭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이를 피해서 움직이는 앤트가 없었다. 그것이 인간이 내린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p. 110)

"이걸 꼭 구해오라고 그렇게 괴롭히더군요" 황금 해골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시겠지만, 3차 세계대전 때문에 지구는 인간이 살기 골치 아픈 곳이 됐습니다. 가까운 화성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선발대를 보내 화성인이 있는지 살피고, 있으면 반드시 제거하라고 했죠. 그게 제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대신 저는 인간을 죽였습니다. 왜냐고요? 인간이 어찌나 말이 많던지 시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p. 126, 127)

< 화성의 폐허 中 >

인간의 명령을 이행한 앤트들의 사회가 무너진 화성에서 살아남은?! 로봇13호는 사실 인간의 명령을 거부한 살인로봇이었다. 그리고 13호는 화성인을 만났다. 거대한 동굴에서 끊임없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최후의 화성인을.

마지막 로봇과 마지막 화성인은 진화일까? 멸종일까?

곧은 자세로 강단에 서 있던 은회색 머리의 여자가 바로 기획자, 가이아의 데메테르였다. (p. 155)

첫해 가을, 시월의 첫 보름달을 맞아 기획자는 여자들을 벌판에 불러 모았다. 기획자가 작성한 맹약의 문구를 함께 암송한 그들은 보름달 아래 머리를 풀어 헤치고 상의를 벗어 던졌다. 화톳불이 퍼뜨리는 불빛 속에서, 그들 각자는 완전무결한 개체였다. 또한,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결집체이기도 했다. 가이아의 여자들은 그날 밤새도록 발을 굴리며 노래를 불렀다. 격렬한 애무와 함께 춤을 추며 입맞춤을 나누기도 했다. (p. 157)

< 불면의 밤은 끝나고 中 >

여자들만 사는 공동체 가이아를 세우고 여자들만의 비의를 치루는 표현은 그리스신화적 분위기를 풍겼지만 어설프게 다가왔다. 과학기술이 첨단으로 발달한 미래배경도 아니고 원인불명의 병이 퍼졌다고 해서 미스터리라고 보기에도 좀 그렇고...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SF적 미스터리한 설정이라고 여긴 것일까...

"변이라고요?"

"네, 그 여자들이 그랬어요.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이할 거라고"

"그 여자들이라면..."

"코라를 숭배하는 사람들"

코라, 혹은 페르세포네. 데메테르 여신의 딸. 데메테르는 기획자에게 붙여진 별명이기도 했다. 이 이름들 간에는 우연 외에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을까, 극심한 어지럼증 속에서도 해인은 답을 구하고 싶었다. (p. 180)

< 불면의 밤은 끝나고 中 >

남자들은 걸리면 죽고 여자들은 걸리면 잠에 빠진다는 그 병의 실체는 알 수 없다. 과연 그 긴 겨울잠에서 여자들이 깨어날 수 있을 것인지도...

곧 만날 아들에 대한 설레임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과학교사가 만삭의 아내와 산책하던 어느날 희한한 라디오가 발견된다.

나도 이런 상황을 원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곧 태어날 우리 아들만 생각해야 한다. 12년 후에 죽을 운명인 우리 아들을 살리려면 바로 오늘, 저 여자애를 죽여야만 한다. (p. 190)

나는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타자기나 전화기, 턴테이블 같은 옛날 전자제품을 모으는 걸 좋아한다. 이 라디오는 아내를 위해 밤잠을 희생하는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니 당연히 내 차지가 되어야 한다.

"갖고 싶으면 하나 사"

"살 수 있으면 진즉에 샀지. 이 모델은 단종 돼서 구하기 힘든 거란 말이야" (p. 192, 193)

< 미래 뉴스 中 >

미래를 먼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고물라디오에서 나오는 채널은 단 한곳, 그런데 라디오를 껐다 켤때마다 방송은 점점 더 미래소식을 들려준다. 처음엔 무서웠다가 다음엔 환희에 차올랐다. 주가상승에 대한 소식이 나올때마다 메모를 하고 주식을 미리 사두었다. 사둔 주식은 대박을 쳤고 부부는 점점 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다 한 사건의 뉴스를 듣는다.

뉴스 속보입니다. 지난 18일 발생한 초등학생 은 모군 살해 사건의 범인이 검거됐습니다. 열두살 은 모군을 납치, 학교 인근 공원의 화장실에서 수차례 칼로 찔러 살해한 범인은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밝혀졌습니다.

피의자의 어떤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조 모씨... 저 목소리는... 조...화영? 나는 뛰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p. 219)

< 미래뉴스 中 >

권선징악...인과응보 는 미래에서도 유지되어야 할 인간사회의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처럼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수습한다고 하는 현재의 행동은 결국 미래가 현재가 됐을때 더 큰 파장을 몰고 와 버린다.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날에.

짧은 단편들이니만큼 스윽 읽히는 책이었지만 좀 아쉬운 기분으로 마지막장을 덮었다.

크륍테이아, 헤파이스토스, 데메테르 등 신화적 이름들을 어설프게 가져다 쓴 것도 미래소식을 들려주는 라디오도 참신한 SF미스터리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 장편보다 단편이해에 약한 개인적인 취향도 한몫 거들면서 4편의 작품 중 그 어느 작품으로도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삼체 라던가 XX 라는 장편소설들이 떠오르면서 역사적 설정과 현재를 반영한 미래의 모습에 공감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호흡이 긴 장편이 나은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GF 시리즈에서 국내 SF소설의 가능성을 확인한 나로서는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서 만날 젊은 SF작가들의 멋진 작품들을 기다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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