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상실 후 축적되는 것들의 위력과 우아함을 담은 특별한 소설

"모두 고요하고, 모두 빛나네"

 

 

'전 세계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 존 맥그리거 8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이라는 홍보문구에 눈길이 갔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라니 멋지지 않은가. 존 맥그리거 라는 이름은 이 작품으로 인해 처음 알게 됐는데... 무척... 묘....한... 소설이었다.

밤이면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있을 만한 곳에 관한 꿈을 꾸었다. 아이가 황무지를 따라 걸어가는 꿈에서, 아이의 옷은 젖어 있고 피부는 거의 파란색이었다. 맨 처음 아이를 발견하고 담요로 감싸서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오는 꿈도 있었다. (p. 22)

조용하고 평범한 마을이 있다. 자연경관이 썩 괜찮아서 관광객들도 종종 방문하는 곳이었다. 새해맞이 휴가를 왔던 어느 가족의 딸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녀의 이름은 리베카 쇼 였다. 마지막으로 눈에 띄었을 때 그녀는 후드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검은색 진, 캔버스 화 차림이었다. 키는 152센티미터였고 머리는 짙은 금발의 직모를 어깨까지 기르고 있었다. 대대적인 수색작전이 펼쳐지고 기자들이 몰려들고 뉴스에 연일 방송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녀가 무사히 돌아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길고긴 수색작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단서하나 찾지 못했다.

아이들은 베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 아이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점들에 근거해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들이 했을 행동과, 자신들이 아는 주변 풍경에 근거해 추측을 했다. 아이들은 작년 여름, 그 가족이 헌터 씨 저택에 보름간 머물렀을 때도 베키를 보았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 아이와 함께 보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들도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다. (p. 32)

리베카 쇼는 13살이었다. 여름 휴가때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놀곤 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새해맞이 휴가를 같은 곳으로 또 왔다. 그리고 실종됐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사라질 당시에는 열세 살 이었다. 후드가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검은 색 진, 캔버스화 차림이었다. 지금은 키가 152센티미터보다 클 것이고, 헤어스타일은 물론 머리 색깔도 달라졌을 것이다. 수사는 계속 진행중이라고, 경찰 대변인이 분명히 말했다. (p. 42)

2년차...

실종 사건은 아직 생생한 사건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마을 에서는 아이 어머니가 얼마나 오래 머무를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발견되어 이 모든게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언덕 밑으로 뻗어 있는 깊은 동굴에 빠져버린 건지도 몰랐다. 여전히 동굴 구석진 곳 어딘가에 동그랗게 몸이 말린채 있을지도 몰랐다. (p. 45)

10월에 실종된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헌터 저택에서 상자와 가방을 싣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p. 63)

 

실종된 아이의 부모는 여전히 마을에 머물렀지만 마을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외부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이라고 해서 서로 모두들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일을 할때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고, 그건 학교의 다른 어떤 직원들보다 오래된 것이었다. 학교에는 존스씨만 열 수 있는 자물쇠가 몇 개 있었다. 교직원 중에는 그의 상관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일을 지시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만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였다. (p. 68)

학교관리인 존스씨는 학교일을 한지 30년이 넘었다.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여동생은 한번도 사람들 눈에 띈 적이 없었다. 마을의 학부형들은 대부분 학생때부터 존스씨를 알고 지냈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최근 공개된 비디오에서 아이 엄마는 벡스라고 불렀다. 비디오에서 소녀는 웃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p. 71)

3년차...

사건은 여전히 종결되지 않은채였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찾고 싶었다. 그 아이가 안전하다는 걸 알고 싶었다. 거의 모르는 아이였지만,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p. 77)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뉴스에 오르내릴 만한 큰 사건이 발생하면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는다. 함께 걱정하다가도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는만큼 빨리 안심하고 싶어진다.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느낄수록 빨리 사건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나 아이들이라면...

그래서 너희 모두 아무 이야기도 안 하기로 한 거야? 아버지가 물었다.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되게 심각한 상황이었잖아요,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온통 그 이야기만 하고. 당연히 그랬지,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한테는 왜 이야기를 안 한 거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제임스는 움츠러들었다. 어머니가 그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다른 일도 있었니, 제임스? 크리스마스요, 그가 말했다. 크리스마스에도 만났어요. 두어 번 만났어요. 둘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이서만?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부모님은 서로를 쳐다봤다. 제임스, 너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엇던 거니? 겨우 열 세살이었다고요, 엄마.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었겠어요? 제임스, 어머니가 말했다. 이건 중요한 일인데, 그 애 실종되던 날도 만났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 (p. 83)

이 소설은 대화와 서술이 구분되지 않느다. 따옴표도 없고 줄바뀜도 없다. 이렇게 죽 그냥 무미건조하게 설명되는 식의 문장들을 읽다보면 소리가 나오지 않는 흑백무성영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 처음엔 이런 문체가 실종사건으로 시작한 이 소설의 스릴러적 분위기를 강조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와 아이 어머니가 이혼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 무렵 그에 대한 목격담도 늘어났다. 저수지 가에서, 채석장 끝에서, 짐말용 다리 아래서, 늘 멀리서만 눈에 띄었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p. 93)

4년차...

소녀의 부모는 이혼했고 따로따로 다른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실종사건은 잊혀져가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진행중인것도 같았다.

나는 그냥 그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았으면 좋겠어. (p. 110)

아이들은 소녀를 기억했고 길을 잃었을때 문득 소녀가 생각났다. 하지만 아무도 그 소녀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후드 달린 흰색 상의가 황무지 고지대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이탄 같은 갈색 기름에 잔뜩 절어 있고 솔기 부분이 해져 있었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상표와 디자인을 확인했다. 과학 수사팀의 조사에 몇 주가 걸렸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상의가 발견된 지점에서 포괄적인 수색 작업이 벌어졌지만, 더 이상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p. 114)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 였다. 이제 열일곱 살이 됐을 테고, 경찰에서는 현재 모습을 컴퓨터로 합성한 이미지를 공개했다. (p. 124)

 

5년차...

실종된 소녀도 나이를 먹어갔다. 실종됐다고 해서 세월이 비껴가는 것은 아니었다. 소녀와 놀았던 마을 아이들도 성장하고 있었다.

제임스 브로드는 결국 로한에게 베키 쇼 이야기를 했다. (p. 136) 제임스는 이제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실종 전해 여름에 모두가 그 아이를 만났다고, 그는 말했다. (p. 137)

마을이란 새로 오는 사람이 있고 떠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새로 이사온 로한에게 제임스는 실종된 소녀의 이야기를 한다. 마치 친구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듯이. 이제 친구사이에 말하지 못한 비밀은 없다는 듯이.

6년차...

캐시는 넬슨을 찾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녀석이 낡은 운동복이나 방한 조끼처럼 보이는, 바느질 자리가 터져 보충재가 삐져나온 진청색 옷가지를 물어뜯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넬슨을 말리고는, 다시 리처드를 따라잡았다. (p. 164)

산책길에 개가 물어뜯던 옷은 이제 더이상 눈길을 끌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에 있을 법한 누군가 버리고간 옷가지이겠거니 여겨졌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찻집에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차를 내어준 여종업원은 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고,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 일이잖아요, 안그래요? 그녀가 반문했고,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인정했다. (p. 172)

그렇게 잊혀진 사건일수도 있었다. 그렇게 잊혀졌다고 볼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했다. 누군가 기억하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실종사건을 경험하게 되기도 했다.

문제는 소피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하고 나면 모두 실종된 여자아이 이야기를 꺼낸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이야긴 하기 싫은데 말이야, 엄마. 사람들은 어떻게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까? 제스는 사건 당시에는 꽤 큰 뉴스였다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건은 기억하거든, 그녀가 말했다. 나중에 로한과 린지, 제임스도 똑같은 일을 겪고 있다고 페이스북으로 전했다. 로한은 '실종 소녀의 저주'라고 했고, 린지는 그런 식으로 싸구려 티 내지 말라고 했다. (p. 175)

7년차...

학교에서는 심프슨 선생님이 보일러 점검을 위해 기술자들을 불러오고, 존스 씨가 못 들어오게 막아서면서 실랑이가 있었다. 미리 알라지도 않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존스 씨가 말했다. 개인 보일러실이 아니잖아요, 존스씨. 절대 못 물러납니다. 그가 말했고, 기술자들은 다른 날 다시 오겠다고 했다. (p. 203)

소설속에선 때론 의심가는 인물이 등장하곤 하지만 글쎄... 실종사건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없었듯이 인물들에 대한 뚜렷한 증거도 드러나지 않는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사진에서 여자아이는 카메라로부터 고개를 반쯤 돌리고 있어 마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것처럼, 어디 다른 곳에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스무 살이 되었겠지만, 그녀는 늘 여자아이라고 칭해졌다. 이제 7년이 지났으니 법적으로 그녀의 사망을 공식화해도 된다는 말이 있었다. 경찰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그건 전혀 법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사망 발표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여자아이의 부모는 수색을 포기하지 않았고, 경찰도 수사는 계속 진행중이라고 발표했다. 마을 사람들은 언덕을 올려다보며 자신들은 오래전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여자아이는 황무지 너머까지 올라갔다가 물이 찬 좁은 계곡으로 미끄러져 떨어졌을 것이다. (중략) 그녀는 어디에서든 추락할 수 있었고, 여전히 거기 누워 있을 것이다. (p. 209)

실종된 아이의 부모라면... 그래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아이에서 성인여자가 된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여전히 찾고 싶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럴수 있는 사건으로 결론 내릴 수도 있겠지만 부모라면... 그래 결론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8년차...

학교에서는 난방 기술자들이 보일러실을 점검했고, 상태가 최악이라고 했다. 주 건물에 현대식 난방 시스템을 설치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심프슨 선생님은 새 시스템을 설치한 후에도 보일러실을 창고로 쓰시면 된다고 존스 씨에게 말했고, 존스씨는 반응이 없었다. (p. 215)

몇몇의 특정인물들이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이 소설을 다 읽을때까지 결국 등장하는 인물들을 제대로 다 구별할 수 없었다. 무채색으로 쓰여진 문장들은 인물들도 무채색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화와 설명이 구분되지 않고 주인공과 배경이 구분되지 않고 사건이 일상이 구분되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런던의 집에서 마을 위 황무지 꼭대기까지 모금을 위한 도보행진을 했다. 신문에 많이 보도가 되었고, 한 웹사이트에서는 그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업데이트했다. 그는 대부분 운하를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는데, 그것이 길을 잃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중략) 그는 실종자를 위한 기금으로 많은 돈을 모금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는 언덕을 올라갈 때는 혼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대부분의 신문에 홀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실렸다. (p. 224)

소설속에선 단 한번도 소녀의 부모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워낙 대화가 거의 없는 소설이긴 했는데, 실종된 소녀 부모의 대화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 부모의 심정은 단 한번도 표현된적이 없었다. 그저 계속 배경만 주변 상황만 나올 뿐이었다.

아동 포르노 혐의로 기소된 남자 이야기를 다룬 지역 뉴스가 나왔다. 기자가 실종된 여자아이 사건을 언급했고, 리처드는 캐시가 어머니의 팔을 다정하게 잡는 모습을 곁눈으로 확인했다. 경관 한 명이 본 사건은 실종된 여자이이와는 관련이 없다고 했다. 법원 건물로 들어가는 남나의 모습이 나왔다. 머리 위에 스웨터를 덮어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존스씨의 얼굴을 알아보는 일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p. 238)

9년차...

마틴은 차를 타고 버려진 채석장으로 가서 망치로 자신의 컴퓨터를 박살 낸 다음, 불에 타서 남은 형체만 남은 조각들을 자동차 밑으로 밀어 넣었다. (p. 243)

등장인물 중 누구의 속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작가는 3인칭으로 서술하는 듯 하면서도 인물의 마음은 결코 서술해주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과 상황을 묘사할 뿐이었다. 그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실종된 소녀만 알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여전히 살아있다면 지금은 키가 거의 180은 됐을 것이다. 열일곱 살 그녀를 추정해 만들어진 컴퓨터 이미지는 이제 5년이나 지난 것이었지만, 경찰 대변인은 새로운 이미지를 제작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사건은 계속 수사중이라고 대변인이 말했다. 검은색 진과 방한 조끼, 훋 달린 흰색 상의는 이제 너무 작을 것이다. 당시의 신발을 신으면 솔기가 터질 것이다. (p. 270)

세월이 흐른다고 키가 계속 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녀의 키는 이제 180 됐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사진은 더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았다. 하지만여전히 사건은 수사중인 상태였다. 하지만 하지만...

10년차...

존스는 잠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 어떤 짓도 저는 하지 않았어요. 실수였다고요. 컴퓨터가 뭔가 잘못된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다 필요 없으니까. 그는 힘을 주고 선 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순간 그녀는 두려웠다. (p. 285)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변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구성원에 큰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어쩌면 쉽게 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이웃도 갑자기 두려워지게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므로...

여자아이가 실종된 지 10년이 지났고,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후드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차림이었다. 지금이면 스물 세살이 됐을 것이다. (p. 295)

실종사건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소설은 단 한번도 그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둔다. 하지만 잊을만 하면 같은 문장을 반복함으로써 사건을 소녀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주문처럼 소설속에 등장하는 문장을 읽을때마다의 느낌은 조금씩 달라진다.

11년차...

장난의 날에 다른 마을에서 온 여자아이가 후드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검은 색 진, 캔버스화 차림의 좀비 분장을 하고 나타났다. 여자아이를 차에 태워서 부모에게 돌려보냈고 말들이 나왔다. (p. 316)

제임스는 여자 친구를 황무지로 데려가 실종된 여자아이 사건을 이야기해주었다. 여자 친구는 귀 기울여 듣고 나서, 제임스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들이 늘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p. 320)

 

사건은 이제 장난의 소재가 될 만큼 가벼워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제임스는 늘 어떤 단계처럼 실종된 소녀의 이야기를 친구 혹은 애인에게 털어놓았다.

12년차...

건물들은 전소했고, 다음 날 아침까지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는 알리바이가 확실한 것 같았다. 경찰이 확인했다. 그 남자에게 그런 걸 물어보러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마틴이 말했다. (p. 322)

실종사건의 이제 거의 희미해졌다고 여겨질 즈음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화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명피해도 없었고 비교적 소소한 사건이었지만 그래도 연이어 발생하자 마을사람들은 신경이 쓰인다.

13년차...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화재 문제로 다시 한번 조사를 받았고, 체포되었다. (p. 347)

그들은 주차장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질 예정이었고, 세 명은 먼 길을 가야 했다. 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p. 358)

 

딸이 실종되고 그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실종된 여자아이와 함께 어울렸던 마을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으나 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13년이 흘렀지만 그들은 여전히 저수지 옆에 살고 있었다.

실종된 여자아이는 아직 잊히지 않았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그 아이를 찾아보았다. 모든 곳에서 찾아보았다. (중략) 소용이 없었다. 여전히 모두들 그 아이에 대한 꿈을 꿨다. (p. 361) 실종 당일에 그 아이를 찾는 꿈들이 있었다. 어스름 무럽에 황무지에서 아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부모에게 데려다 주었다. 꿈속에서 여자아이의 부모는 감사하다고 짧게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p. 362)

소리도 없고 색깔도 없는 한편의 무성흑백영화를 보고 난 듯한 이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첫장처럼 여전히 희뿌연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마지막에가서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실종사건으로 시작했으나 이 소설은 스릴러 소설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시간을 흘러가고 일상은 반복된다. 기억이 흐려지더라도 잊지는 못하고 같은 시간을 다르게 기억하며 세월이 흐른만큼 누군가는 자라고 누군가는 늙는다. 어떻게 읽으면 모두가 의심스럽고 어떻게 읽으면 모두가 안쓰럽지만 어떻게 읽으면 모두가 답답한 이 소설은 결국 실종된 여자아이를 제외한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같기도 하다. 그토록 자주 실종된 여자아이를 언급하지만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인물들은 살아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소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내내 살아있는 생을 다루지만 그 어떤 생명력도 느낄 수 없게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서술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실종시킨다. 실종된 것은 어쩌면 첫장에 등장하는 그 소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침대에 누운 잭슨씨는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모두 고요했고, 모두 빛났네. (p. 363)

커다란 상실이 있더라도 삶은 축적되고 그렇게 삶은 눈이 멀더라도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그 삶이 빛나고 우아하게 느껴질지는 읽는이마다 많이... 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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