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 위의 남자
다니엘 켈만 지음, 박종대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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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세상에 던지는 농담이자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 수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안부

세상엔 왜 이렇게 유명한 작가들이 많은 것일까;;; '<해리포터>를 제치고 <향수>이래 가장 많이 읽힌 작가 다니엘 켈만 최고의 소설' 이라는 홍보문구를 단 소설 <틸>의 작가 '다니엘 켈만'을 나는 이 소설로 인해 처음 알았다. <해리포터> 팬이고 <향수>를 읽었음에도 전혀 알지 못했던 다니엘 켈만의 작품을 읽게된 계기는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였다. '소설다운 소설이면서도 상상력을 한계 너머로 마음껏 펼치는, 다니엘 켈만다운 작품이다' 라는 김연수 작가의 감탄을 공감해보고 싶었다.

이력을 보건대 아직 젊은 작가이고, 추천사를 보건대 유명작가들이 꼽은 작가라는 점에서 나는 현대소설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독일30년전쟁을 배경으로 틸 울렌슈피겔 이라는 광대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 아닌 면도 꽤 많다. 그러니까 역사이면서 역사가아닌 언밸런스적 요소들을 조화롭게 구성해 놓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종교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마법사적 판타지 요소가 등장하고 절대적 권위의 왕을 마음껏 조롱거리로 삼으면서도 딱히 이상적 인간형이 등장하는 것도 아닌... 잔인하고 폭력적인 인간들의 향연이랄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전쟁이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두려움과 희망을 함께 품은 채 살았고,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우리 도시에 신의 분노가 미치지 않도록 갖은 애를 썼다. 백다섯 가구와 예배당,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공동묘지가 자리한 도시였다.

우리는 전쟁이 우리를 비켜 가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전지전능한 신에게 기도했고, 선하신 마리아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거기다 숲의 여신과 밤의 요정들, 전설 속의 거룩한 게르빈, 천국의 문을 지키는 성 베드로, 사도 요한에게 기도했다. 혹시 몰라 악령이 자유롭게 떠도는 스산한 밤이면 종자들을 데리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마녀 멜레에게도 두 손을 모았다. 또한 우리는 그 옛날 뿔 달린 도깨비에게도 기도하고, 얼어 죽어가는 거지에게 자신의 외투를 건네 같이 덮고는 함께 떨었다는 마르틴 주교에게도 기도했다. 사실 한겨울에 둘이서 외투를 나누어 입는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p. 9)

전쟁의 시대였다. 하지만 전쟁이 찾아가지 않은 작은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은 기도했다. 그들이 믿는 신 뿐만 아니라 믿어서는 안되는 것들에게도 기도했다. 너무 많은 곳에 기도를 올렸기 때문일까, 신과 신이 아닌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올린 기도라서 일까, 그 누구도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틸'이 마을에 왔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었어도 온갖 전단에 등장했던 가장 유명한 광대 '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줄타기를 하는 남자였다.

고개를 젖히고 있던 우리는 가벼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갑자기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어떤 것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깨달았고, 동시에 우린 절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p. 23)

밧줄이 걸린 날 이후로 공기가 갑자기 한층 무거워졌고, 물맛도 달라졌으며, 하늘조차도 더 이상 예전의 하늘이 아닌 듯했다. 1년 뒤 전쟁이 우리를 찾아왔다. (p. 32)

남들이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억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고, 우리는 산 자들의 일에 무심하지 않다. 모든 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p. 33)

'틸'이 한바탕 마을 사람들 혼을 쏙 빼놓고 간 뒤 마을 분위기는 달라졌다.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여기저기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마을을 덮쳤다.

이 소설은 몇개의 소제목으로 구분된다. 신발, 공중의 제왕,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 겨울왕, 굶주림, 빛과 그림자의 위대한 예술, 갱도, 베스트팔렌.

에피소드들의 중심인물은 항상 '틸'이지만 에피소드들이 시간순으로 나열되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시간의 뒤섞임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마법 못지 않게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한다. 그중 첫번째 에피소드인 '신발'은 이 소설의 인트로이자 엔딩이라고 여겨졌다. 혹은 소설의 (아주 긴) 첫문장 이라고도 할수 있을 것 같다. 짧은 문장으로 하나의 긴 작품을 아우르곤 하는 그런, 소설의 첫문장 말이다.

클라우스는 어둠 속에서 적당한 힘으로 정사각형 문구를 벽에다 써넣는다.

M I L O N

I R A G O

L A M A L

O G A R I

N O L I M

그런 다음 만전을 기하기 위해 주문을 일곱 번 크게 외운다. Nipson anomimat mi monan ospin. 이것이 그리스어라는 것만 알뿐 그 뜻은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앞에서부터 읽으나 뒤에서부터 읽으나 똑같은 글귀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p. 75)

위와 같은 좌우로 대칭되는 정방형의 주문은 이 소설에 3가지 등장하는데 사전검색을 해봐도 뜻풀이가 되진 않는 그저 대칭적인 문자배열이었다. 하지만 Nipson anomimat mi monan ospin 문장은 그리스어라기에 검색해보았더니 '당신의 얼굴뿐만 아니라 당신의 죄를 씻으십시오' 라는 뜻이라고 나온다. 저자는 종교와 마법을 교묘하게 뒤섞어놓았는데 소설의 뒤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주문은 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척 씁쓸해지게 만드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믿음, 종교, 미신, 마법 무엇이되었건 여하튼 특별한 힘이 있는 글귀는 읽을 수 없는 책처럼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소년은 머리에 쓰고 있던 것을 벗는다. 털이 숭숭하고 기다란 귀가 달린 당나귀 머리 가죽의 일부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핏물로 찰싹 달라붙어 있다. "세상에!" 클라우스가 중얼거린다. "무슨 이런 해괴한 일이" 소년이 말한다. "오랫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어. 재미로 그랬어. 목소리가 들렸어! 아주 재미있었어" (p. 92)

"악마는 공기로 이루어져 있거든. 그래서 악마를 공중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방인은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춘다. 마치 자신의 말을 스스로 엿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p. 103)

틸은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이방인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키르허 박사는 소년에게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키르허는 마녀 특별 사법관인 테시먼드 박사와 순회중이다. 키르허와 테시먼드 박사는 틸의 집을 찾는다. 틸의 아버지 클라우스는 주문의 힘을 믿었고 읽을 수 없는 라틴어 책을 읽기를 소망했으나 마법사로 몰려 처형당한다. 나중에 놀라운 줄타기 광대가 되는 틸은 공중의 제왕이라고 불릴만하다. 하지만 틸이 악마일까?

증언이 없으면 피고인을 이단으로 판정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마법사로 선포할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를 실수를 피하기 위해 키르허는 몇 날 며칠 동안 증인들에게 그들이 봤다는 몸짓과 말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는 둔하고 더뎠다. 그들이 저주나 마법의 문구, 사탄을 불러내는 주문을 기억하려면 일단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어쨌든 이런 연습 끝에 마침대 다들 올바른 주문과 마법의 몸짓을 직접 듣고 본 것처럼 묘사할 수 있었다. (p. 147)

마녀 재판이라는 것이 마법사 재판이라는 것이 참 해괴하기 그지없다. 증언을 얻기 위해 증언을 교육시킨다. 자백을 받기 위해 자백을 세뇌시킨다. 마법적 꿈을 꾸었다는 것이 죄악의 증거로 채택된다.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미신을 교육시키는 과정이 결국 마녀재판이었다. 이런식의 아이러니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아마도 현대도 그러할 것이다.

그 광대가 나타나면 항상 그랬다. 몇몇 이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거기서 비켜나 있는 사람들은 큰 재미를 누렸다. (p. 203)

광대의 재주부리기에 빠져 박장대소를 터트리다가다 광대가 던져놓은 시비에 휘말려 종내는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 어쩌면 '전쟁'이란 것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용병들은 전쟁의 목적이나 의미따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늘은 황군이었다가 내일은 스페인군이 될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에서 비켜나 있는 사람들은 큰 이득을 얻는다.

독일어는 연극에 맞는 언어가 아니었다. 끙끙대는 신음과 툴툴대는 불평의 어지러운 잡탕일 뿐이었다. 독일어는 마치 목이 졸릴 때나 소가 발작을 일으키며 기침을 할 때, 혹은 맥주가 코로 넘어갈 때 터져 나오는 소리 같았다. 그런 언어로 시인이 뭘 할 수 있겠는가? (p. 252)

"하지만 독일어로도 충분히 시를 쓸 수 있어요! 우리의 언어는 막 태동한 셈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세사람은 모두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라틴어로 이야기하고 있지요. 왜 그래야 할까요? 지금은 독일어가 어설프고, 끓는 죽 같고, 성장기의 아이 같아도, 언젠가는 어른이 될 겁니다." (p. 391)

연극의 도시 영국에 비해 독일의 문화는 한참 처져있었다. 언어도 그러했다. 소설의 배경은 독일전쟁이고 소설의 언어는 독일어다. 그변화와 성장의 의미가 종교와 연결될 때 어떤 식으로 이해하면 될까?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옛날이야기로 역사소설로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지금의 이야기로 판타지소설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런게 다니엘 켈만 작가의 능력인건가...

"이제 진짜 용이 필요합니다. 홀슈타인에 북방의 마지막 용이 아직 살고 있습니다"

"그게 발견되었나요?"

"뭐가요?"

"용"

"당연히 아니죠. 사람이 봤다고들 하는 용은 진정한 용의 속성을 지닌 용이 아닐 겁니다. 그런 속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 이유에서 나는 용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보고를 믿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는 용은 진정한 용이 아닌 다른 용입니다. 이 지방에서는 용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한 마리가 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p. 386~387 발췌)

없음으로 있음을 증명하는 시대 그런 시절이 있었다. 틸의 아버지를 처단했던 예수회의 극우파 테시먼드와 그의 조교 키르허는 주문과 마법을 쓴다며 사람들을 처단하고 다녔는데 그들이 연구한 것은 결국 주문과 마법이었다. 테시먼드는 키르허에게 용을 만났을때 사용하라며 평생 단 한번만 쓸수 있는 '주술적 정사각형 문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주문(p. 402)' 를 알려주었다. 키르허는 그 주문을 틸을 만났을 때 사용한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일까? 키르허는 사탄이 자기 앞에 직접 나타나는 날이 오리라고 늘 예상하던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징후가 없었다. 유황 냄새가 나지 않았고, 남자의 발은 인간의 발이었으며, 키르허가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도 따듯해지지 않았다. (p. 417)

"네 말이 맞아. 나는 거짓말을 많이 해. 테시먼드 박사에게 거짓말을 했지.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냐. 나는 황제 폐하에게도 거짓말을 했고, 심지어 하느님에게도 거짓말을 했어. 책에서도 남을 많이 속였어. 나는 늘 거짓말을 해" (p. 423)

한 마리 남은 용을 찾아나선 길에 틸의 서커스단을 만난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박사는 그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학자였다. 그리고 틸의 아버지를 마법사로 재판한 자였다. 그리고 스스로 거짓말쟁이라고 틸에게 말했다. 하지만 '키르허는 헛기침을 하고는 그 옛날 스승이 가르쳐준 마법의 주문을 읊조렸다. SATOR......(p. 422)' 주문을 외우고도 탈출하지 못한 클라우스와 주문을 외우고 로마로 사라진 키르허. 누가 마법사인가? 누가 사탄인가? 사제와 마법사 혹은 사탄과 사탄이 아닌 존재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무엇을 믿고 누구의 말이 진실이었을까...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불태우고 죽였어. 장군이 그랬거든, 우리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하지만 그러라고 해서 바로 그렇게 하지는 못해. 너도 알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러려면 어느 정도 익숙해져야 하거든. 이래도 되는구나,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그런 식으로 적응이 돼야 한다는 말이지. 다른 사람을 내 맘대로 하려면 말이야" (p. 449)

한 용병의 말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역사책을 읽다보면 수많은 약탈전을 보게 된다. 그런 장면이 등장할때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소설속 용병의 말을 읽고 조금은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폭력에.... 적응이 돼야 한다는 것... 그러한 삶... 그러한 시대.... 과연... 옛날이기이기만 할까?

그러나 소년은 말하지 않는다. 겨울왕뿐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생각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p. 456)

틸이 넬레와 도망치던 소년시절, 숲에서 했던 극적 경험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당나귀 하나는 무뢰배 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틸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혹은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더 좋은 게 뭔지 알아? 평화로운 죽음보다 훨씬 좋은 게?"

"말해봐'

"죽지 않는 거야" (p. 521)

틸은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으며 전쟁의 시절을 광대로 살았다. 나이를 먹었고 유일한 (가족같은 존재였던) 넬레도 떠나보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틸은 평생 소년으로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늙지 않는것, 틸은 자신의 늙어감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은 죽음도 마찬가지라고 틸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틸은 사라졌다. 하지만 틸은 죽었으면서도 죽지않은 광대로 지금도 우리 삶 속 어딘가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옛날 왕을 조롱할 수 있었던 건 오직 광대뿐이었다. 그것이 광대의 역할이자 책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권력을 조롱할 수 있는 건 누구일까?

암울한 세상 폭력의 시대 이름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안부는 무엇이었을까... 오래 생각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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