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패스트 라는 팬데믹 시대는 절대적이었던 종교를 누르고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코로나라는 현대의 팬데믹은 무엇을 누르고 새로운 무엇을 가져온 것일까? 우리는 약이 모자라 접종을 못받는데 미국인들은 약이 넘쳐도 접종을 거부한다는 뉴스를 보며 혹여 과학을 무시하고 맹신의 무엇이 오고 있는 건 아닐지 새삼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패스트 시대에도 코로나 시대에도 예술은 그 중간지대에서 여전한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예술의 힘이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 새로 다가오는 무엇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병든 바쿠스'로 데뷔해서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으로 생을 마감한 카라바조의 삶은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지 않았을까? 저자가 서문에서 '빛'을 강조한 만큼 카라바조로 책을 시작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강렬한 어둠과 빛의 대비에 대해선 카라바조가 으뜸 아니겠는가. 그런데 '카라바조가 병든 자신의 모습을 바쿠스에 투영했던 것은 천재 예술가와 광인이라는 이중적인 삶 가운데서 침몰하고 말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실현적 예언의 증거였을지도 모른다. (p. 29)' 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을 때 폭력적 행동을 보인다. 그의 광기는 과연 조현병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p. 30)' 라는 문장은 충격이었다. 조현병의 증상에 들어맞는 카라바조의 행적과 작품속에 투영된 그의 정신세계를 읽고 나니 심리학으로 미술을 본다는게 이런 거구나 싶어서 이 책의 첫 장 부터 책속에 빨려들어갔다.
'심리학과 관련해 렘브란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자화상> 시리즈에 있다. (p. 52)' 는 문장을 뒷받침해주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며 렘브란트의 쉼없는 자아성찰이 새삼 대단해 보였고, '심리학의 렌즈로 페르메이르를 바라보면서 나는 여인들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과 개인적인 공간에 주목한다. (p. 93)' 를 읽으며 그동안 페르메이르 그림에서 나는 여인들을 주목해서 본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터너의 회화는 심리학과 관련된 두 가지 주제를 제기한다. 색채 지각의 매커니즘과 색채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그 하나이고, 후기 작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습기와 증기에 관련한 터너의 무의식이 두 번째다. (p. 116)' 영국의 대표적 화가라 할 수 있는 터너의 회화에서 터너의 트라우마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놀라웠고, '모네야말로 행복의 상징 아닐까 (p. 142)' 수련 그림을 그닥 좋아하지 않던 나로서는 모네의 '행복'이 처음으로 실감되기도 했다.
'유미주의 운동을 펼쳤던 휘슬러는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와 뜻을 함께했다. (p. 189)' 호전적인 화가였던 휘슬러의 그림들이 '색채' 중심이라는 것을 통해 색채와 심리학을 연결짓는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화가의 의도와 달리 유명해진 그의 어머니의 초상 제목이 '회색과 검생의 편곡1번' 이라는 점이 '유미주의'와 연결되는 구나 싶어서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을 읽으며 이해되지 않았던 유미주의가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그림은 '그러나 정작 휘슬러의 의도는 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적 가치와 도덕성의 잣대로부터 예술 해방을 부르짖은 그에게, 이 그림의 주제는 색과 구도의 조화였다. (p. 184)' 휘슬러를 목사를 만들려고 하다가 군인을 만들려고 하다가 가출한 휘슬러가 화가가 되었을 때에도 어머니의 열정은 아들과 조화되지 못했다. 그런 모자관계를 뒤로하고, 어머니를 보라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색과 구도를 보라고 한 그림이 모성애를 강조한 그림으로 인기를 얻은 아이러니를 보며 대중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유미주의'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싶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했다.
작가주의적 주관이 뚜렷했던 휘슬러처럼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예민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을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지리적 조건때문에 유럽 예술의 발전이 더뎠고 햇빛이 모자란 북반구의 기후에서 그러한 예민함은 더하지 않았을까. '긴 겨울을 동반하는 북구의 기후와 고르지 못한 일조량은 빛에 민감하고 세련된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삶을 잠식했다. 뭉크의 화풍이 그의 상처받은 정신으로부터 자라난 것이었다면, 크뢰위에르의 자연주의적 화풍은 조울증에 침식당하고 말았다. (p. 206)' 조울증과 조현병으로 고통받았던 뭉크의 그림은 그림 자체로도 어두웠지만 북해의 다채로운 빛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던 크뢰위에르도 정신질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고 북구의 화가들이 모두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휘게'를 올해의 단어 리스트에 올렸다. (p. 224)' 저자는 휘게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하는 북구의 화가들도 소개한다.
'창조적 예술가들은 외부 자극에 대체로 예민하기 마련이다. 유독 남달랐던 것으로 보이는 하메르스회나 글렌 굴드의 정신세계는 기질적 예민성과 내향적인 성격이라는 심리학적 주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p. 241)' 그림을 보며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곡을 찾아 듣게한 하메르스회의 그림들은 외로웠지만 마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휘슬러의 작품 속 색의 구성이 이루어낸 예술에 동의했다는 점에서 하메르스회는 유미주의자였다. (p. 248)' 라는 문장과 하메르스회의 흑백톤 그림들을 보면 '유미주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런 것과 반대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는가가 관건이라면 휘슬러와 하메르스회가 선보인 아름다움은 눈으로 볼수 없는 것들이었다.
'젖은 날의 빛과 대기가 연출하는 서정에 품었던 차일드 하삼의 관심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춥고 흐린 날의 풍경을 갈무리해두었다.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눈 덮인 보스턴 공원의 황혼과 비에 젖어 반짝이는 뉴욕의 밤경치는 감성 충만한 작품인 동시에, 날씨가 우리의 기억력과 판단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심리학적 주제를 생각하게 한다. (p. 267)' 미국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의 그림을 보며 흐린날의 기억력 상승을 연결짓는 시도는 심리학자만이 할수 있는것이 아닐까 ㅎㅎ 또한 많은 그림들에서 저마다의 치유효과를 떠올리는 것도. '존 슬로안의 그림은 '공간이 갖는 치유 효과'라는 화두를 던진다. (p. 285)'
'시간적 거리, 미국과 유럽의 지리적 거리, 하물며 영국의 청교도와 벨 에포크 파리의 퇴폐성 사이에 놓인 문화적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드가와 호퍼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분모가 있다. 실내의 햇살 속에 얼어붙은 듯 정지한 나신의 여인들은 호퍼의 주제 중 하나이고, 이는 드가의 관음증적 시선과 닮았다. 우리는 무대를 바라보듯, 혹은 열린 문을 통해 훔쳐 보듯 호퍼의 실내를 들여다본다. (p. 305) 19세기의 드가와 20세기의 호퍼가 보았던 것은 함께 있으나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p. 306)' 임상심리학자의 일이란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치유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저자가 보여주는 그림들에선 나름의 심리적 문제를 건드리는 것들이 있곤 했다. '미국적 사실주의 혹은 미국적 인상주의 (p. 312)' 의 화가인 호퍼가 국내에서 유독 인기가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호퍼의 말기작인 '철학으로의 여행'은 부부의 친밀하고 사적인 순간을 포착하지만,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p. 323)' 심리학으로 보는 그림은 이제 철학적 세계로 연결된다.
'색채 일변도의 추상미술 세계는 자칫하면 마음이 삐딱해지고 흥이 사그라들어 난해할 수도 있지만, 정지한 듯 움직이는 색채의 울림은 기억 속 이야기를 가만히 불러낸다. 최소한의 형태와 최소한의 색채를 사용한 로스코의 캔버스는 조용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다. 같은 그림이지만 매번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고, 지난 시간의 감정과 조우하는 어떤 순간들은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p. 332)' 마크 로스코의 색면화는 특유의 명상적 분위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직접 본적이 없어 그런지 그 명상감이 그림의 거대한 크기가 주는 압도감 때문일지 단색이 주는 색채감 때문일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직접 볼 기회가 있다면 '그림과의 거리 45센티미터 (p. 340)' 라는 화가가 직접 요구한 감상법을 실천해보고 싶다. 나의 감상과 무관하게 로스코가 대단한 화가이긴 한가 보다. 그의 등장으로 20세기 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면.
'로스코가 색채로 감정을 표현했다면 트웜블리는 선으로 생가과 감정을 표현했다. (p. 367)' 그림이 철학적으로 표현되면 추상미술인것 같다. 그리고 철학책이 읽기 어려운 것처럼 추상미술은 보기 어렵다. 나의 이해를 벗어나는 영역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추상미술가는 이런 내게 희망을 남겨 주었다. '미국의 설치 작가 제임스 터렐은 빛에 물성을 부여하고 빛의 공간 내부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그리하여 우리가 '본다'는 현상의 본성에 관해 재고해보도록 한다. 빛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착시를 통해 그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것은 두 가지다. 색채와 연합된 빛은 환상적인 기분을 유도하고 때로는 명상에 빠져들도록 한다. 빛과 공간이 엮어내는 시각적 착시를 통해 우리가 사물을 보는 습관적인 방식을 의심해보게 만든다. 나아가 사물을 지각하는 새로운 방식에 눈뜨게 한다. (p. 384)' 터렐의 작품은 책속에서 작은 그림으로만 보고 있어도 명상적 무언가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한국 원주의 뮤지엄 산 이라는 곳에 그 전시관이 있다고 하니 직접 가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왠지 업된 기분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멀고 먼 나라에 있는 그림들은 멀고먼 추상미술 이겠거니 싶었지만 가까이 있는 곳에 있는 추상미술은 직접 보면 왠지 조금은 이해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ㅎ
전문가가 알려주는 심리학적 그림 보기가 좋았지만, 익숙했던 작가들의 새로운 그림을 볼수 있어 좋았고 아예 몰랐던 작가들의 좋은 그림을 볼수 있어 좋았지만, 내용에 나오는 그림이 책속에 다 나오는 것은 아니고 내용과 좀 떨어진 위치에 그림이 배치되어 있곤 한데다 도판도 썩 보기 좋은 편은 아니라서 이 책을 그림감상용 책으로 보면 곤란함을 느낄 것 같다. 하지만 그림을 본다기 보다는 '그림의 마음' 또는 '화가의 마음' 그렇게 '미술의 마음'을 읽는다는 생각으로 본다면 무척 인상깊은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