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서 - 고전으로 읽는 성서 EBS CLASS ⓔ
김학철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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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전을 서양역사를 읽다보면 기독교 라는 벽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나는 종교가 없으므로 종교에 대한 이해기반이 부족했다. 성서를 역사서로서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두께와 그 어색한 문체가 늘 선택장애를 가져오곤 했다. 신학자들이 쓴 책을 읽어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전도를 위해 믿음을 종용하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미루고만 있던, 비록 개인적이긴 하지만 숙제같았던 부분에 대해 조금은 할 수 있게 한 이 책을 만났다.

기독교 성서를 전공하고 이에 관해 여러 편의 책과 논문을 냈지만 이후 저는 기독교를 교양교육으로 가르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중략) 이 책은 [마태복음서]라는 기독교 성서 중 한 권의 책을 교양인에게 해설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한 총 열 번의 강의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강의 현장감을 살리려 책에 구어체를 유지했습니다. 저는 [마태복음서]를 기독교인만이 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류의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p. 4) 여러 훌륭한 성서 번역본이 있지만 이 책의 [마태복음서] 본문은 제가 그리스어 성서를 번역한 것입니다. (p. 5)

저자는 신학을 전공했고 기독교교양학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는 학자다. 신학을 공부했으나 목회자는 아니고 기독교를 가르치고 있으나 종교가 아닌 교양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자다. 그리고 EBS에서 강의됐던 프로그램이 바탕이 된 책이다. 여러모로 신뢰가 가는 책이었고 무엇보다 얇아서 부담이 없었다. 무엇보다 비록 부분적이긴 하나 원전번역 이라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었다. 기존의 한글성서를 바탕으로 한 책은 결국 중역본일 수 밖에 없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원전에선 조금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종교인이 아니라 '고전으로서' 읽는 첫 성서로 이만한 조건을 갖춘 책은 드물지 않나 싶어 반가웠다.

[마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경에 있는 문서 중 하나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그리스도교'는 로마카톨릭, 프로테스탄트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신교, 그리고 동방정교회를 모두 포함합니다. 앞으로 그리스도교 혹은 기독교라 부르겠습니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경전 문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는 교파를 불문하고 경전에 속합니다. 기독교 경전을 흔히 '성경' 혹은 '성서'라고 합니다. 성경은 전서 입니다. 전서란 어떤 분야에 관련한 사실이나 지식을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엮은 책이지요. (p. 13)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마태복음서]는 고전입니다. (중략) 제가 직접 번역을 해봤는데요, 200자 원고지로 약 400매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분량입니다. A4용지로 하면 50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얇은 책이 서양 세계에서 오랜 시간 동안 고전의 지위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p. 14) [마태복음서]는 이스라엘 바로 위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기원후 80~90년대에 기록되었습니다. (p. 15) [마태복음서]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탄생하기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옹호하거나 강화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지요. (p. 16) [신약성서] 중 제일 앞에 나오고 중요한 것이 바로 [마태복음서]입니다. 세계 인구 중 3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안다는 것, 그들의 삶과 생각을 형성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마태복음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p. 17)

나는 성서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1도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차근차근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니 첫장부터 바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종교서를 읽고 있지만 고전으로서 느끼게 해주는 적당한 거리감과 적절한 요약이 편하고 좋았다. 동시에 적당한 설득력도 갖추고 있어서 읽을수록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이 [마태복음서]를 역사비평적으로 읽으려고 합니다. 역사비평은 문헌이 기록될 당시 저자와 청중을 고려해서 텍스트를 읽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지중해에서 기록된 문헌을 21세기 한국 사람이 쓴 것인양 읽으면 필연적으로 오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대에 살더라도 다른 지역에 있으면 문화가 다릅니다. 같은 지역이라도 시대가 다르면 이해가 다릅니다. 역사비평은 그때 그곳의 사람들에게 [마태복음서]는 어떻게 들렸을까, 저자는 당시 그곳에서 어떤 의도로 글을 썼을까를 물으면서 문헌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p. 29)

딱 좋았다. 내가 찾던 방향의 책이었다. 저자가 성서를 통째로 역사비평적으로 번역해주면 당장 사서보고 싶은 마음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당대의 문화에 맞춰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줄의 명문장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표현된 문장을 직접적으로만 해석하여 지금의 현실에 끼워맞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종교서는 더더욱 위험하다. 그렇기에 종교관련 책들 중 읽을만한 책을 찾기가 어려웠었는데 이렇게 반가울수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 두 문헌은 무의 세계, 무력의 세계입니다. 이른바 사내들의 세계고, 전쟁의 세계고, 명분의 세계입니다. 다른 한편, [마태복음서]의 두번째 단어 '게네세우스'를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들었을까요? 아마도 유대인 경전의 제일 처음에 있는 [창세기]를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유대인에게 [마태복음서]는 새로운 창조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기주장을 하는 책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p. 30)

요약하면, [마태복음서]는 누가 이상적인 통치자인가, 누가 이 세상을 통치해야 하는 사람들인가, 라는 오래된 그리스 철학의 질문에 답을 줍니다.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철학자이자 통치자라는 것이지요. 예수와 제자들은 지혜로 이 세상을 건설해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선언이 [마태복음서]의 주요 내용입니다. (p. 31)

 

열번의 강의로 서술되는 이 책은 첫번째 강의부터 흥미진진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그리고 [마태복음서]의 첫 단어를 비교함으로써 당대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이해를 도우면서, [마태복음서] 가 단순히 종교서를 넘어 왜 고전이 되고 철학이 되고 나아가 혁명서가 될 수 있었는지 호기심도 불러일으켰다.

[마태복음서]는 '읽는' 책이 아니라 '듣는' 책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역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책이었습니다. 누가 들려줬을까요? (중략) [마태복음서]도 한 사람이 낭독하고 그것을 듣는 형식으로 '공연'되었습니다. (p. 35) 첫 장 첫 구절을 '족보' 로 시작합니다. (p. 36) 예수는 누구인가? 그것을 알려면 일단 족보부터 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번여간 [마태복음서] 1장 1절과 달리 다른 번역본에서는 대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나올 겁니다. 순서가 바뀌어 있을 거예요. 그러나 헬라어 원문의 순서는 '다윗과 아브라함'입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다윗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p. 37) '다말', '라합', '롯', 이 셋은 여성 이름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남자 이름이고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족보에는 혈통주의, 정통성, 남성우월주의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중략) 혈통이 중요한 유대인의 족보에서 중요한 건 유대인과 남성인데, 예수가 유대인 왕가의 후손임을 자랑하려는 이 족보에 비유대인 여성이 등장하다니, 어떤 아이러니가 숨어 있을까요. (p. 39) 족보는 혈통주의, 정통주의, 남성우월주의, 도덕주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 마태는 족보의 한 측면에 그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해체해버리지요. 전통과 보존이 있고, 동시에 해체와 전복이 있습니다. (p. 41)

누가누구를낳고 또누가누구를낳고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장부터 읽기힘들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성서였다. 그런데 단순한 나열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디에사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는 습관은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도 로마제국 고전에서도 익숙한 표현 방식이었다. 단순히 같은 이름이 하도 많으니 그렇게 위로 거슬러올라가야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것이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예수의 족보는 길이도 길이지만 남다른 인물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사연많은 여인 셋, 그리고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가 솔로몬을 낳았다' 라는 문장에서 고발한 죄악, 무엇보다 기껏 누가누굴낳고를 주욱 나열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정작 예수는 왕가 혈통인 요셉과 관계가 없어진 마무리. 이 기나긴 족보는 예수라는 인물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하는 전복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라웠다.

태어난 '유대인의 왕'은 '난민'입니다. (p. 55) 아기들을 죽인 사람이 예수는 아니지만 예수 때문에 죽은 건 맞지 않나? 베들레헴의 수많은 어린아이가 죽었잖아. 이게 왕이고 구세주인가? 당시 사람들도, 죽은 아이들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는 바로 이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나 때문에, 내가 태어난 탓에 사람들이 죽었다면 나는 그 죽음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중략) 난민이 되었지만 자신과 관련하여 목숨을 잃은 저 많은 베들레헴의 아이들, 그리고 그 부모의 절규에 예수는 삶으로 응답해야만 하지요. (p. 57)

예언된 아기, 헤롯왕의 아기 학살, 왕의 탄생..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가 평생 짊어졌어야 할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자신의 탄생이 수많은 죽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어찌 고민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찌 열심히 성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예수의 삶이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회개하라는 말부터가 그러합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뭔가 기분이 나쁘지요.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잘못한 것도 별로 없는데 회개하려니 언짢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가 말한 '회개하라'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법적 죄를 돌이키라는 뜻 이상입니다. '삶의 방식 자체를 돌이키라'는 의미이지요. (p. 66) 3장2절은 간략히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방향을 전환합시다. 신의 질서가, 신의 통치가 바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훨씬 더 그러하지만, [신약]에는 사후 세계에 관한 관심이 크지 않습니다. 기독교 문화권의 사후 세계에 관한 이미지는 단테의 [신곡]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p. 67) 신의 통치가 이 땅에 '온다'는 것이지, 죽어서 '가는' 저곳을 바라보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신의 질서가 여기로 옵니다. 그러니 그 새롭고 정의로운 질서에 편입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제에 길들어 살던 우리 삶의 방향이 전환되어야 하겠지요. (p. 68)

왠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회개하라가 모두가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니, 기독교라는 종교가 천당에 가기위한 기도를 드리는 종교가 아니었다니. '예수천당 불신지옥' 은 성서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니.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 성서를 읽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읽었더라도 보고싶은데로 보고 이해하고 싶은데로만 이해한다면 그렇게 됐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하지만 여하튼 나는 이제야 기독교에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오해와 편견을 넘어 굉장히 좋은 논리였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예수는 현실적으로 옷도 제대로 못 입고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민중을 앞에 두고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러한 가르침은 민중을 향해 통치자와 철학자로 스스로 간주하고, 그 윤리를 실행하라는 촉구입니다. 그것이 신의 질서, 신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뜻을 풀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모두 주체가 되어 신의 자녀임을 깨닫고 연대하며 서로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철학자와 통치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신의 질서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p. 93)

에픽테토스와 세네카의 가르침과 연결된다는 예수의 가르침들을 보면서 고대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예수에게는 고전이었을테니까 그렇게 영향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웠겠구나 싶다. 그리스철학이 중세기독교시대로 넘어가면서 끊기거나 사라졌다가 보다는 철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삶에 대한 근본 질문을 던지는 철학은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그대의 오른쪽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 대라'

당시 사회는 오른손잡이 문화였습니다. 공공연하게 공중에서 왼손을 사용하면, 왼손을 사용한 사람에게 모욕적인 눈길을 보내는 사회였지요. 오른손잡이가 다수이기도 하니, 누군가 다른 이의 뺨을 친다면 오른손으로 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내가 오른손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뺨을 치면 그 사람의 어느 쪽 뺨을 치게 됩니까? 왼쪽 뺨이지요. 그런데 왜 '오른쪽 뺨을 치거든' 이라고 했을까요. 오른손의 손등으로 때려서 그렇습니다. 고대 유대인의 한 문헌은 같은 신분의 사람끼리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때렸을 경우에는 벌금이 4전인 반면, 손등으로 때리면 벌금이 100배인 400전을 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손등보다는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이 더 고통을 줄 텐데요.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주인과 종, 장군과 부하, 왕과 신하 등 신분의 격차가 확연할 때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신분인데도 손등으로 상대방을 때리면 그것은 폭력과 모독의 죄를 동시에 범한 것이기에 벌금의 차이가 크게 나는 것입니다. 윗사람에게 손등으로 뺨을 맞은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취하는 태도가 있지요. 사죄하며 고개 숙이고 물러나는 겁니다. 당시 사회는 그렇세 신분이 주는 절망을 학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고 합니다. 일단 예수의 청중들은 모두 웃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비일상적이었거든요. (중략)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p. 99~100) 왼뺨을 대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사람이야, 너와 같아. 때리고 싶으면 때려. 하지만 네가 신분으로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어' (p. 101)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밀어라 하는 말이 그저 비폭력을 나타내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겉옷을 뺏는 예도 '강제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하는 말도 그 직접적 문장의 의미가 다가 아니었다. 역사비평적으로 저자가 알려주는 문장의 의미들은 보다더 깊고 진지한 의미가 들어있었다. 알면 알수록 멋진 철학이었다.

예수가 일으켰다는 기적의 의미와 예수가 했다는 은유적 표현속의 숨은 뜻 그리고 당대를 향한 비판과 전복적 상상력이 모두 새롭게 다가왔다. 번역에서 빠지고 왜곡되고 악용되는 일부 사례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되는 부분들도 좋았다.

우리는 예수가 견고한 상징체계, 그러나 어떤 열매도 굶주린 이들에게 주지 못하는 옛 질서에 도전하고 전복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새 세상을 그려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추구해나갈 때 한계나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고, 또 지헤로웠던 청년 예수, 젊은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p. 183)

종교인으로서 성인으로서 어쩌면 신으로서 접하는 예수라는 이미지보다 고민하는 선구자로서 앞선 생각의 철학자로서 민중의 리더로서 접하는 예수의 모습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역시 종교로 읽는 것보다 역사로 읽었어야 했다. 이런 책이 더 많이 더 넓게 나와줘야 한다.

그리스의 오래된 정치철학 담론, 누가 이상적인 통치자인가 하는 담론의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것이 좋은데, 철학자 왕이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두번째는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기꺼이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과 지혜를 사랑한 삶이 철학자, 통치자의 이상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에수가 바로 그러한 통치자임을 잘 이애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226)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들과 주변 인물들의 심리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특히 부활과 관련해서 [안티고네] 및 당시 로마황제가 죽으면 신격화했던 '아포테오시스' 와의 연결은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항상 소외된 사람들 가까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논리를 펼쳤던 고대의 철학자들과 달리 종교성을 획득하기에 자연스럽기도 했다. 예수의 삶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자리잡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예수는 당대 필요했던 진정한 왕이었다.

그들은 [마태복음서]를 보며 살아갈 힘을 얻지 않았을까요.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요. 많은 사람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폭력과 모욕을 안기며 생채기를 내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생명이 발가벗긴 채 놓여 있는 듯한 이 차가운 현실 앞에, [마태복음서]는 변함없이 유효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절망을 이겨낼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펼쳐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에게 [마태복음서]가 고전이자 교양으로 읽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 228)

좋은 책이었다. 고전으로 읽기에 충분한 깊이가 있는 책이었다. 종교도 어찌보면 삶의 철학이다. 삶은 그렇게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종교에서 혹은 철학에서 혹은 돈에서 혹은 또다른 길에서 답을 찾고자 할 것이다.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은 좀더 분명한 길을 보여주리라 생각한다. 고전으로서 읽는 [마태복음서]는 그런 과정에 의미를 더해준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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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smsqpdht 2021-12-2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 단계
http://www.godnara.co.kr/bbs/board.php?bo_table=03_01&wr_id=119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단계를 배워야 참 하나님을 알게되는데 천국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배워서 참 하나님께 나아 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섯단계을 모두 깨달으신분들은 참 하나님을 알게되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비밀들과 구원의 해를 알게 되실겁니다.
 
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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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기 전과 이 소설을 읽고 난후의 성인지 감수성은 달라지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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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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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실 후 축적되는 것들의 위력과 우아함을 담은 특별한 소설

"모두 고요하고, 모두 빛나네"

 

 

'전 세계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 존 맥그리거 8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이라는 홍보문구에 눈길이 갔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라니 멋지지 않은가. 존 맥그리거 라는 이름은 이 작품으로 인해 처음 알게 됐는데... 무척... 묘....한... 소설이었다.

밤이면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있을 만한 곳에 관한 꿈을 꾸었다. 아이가 황무지를 따라 걸어가는 꿈에서, 아이의 옷은 젖어 있고 피부는 거의 파란색이었다. 맨 처음 아이를 발견하고 담요로 감싸서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오는 꿈도 있었다. (p. 22)

조용하고 평범한 마을이 있다. 자연경관이 썩 괜찮아서 관광객들도 종종 방문하는 곳이었다. 새해맞이 휴가를 왔던 어느 가족의 딸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녀의 이름은 리베카 쇼 였다. 마지막으로 눈에 띄었을 때 그녀는 후드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검은색 진, 캔버스 화 차림이었다. 키는 152센티미터였고 머리는 짙은 금발의 직모를 어깨까지 기르고 있었다. 대대적인 수색작전이 펼쳐지고 기자들이 몰려들고 뉴스에 연일 방송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녀가 무사히 돌아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길고긴 수색작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단서하나 찾지 못했다.

아이들은 베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 아이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점들에 근거해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들이 했을 행동과, 자신들이 아는 주변 풍경에 근거해 추측을 했다. 아이들은 작년 여름, 그 가족이 헌터 씨 저택에 보름간 머물렀을 때도 베키를 보았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 아이와 함께 보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들도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다. (p. 32)

리베카 쇼는 13살이었다. 여름 휴가때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놀곤 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새해맞이 휴가를 같은 곳으로 또 왔다. 그리고 실종됐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사라질 당시에는 열세 살 이었다. 후드가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검은 색 진, 캔버스화 차림이었다. 지금은 키가 152센티미터보다 클 것이고, 헤어스타일은 물론 머리 색깔도 달라졌을 것이다. 수사는 계속 진행중이라고, 경찰 대변인이 분명히 말했다. (p. 42)

2년차...

실종 사건은 아직 생생한 사건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마을 에서는 아이 어머니가 얼마나 오래 머무를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발견되어 이 모든게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언덕 밑으로 뻗어 있는 깊은 동굴에 빠져버린 건지도 몰랐다. 여전히 동굴 구석진 곳 어딘가에 동그랗게 몸이 말린채 있을지도 몰랐다. (p. 45)

10월에 실종된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헌터 저택에서 상자와 가방을 싣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p. 63)

 

실종된 아이의 부모는 여전히 마을에 머물렀지만 마을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외부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이라고 해서 서로 모두들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일을 할때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고, 그건 학교의 다른 어떤 직원들보다 오래된 것이었다. 학교에는 존스씨만 열 수 있는 자물쇠가 몇 개 있었다. 교직원 중에는 그의 상관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일을 지시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만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였다. (p. 68)

학교관리인 존스씨는 학교일을 한지 30년이 넘었다.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여동생은 한번도 사람들 눈에 띈 적이 없었다. 마을의 학부형들은 대부분 학생때부터 존스씨를 알고 지냈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최근 공개된 비디오에서 아이 엄마는 벡스라고 불렀다. 비디오에서 소녀는 웃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p. 71)

3년차...

사건은 여전히 종결되지 않은채였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찾고 싶었다. 그 아이가 안전하다는 걸 알고 싶었다. 거의 모르는 아이였지만,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p. 77)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뉴스에 오르내릴 만한 큰 사건이 발생하면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는다. 함께 걱정하다가도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는만큼 빨리 안심하고 싶어진다.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느낄수록 빨리 사건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나 아이들이라면...

그래서 너희 모두 아무 이야기도 안 하기로 한 거야? 아버지가 물었다.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되게 심각한 상황이었잖아요,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온통 그 이야기만 하고. 당연히 그랬지,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한테는 왜 이야기를 안 한 거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제임스는 움츠러들었다. 어머니가 그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다른 일도 있었니, 제임스? 크리스마스요, 그가 말했다. 크리스마스에도 만났어요. 두어 번 만났어요. 둘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이서만?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부모님은 서로를 쳐다봤다. 제임스, 너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엇던 거니? 겨우 열 세살이었다고요, 엄마.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었겠어요? 제임스, 어머니가 말했다. 이건 중요한 일인데, 그 애 실종되던 날도 만났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 (p. 83)

이 소설은 대화와 서술이 구분되지 않느다. 따옴표도 없고 줄바뀜도 없다. 이렇게 죽 그냥 무미건조하게 설명되는 식의 문장들을 읽다보면 소리가 나오지 않는 흑백무성영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 처음엔 이런 문체가 실종사건으로 시작한 이 소설의 스릴러적 분위기를 강조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와 아이 어머니가 이혼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 무렵 그에 대한 목격담도 늘어났다. 저수지 가에서, 채석장 끝에서, 짐말용 다리 아래서, 늘 멀리서만 눈에 띄었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p. 93)

4년차...

소녀의 부모는 이혼했고 따로따로 다른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실종사건은 잊혀져가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진행중인것도 같았다.

나는 그냥 그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았으면 좋겠어. (p. 110)

아이들은 소녀를 기억했고 길을 잃었을때 문득 소녀가 생각났다. 하지만 아무도 그 소녀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후드 달린 흰색 상의가 황무지 고지대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이탄 같은 갈색 기름에 잔뜩 절어 있고 솔기 부분이 해져 있었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상표와 디자인을 확인했다. 과학 수사팀의 조사에 몇 주가 걸렸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상의가 발견된 지점에서 포괄적인 수색 작업이 벌어졌지만, 더 이상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p. 114)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 였다. 이제 열일곱 살이 됐을 테고, 경찰에서는 현재 모습을 컴퓨터로 합성한 이미지를 공개했다. (p. 124)

 

5년차...

실종된 소녀도 나이를 먹어갔다. 실종됐다고 해서 세월이 비껴가는 것은 아니었다. 소녀와 놀았던 마을 아이들도 성장하고 있었다.

제임스 브로드는 결국 로한에게 베키 쇼 이야기를 했다. (p. 136) 제임스는 이제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실종 전해 여름에 모두가 그 아이를 만났다고, 그는 말했다. (p. 137)

마을이란 새로 오는 사람이 있고 떠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새로 이사온 로한에게 제임스는 실종된 소녀의 이야기를 한다. 마치 친구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듯이. 이제 친구사이에 말하지 못한 비밀은 없다는 듯이.

6년차...

캐시는 넬슨을 찾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녀석이 낡은 운동복이나 방한 조끼처럼 보이는, 바느질 자리가 터져 보충재가 삐져나온 진청색 옷가지를 물어뜯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넬슨을 말리고는, 다시 리처드를 따라잡았다. (p. 164)

산책길에 개가 물어뜯던 옷은 이제 더이상 눈길을 끌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에 있을 법한 누군가 버리고간 옷가지이겠거니 여겨졌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찻집에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차를 내어준 여종업원은 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고,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 일이잖아요, 안그래요? 그녀가 반문했고,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인정했다. (p. 172)

그렇게 잊혀진 사건일수도 있었다. 그렇게 잊혀졌다고 볼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했다. 누군가 기억하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실종사건을 경험하게 되기도 했다.

문제는 소피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하고 나면 모두 실종된 여자아이 이야기를 꺼낸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이야긴 하기 싫은데 말이야, 엄마. 사람들은 어떻게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까? 제스는 사건 당시에는 꽤 큰 뉴스였다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건은 기억하거든, 그녀가 말했다. 나중에 로한과 린지, 제임스도 똑같은 일을 겪고 있다고 페이스북으로 전했다. 로한은 '실종 소녀의 저주'라고 했고, 린지는 그런 식으로 싸구려 티 내지 말라고 했다. (p. 175)

7년차...

학교에서는 심프슨 선생님이 보일러 점검을 위해 기술자들을 불러오고, 존스 씨가 못 들어오게 막아서면서 실랑이가 있었다. 미리 알라지도 않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존스 씨가 말했다. 개인 보일러실이 아니잖아요, 존스씨. 절대 못 물러납니다. 그가 말했고, 기술자들은 다른 날 다시 오겠다고 했다. (p. 203)

소설속에선 때론 의심가는 인물이 등장하곤 하지만 글쎄... 실종사건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없었듯이 인물들에 대한 뚜렷한 증거도 드러나지 않는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사진에서 여자아이는 카메라로부터 고개를 반쯤 돌리고 있어 마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것처럼, 어디 다른 곳에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스무 살이 되었겠지만, 그녀는 늘 여자아이라고 칭해졌다. 이제 7년이 지났으니 법적으로 그녀의 사망을 공식화해도 된다는 말이 있었다. 경찰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그건 전혀 법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사망 발표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여자아이의 부모는 수색을 포기하지 않았고, 경찰도 수사는 계속 진행중이라고 발표했다. 마을 사람들은 언덕을 올려다보며 자신들은 오래전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여자아이는 황무지 너머까지 올라갔다가 물이 찬 좁은 계곡으로 미끄러져 떨어졌을 것이다. (중략) 그녀는 어디에서든 추락할 수 있었고, 여전히 거기 누워 있을 것이다. (p. 209)

실종된 아이의 부모라면... 그래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아이에서 성인여자가 된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여전히 찾고 싶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럴수 있는 사건으로 결론 내릴 수도 있겠지만 부모라면... 그래 결론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8년차...

학교에서는 난방 기술자들이 보일러실을 점검했고, 상태가 최악이라고 했다. 주 건물에 현대식 난방 시스템을 설치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심프슨 선생님은 새 시스템을 설치한 후에도 보일러실을 창고로 쓰시면 된다고 존스 씨에게 말했고, 존스씨는 반응이 없었다. (p. 215)

몇몇의 특정인물들이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이 소설을 다 읽을때까지 결국 등장하는 인물들을 제대로 다 구별할 수 없었다. 무채색으로 쓰여진 문장들은 인물들도 무채색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화와 설명이 구분되지 않고 주인공과 배경이 구분되지 않고 사건이 일상이 구분되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런던의 집에서 마을 위 황무지 꼭대기까지 모금을 위한 도보행진을 했다. 신문에 많이 보도가 되었고, 한 웹사이트에서는 그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업데이트했다. 그는 대부분 운하를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는데, 그것이 길을 잃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중략) 그는 실종자를 위한 기금으로 많은 돈을 모금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는 언덕을 올라갈 때는 혼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대부분의 신문에 홀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실렸다. (p. 224)

소설속에선 단 한번도 소녀의 부모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워낙 대화가 거의 없는 소설이긴 했는데, 실종된 소녀 부모의 대화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 부모의 심정은 단 한번도 표현된적이 없었다. 그저 계속 배경만 주변 상황만 나올 뿐이었다.

아동 포르노 혐의로 기소된 남자 이야기를 다룬 지역 뉴스가 나왔다. 기자가 실종된 여자아이 사건을 언급했고, 리처드는 캐시가 어머니의 팔을 다정하게 잡는 모습을 곁눈으로 확인했다. 경관 한 명이 본 사건은 실종된 여자이이와는 관련이 없다고 했다. 법원 건물로 들어가는 남나의 모습이 나왔다. 머리 위에 스웨터를 덮어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존스씨의 얼굴을 알아보는 일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p. 238)

9년차...

마틴은 차를 타고 버려진 채석장으로 가서 망치로 자신의 컴퓨터를 박살 낸 다음, 불에 타서 남은 형체만 남은 조각들을 자동차 밑으로 밀어 넣었다. (p. 243)

등장인물 중 누구의 속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작가는 3인칭으로 서술하는 듯 하면서도 인물의 마음은 결코 서술해주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과 상황을 묘사할 뿐이었다. 그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실종된 소녀만 알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여전히 살아있다면 지금은 키가 거의 180은 됐을 것이다. 열일곱 살 그녀를 추정해 만들어진 컴퓨터 이미지는 이제 5년이나 지난 것이었지만, 경찰 대변인은 새로운 이미지를 제작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사건은 계속 수사중이라고 대변인이 말했다. 검은색 진과 방한 조끼, 훋 달린 흰색 상의는 이제 너무 작을 것이다. 당시의 신발을 신으면 솔기가 터질 것이다. (p. 270)

세월이 흐른다고 키가 계속 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녀의 키는 이제 180 됐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사진은 더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았다. 하지만여전히 사건은 수사중인 상태였다. 하지만 하지만...

10년차...

존스는 잠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 어떤 짓도 저는 하지 않았어요. 실수였다고요. 컴퓨터가 뭔가 잘못된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다 필요 없으니까. 그는 힘을 주고 선 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순간 그녀는 두려웠다. (p. 285)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변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구성원에 큰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어쩌면 쉽게 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이웃도 갑자기 두려워지게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므로...

여자아이가 실종된 지 10년이 지났고,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후드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차림이었다. 지금이면 스물 세살이 됐을 것이다. (p. 295)

실종사건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소설은 단 한번도 그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둔다. 하지만 잊을만 하면 같은 문장을 반복함으로써 사건을 소녀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주문처럼 소설속에 등장하는 문장을 읽을때마다의 느낌은 조금씩 달라진다.

11년차...

장난의 날에 다른 마을에서 온 여자아이가 후드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검은 색 진, 캔버스화 차림의 좀비 분장을 하고 나타났다. 여자아이를 차에 태워서 부모에게 돌려보냈고 말들이 나왔다. (p. 316)

제임스는 여자 친구를 황무지로 데려가 실종된 여자아이 사건을 이야기해주었다. 여자 친구는 귀 기울여 듣고 나서, 제임스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들이 늘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p. 320)

 

사건은 이제 장난의 소재가 될 만큼 가벼워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제임스는 늘 어떤 단계처럼 실종된 소녀의 이야기를 친구 혹은 애인에게 털어놓았다.

12년차...

건물들은 전소했고, 다음 날 아침까지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는 알리바이가 확실한 것 같았다. 경찰이 확인했다. 그 남자에게 그런 걸 물어보러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마틴이 말했다. (p. 322)

실종사건의 이제 거의 희미해졌다고 여겨질 즈음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화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명피해도 없었고 비교적 소소한 사건이었지만 그래도 연이어 발생하자 마을사람들은 신경이 쓰인다.

13년차...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화재 문제로 다시 한번 조사를 받았고, 체포되었다. (p. 347)

그들은 주차장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질 예정이었고, 세 명은 먼 길을 가야 했다. 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p. 358)

 

딸이 실종되고 그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실종된 여자아이와 함께 어울렸던 마을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으나 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13년이 흘렀지만 그들은 여전히 저수지 옆에 살고 있었다.

실종된 여자아이는 아직 잊히지 않았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그 아이를 찾아보았다. 모든 곳에서 찾아보았다. (중략) 소용이 없었다. 여전히 모두들 그 아이에 대한 꿈을 꿨다. (p. 361) 실종 당일에 그 아이를 찾는 꿈들이 있었다. 어스름 무럽에 황무지에서 아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부모에게 데려다 주었다. 꿈속에서 여자아이의 부모는 감사하다고 짧게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p. 362)

소리도 없고 색깔도 없는 한편의 무성흑백영화를 보고 난 듯한 이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첫장처럼 여전히 희뿌연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마지막에가서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실종사건으로 시작했으나 이 소설은 스릴러 소설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시간을 흘러가고 일상은 반복된다. 기억이 흐려지더라도 잊지는 못하고 같은 시간을 다르게 기억하며 세월이 흐른만큼 누군가는 자라고 누군가는 늙는다. 어떻게 읽으면 모두가 의심스럽고 어떻게 읽으면 모두가 안쓰럽지만 어떻게 읽으면 모두가 답답한 이 소설은 결국 실종된 여자아이를 제외한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같기도 하다. 그토록 자주 실종된 여자아이를 언급하지만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인물들은 살아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소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내내 살아있는 생을 다루지만 그 어떤 생명력도 느낄 수 없게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서술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실종시킨다. 실종된 것은 어쩌면 첫장에 등장하는 그 소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침대에 누운 잭슨씨는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모두 고요했고, 모두 빛났네. (p. 363)

커다란 상실이 있더라도 삶은 축적되고 그렇게 삶은 눈이 멀더라도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그 삶이 빛나고 우아하게 느껴질지는 읽는이마다 많이... 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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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티의 플랜B -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의 비밀
나희선(도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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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에 관해 너무 무지했던 터라 토익은 700점도 안 됐고 스펙이라곤 전무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불안했다. (p. 9) 유투브라는 세계를 만나 정상에 도달했다가 '멈춤'버튼을 누른 뒤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동안 배우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이 책을 통해 나누고자 한다. (중략) 존재감을 키우고 운명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가 작은 영감과 희망을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p. 13) - 프롤로그 中 -

나는 티비도 잘 안보지만 유투브도 잘 안 본다. 그냥 나라는 사람은 시대에 맞지 않을지 몰라도 여전히 영상매체 보다는 인쇄매체가 편하다. 그래서 연예인도 잘 모르고 더군다나 유투버는 더더욱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티'는 알고 있었다. 심지어 도티를 보러 행사장에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도티가 쓴 책에 호기심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웠다. 출판사에서 모집한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읽을 기회를 얻었다.

'아, 돈이 있음으로써 어떤 이의 시간은 가치 있어지는구나' (p. 19)

도티가 연대법대 졸업생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금수저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도티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목표를 세웠을때 그 목표를 향해 굉장히 열심히 하는 타입이었다. 대학생때 친구들과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때 친구들과 경제력의 차이를 절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낙담하거나 좌절한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야 겠다' 고 목표를 세운다. 돈을 벌려고 보니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다 법을 알아야 겠구나 싶어 법학과로 전과를 했는데 사시가 없어지면서 취업을 고민하다가 PD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PD가 되기위한 자기소개서에 경험 한줄을 적어넣기 위해 개인방송을 시작한건데, 여기서 천직을 찾았다.

'VOD형 플랫폼에는 VOD형 콘텐츠가 있지 않을까?' (p. 35)

아프리카TV방송에서 BJ로 나름 성과를 거두었지만 '차별화'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유투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유투브형 콘텐츠를 제작하여 올렸는데 이게 대박이 났다. 도티의 채널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방구석에서 고군분투했다. 취미로 하는 것과 직업으로 하는 것은 마음가짐부터 노동량까지 천지차이가 난다. (p. 43) 유투브를 시작하고 1년 반 정도는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다. (p. 48) 그런데 만약 이 일이 재미있지 않았다면 아무리 다른 대안이 없어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거다. 다행히도 일이 아주 재미있었다. (중략) 내가 즐거운 일을 발견했기에 힘든 줄을 몰랐다. 하루에 서너 시간 밖에 못 자도 내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일이라서 꾸준히 노력할 수 있었고, 그래서 성공에 다가갈 수 있었다. (p. 49)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마도 '내가 즐거운 일을 하라' 가 아닐까 싶다. 마치 수능만점 받은 학생이 '교과서로 공부했어요' 하는 멘트처럼. 하지만 식상할 수 있는 진리가 솔직함으로 다가올땐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진다. 도티의 장점중에 하나는 그런 솔직함이다. 정말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하는 말도 하지만 그 노력이 재미있었기에 할수있었다는 말도 도티의 진심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유투브가 경쟁 플랫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p. 53)

내가 어느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럼으로써 아이의 부모와 가정에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니 이왕이면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졌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자 사명감도 커졌다. (p. 56)

 

도티를 알게 되고 꾸준히 관심을 갖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도티의 '착함' 때문이었다. 도티는 유투브 크리에이터 1세대다. 지금은 너무나 일상적이 되버린 유투브 콘텐츠들이 불과 몇년 전만해도 지금과 많이 달랐다. 그 초창기의 무질서 속에서 크리에이터 들의 거친 언어들이 귀에 들어올때마다 심기가 불편해지곤 했다. 하지만 도티는 욕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내용도 착했다. 도티의 유투브라면 나쁜 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아서 안심이 됐다. 그런 유투버는 도티 뿐이었다.

샌드박스 안에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여 '실패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크리에이터를 비롯한 창작자들은 자유롭게 시도하고 실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는 과정에서 창의성이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터들이 마음껏 활동하며 성장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자. 그런 환경울 제공하고 싶다는 바람이 샌드박스라는 회사 이름을 선택한 이유였다. (p. 67)

도티, 잠뜰 등 샌드박스 캐릭터들을 몇 알고 있었다. 샌드박스 네트워크 라는 회사가 그냥 도티TV가 잘 되서 만들어진 회사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친구와 의기투합하여 맨땅에 헤딩하다시피 회사를 일궈낸 과정을 보니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유투브라는 매체의 특성상 근시안적 콘텐츠들만 무분별하게 양산되는 줄 알았더니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회사의 역할이 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아빠가 없다는 결핍, 몸이 왜소하다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내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애썼던 듯하다. 약점을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는 것이 내게는 아주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아빠가 없는 것도 키가 작은 것도 내가 선택한 조건은 아니지만, 존재감은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p. 84) 누구나 살면서 상처를 받고 나쁜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 중요한 건 그 일을 마주하는 나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쁜 일과 맞닥뜨렸을 때 시간이 걸리더라도 잘 소화하면 자산이 될 수 있다. 자신을 갉아먹는 독으로 쌓아둘지 자산으로 축적할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p. 89)

읽을 수록 기본 마인드가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역시 그 사람이 쓰는 언어는 그 사람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방송에서 하는 착한 언변은 결국 도티의 인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덕질을 해도 남들과 다르게 잘하고 싶었고, 그래서 인정받고 싶었다. 무엇을 하건 어디에 가건 인정받고 싶고 존재감을 키우고 싶었다. 학교에서든 팬카페에서든 게임에서든... 그래서 게임도 공부도 모두 열심히 했다. (p. 107) 미치는 경험을 해보라. 물론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챙기면서 지금 상황에서 허용되는 만큼 미쳐보는 거다. 그때 느끼는 행복은 삶을 살아가는 데 좋은 에너지가 된다고 믿는다. (p. 111)

세상에 저절로 되는 건 없다. 엄청난 과학적 발견도 굉장히 획기적인 발명도 다 앞서서 누군가의 경험들이 쌓인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도티가 김연아 와 이효리 의 광팬으로 덕질을 하며 영상을 모으고 편집하고 꾸미고 카페에 올리던 그 모든 시간들이 도티의 크리에이터 능력을 키워낸 셈이었다. 무엇보다 도티는 미쳤다고 할만큼 뭔가에 꽂히면 정말 열심히 하는 타입이었다. 뭐가 되도 될놈이었달까. ㅎㅎ

내 구독자들 중에도 꿈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다. 부모님이나 사회가 꿈을 찾으라고 압박하는 분위기여서 그런지 다들 꿈이라는 보물섬을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하다. 그렇지만 꿈을 정한다고 해서 꼭 그대로 되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꿈은 찾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서도 꿈을 발견하고 이루기위해 노력할 마음만 굳건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p. 116~117)

도티가 초등학교 다닐때 장래 희망을 써내라기에 '훌륭한 사람'이라고 써냈더니 선생님이 다시 써오라고 했단다. 왜 꿈이 꼭 직업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갔었다고... 선견지명이 있었던게 아닐까 ㅎㅎ 요즘은 꿈을 꼭 직업이라고 생각지 않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가 아닐까 그것이 바로 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라지만 시청자들은 진심을 느낀다. 한두 편이면 모르고 넘어갈까, 꾸준히 활동하면 크리에이터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는지 다 보인다. 팬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는지, 콘텐츠를 만드는 게 즐거워서 하는지, 그냥 조회수 장사꾼에 불과한지 보는 사람들은 다 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진심이다. (p. 147)

동의한다. 나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진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진심이 통하지 않는 관계는 늘 어려웠다. 가식적인 관계는 언젠가는 끝난다. 그리고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 도티의 성공뒤엔 끊임없는 노력과 장기적인 성찰과 쉬지않는 성실함이 있었다. 무엇보다 구독자를 향한 진심어린 정성이 있었다.

바람직한 건 그냥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좋은 사람인 척하는 것보다 그냥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가장 편하다. 몸을 사리는 게 아니라 내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자연스레 그렇게 될 것이다. (p. 171)

언제나 좋은 사람 성실한 사람 진심어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도티이지만 일년365일 매일 그렇게 노력하는 삶은 즐기고 있는 일임에도 쉽지 않았나보다. 부지불식간에 공황장애가 왔고 어쩔수 없이 모든 활동을 멈추어야 했다. 마라톤 코스에도 잠시 속도를 늦추고 물마시는 테이블이 있는 것처럼 삶이란 멈추고 쉬어가야 할 때를 알아야 더 오래 뛸 수 있는가보다. 이또한 오래된 진리임에도 실천이 참 어려운 법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마음가짐을 좀더 편하게 먹게 됐고 여전히 즐기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유투브는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득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매체다.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장밋빛 미래만을 꿈꾸는 것도 위험하다. 어떤 방식이든 자신에게 행복을 1그램이라도 더하는 방향으로 유투브를 활용하기를 바란다. (p. 187)

유투브 크리에이터 1세대 로서의 도티 개인적 성공담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유투브 세계의 뒷 얘기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뭐하나가 잘됐다 하면 관련 책들이 우수수 쏟아지곤 하지만 속빈강정일 때가 많다. 유투브 관련한 전문적인 기술을 배울 것이 아니라면, 도티의 진심어린 경험담을 통해 유부버들의 세계에 대해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유투버 로서의 도티 못지 않게 인간 나희선의 매력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먼 길을 걸어 처음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성장이란 어쩌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고 지키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중략) 세상을 향해 나라는 존재를 펼친 출발점이자 정체성인 크레이이터 도티는 그 자리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끊임없이 탐험하고, 꾸준히 성장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을 것이다. (p.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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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컬러 - 색을 본다는 것,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들에 대하여
데이비드 스콧 카스탄.스티븐 파딩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마바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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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와 영국의 대표적 화가가 만나 문학과 예술, 역사, 문화, 인류학, 철학, 정치학, 과학을 넘나들며 색의 세계를 탐구한다. 호메로스에서 피카소, 이란민주화운동, <오즈의 마법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흥미로운 소재들로 색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단지 색에 대한 담론을 넘어 세상과 예술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생각지 않았던 새로운 흐름에 휩쓸리게 될 때가 있다. 역사를 읽다가 철학을 읽다가 과학을 읽게 되기도 하고 문학을 읽다가 심리를 읽다가 그림을 읽게 되기도 한다. 그림을 읽다... 그랬다. 나는 그림도 책으로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그림도 책으로 읽다보니 '색'에 대해서도 관심이 갔다. 최근 '색채의 심리'를 읽고나서 더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이 '색'에 대하여 색의 의미에 대하여 알려주기를 기대했다.

차례를 보면 총 10가지의 색이 등장한다. 빨주노초파남보 라는 무지개 7색과 검정,흰색,회색 이라는 무채색 3색. 이 10가지 색은 사실 일상에서 접하는 온갖 색에 대한 기본색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 대해 색에 대해 뭘 배워본적 없는 내가 그저 책만 봤던 내가 10가지 기본색들에 대해서만 알아도 어디인가? 하지만... 이 책은 '색'을 말하고 있으나 '색'에 대한 책은 아니었다. '색'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색'을 통해보는 세상이야기랄까.. 하지만 그 세상도 내게서 너무나 먼 고차원적 세상이야기였달까;;;

색은 우리 대화에서 끝나지 않는 주제이자 영감을 주는 소재였다. 10년 동안 대화를 이어가면서 우리 스스로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는 회화와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기반으로 언어와 색의 관계를 학제를 넘어 탐구하는 학자들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색의 본질 자체에 골몰하며 생각과 이미지를 나누는 작가와 화가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러다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에 대한 사색도 같이하게 되었다. (p. 11) -서문 中-

<뉴턴의 아틀리에>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물리학자 김상욱 과 그래픽 디자이너 유지원 이 같은 주제에 대하여 다르게 풀어낸 , 과학자는 예술을 보고 예술가는 과학을 생각하는 신선한 책이었다. <온 컬러> 라는 이 책도 비슷하다. 작가와 화가가 만나 '색'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만 그 이야기들이 좀 많이 광범위적이고 좀 많이 사색적이라 쫓아가기 버겁곤 했다.

화학자는 색을 띤 물체의 미시물리적 속성에서 색을 찾으려 한다. 물리학자는 이 물체가 반사하는 전자기에너지의 특정 주파수에서 색을 찾는다. 생리학자는 이 에너지를 감지하는 눈의 광수용체에 색이 있다고 한다. 신경생물학자는 이렇게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서 처리한 것이 색이라고 한다. 물론 각자의 탐구분야가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생각이 서로 엇갈리는 것을 보면 색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혹은 현상과 심리의 불분명한 경계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이 경계의 한쪽에는 화학자와 물리학자가, 다른 쪽에는 생리학자와 신경생물학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p. 16~17)

색이란 무엇인가? 라는 색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러한 '색의 존재론적' 질문이 머리속을 둥둥 떠다녔다. 색은 보는 것인가? 그렇다고 여겨지는 것인가? 색이 있기는 한 것인가?;;;

뜻밖에 이야기는 호메로스로 이어진다. 투키디데스가 '바위투성이 히오스섬의 눈먼 시인'이라고 부른 호메로스는 실제로 색을 기피했다. 호메로스가 쓴 세계 최고의 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는 색과 관련된 어휘가 극히 적게 나오고 몇 안 되는 것마저도 직관에 어긋나게 쓰였다. (p. 19)호메로스가 '와인처럼 짙은 바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중략) 이 단어를 호메로스는 수소(牛)를 묘사하는 데에도 썼다. 그러니까 그 단어가 어떤 색을 가리킨다면 적갈색에 가까운 색일 듯싶다. (중략) 호메로스의 시대나 요즘이나 바다 색깔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p. 20) 그리스인의 색각이 발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으로 본 색을 나타내는 어휘가 달랐기 때문이다. (p. 21) 사실 언어마다 색을 표현하는 말의 체계가 다르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색을 어떻게 감지하는가와 반드시 관련있다고 할 수는 없다. (p. 22) 특이점은 그리스인의 색 지각 능력이 생리적으로 덜 발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추상적 색채 어휘를 거의 쓰지 않는 문화에 원인이 있다. 고대 그리스 바다나 하늘에 파란색이 엄청나게 많긴 해도 바다나 하늘은 시시때때로 색이 급변하니까. 하늘도 바다도 색이 균일하지도 않고 일정하게 유지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파랗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호메로스나 그리스인들에게는 필요 없는 단어였다. (p. 24) 그리스인들은 색에 반응할 때 색상보다는 명도를 중요시했다. (중략) 그렇다면 색채를 나타내는 단어는 우리가 본래 아는 속성에 붙인 이름인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속성을 알게 되었다고도 할수 있는 것이다. (p. 25) 다시말해 스펙트럼을 부분으로 나누는 어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이다. 사람의 생리는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하고, 사람의 문화는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떻게 묘사하고 이해하는지를 결정한다. 색의 감각은 물리적이고, 색의 인식은 문화적이다. (p. 27) 모든 색이 근본적으로 환영이다. 색에는 색이 없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사실이다. 색에 있어서는 항상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p. 36)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이다. 눈으로 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훨씬 더 많은 것들.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색을 보는가, 무엇을 보거나 본다고 생각하는가, 인지하거나 상상한 색으로 무얼 하는가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어떻게 색을 만들고 색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주제별로 나뉘거나 시간 순서대로 나아가지 않는다. 관심이 가는 작은 주제를 내키는 대로 다룬다. (p. 37)

정말 뜻밖에도 색에 대한 담론의 책이 호메로스에서 시작할 줄은 몰랐다. 고전읽기를 좋아하고 더구나 최근 <오뒷세이아>를 읽고 있는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니 <일리아스>를 읽을때에도 색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랬구나... 색을 표현한다는 것이 눈으로 본 색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었구나...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이었다. 색은 그저 환영이었나... 눈으로 보고 있지만 볼 수 없었던 그런 것이었나...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색' 에 대한 인식을 뒤집어 놓은 이 부분들은 이제 겨우 '서론' 에 불과하고, 서론의 제목은 '색은 중요하다' 이다. 정말이지... 생각보다... 색은 훨씬 심도깊게 중요한 것 이었다!

1장 Red : 당신이 묻고 싶은 질문이 들린다. 색이 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 장미는 붉다

'빨갛다'라는 말은 발간 사물의 색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빨갛다'라는 말이 빨간 것을 가리킨다는 말은 명료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빨강을 시각적 특징으로 강력하게 경험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정의가 없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곤란해지거나 '빨강'이 정녕 무엇인가 의아해하지는 않는다. 의아해할 만한 게 있다는 생각조차 안 한다. 그런데 있다. 그게 색의 본질이다. 일단 이런 의문으로 시작해보자. 장미는 붉은가 아니면 그저 붉게 보이는 것인가? (p. 44~45) 색은 사물의 외양의 특별한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면인가? 어쩔 수 없이 '색'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지낟. 그게 문제다. 색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늘 순환논법에 갇히는데 거기에서 대체 어떻게 빠져나올지 알 수가 없다. (p. 47)

빨강 이라는 색채가 주는 느낌처럼 강렬하게 1장은 색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한다. 뉴턴의 물리학적 발견에서 시작해서 '색은 실재가 아니'라는 철학적 탐구를 지나 인간만이 색에 이름을 붙일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추상화 능력으로 이어진다. 결국 색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2장 Orange : 무엇이 오렌지색인가? 아, 오렌지. 그냥 오렌지! - 크리스티나 로제티 <무엇이 분홍인가?> ; 오렌지는 새로운 갈색

어떤 언어에서든 색을 가리키는 단어는 언어인류학에서 '기본색 용어'라고 부르는 몇 개의 범주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이 단어들은 구체적으로 색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이름이다. 기본색 용어를 일반적으로 '색을 나타내는 단어의 최소 부분집합으로 어떤 색이든 그 가운데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라고 정의한다. (p. 69) 그러나 영어에서 '오렌지'는 기본색 단어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유사 하위 단어가 없다. 오렌지 범주에는 오렌지색밖에 없는데, 이 이름은 과일에서 왔다. (p. 71) 초서가 사용한 중세 영어보다 훨씬 이전 시기인 5~12세기에 쓰인 고대 영어엔 'geoluhread(노랑-빨강)'라는 단어가 있었다. 사람들은 오렌지색을 볼 수 있었지만 거의 1,000년 동안 영어로 그 색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단어를 합치는 것뿐이었다. (p. 72) '오렌지orange'라는 단어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naranga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아마 그보다 더 오래된 언어인 드라비다어의 naru(향긋하다는 뜻)라는 어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오렌지와 함께 이 단어도 페르시아어, 아랍어로 옮겨갔다. 거기에서 유럽 언어로 전해져서 헝가리어로는 narancs, 에스파냐어로는 naranja가 되었다. 이탈리아어에서는 원래 narancia고 프랑스에서는 narange였는데 두 언어에서 초성 'n'이 사라져 각각 arancia와 orange가 된다. (p. 76~77)

오렌지색은 있었지만 그 색을 표현하는 단어는 오렌지라는 과일이 유럽에 들어오고나서야 생겨났다. 언어학적으로 시작한 오렌지색에 대한 담론은 반 고흐의 '색채가'적 시도가 표현된 그림을 거쳐 클랭의 '모노크롬 회화'를 지나 바넷 뉴먼의 '더 서드' 라는 작품으로 마무리된다. 저자에게 있어 영어의 역사적 과정과 현대미술에서의 오렌지색은 그렇게 연결되지만 나는 그저 고흐의 그림에서 새로운 오렌지색을 발견한 것이 기뻤을 따름이다.

3장 Yellow : 흐린 노란색 조합은 내 피부색이 아니오, 내 형제들이 그렇다고 믿게 만든 것일 뿐. -프랜시스 나오히코 오카 <파란 크레용> ; 노란 위험

교육받은 서양 사람들도 동아시아인을 직접 접해본 적은 거의 없었으므로 비슷하게 생각했다. 13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거의 500년 동안, 대부분 사람들이 조지 워싱턴 처럼 아시아인은 '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60년 까지도 프랑스 외교관이 일본인에 대해 '우리만큼 희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물론 동아시아인은 실제로는 희지 않다. '유럽인 피부색'이라는 사람들이 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다 곧 중국인이 '노랗다'고 불리게 되었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인들은 노랗지도 않다. 권위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1판(1910~1911)이 출간될 무렵에는 중국의 방대한 인구 가운데에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나, 그래도 백과사전에는 중국인 가운데 '노란색이 가장 많다'라고 기록되었다. (p. 97)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시아인이 서양인 눈에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상대로 보일 때에는 희게 보인다. 16세기 중국과 일본에 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는 그랬다. 그러나 서양의 도덕적 가치와 경제적 이익에 위협이 되는 듯할 때에는 노래진다. 상상한 도덕적 특성이 상상한 피부색과 뒤섞인다. (중략) 색소가 아니라 편견 때문에 만들어진 노란색이었다. 하지만 일단 아시아인이 노란색이 되자 그 색은 당연시되었다. 부정확한 편견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인 듯 보이게 되었다. (p. 101)

동아시아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사실 이 표현은 한중일 딱 3나라를 지칭한다. 그리고 몇십년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일본 딱 두 나라는 지칭했다. 유럽인들에게 동아시아인의 이미지는 이 두 나라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두 나라의 폭발적인 변화는 그들에게 위험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동아시아인은 '황인'이 되었다. 피부색으로 시작한 노란색 이야기는 '살색' 이라는 크레용을 거쳐 고대 그리스 의학에서의 4체액설을 지나 '제유' 라는 현대작품에 이른다. 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실 인류의 피부색은 그렇게 다양하지도 그렇게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4장 Greens : 내 손을 작은 텃밭에 심는다 - 나는 푸르게 자랄 거야.-포루그 피로호지드 <또 다른 탄생> ; 알 수 없는 녹색

아무튼 녹색이 생태학적 관심을 뜻하는 색이 되었다. 그렇다고 녹색이 환경주의 말고 다른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p 124) 녹색은 역사적으로 무함마드와 관련 있는 색이다. 무함마드는 녹색터번과 녹색망토를 둘렀고, 그가 사망했을 때 수놓인 녹색옷으로 시신을 덮었다고 전해진다. 녹색은 10세기부터 12세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북아프리카 전체를 다스린 파티마왕조의 색이었고, 이어 이슬람교 시아파의 표지가 되었다. (p. 126) 정치가 색으로 구분되는 이유는 빤하다. 색은 알아보기도 쉽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오고 여러 다양한 형태와 맥락에 적용될 수 있다. (p. 128) 정치에 쓰이는 색은 모두 각자 유래와 역사가 있으나, 역사는 너무나 다양한데 기본색은 몇 개 안되다보니 색과 정치의 연결이 종잡을 수 없기도 하고 서로 상충하거나 자꾸 바뀌기도 한다. (p. 134)

세계 어느 나라든 녹색당 이라고 하면 환경주의적 가치관을 지닌 정치집단을 의미한다. 나도 녹색은 환경적인 색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녹색은 아일랜드에서 이란에서 다른 의미의 정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색으로 구분되는 정치세력은 녹색 뿐만 아니라 빨강, 파랑, 하양 등 색으로 자신들을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빨강은 왕가의 색이자 저항의 색이기도 했고 파랑도 녹색도 그러했다.색은 또다시 색이 지니고 있는 '의미'로 인해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있었다.

5장 Blues : 리노 다코타 네 마음에 친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네가 날 홀린 줄 알면서 나한테 전화도 안 하지 그래서 우울해 펜톤 292 -마그네틱 필즈 <리노 다코타> ; 우울한 파랑

감정에도 무지갯빛이 있지만, 스펙트럼의 여러 색 중에서도 파란색이 가장 압도적인 감정의 색이다. (p. 144) 14세기 말부터 파란색은 낙담과 절망의 색이 되었다. 아마 청색증이라는 병과 연관 지어 이런 정서를 유추하지 않았나 싶다. (p. 145) 파랑은 초월의 색이다. (중략) 비슈누의 파란 피부, 치유의 힘이 있다는 파란 부처, 시크교도들이 쓰는 파란 터번, 유대인들이 기도를 드릴 때 쓰는 숄의 파란 줄무늬, 이스탄불에 있는 아름다운 블루 모스크 등을 보아도 파란색과 초월성의 연결이 보편적임을 알 수 있다. (p. 154)

블루스 라는 음악으로 시작해서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지나 또다시 클랭이라는 화가에게로 온다.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 라는 색이름이 있다는데, 오렌지 색 때도 그랬지만 캔버스를 온통 같은 물감으로 칠해놓은 작품에서 그렇게 많은 의미를 꺼낼 수 (혹은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인 파랑은 내게 결코 우울하지도 초월적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6장 Indigo : 인디고, 인디고잉, 인디곤. - 탐 로빈스 <지터버그 향수> ; 쪽빛 염색 / 죽음

적어도 영어권에서는 뉴턴 이전에 '인디고'를 색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뉴턴은 프리즘이 여러 색으로 분산시킨 빛에 일곱 가지 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색'이라고 생각한 것에 '오렌지' 와 '인디고'를 더했다. (p. 169) 뉴턴이 인디고를 색으로 '본' 뒤에도, 한동안은 여전히 염료였다. (p. 170) 인디고 염색은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중략)즙을 짜낸다. 즙을 햇볕에 내놓고 증발시키면 꾸덕해지는데 이걸 조각조각으로 자른 것이 우리가 보는 형태다. 유럽인들이 흔히 본 '형태'는 고체 덩어리였다. 그래서 초기 영어사전 중 하나인 1616년에 나온 사전에 '인디고'가 '터키에서 들어온 돌로 파란색 물을 들이는 데 쓴다'라는 잘못된 정의가 실렸다. 이 오해는 그 뒤 백여년 동안 자주 되풀이된다. (p. 174) 18세기에는 이 염료에서 나온 색을 '인디고'라고 부른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이다. 영국에서는 보통 '네이비(해군)블루'라고 불렀다. (p. 188)

빨주노초파남보 라는 무지개색에 들어가 있듯이 그동안 그저 '남색' 이라고 불렀던 색이 언제부터 '인디고' 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이 인디고 색은 만들어내기까지 엄청난 수고가 필요했고 과거에 그 엄청난 수고를 담당한 이들은 '노예' 였다. 플렌테이션 노예농업이라고 하면 목화나 사탕수수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인디고 농장이 훨씬 더 힘든 노동을 필요로 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디고 색을 가장 많이 썼던 유럽에서 이 색이 인디고 라고 불린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인디고 라는 식물이 염료가 되기까지 들어간 노예노동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나조차도 인디고 색 보다는 네이비 색이 더 편하게 불렀던 배경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7장 Violet : 그자들의 망막이 병들었다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 보랏빛 박명

어느 언어에서든 바이올렛과 퍼플을 대체로 구분하는 것 같다. 색조로 구분한다기보다는 환한 정도로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바이올렛은 퍼플의 안쪽에 작은 불을 켜놓은 색이라고나 할까. (p. 192) 현대 미술은 그 빛을 내는 보라색으로 시작되었다. 1874년 파리에서. 4월 15일에.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날을 꼭 집어야 한다면 그날이 그럴듯한 날이다. 무언가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제나 허위에 가깝다. (p. 193) 무엇보다도 미술계를 분개하게 만든 것은 사실 어떤 색이었다. 바로 보라색이다. (p. 194)

'purple' 이 자주색 이고 'violet'이 보라색 이라고 한 저자의 글을 보며 여지껏 내가 퍼플을 보라색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뭘까 어지러웠다. 여하튼 저자는 인상주의파에서의 보라색 혁명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상주의파의 화가들이 쓰는 보라색을 보며 위스망스는 '그자들의 망막이 병들었다'고 말했다 한다. 비평가들이 분개할 만큼 인상주의 작품에 보라색이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뚜렷한 대상을 그렸던 그림에서 '대상과 화가 사이에' 있는 것을 그린 인상주의파 그림과의 차이점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한 색이 바로 보라색이었다. 마네는 보라색을 '대기의 색' 이라고 했다. 모네의 팔레트에서도 보라색은 빛을 발하는 색이었다. 공기에, 빛에 색이 있는가? 없다. 아니 있어도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인상주의파 화가들은 이것을 그렸다.

그때는 예술이 빛의 착시 현상에 푹 빠지기보다는 세상의 근본적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색은 안을 칠하는 데에만 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선의 권위를 확인하는 이른바 '도의적 색'이라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인상주의 회화에서처럼 색이 추가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주요한 것이 되어버리면, 다시 말해 색이 회화의 주제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도의적이지도 진실하지도 않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색은 유혹적이고 기만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색이 인상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한 것이고 비판자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이 되었다. 비판자들은 나무는 보라색이면 안 되고 세상은 색의 '얼룩' 보다는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p. 206) 그럼에도 미술사에서 현대예술의 시초로 꼽히는 사람은 언제나 세잔이다. (p. 211)

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당대 비평가들에게 뭇매를 맞았던 이유가 뭉개지듯 그리는 화법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었다. 뚜렷하지 않은 그야말로 인상을 그린 그림이라서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색' 에 집중해서 의미를 알고 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불구하고 인상주의 파의 '색' 보다 세잔의 구성이 더 인정받는 점에서 여전히 인상주의파 화가들은 비주류인가 싶었다. 사실 일상에서 가장 장식적인 활용도가 높은 작품들은 대개 인상주의파 화가들의 작품인데 말이다.

8장 Black : 검정은 가장 기본적인 색이다 -오달롱 르동 ; 기본 검정

오드리 햅번이 1961년 영화 <티파티에서 아침을>의 첫 장면에서 입은 몸에 달라붙는 검정 새틴 슬리브리스 드레스보다 더 유명한 드레스는 세상에 없을 듯 싶다. 이 드레스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리틀 블랙 드레스 LBD 다. (p. 217) LBD는 순수한 가능성의 드레스다. 누구든 사회적 격차를 좁히고 오직 한순간이라도 없앨 수 있을 거라고 꿈꾸게 하는 드레스다. 검은 옷은 언제나 그런 역할을 해왔다. 계층을 지우는 일종의 사회적 연금술을 수행한다. (p. 222) 검은색은 겸허하기도 하고, 과도하기도 하다. 빈곤의 색이자 과시의 색, 경건함의 색이자 변태성의 색, 절제의 색이자 반항의 색이다. 화려한 색이면서 우울한 색이다. (p. 224) 인간의 시각기관은 에너지의 특정 파장을 감지하여 처리하고, 우리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각 경험에 색 이름을 붙인다. 그걸 색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이 파장들 가운데 검은색에 해당하는 파장은 없다. (p. 228)

검정색 옷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검정옷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옷이다. 여러 의미에서. 옷을 통해 보는 검정색의 다양성은 그 다층적 양명성에도 불구하고 어렵지않게 다가왔다. 하지만 검정색은 사실 색이 아니다. 빛이 없는 일종의 암흑이다. 검정을 관념적 색으로 볼 경우 종교성으로 이어진다. 말레비치의 <검은 정사각형> 이라는 그림은 이콘이라는 성화를 거는 위치에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한가지 색만 칠해놓은 그림을 도통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9장 White : 우리는 아직 이 흰색의 주술을 풀지 못했다. -허먼 멜빌 < 모비 딕> ; 하얀 거짓말

'흰색은 모든 색이 섞인 색이다' 이게 흰색에 관한 첫번째 거짓말이다. 뉴턴의 프리즘은 '흰빛'이 어느 정도 구분 가능한 색들의 연속체로 나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색을 프리즘으로 한데 모으면 다시 원래의 흰 빛이 된다. 그렇지만 보통 빛을 흰색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흰색이 모든 색을 섞은 것이라는 말이 빛에는 들어맞을지라도 물감을 섞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흰색은 무엇인가? 검은색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흰색이 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리학자들은 흰색도 검은색과 마찬가지로 색이 아니라고 말한다. (p. 243) 흰색은 무결한 순수의 색이며 완전한 면죄의 색이고 빈 페이지의 색이고 깨끗한 출발의 색이다. 그러나 이것은 흰색에 관한 두 번째 거짓말이다. 흰색은 유령의 색이기도 하다. 백골의 색이다. 구더기의 색이다. 흰색은 창백하게 질리게 만드는 색이다. 미래를 약속하거나 과거를 응시하는 대신 겁먹게 하고 메스껍게 하기도 한다. 허먼 멜빌은 <모비 딕>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멸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를 등 뒤에서 찌른다' 이게 세번째 거짓말일 것이다. 두번째 것의 다른 버전이기는 하지만, 흰색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둘 다 거짓말이다. 색에는 의미가 없다. (중략) 색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색이 어떤 의미라고 말해 색이 의미를 띠게 만든다. 시각기관하고는 큰 상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p. 245)

저자가 색과 빛을 혼용할 수록 저자의 이야기는 심도깊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혼란을 종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색의 의미에 대해 알고자 읽은 책에서 색은 의미가 없다고 답해주니 나로서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지만... 그러나 색에 대한 들쭉날쭉한 저자의 담론에는 분명 새로운 발견들이 있었다. 흰색에 대해서는 주로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이야기를 한다. 흰 대리석으로 칭송받는 고대작품들이 사실 채색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다시한번 캔버스를 온통 한가지색으로 칠한, 여기서는 흰색으로만 칠한 그림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내 머릿속은 하얘져 갔다.

10장 Gray : 회색은 슬픈 세상 색이 추락해 들어가는 곳 -데릭 저먼 <채도> ; 회색지대

'사진은 사실상 포착된 경험이다' 라고 수전 손택이 말했다. 그런데 이 '사실상'이 문제다. '포작된 경험'이긴 한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진은 회색조로만 이루어진 포착된 경험이었다. 그런데 경험이 정말로 그 사진처럼 보이는가? 색은 어떻게 하고? 탁월한 예술 비평가 존 버거는 좀 더 정확하게 사진은 '본 것의 기록'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사진은 대상의 이미지라기보다 기록에 가깝다. 흑백사진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p. 267) 이런 사진을 보통 '흑백'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흑백은 아니다. 얼룩말이 흑백이고 사진은 아니다.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회색 톤들을 나타내기에는 '흑부터 백까지'가 더 적절한 말일 것 같다. 흑백사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회색이니까 '회색' 사진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p. 270)

이 책을 읽으며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웃었던 문장이었다. '얼룩말이 흑백이고 사진은 아니다' ㅍㅎㅎ 맞는 말이다.

회색에 대해서는 '흑부터 백까지' 의 색으로 표현된 '회색사진' 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진이 담아낸 의미 혹은 상징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컬러의 시대가 왔음에도 여전히 흑백사진들이 찍히고 도로시가 컬러의 세계를 여행하고도 회색의 집으로 돌아왔듯이 색에 대한 담론은 어쩌면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색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675년 왕립학회장 헨리 올든버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뉴턴은 자기 눈이 '아주 날카롭게 색을 구분하지는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무지개에서 일곱 색을 본 적도 있지었지만 보통은 빨강, 노랑, 녹색, 파랑, 보라 다섯 가지만 보였다. 그런데 온음계는 일곱 음으로 이루어진다. 천지창조도 7일 동안에 이루어졌다. 무지개는 우주적 조화의 징표이니, 일곱 색이 있는 게 마땅했다. 그래서 뉴턴은 빨강과 노란색 사이에 주황색을 추가했고 (보았고?) 파랑과 보라 사이에 남색을 넣었다. (중략) 뉴턴은 자기가 본 색에 둘을 추가하는 게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생겨난 것이다. 과학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믿음의 산물에 가깝지만. (p. 31) 무지개에서 실제로 일곱 색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는 일곱 색을 본다. 색에 있어서든,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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