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 위의 남자
다니엘 켈만 지음, 박종대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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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세상에 던지는 농담이자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 수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안부

세상엔 왜 이렇게 유명한 작가들이 많은 것일까;;; '<해리포터>를 제치고 <향수>이래 가장 많이 읽힌 작가 다니엘 켈만 최고의 소설' 이라는 홍보문구를 단 소설 <틸>의 작가 '다니엘 켈만'을 나는 이 소설로 인해 처음 알았다. <해리포터> 팬이고 <향수>를 읽었음에도 전혀 알지 못했던 다니엘 켈만의 작품을 읽게된 계기는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였다. '소설다운 소설이면서도 상상력을 한계 너머로 마음껏 펼치는, 다니엘 켈만다운 작품이다' 라는 김연수 작가의 감탄을 공감해보고 싶었다.

이력을 보건대 아직 젊은 작가이고, 추천사를 보건대 유명작가들이 꼽은 작가라는 점에서 나는 현대소설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독일30년전쟁을 배경으로 틸 울렌슈피겔 이라는 광대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 아닌 면도 꽤 많다. 그러니까 역사이면서 역사가아닌 언밸런스적 요소들을 조화롭게 구성해 놓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종교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마법사적 판타지 요소가 등장하고 절대적 권위의 왕을 마음껏 조롱거리로 삼으면서도 딱히 이상적 인간형이 등장하는 것도 아닌... 잔인하고 폭력적인 인간들의 향연이랄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전쟁이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두려움과 희망을 함께 품은 채 살았고,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우리 도시에 신의 분노가 미치지 않도록 갖은 애를 썼다. 백다섯 가구와 예배당,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공동묘지가 자리한 도시였다.

우리는 전쟁이 우리를 비켜 가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전지전능한 신에게 기도했고, 선하신 마리아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거기다 숲의 여신과 밤의 요정들, 전설 속의 거룩한 게르빈, 천국의 문을 지키는 성 베드로, 사도 요한에게 기도했다. 혹시 몰라 악령이 자유롭게 떠도는 스산한 밤이면 종자들을 데리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마녀 멜레에게도 두 손을 모았다. 또한 우리는 그 옛날 뿔 달린 도깨비에게도 기도하고, 얼어 죽어가는 거지에게 자신의 외투를 건네 같이 덮고는 함께 떨었다는 마르틴 주교에게도 기도했다. 사실 한겨울에 둘이서 외투를 나누어 입는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p. 9)

전쟁의 시대였다. 하지만 전쟁이 찾아가지 않은 작은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은 기도했다. 그들이 믿는 신 뿐만 아니라 믿어서는 안되는 것들에게도 기도했다. 너무 많은 곳에 기도를 올렸기 때문일까, 신과 신이 아닌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올린 기도라서 일까, 그 누구도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틸'이 마을에 왔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었어도 온갖 전단에 등장했던 가장 유명한 광대 '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줄타기를 하는 남자였다.

고개를 젖히고 있던 우리는 가벼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갑자기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어떤 것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깨달았고, 동시에 우린 절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p. 23)

밧줄이 걸린 날 이후로 공기가 갑자기 한층 무거워졌고, 물맛도 달라졌으며, 하늘조차도 더 이상 예전의 하늘이 아닌 듯했다. 1년 뒤 전쟁이 우리를 찾아왔다. (p. 32)

남들이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억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고, 우리는 산 자들의 일에 무심하지 않다. 모든 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p. 33)

'틸'이 한바탕 마을 사람들 혼을 쏙 빼놓고 간 뒤 마을 분위기는 달라졌다.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여기저기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마을을 덮쳤다.

이 소설은 몇개의 소제목으로 구분된다. 신발, 공중의 제왕,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 겨울왕, 굶주림, 빛과 그림자의 위대한 예술, 갱도, 베스트팔렌.

에피소드들의 중심인물은 항상 '틸'이지만 에피소드들이 시간순으로 나열되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시간의 뒤섞임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마법 못지 않게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한다. 그중 첫번째 에피소드인 '신발'은 이 소설의 인트로이자 엔딩이라고 여겨졌다. 혹은 소설의 (아주 긴) 첫문장 이라고도 할수 있을 것 같다. 짧은 문장으로 하나의 긴 작품을 아우르곤 하는 그런, 소설의 첫문장 말이다.

클라우스는 어둠 속에서 적당한 힘으로 정사각형 문구를 벽에다 써넣는다.

M I L O N

I R A G O

L A M A L

O G A R I

N O L I M

그런 다음 만전을 기하기 위해 주문을 일곱 번 크게 외운다. Nipson anomimat mi monan ospin. 이것이 그리스어라는 것만 알뿐 그 뜻은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앞에서부터 읽으나 뒤에서부터 읽으나 똑같은 글귀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p. 75)

위와 같은 좌우로 대칭되는 정방형의 주문은 이 소설에 3가지 등장하는데 사전검색을 해봐도 뜻풀이가 되진 않는 그저 대칭적인 문자배열이었다. 하지만 Nipson anomimat mi monan ospin 문장은 그리스어라기에 검색해보았더니 '당신의 얼굴뿐만 아니라 당신의 죄를 씻으십시오' 라는 뜻이라고 나온다. 저자는 종교와 마법을 교묘하게 뒤섞어놓았는데 소설의 뒤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주문은 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척 씁쓸해지게 만드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믿음, 종교, 미신, 마법 무엇이되었건 여하튼 특별한 힘이 있는 글귀는 읽을 수 없는 책처럼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소년은 머리에 쓰고 있던 것을 벗는다. 털이 숭숭하고 기다란 귀가 달린 당나귀 머리 가죽의 일부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핏물로 찰싹 달라붙어 있다. "세상에!" 클라우스가 중얼거린다. "무슨 이런 해괴한 일이" 소년이 말한다. "오랫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어. 재미로 그랬어. 목소리가 들렸어! 아주 재미있었어" (p. 92)

"악마는 공기로 이루어져 있거든. 그래서 악마를 공중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방인은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춘다. 마치 자신의 말을 스스로 엿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p. 103)

틸은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이방인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키르허 박사는 소년에게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키르허는 마녀 특별 사법관인 테시먼드 박사와 순회중이다. 키르허와 테시먼드 박사는 틸의 집을 찾는다. 틸의 아버지 클라우스는 주문의 힘을 믿었고 읽을 수 없는 라틴어 책을 읽기를 소망했으나 마법사로 몰려 처형당한다. 나중에 놀라운 줄타기 광대가 되는 틸은 공중의 제왕이라고 불릴만하다. 하지만 틸이 악마일까?

증언이 없으면 피고인을 이단으로 판정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마법사로 선포할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를 실수를 피하기 위해 키르허는 몇 날 며칠 동안 증인들에게 그들이 봤다는 몸짓과 말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는 둔하고 더뎠다. 그들이 저주나 마법의 문구, 사탄을 불러내는 주문을 기억하려면 일단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어쨌든 이런 연습 끝에 마침대 다들 올바른 주문과 마법의 몸짓을 직접 듣고 본 것처럼 묘사할 수 있었다. (p. 147)

마녀 재판이라는 것이 마법사 재판이라는 것이 참 해괴하기 그지없다. 증언을 얻기 위해 증언을 교육시킨다. 자백을 받기 위해 자백을 세뇌시킨다. 마법적 꿈을 꾸었다는 것이 죄악의 증거로 채택된다.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미신을 교육시키는 과정이 결국 마녀재판이었다. 이런식의 아이러니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아마도 현대도 그러할 것이다.

그 광대가 나타나면 항상 그랬다. 몇몇 이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거기서 비켜나 있는 사람들은 큰 재미를 누렸다. (p. 203)

광대의 재주부리기에 빠져 박장대소를 터트리다가다 광대가 던져놓은 시비에 휘말려 종내는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 어쩌면 '전쟁'이란 것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용병들은 전쟁의 목적이나 의미따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늘은 황군이었다가 내일은 스페인군이 될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에서 비켜나 있는 사람들은 큰 이득을 얻는다.

독일어는 연극에 맞는 언어가 아니었다. 끙끙대는 신음과 툴툴대는 불평의 어지러운 잡탕일 뿐이었다. 독일어는 마치 목이 졸릴 때나 소가 발작을 일으키며 기침을 할 때, 혹은 맥주가 코로 넘어갈 때 터져 나오는 소리 같았다. 그런 언어로 시인이 뭘 할 수 있겠는가? (p. 252)

"하지만 독일어로도 충분히 시를 쓸 수 있어요! 우리의 언어는 막 태동한 셈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세사람은 모두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라틴어로 이야기하고 있지요. 왜 그래야 할까요? 지금은 독일어가 어설프고, 끓는 죽 같고, 성장기의 아이 같아도, 언젠가는 어른이 될 겁니다." (p. 391)

연극의 도시 영국에 비해 독일의 문화는 한참 처져있었다. 언어도 그러했다. 소설의 배경은 독일전쟁이고 소설의 언어는 독일어다. 그변화와 성장의 의미가 종교와 연결될 때 어떤 식으로 이해하면 될까?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옛날이야기로 역사소설로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지금의 이야기로 판타지소설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런게 다니엘 켈만 작가의 능력인건가...

"이제 진짜 용이 필요합니다. 홀슈타인에 북방의 마지막 용이 아직 살고 있습니다"

"그게 발견되었나요?"

"뭐가요?"

"용"

"당연히 아니죠. 사람이 봤다고들 하는 용은 진정한 용의 속성을 지닌 용이 아닐 겁니다. 그런 속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 이유에서 나는 용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보고를 믿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는 용은 진정한 용이 아닌 다른 용입니다. 이 지방에서는 용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한 마리가 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p. 386~387 발췌)

없음으로 있음을 증명하는 시대 그런 시절이 있었다. 틸의 아버지를 처단했던 예수회의 극우파 테시먼드와 그의 조교 키르허는 주문과 마법을 쓴다며 사람들을 처단하고 다녔는데 그들이 연구한 것은 결국 주문과 마법이었다. 테시먼드는 키르허에게 용을 만났을때 사용하라며 평생 단 한번만 쓸수 있는 '주술적 정사각형 문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주문(p. 402)' 를 알려주었다. 키르허는 그 주문을 틸을 만났을 때 사용한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일까? 키르허는 사탄이 자기 앞에 직접 나타나는 날이 오리라고 늘 예상하던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징후가 없었다. 유황 냄새가 나지 않았고, 남자의 발은 인간의 발이었으며, 키르허가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도 따듯해지지 않았다. (p. 417)

"네 말이 맞아. 나는 거짓말을 많이 해. 테시먼드 박사에게 거짓말을 했지.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냐. 나는 황제 폐하에게도 거짓말을 했고, 심지어 하느님에게도 거짓말을 했어. 책에서도 남을 많이 속였어. 나는 늘 거짓말을 해" (p. 423)

한 마리 남은 용을 찾아나선 길에 틸의 서커스단을 만난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박사는 그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학자였다. 그리고 틸의 아버지를 마법사로 재판한 자였다. 그리고 스스로 거짓말쟁이라고 틸에게 말했다. 하지만 '키르허는 헛기침을 하고는 그 옛날 스승이 가르쳐준 마법의 주문을 읊조렸다. SATOR......(p. 422)' 주문을 외우고도 탈출하지 못한 클라우스와 주문을 외우고 로마로 사라진 키르허. 누가 마법사인가? 누가 사탄인가? 사제와 마법사 혹은 사탄과 사탄이 아닌 존재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무엇을 믿고 누구의 말이 진실이었을까...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불태우고 죽였어. 장군이 그랬거든, 우리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하지만 그러라고 해서 바로 그렇게 하지는 못해. 너도 알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러려면 어느 정도 익숙해져야 하거든. 이래도 되는구나,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그런 식으로 적응이 돼야 한다는 말이지. 다른 사람을 내 맘대로 하려면 말이야" (p. 449)

한 용병의 말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역사책을 읽다보면 수많은 약탈전을 보게 된다. 그런 장면이 등장할때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소설속 용병의 말을 읽고 조금은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폭력에.... 적응이 돼야 한다는 것... 그러한 삶... 그러한 시대.... 과연... 옛날이기이기만 할까?

그러나 소년은 말하지 않는다. 겨울왕뿐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생각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p. 456)

틸이 넬레와 도망치던 소년시절, 숲에서 했던 극적 경험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당나귀 하나는 무뢰배 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틸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혹은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더 좋은 게 뭔지 알아? 평화로운 죽음보다 훨씬 좋은 게?"

"말해봐'

"죽지 않는 거야" (p. 521)

틸은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으며 전쟁의 시절을 광대로 살았다. 나이를 먹었고 유일한 (가족같은 존재였던) 넬레도 떠나보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틸은 평생 소년으로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늙지 않는것, 틸은 자신의 늙어감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은 죽음도 마찬가지라고 틸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틸은 사라졌다. 하지만 틸은 죽었으면서도 죽지않은 광대로 지금도 우리 삶 속 어딘가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옛날 왕을 조롱할 수 있었던 건 오직 광대뿐이었다. 그것이 광대의 역할이자 책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권력을 조롱할 수 있는 건 누구일까?

암울한 세상 폭력의 시대 이름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안부는 무엇이었을까... 오래 생각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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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기호와 상징 사전
D. R. 매켈로이 지음, 최다인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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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히에로글리프부터 현대 서브컬처까지!

전 세계의 아이콘, 글리프, 기호, 상징 1,001종 수록

고대의 문자들은 신비롭다. 문자가 아닌 뭔가 상징적인 기호들은 더욱 신비롭다. 역사 관련 책들을 읽다보면 이런 뜻모를 문자나 기호가 등장했을때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곤 한다. 그런데 그런 신비로운 기호와 상징들을 책 한권에 모아놓았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 사이즈부터가 남다르다. 커다란 사이즈에 두툼한 표지, 페이지마다 가득한 기호들이 흡사 마법사의 책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 책의 목표는 가능한 한 폭넓게 상징의 유형과 쓰임새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책에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1,0001개 이상의 상징, 그 의미와 역사가 수록되었다. 독자 여러분이 용도별로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유형에 따라 상징을 분류했다. 맨 뒤에는 해당하는 쪽 번호와 함께 상징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한 색인을 실었다. 여러분이 세계의 상징을 조사한 이 책을 흥미롭고 쓸모 있다고 여기고, 가능하다면 이 책을 통해 전에는 미처 몰랐으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p. 13 -머리말 中-)

책의 머리말부터 낯선 단어들이 등장한다. '사물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은 매우 많지만, 몇 가지 대표적 기호와 상징의 정의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p. 8)' 면서 저자가 알려주는 애뮬릿, 엠블럼, 글리프, 시질 등의 용어들은 익숙한 그림 대비 생소한 말들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생소한 말들을 사용해 기호와 상징들을 소개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 기호와 상징들은 낯설지 않은 것들이었다.

연금술, 고대와 현대문명, 점성술, 켈트상징, 화학, 디지털, 화폐, 표의문자, 언어, 제조업, 의료, 군대, 음악, 신화와 전설, 몸짓과 자세, 종교, 성별과 성정체성, 시질과 이교신앙, 운송, 문서와 문장부호 등 20개의 챕터로 나뉘어진 이 책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연금술 기호들이 신비롭다가 이집트 상형문자 같은 상징들은 그림만 구경할뿐 점성술에서 별자리와 12간지 설명같은 것은 식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켈트상징이나 화학기호들 혹은 세계의 화폐단위 같은 것을 한 페이지에서 그림으로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디지털 이모지나 산업, 교통 등의 분야에서 사용되는 현대에 만들어진 기호들이야 기호 자체로 이해가 되기도 하고 크게 관심이 없던 분야라 어떠하든 상관없었는데, 언어, 신화, 전설, 종교 같은 고대 역사와 관련되는 부분들은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생각해보면 그 수많은 기호와 상징들을 이 짧은 페이지안에 기원부터 역사를 거쳐 현재까지 모두 담는 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애초에 저자가 의도했던 바 그대로 이 책을 읽되 그 이상의 기대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수집' 하고 '수록' 하고 '분류' 했다고. 다시말해 이 책은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수집한 책이지 하나하나 상세하게 풀이해놓은 사전은 아니었던 거다. 이 책의 영어 원제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Signs & Symbois of the Worid

영어원제가 어떤 의미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하나의 예로 ※ 에 대한 내용을 보면,

'문서와 문장부호' 챕터인 243p 에서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 이 표시는 일본어나 한국어 문서에서 주석의 시작을 알리는 참조 기호다. 항목 앞에 쓰는 큰 점이나 별표와 비슷하다. 일본어로는 한자 쌀 미 자와 닮아서 코메지루시 라고 하며 한국어로는 '당구장 표시'라고 한다.]

이 ※ 을 위키백과 에서 검색하면 (참고표 로 검색하면 됨)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참고표(參考標)는 다음 내용을 참고하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문장 부호이다. 다른말- 대한민국 ; 당구장 간판에 흔히 쓰이는 그림(큐 2개와 당구공 4개)과 비슷하여 '당구장 표시'라고도 한다. , 일본 ; 米(쌀 미)자와 비슷한 모양이라 하여 고메지루시(米印, 쌀 표시)라고 한다. , 같이보기 - 별표 ]

그러니까 이 책은 영어 원제 그대로 저자의 머리말 설명 그대로 다양한 상징과 기호들을 '수집' 하고 '수록' 하고 '분류' 한 책이다.

어렸을 때 우표수집을 한 적이 있다. 우표수집용 책도 따로 있었다. 노트 크기의 얇은 책 페이지마다 습자지로 한겹씩 덧씌워져 있어서 그 사이에 우표를 끼워놓으면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페이지 넘길때 안 떨어지고 그림도 구경할 수 있는 그런 수집용 책이었다. 국가적 행사가 있거나 기념일마다 우표가 발행되곤 했고 친척들의 도움으로 외국우표도 어쩌다 생기면 귀하게 끼워놓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표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우체국에 가면 간단한 스티커로 발송될뿐더러 요새 누가 손편지를 쓰나 이메일을 쓰지;;; 여하튼, <세계의 기호와 상징 사전> 이라는 책은 오랜만에 우표수집책을 떠올리게 한 책이다. 그 의미나 기원 그리고 역사는 차치하고 신기하거나 생소한 기호와 상징들을 구경하는 재미를 원한다면 이 책은 한번쯤 볼만하다. 그리고 영어사전이나 국어사전처럼 그렇게 책장 한켠에 자리하게 될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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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마음 - 심리학, 미술관에 가다
윤현희 지음 / 지와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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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화를 보면서 심리학적풀이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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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마음 - 심리학, 미술관에 가다
윤현희 지음 / 지와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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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술관에 간 심리학>의 윤현희 박사 신작

심리학자와 함께 읽는 화가들의 내밀한 마음 이야기와 삶의 드라마

<미술관에 간 물리학자>를 통해 이 시리즈를 알게 됐다. 미술관에 간 000 시리즈에서는 물리학자 뿐만 아니라 화학자, 수학자, 의학자, 해부학자 등이 차례차례 미술관을 방문하고 있는 중이다. 미세한 제목의 차이로 동일 시리즈에 묶인 책 같진 않지만 그동안의 시리즈보다 더 관심이 가는 '심리학'으로의 미술관 방문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신작이 좋으니까 <미술의 마음> 읽기 부터~! ^^

저자는 임상심리학자인데 심리치료의 한 방안으로 미술작품의 창작과 감상을 활용한다고 한다. 미술작품을 활용하기 위해선 그만큼 미술작품을 잘 알아야 할터. 심리학자가 들여다보는 미술의 속마음은 과연 어떠할까?

이 책에는 열다섯 명의 화가들의 인생과 그들의 예술작품이 심리학과 만나는 접점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빛의 역사다. 빛은 그 자체로는 물성을 가지지 않지만 모든 사물은 빛에 의해서만 존재가 드러난다. 회화의 역사는 화면에 빛을 담아온 역사이며, 화가들은 자신의 마음을 빛에 실었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빛이 담긴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화가의 삶의 이야기와 빛의 의미,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궁금해지곤 했다. 이 책은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담았다. 화가들의 작품이 내포한 미학적 서정과 서사를 현대 심리학의 다양한 주제들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풀어냈다. (p. 6 - 저자의 말 中-)

저자는 그림감상을 많이 한것 같아 보이는데 그림 그리는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명화들이 등장하기전 '저자의 말'에서 자신의 작품 하나늘 내보이는데 그 작품의 제목이 '프로노이아' 였다. '보라색 꽃다발을 그려놓고 '프로노이아 pronoia'라 이름을 붙였다. 프로노이아는 온 우주와 온 세상이 나를 도울 거라는, 막연하고 대책없지만 기분 좋은 믿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의심을 의미하는 것이 편집증paranoia 이라면, 프로노이아는 그 반대 의미다. (p. 8)' 라는 말에서 프로노이아와 파라노이아의 대칭에 눈길이 같다. 한국말로 치면 님이라는 글장 점하나를 붙이면 남이되는 식의 고대어는 늘 흥미롭게 다가오곤 한다. 대칭되는 단어들은 그 상반되는 의미와 비슷한 어감이 묘한 깨달음을 전해주곤 한다. '프로노이아'라는 단어를 보며 서양인들의 '시크릿'적 자기중심적 믿음이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다. 여하튼, 내게 의미있게 다가왔던건 '보라색' 이었다. 저자가 그린 보라색 꽃다발 그림 자체도 괜찮았지만 그 보라색이 인상파의 핵심적 색이었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나서 한번 더 쳐다보게 된 그림이었다. 심리학과 인상주의는 묘하게 통하는 느낌이 있다. ㅎㅎ 그리고 저자는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전 '르네상스'부터 출발한다.

인류사 최악의 팬데믹이었던 14세기 페스트는 '르네상스 문예 부흥'이라는 놀라운 역설을 가져왔다. 이는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의 긍정적인 힌트일지 모른다. (중략) 대책 없는 전염병의 창궐과 죽음의 행렬 앞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절대적 권위는 무너졌다. 반종교를 외치며 과학과 이성의 세계로 귀의하는 지식인들은 그리스 문학과 과학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이는 르네상스 문화 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p. 21) 팬데믹으로 인한 심리적 타격을 극복하기 위한 고민의 목소리가 높아가는 시절에,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마음을 치유하는 예술의 힘은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p. 22)

중세 패스트 라는 팬데믹 시대는 절대적이었던 종교를 누르고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코로나라는 현대의 팬데믹은 무엇을 누르고 새로운 무엇을 가져온 것일까? 우리는 약이 모자라 접종을 못받는데 미국인들은 약이 넘쳐도 접종을 거부한다는 뉴스를 보며 혹여 과학을 무시하고 맹신의 무엇이 오고 있는 건 아닐지 새삼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패스트 시대에도 코로나 시대에도 예술은 그 중간지대에서 여전한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예술의 힘이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 새로 다가오는 무엇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병든 바쿠스'로 데뷔해서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으로 생을 마감한 카라바조의 삶은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지 않았을까? 저자가 서문에서 '빛'을 강조한 만큼 카라바조로 책을 시작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강렬한 어둠과 빛의 대비에 대해선 카라바조가 으뜸 아니겠는가. 그런데 '카라바조가 병든 자신의 모습을 바쿠스에 투영했던 것은 천재 예술가와 광인이라는 이중적인 삶 가운데서 침몰하고 말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실현적 예언의 증거였을지도 모른다. (p. 29)' 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을 때 폭력적 행동을 보인다. 그의 광기는 과연 조현병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p. 30)' 라는 문장은 충격이었다. 조현병의 증상에 들어맞는 카라바조의 행적과 작품속에 투영된 그의 정신세계를 읽고 나니 심리학으로 미술을 본다는게 이런 거구나 싶어서 이 책의 첫 장 부터 책속에 빨려들어갔다.

'심리학과 관련해 렘브란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자화상> 시리즈에 있다. (p. 52)' 는 문장을 뒷받침해주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며 렘브란트의 쉼없는 자아성찰이 새삼 대단해 보였고, '심리학의 렌즈로 페르메이르를 바라보면서 나는 여인들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과 개인적인 공간에 주목한다. (p. 93)' 를 읽으며 그동안 페르메이르 그림에서 나는 여인들을 주목해서 본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터너의 회화는 심리학과 관련된 두 가지 주제를 제기한다. 색채 지각의 매커니즘과 색채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그 하나이고, 후기 작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습기와 증기에 관련한 터너의 무의식이 두 번째다. (p. 116)' 영국의 대표적 화가라 할 수 있는 터너의 회화에서 터너의 트라우마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놀라웠고, '모네야말로 행복의 상징 아닐까 (p. 142)' 수련 그림을 그닥 좋아하지 않던 나로서는 모네의 '행복'이 처음으로 실감되기도 했다.

'유미주의 운동을 펼쳤던 휘슬러는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와 뜻을 함께했다. (p. 189)' 호전적인 화가였던 휘슬러의 그림들이 '색채' 중심이라는 것을 통해 색채와 심리학을 연결짓는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화가의 의도와 달리 유명해진 그의 어머니의 초상 제목이 '회색과 검생의 편곡1번' 이라는 점이 '유미주의'와 연결되는 구나 싶어서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을 읽으며 이해되지 않았던 유미주의가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그림은 '그러나 정작 휘슬러의 의도는 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적 가치와 도덕성의 잣대로부터 예술 해방을 부르짖은 그에게, 이 그림의 주제는 색과 구도의 조화였다. (p. 184)' 휘슬러를 목사를 만들려고 하다가 군인을 만들려고 하다가 가출한 휘슬러가 화가가 되었을 때에도 어머니의 열정은 아들과 조화되지 못했다. 그런 모자관계를 뒤로하고, 어머니를 보라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색과 구도를 보라고 한 그림이 모성애를 강조한 그림으로 인기를 얻은 아이러니를 보며 대중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유미주의'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싶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했다.

작가주의적 주관이 뚜렷했던 휘슬러처럼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예민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을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지리적 조건때문에 유럽 예술의 발전이 더뎠고 햇빛이 모자란 북반구의 기후에서 그러한 예민함은 더하지 않았을까. '긴 겨울을 동반하는 북구의 기후와 고르지 못한 일조량은 빛에 민감하고 세련된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삶을 잠식했다. 뭉크의 화풍이 그의 상처받은 정신으로부터 자라난 것이었다면, 크뢰위에르의 자연주의적 화풍은 조울증에 침식당하고 말았다. (p. 206)' 조울증과 조현병으로 고통받았던 뭉크의 그림은 그림 자체로도 어두웠지만 북해의 다채로운 빛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던 크뢰위에르도 정신질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고 북구의 화가들이 모두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휘게'를 올해의 단어 리스트에 올렸다. (p. 224)' 저자는 휘게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하는 북구의 화가들도 소개한다.

'창조적 예술가들은 외부 자극에 대체로 예민하기 마련이다. 유독 남달랐던 것으로 보이는 하메르스회나 글렌 굴드의 정신세계는 기질적 예민성과 내향적인 성격이라는 심리학적 주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p. 241)' 그림을 보며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곡을 찾아 듣게한 하메르스회의 그림들은 외로웠지만 마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휘슬러의 작품 속 색의 구성이 이루어낸 예술에 동의했다는 점에서 하메르스회는 유미주의자였다. (p. 248)' 라는 문장과 하메르스회의 흑백톤 그림들을 보면 '유미주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런 것과 반대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는가가 관건이라면 휘슬러와 하메르스회가 선보인 아름다움은 눈으로 볼수 없는 것들이었다.

'젖은 날의 빛과 대기가 연출하는 서정에 품었던 차일드 하삼의 관심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춥고 흐린 날의 풍경을 갈무리해두었다.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눈 덮인 보스턴 공원의 황혼과 비에 젖어 반짝이는 뉴욕의 밤경치는 감성 충만한 작품인 동시에, 날씨가 우리의 기억력과 판단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심리학적 주제를 생각하게 한다. (p. 267)' 미국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의 그림을 보며 흐린날의 기억력 상승을 연결짓는 시도는 심리학자만이 할수 있는것이 아닐까 ㅎㅎ 또한 많은 그림들에서 저마다의 치유효과를 떠올리는 것도. '존 슬로안의 그림은 '공간이 갖는 치유 효과'라는 화두를 던진다. (p. 285)'

'시간적 거리, 미국과 유럽의 지리적 거리, 하물며 영국의 청교도와 벨 에포크 파리의 퇴폐성 사이에 놓인 문화적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드가와 호퍼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분모가 있다. 실내의 햇살 속에 얼어붙은 듯 정지한 나신의 여인들은 호퍼의 주제 중 하나이고, 이는 드가의 관음증적 시선과 닮았다. 우리는 무대를 바라보듯, 혹은 열린 문을 통해 훔쳐 보듯 호퍼의 실내를 들여다본다. (p. 305) 19세기의 드가와 20세기의 호퍼가 보았던 것은 함께 있으나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p. 306)' 임상심리학자의 일이란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치유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저자가 보여주는 그림들에선 나름의 심리적 문제를 건드리는 것들이 있곤 했다. '미국적 사실주의 혹은 미국적 인상주의 (p. 312)' 의 화가인 호퍼가 국내에서 유독 인기가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호퍼의 말기작인 '철학으로의 여행'은 부부의 친밀하고 사적인 순간을 포착하지만,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p. 323)' 심리학으로 보는 그림은 이제 철학적 세계로 연결된다.

'색채 일변도의 추상미술 세계는 자칫하면 마음이 삐딱해지고 흥이 사그라들어 난해할 수도 있지만, 정지한 듯 움직이는 색채의 울림은 기억 속 이야기를 가만히 불러낸다. 최소한의 형태와 최소한의 색채를 사용한 로스코의 캔버스는 조용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다. 같은 그림이지만 매번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고, 지난 시간의 감정과 조우하는 어떤 순간들은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p. 332)' 마크 로스코의 색면화는 특유의 명상적 분위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직접 본적이 없어 그런지 그 명상감이 그림의 거대한 크기가 주는 압도감 때문일지 단색이 주는 색채감 때문일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직접 볼 기회가 있다면 '그림과의 거리 45센티미터 (p. 340)' 라는 화가가 직접 요구한 감상법을 실천해보고 싶다. 나의 감상과 무관하게 로스코가 대단한 화가이긴 한가 보다. 그의 등장으로 20세기 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면.

'로스코가 색채로 감정을 표현했다면 트웜블리는 선으로 생가과 감정을 표현했다. (p. 367)' 그림이 철학적으로 표현되면 추상미술인것 같다. 그리고 철학책이 읽기 어려운 것처럼 추상미술은 보기 어렵다. 나의 이해를 벗어나는 영역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추상미술가는 이런 내게 희망을 남겨 주었다. '미국의 설치 작가 제임스 터렐은 빛에 물성을 부여하고 빛의 공간 내부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그리하여 우리가 '본다'는 현상의 본성에 관해 재고해보도록 한다. 빛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착시를 통해 그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것은 두 가지다. 색채와 연합된 빛은 환상적인 기분을 유도하고 때로는 명상에 빠져들도록 한다. 빛과 공간이 엮어내는 시각적 착시를 통해 우리가 사물을 보는 습관적인 방식을 의심해보게 만든다. 나아가 사물을 지각하는 새로운 방식에 눈뜨게 한다. (p. 384)' 터렐의 작품은 책속에서 작은 그림으로만 보고 있어도 명상적 무언가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한국 원주의 뮤지엄 산 이라는 곳에 그 전시관이 있다고 하니 직접 가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왠지 업된 기분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멀고 먼 나라에 있는 그림들은 멀고먼 추상미술 이겠거니 싶었지만 가까이 있는 곳에 있는 추상미술은 직접 보면 왠지 조금은 이해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ㅎ

전문가가 알려주는 심리학적 그림 보기가 좋았지만, 익숙했던 작가들의 새로운 그림을 볼수 있어 좋았고 아예 몰랐던 작가들의 좋은 그림을 볼수 있어 좋았지만, 내용에 나오는 그림이 책속에 다 나오는 것은 아니고 내용과 좀 떨어진 위치에 그림이 배치되어 있곤 한데다 도판도 썩 보기 좋은 편은 아니라서 이 책을 그림감상용 책으로 보면 곤란함을 느낄 것 같다. 하지만 그림을 본다기 보다는 '그림의 마음' 또는 '화가의 마음' 그렇게 '미술의 마음'을 읽는다는 생각으로 본다면 무척 인상깊은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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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켰을까? 혁명 시리즈
칼렙 에버레트 지음, 김수진 옮김 / 동아엠앤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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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인류를 변화시켰다‘ 라는 이 한문장을 이렇게 상세하게 증명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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